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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은행나무, 2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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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은행나무, 2017.)

Dog君 2018. 12. 24. 11:10


(…) 어느 낮 어느 담벼락에 내가 기대 쉬고 있을 때...... 그 담이 너무 서늘하고 내가 너무 지치고 피곤해 이제 그만 영영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담에 박이 자라고 있었어. 조롱박, 아직 어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연한 박이...... 희고도 파랗게 그것이 어찌나 예뻤는지 손으로 쥐었다가 땄지. 내가 그것을 뚝 땄을 적에는 반드시 먹으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게 다만 탐스럽게 예뻐서, 십여 개 열린 것 중에 한 개를 쥐고 넝쿨에서 뚝 떼어낸 거야. 그랬더니 그 집 여편네가 벼락같이 문을 열고 나와서 우리 박을 따지 말라고 야 이 도둑년, 박 도둑년, 아주 그러며 내 손에 든 박을 싹 빼앗아갔지. 나하고 똑, 같은 나이를 먹은 것 같은 그년이 아주 말쑥한 얼굴과 머리를 하고 박 도둑년...... 그때에...... 대낮에 내가 너무 야속하고 부끄러워서 눈물이 났어. 그때 내가 매우 놀라며 깨달았지. 내가 우는구나 부끄러운 것을 다 느끼는구나 살아서 이렇게 있구나. 그러자 이번엔 그게 기쁘고 막막해 눈물이 났다. 내가 살아야겠다 이왕에 여기까지 살았으니 끝내 살아보자는 뚜렷한 맴이 들었어...... 그 확고하고도 뚜렷한 맴을 먹게 된 것이 부끄럼 덕이었으니 그것이 나를 살렸지 그러니까 그것이 보자 지금 내 나이가 하나 둘 서이 너이...... 하니 거의 백 년의 일이로구나......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도 내가 그것을 잊지 못해. 그것 한 가지 내가 그 맴을. 손녀하고 딸년은 내 사는 꼴이 지저분하다고 부끄럽다지만...... 그것이 무엇이 부끄러운가? 내가 아는 부끄러운 것 중에 그런 것은 없어. 산 사람의 살림이 오만 잡종인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황정은, 「웃는 남자」, 24~25쪽.)


  첫 번째 트랙이 다 돌기도 전에 옆방에서 벽을 때렸다. (…) 누군가 다시 벽을 때렸고 이번엔 다른 쪽 방이었다.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번에는 벽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오른쪽 방과 왼쪽 방에서. d는 옆방의 거주자들을 생각하고 미소지었다. 옆방을, 15번과 똑같은 16번과 17번의 구조를, 자신의 것과 다를 바 없거나 더 더러운 침구와 벽, 합판과 시트지로 구성된 싸구려 가구와 그 방을 가득 채우고 있을 허름한 생필품들을 생각했다. 나는 그 사물들의 일시적 소유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것보다 혐오스러운 것, 좀 더 견딜 수 없는 것, 말하자면 자신의 이웃을 향해, 그토록 열심으로 벽을 두들길 기회를 주고 있다. 재미있느냐고? 재미있다. 재미가 있다. d는 책장을 한 장 더 넘기며 생각했다. 매트리스를 짓누를 때 말고는 존재감도 무게도 없어 무해한 그들, 내 이웃. 유령적이고도 관념적인 그 존재들은 드디어 물리적 존재가 되었다. 사악한 이웃의 벽을 두들기는 인간으로. (황정은, 「웃는 남자」, 64~65쪽.)


  물론 사람이 늘면 상권은 형성될 것이다. 지금과는 뭔가 다른 형태의 상권이. 여소녀는 창을 통해 삼 층 보행 데크를 내려다보았다. 60년대에 그 이름처럼 원대한 계획으로 설계되었다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애매하게 끊어진 형태로 구현되었고 한 차례 그야말로 끊어졌다가 이제 다시 원대한 계획의 일부가 된 공중가로는 지금 2월 태양의 싸늘하고도 엷은 빛을 받고 있었다. (...) 어쨌거나 저곳을 오가는 사람이 늘고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면 임대인들은 즉시 세를 올려 받으려 할 것이다. (...) 여소녀는 생각했다. 상가가 사는 거지 내가 사는 것은 아니지. (황정은, 「웃는 남자」, 67쪽.)


교정.

214쪽 5줄 : 처음 만날 날 -> 처음 만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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