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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142호 (역사비평사, 2023.) 본문

잡冊나부랭이

역사비평 142호 (역사비평사, 2023.)

Dog君 2024. 8. 4. 23:29

 

  『훈민정음』 어제문을 관통하고 있는 바, "중국"이라는 거울로 조선을 비추는 비교의 서사가 쓰인 역사적 맥락을 이상과 같이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면,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다르다"는 구절의 함의도 단지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다르다고 차이를 지적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다르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중국과 함께 그 무엇인가를 공유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는 뜻으로 파악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더 타당한 해석 아닐까. 즉 "국지어음 이호중국"은, 조선말과 중국말의 차이를 본질화하는 데 그치는 문장이 아니라, 그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어려움을 언급함으로써, 오히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중국과 조선이 무엇인가를 공유하면서 서로 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다음 구절의 의미까지 연결되는 문장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오히려 더 중요해지는 문제가 무엇인지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제문은, "국지어음 이호중국"의 바로 다음 구절인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아니한다"는 뜻의 "여문자불상유통(與文字不相流通)"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제시해놓았다.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 오히려 더 중시해야 할 그 문제는 바로, "문자"인 한자를 공유함으로써 서로 통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뜻이, "여문자불상유통"의 구절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
  통설이 이렇게 중요한 지점을 간과한 것은, 결국 근대국민국가의 형성과 유지를 위한 정체성의 정치가 무엇보다 중시되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언문일치"라는 용어를 지금껏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언문일치"는 이기문의 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는 훈민정음 제정 이후로도 조선이 써야 하는 공용문자로서 한자의 지위가 더 강화되던 당대의 역사를 논하면서도, 우리의 고유한 말이 있으면 고유한 문자도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근대적 맥락의 "언문일치"를 강조했다. "언문일치"를 훈민정음 제정 당시에도 실현되었어야 하는 가치로 본 것이다.
  (...)
  이런 관점은, 민족의 고유한 언어를 고유한 문자로 쓰는 것이 정상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이라는 인식을 초래했다. 그는 "이렇게 입으로는 국어를 말하고 글로는 한문을 쓰는" 것을 "기형적인 생활"이라고 썼다. 그는 이 "기형적인 생활"이 "영속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고 부연하며, 훈민정음이 결국 한문·한자를 물리치고 우리 민족의 문자가 될 필연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런 관점 때문에, 훈민정음 제정 후에도 공용문자로서 한자의 지위가 유지되며 훈민정음이 한자와 함께 쓰였던 400년 넘는 역사적 맥락은 비정상적 상태로 정의되고, "훈민정음 창제가 지향해온 구극적 목표"와는 동떨어진 "기형적"인 역사로 치부되어버린 셈이다.
  (...)
  결국 이런 통설의 관점과 서사는 "여문자불상유통"에 담긴 함의, 즉 훈민정음의 제정 이후로도 공용문자로서 한자를 써야만 했던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간과하도록 만들었다. 조선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 한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않아도, 당대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반드시 한자는 공용문자로 계속 써야만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이 구절의 함의는 소거되어버렸다. 그렇게 되자 이 구절은, 말은 조선의 것을 사용하는데 문자는 "한자"를 사용하는 불편함으로 인해 조선의 고유한 말에 맞는 한자가 아닌 조선 고유의 문자의 필요성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되면서, 마치 한자의 불필요함을 전제하는 것처럼 다시 정의되어버렸던 것이다.
  (...) 또한 이 간극은 통설이 상상해왔던 것처럼 훈민정음으로 인해 소멸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도 공용문자로서 쓰일 한자와 조선의 말 사이에 계속 존재할 간극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간극은, 조선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도 계속 한자를 쓰는 상황에서는 더욱 더 중요하게 반드시 이어지고 매개되어야만 하는 간극, 그래서 결국은 반드시 통해야만 하는 간극었던 것이다. (정다함, 「세종의 훈민정음 제정에 대한 국어사 연구의 서사와 그 문제점들」, 182~186쪽.)

 

  우선 세종은 상소에 가담한 것으로 보이는 정창손에게 분명히 상소보다 앞서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라고 밝혔다. 『삼강행실』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것은 『삼강행실』의 국어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종의 이 발언이, 그가 당초부터 『삼강행실』을 담는 한자와 조선 말밖에 모르는 백성들 사이의 간극을 훈민정음으로 이으려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종의 이 발언은, 세종 역시 상소문이 강조한 "동문동궤"의 역사적 맥락에 유의하는 가운데 훈민정음의 역할도 그 맥락 안에서 설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세종의 이 발언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통해 한자로 쓰인 유교가 내세우는 "보편" 가치를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효과적으로 공유할 수 있으니 훈민정음이 한자와 상충됨 없이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룰 수 있다고, 진작부터 정창손 등에게 강조해왔음을 보여준다. 그도 그럴 것이, "동문동궤"의 역사적 맥락 속에 한자가 공용문자로 사용되는 가운데, 훈민정음을 통해 한자로 쓰인 유교적 가치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에게까지 전달된다면, 조선이라는 통치권력의 주체로서 세종이 지니는 위상과 그 통치권력이 "중화"와 함께 구성하는 동아시아의 광역적 통치질서 전체 안에서 세종이 지니는 위상 모두가 함께 제고되기 때문이다.
  정창손이 삼강행실의 도리를 행할지의 여부는 사람의 자질 여하에 달린 것인데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들이 삼강행실의 가르침을 본받겠냐고 말한 것에 대해, 세종이 "이들의 말이 어찌 이치를 아는 유자의 말이겠느냐 심히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속된 선비다"라고 꾸짖고, 또한 "너희들이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 것등은, 모두 위와 같은 맥락에서 한 것이다. 세종의 이러한 발언들은, 세종이 오히려 훈민정음을 통해 한자로 쓰인 유교의 가치들을 쉽게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한자와 상충됨이 없이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며 훈민정음 제정을 추진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최만리 등과 세종의 의견 차이는, 통설의 주장처럼 양자의 입장이 서로의 대척점에 위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중화(中華)"와 조선이 "동문동궤"한다는 역사인식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었던 것으로, 그 "동문동궤"에 바탕을 둔 광역적 통치질서를 구현하기 위해 한자와 조선의 말소리 사이를 매개할 구체적 방법상의 차이 정도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정다함, 「세종의 훈민정음 제정에 대한 국어사 연구의 서사와 그 문제점들」, 189~190쪽.)

 

  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편지」와 「전언」은 1994년 1월 사이토 주지에 의해 비롯되었으며, 그해 4월 최서면에 의해 또 다른 버전이 만들어졌다. 사이토나 최서면은 안중근에 대해 지극한 호의를 지니고 있었으며, 최서면은 안중근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발굴·소개한 공로가 있는 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료의 조작이나 창작이 지극한 호의에 의한 선양이나 선의에 의해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더욱 주목할 점은 「편지」의 폭발적인 유통과 확산 과정이다. 1994년경 뿌려진 조작의 씨앗이 일정 기간 학계의 논저로 가지를 치고, 21세기에 들어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윤색되고 전 방위로 확대되어, 이제는 일정한 병리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씨를 뿌린 사람과 더불어 대중들이 환호하는 '애국주의'가 배양의 온상이 되었다. 조작된 허구가 '장엄한 역사'로 편입되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호의를 지닌 주제일수록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엄정성, 애국적 주제일수록 비판적 사유가 허용되는 학문적 개방성이 견실하게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도진순,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의 「편지」와 「전언」, 조작과 실체」, 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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