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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137호 (역사비평사, 2021.) 본문

잡冊나부랭이

역사비평 137호 (역사비평사, 2021.)

Dog君 2024. 7. 30. 21:10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해방 이후 '실증주의 사학'이 사회경제사학의 '탈식민' 연구를 비판하며 보수 우파 입장에서 새로운 탈식민의 방법·과제를 제시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1970년대 이후 고려·조선시대 관료제사회설의 본격적 대두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 입각해 식민주의 역사관을 반박하며 조선도 '보편'적 역사발전단계를 거쳤음을 증명하려 했던 사회경제사 연구의 탈식민서사를 한국사를 연구하는 데 서구 중심적인 이론을 빌려온 것이라 비판했던 바로 그 학자들이, 해방 이후 고려 사회가 "관료제"였는지 아니면 "귀족제"였는지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에 적극 개입하면서 한국 사회 스스로가 고려-조선시대로의 전개 과정에서 근대화된 관료제사회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연구를 주도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 역시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냉전질서가 강화되는 가운데 미국 사회학에서 크게 각광 받던 막스 베버의 관료제설과 근대화론을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다함, 「해방 이후 고려·조선시대사 연구에서의 관료제설, 막스 베버, 그리고 유교적 전통의 트랜스내셔널한 발명」, 18~19쪽.)

 

  중요한 것은,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교로 재편되며 사회학과가 개설된 사정은 결국 당시 미군정 및 미국의 정책과 밀접하게 관련된 일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1950년대 후반에 한국 사회학은 이미 미국 사회학과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었고, "미국 지향의 사회학이 거의 단숨에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미국 편향의 사회학 수용은, 분단과 미국의 개입이라는 구조적 요인이 작용함과 동시에 일본 중심에서 미국 중심으로 국제질서가 극적으로 바뀌는 상황에 재빠르게 순응해간 남한 지식인층의 의도적 행동이 낳은 결과이며, 이것은 "이후 한국 사회학의 역사에서 원형이 되었다"는 한 연구의 분석은 매우 시사적이다. 냉전 초기 미국 후진국 정책이 경제원조와 사회주의 이념에 대항하는 가치·이념의 전파를 병행하는 것이었음을 고려하며, 미군정에 의해 진행된 서울대 사회학과의 창설은 결국 사회주의에 맞서는 미국의 사회학 도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정다함, 「해방 이후 고려·조선시대사 연구에서의 관료제설, 막스 베버, 그리고 유교적 전통의 트랜스내셔널한 발명」, 23쪽.)

 

  (...) 그(홍순창―옮겨적은이)는 위정척사론의 발전과 자주의식의 관련성을 논한다. "위정척사론에는 원래 사상적인 보수성이 있으나 역사적 상황의 변천과 이에 따르는 위기의식의 심화는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발전을 가져와 화이양이(華夷攘夷) 의식에 의한 배외주의가 아닌 자주의식에 의한 민족주의 사상을 형성케 하였다. 즉 위정척사론은 항일 민족운동의 지도이념으로 발전"한다고 본 것이다. 이렇듯 홍순창은 위정척사론→자주의식→민족주의 사상이라는 구도를 설정하고 있었다. (정다함, 「해방 이후 고려·조선시대사 연구에서의 관료제설, 막스 베버, 그리고 유교적 전통의 트랜스내셔널한 발명」, 65쪽.)

 

  본고에서 제시하듯이, 램지어의 저작을 통해 드러난 법경제학의 담론은 경제적 역사적 사건을 인간(homo economicus)의 합리적 계산에 의한 자원 분배 문제로 접근한다. 개별 행위주체는 잣니들의 자발적 '선택'에 따라 시장의 거래를 구성하고 그 결과물인 가격은 모든 참여자들이 동의하는 '최적의' 결과로 환원된다. 그 결과 해당 사건의 구체적인 맥락과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권력관계를 비롯한 비-경제적인 요소들은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이렇게 특정한 경제이론의 입장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를 총체적으로 설명하려는 학문적 실천은 '자유 시장경제'라는 추상적 구성물을 준거로 '역사 만들기'를 시도하고 있다. (...)
  첫 번째는 초기 신자유주의를 이끌었던 오스트리아 출신 정치경제학자 하이에크(F. Hayek)의 노선에 따라 여론 형성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식인과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한 학술운동이었다. 당시 시장실패와 정부개입을 뒷받침했던 '독점' 논의에 도전한 시카고학파는 시장의 효율성과 정부실패를 증명하고 시장이 올바르게 작동할 수 있는 법률 및 제도 연구로 돌아섰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법경제학'이었다. (...) (김승우, 「미국 신자유주의의 역사 만들기―시카고학파와 '램지어 사태'의 과거와 현재」, 238~239쪽.)

 

  냉전은 신자유주의에게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반공주의에 기대어 국가의 개입을 이념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고, 뉴딜을 반대하고 시장주의 원칙 회복을 요구해온 보수주의 기업가들의 재정적 지원 또한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카고학파는 20세기 초반 사회주의의 성공에 대한 하이에크(E. Hayek)의 통찰에 따라 대학과 언론, 방송 등에서 활동하는 "사상의 중고중개상들(secondhand dealers in ideas)"을 학문적으로 설득하고, 이들을 통한 친-시장적 여론 형성을 시도한다. 이 기획에 따라 대중운동 대신 지식인들을 포섭하고 시장주의 이론의 재생산을 위한 장기적 학술운동을 펼쳤다.
  미국에서 보수주의 운동을 이끌어온 볼커기금(Volker Foundation)은 하이에크의 조언에 따라 시카고학파의 자유시장연구회(Free Market Society, 이하 연구회)를 지원했다. (...)
  사실 시카고학파는 독점이 시장의 가격결정 기능을 기만하기 때문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하지만 기업가들의 후원 속에서 연구회의 입장은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연구회가 의뢰한 너터(W. Nutter)와 스티글러(G. Stigler)의 실증연구가 그 출발점이었는데, 이들은 20세기 미국 민간부문에서 독점적 기업 활동이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 이제 독점적 대기업의 등장은 시장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인수합병을 통한 효율성 향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김승우, 「미국 신자유주의의 역사 만들기―시카고학파와 '램지어 사태'의 과거와 현재」, 240~242쪽.)

 

  또 다른 역사 만들기의 사례로 노예제와 식민지 지배를 들 수 있다. (...)
  식민지 지배 문제에 대해서 프리드먼은 대중이 한 사람이 이득을 취한다면 다른 사람은 반드시 잃기 마련이라는 제로섬(zero-sum)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모든 참여자가 자발적인 거래를 통해 이득을 얻는다는 자유시장의 이론으로 논의를 재설정한 그는 19세기 말 아프리카인들의 생활수준이 서양과의 조우를 통해 크게 향상되었다고 반박한다. 또 다른 사례는 갈브레이스가 1960년대 초 대사직을 맡았던 인도였다. 인도의 역사에서 영국이 지배하던 식민 통치 시절에만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전후 정부가 주도한 경제개발계획의 실패는 자유시장의 우월함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리드먼은 미국이 가장 큰 경제성장을 달성한 기간은 식민지가 없었던 1898년까지, 자유방임 정책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경제적 분석으로 그려낸 자본주의의 역사에는, 정부의 개입이 없다면 오점도 부끄러움도 없었다.  (김승우, 「미국 신자유주의의 역사 만들기―시카고학파와 '램지어 사태'의 과거와 현재」, 250~251쪽.)

 

  (...) 일본의 산업화는 자유시장과 관련이 없다는 논지에 도전한 그는 표준적인 경제발전의 논의 대상에서 벗어난 토지, 아동, 가족, 공장노동 및 성매매와 같은 '이상한' 시장에서도 사유재산권이 행사되어왔음을 보여주었다. 흥미롭게도 성매매에 관한 분석은 25년 뒤에 발표된 「태평양전쟁」과 동일하다. 1940년대 이전 일본 정부가 인민들을 경제적으로 자율적인 행위자로 만든 규칙을 제정했고 법원이 이를 집행해왔다는 결론은 근대 일본 경제사가 국가보다는 경제적 인간과 자유시장의 논리에 따라 발전해 왔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
  특수성을 강조하는 문화가 아닌, 경제적 인간 중심의 일본 경제사 해석의 토대를 마련한 램지어의 다음 목표는 정부의 역할을 부정하는 수정주의 담론이었다. (김승우, 「미국 신자유주의의 역사 만들기―시카고학파와 '램지어 사태'의 과거와 현재」, 252~253쪽.)

 

  신자유주의가 미국의 주류 담론으로 성장한 1980년대 램지어는 법경제학을 일본으로 확장했고 일본 경제성장을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발전경로 위에 놓고자 했다. 올린재단의 지원 속에서 그는 관료 주도의 발전국가 및 경제계획, 독점적 은행 및 대기업 주도의 경제성장,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일본 경제불황에 대한 탈규제 책임론에 도전했고 일본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영향력 있는 법경제학자로 성장한 램지어는 선례를 따라 경제적 분석을 비경제적 영역에 적용했고, 그 결과물이 「태평양전쟁(의 성 계약)」이었다. 모든 것을 경제적 계산으로 환원해버린 그의 학문적 세계에서 식민지 관계와 젠더의 '역사'는 사라져버렸다. (김승우, 「미국 신자유주의의 역사 만들기―시카고학파와 '램지어 사태'의 과거와 현재」,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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