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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想나부랭이

말의 무게

Dog君 2019. 8. 26. 23:19

  중국 당나라의 작가 심기제沈旣濟가 지은 『침중기枕中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여옹呂翁이라는 도사가 한단邯鄲의 한 주막에서 노생盧生이라는 젊은이를 만났다고 한다. 여행길에서는 누구나 마음(과 입)이 열리는 법이라서 그런가, 처음 만난 사이에 나이 차이도 꽤 났지만 노생과 여옹은 곧바로 속내를 털어놓으며 이야기를 나눴던 모양이다. (모르긴 몰라도 여옹의 옹翁과 노생의 생生이 반드시 이름은 아닐 것이다.) 노생은 야심만만한 젊은이였지만 타고난 가난 때문에 좀처럼 출세의 기회를 잡지 못했던 사람이었나보다. 천하가 난세였으면 또 모를까, 『침중기枕中記』가 쓰여진 당나라 중기처럼 평화로운 시대에 그런 기회가 흔할리가 없지. 그렇게 신세한탄을 한참이나 늘어놓았다고 한다. 한참 수다를 떨고, 대충 화젯거리가 떨어질 때쯤 되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나보다.


  주막집 부엌에서 이제 막 쌀을 씻어 안치는 참이었다. 저녁밥이 되기 전에 노생이 잠깐 눈이라도 붙여야겠노라고 말하자 여옹이 자기 짐보따리에서 베개를 하나 꺼내주었다. 먼길 다니시는 도사님이 짐보따리에 베개까지 따로 챙겨다니시는게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싶긴 하지만, 뭐 암튼 그랬다고 하니 그런줄 알고 받아들이자. (이런거 일일이 토달면 옛날이야기 못 듣는다.) 어찌나 피곤했던지 뒤통수에 베개 붙이자마자 노생은 곧장 잠이 들었다.


  암만 피곤해도 낯선 숙소에서 자는 잠이라 그렇게까지 깊은 잠을 자지는 못했던 모양인지 노생은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 꿈이 아주 그냥 리얼하기가 장주의 나비꿈은 저리 짜져 수준이었단다.


  꿈에서 노생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결혼이었다. 노생이 미남이었는지는 달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암튼간에 꿈에 나타난 대갓집 따님과 결혼에 골인하는 걸로 꿈이 시작됐다. 과거에도 단박에 급제했는데, 이 친구 이거 일머리가 꽤 있었던 모양이다. 일단 벼슬길에 오르자마자 고속승진을 거듭해서 결국 재상 자리까지 올랐고, 그러고 10년 동안 명재상으로 부귀를 한몸에 누리며 잘 살았다. 그런데 사람 일이라는게 한치 앞을 모르는기라, 명재상이 됐다가 갑자기 역적으로 모가지가 달아날 판이 됐단다. 죽을 지경이 되니까 한단에서 길바닥 생활을 하던 예전 생각도 나고 막 그래서 에라 씨발 나 하나 죽고 말지 하고 자결을 할라다가 가족들이 뜯어말리는 통에 꾹 참고... 절치부심하다 몇 년 뒤 마침내 누명을 벗고 다시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한차례 시련을 겪고 나니 이제부터는 특별히 힘든 일도 없었다. 아들 다섯이 하나같이 다 고관으로 성공하고 손자는 열 명이었으니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성공한 삶을 살았던 노생...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손자 하나가 부족해서 축구팀을 못 만든 것 정도가 있겠지만, 그때는 아직 축구가 생기기 전이니까 그까이꺼 그 정도는 댓츠오케이. 그렇게 80 평생을 행복하게 마무리하고 평안히 임종을 맞았는데...






































  심지어는 오래 잔 것도 아니다. 깨보니 아까 부엌에 안쳐둔 밥이 아직 뜸도 다 안 든 채였다고 하니 잘해야 20분이나 잤나? 꿈 속에선 한평생을 다 살았지만 그래봐야 결국 20분짜리 꿈이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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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몇주간 '말의 무게'라는 것을 생각하다가 뜬금없이 이 생각이 났다. 지금 내 상황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말과 글이 SNS로 쏟아져 나오는 시대지만, 여전히 말과 글의 무게는 무겁다. 별 고민 없이 던진 말이 칼날이 되어 다른 사람을 베기도 하고, 충분한 깊이 없이 뱉은 말이 나 스스로를 옥죄기도 한다. 지금 내가 뱉은 말과 미래의 내가 하는 행동이 불일치할 때도 문제가 생긴다. 확고한 삶의 철학이 있고 지금의 내가 그에 충실하다면야 괜찮겠지만, 나처럼 귀 얇은 사람이 그럴 수 있을리가 없다.


  나에게 과연, 말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근력이 있을까.












  요 몇년 말을 많이 했고, 다른 사람한테 말 좀 많이 하라고 채근하기도 했다. 달변도 아니고 내공도 없는 놈이 그저 운이 따라준 덕에 말을 많이 할 수 있었다. 꿈 같은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시간이 몇년 지났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인데 말까지 많이 하니 결국 바닥이 드러난 느낌이다. 사실, 이제는 할 수 있는 말도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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