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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독재 (한윤형, 생각의힘, 202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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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독재 (한윤형, 생각의힘, 2024.)

Dog君 2024. 8. 1. 06:35

 

  '한국적 삶'의 특성 및 장단점을 분석하고, 그것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어느 날, '상식常識'의 문제를 만나게 됐다. 진보주의자로서의 나는 반복해서 한국 사회가 주류·표준·평균에 속하지 않은 소수자에게 지나치게 잔인하다는 문제를 지적해야만 했는데, 문제를 지적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그것을 문제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많더라는 현실에 맞닥트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류·표준·평균에 속한 이에게 제공되는 엄청난 편의성, 그리고 그 바깥 다양한 삶의 양태에 대한 철저한 무신경함'이란 현상의 기반에는 우리가 지식과 배움을 받아들이는 방식, 어떤 지적 토양에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착상에 이르게 됐다. 나는 여기에 '상식'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국은 '상식이 지배하는 나라'이며, 한국적 삶의 특징은 이러한 '상식의 지배'로부터 도출된다는 착상이었다.
  (...) 한국에서 '상식'이란 말은 '커먼 센스'와는 다소 다르게 '공통의 감각'이나 '모르면 괄시당할 수준의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 사실상 '따라야 할 도덕 기준'이란 의미까지 가졌다는 것이 큰 차이다. 바로 이 점이 내가 이 책에서 얘기하는 '상식의 지배', '상식의 독재'를 만들어내는 동력이기도 하다. (28~29쪽.)

 

  품평과 험담을 일삼는 나라, 개인주의도 자유주의도 인권도 없는 나라, 공동체 윤리의식이 없는 샤머니즘이 정신문화인 나라라며 자국에 사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가 어떠한 인지적 착각에 빠져 있는지를 사회적·교육적으로 적극 설명해야 한다. 그리하여 어떤 경우엔 윤리적 판단을 유보해야 할 수도 있고, 사안이 확실치 않으면 회색지대(누가 누구에게 잘못했는지 타인은 제대로 밝혀낼 수 없는 상태)를 인정해야 할 수도 있으며, '대중의 여론 재판'에서 오심이 발생했을 경우 일종의 '재심'이 필요할 수 있다는 점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힐난할 사람이 있겠지만, 한국 사회에 없는 '철학'에 한탄하는 것보다는 공동체 시민들에게 함께 지켜야 할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 당연히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일이다. 한국 사회는 '상식'의 나라인 만큼, 이러한 가이드라인이 또한 '상식'에 포함된다면 문제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개선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한국 사회의 '상식'은, 비록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크나큰 역할을 하게 되겠지만 적어도 '독재자'라는 혐의는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367쪽.)

 

  첫머리에 책 내용을 요약하려고 했는데, 어설프게 요약하느니 그냥 위의 두 부분만 인용해도 될 것 같습니다. ㅎㅎㅎ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상식'이 '독재(자)'의 지위에까지 올랐다고 지적하고, 한국 사회의 이러한 특징이 어떠한 연유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탐구합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역사학, 인류학, 철학 등에 걸친 방대한 연구성과들을 섭렵하며 한국적 특징의 기원을 추적합니다. 역사학 연구를 직업으로 삼은 저조차도 잘 몰랐던 역사학 연구성과들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누비는 저자의 광폭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폭넓은 독서력에 감탄하기도 하고, 독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 같아서 어질어질 멀미가 나기도 합니다.

 

  사실 저에게는 이 책에 대한 첫인상이 과히 좋지는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과거, 그것도 까마득히 오래 전의 역사와 경험을 통해 현대인의 행동양식을 설명하는 것에 상당히 회의적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과정과 역사적 연원을 살펴보는 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게 역사학의 존재 이유 중 일부이기도 하니까요 ㅋ) '기원'이니 '문명'이니 하는 것으로 현재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실상 이런 접근법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되기 일쑤입니다. 뭐만 했다 하면 "그건 한국(인)이라서 그렇다" 내지는 "한국(인)은 원래부터 그렇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식이 되거든요. 이런 건 실상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게으른 논증에 불과합니다. 저는 현대인의 행동양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조건과 환경을 훨씬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보는 쪽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평생동안 자기가 나고 자란 마을을 벗어난 적 없이 일기를 마친 조선시대의 평범한 농부와 2024년의 제가, 한반도에 살며 같은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행동패턴을 보유한다는 말은, 저로서는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실용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현대인을, 성리학의 형이상학이나 구석기시대의 습성으로 설명하는 것도 어색하긴 마찬가집니다. 물론 이 책도 그런 비판을 의식한 탓인지 '민족성' 대신 '역사성'을 추구하겠다고 말하지만(58~59쪽.) 글쎄요, 그 둘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수천 년의 시간을 누비는 글쓰기는 종종 필요에 따라 논거를 취사선택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예컨대 이 책은 현대 한국(인)의 행동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무려 수십만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누적된 경험을 파고들지만 또 어떤 순간에는 (불과!) 천여 년 전 고려시대의 경험은 "지나치게 옛날"(475쪽.)이고 말합니다. 긴 시간을 종횡무진 오가다보니 스스로 모순에 빠진 것처럼 보인단 말이죠. 제가 이철승의 『쌀, 재난, 국가』에 대해서 지극히 비판적이었고 진화심리학에 대해서 꽤 냉소적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책도 그런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제가 이 책에 대해 낙제점을 주고 싶은 거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 저는 이 책이 꽤 마음에 듭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의 태도입니다.

 

  이 책은 작금의 상황을 해결해야 할 '문제'라기보다는 적응해야 할 '조건'으로 인식하는 듯합니다. 한국 사회의 각 구성원이 자신의 생각과 지식을 '상식'으로 간주하고 이에 맞춰 다른 구성원을 재단하고 판단하는 작금의 분위기는 분명 문제적입니다. 이는 많은 경우 가공할 폭력이 되니까요. 저자 역시도 이러한 세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만 저자의 접근법은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약간 다릅니다. 저자는 이런 세태를 이것을 비난하고 교정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이것을 한국 사회의 성격과 조건으로 일단 받아들인 다음, 이런 상황에서 빚어지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좀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습니다.

 

  저는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일군의 비평가 혹은 지식인이 종종 해결해야 할 '문제'와 받아들여야 할 '조건'을 혼동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와 한국인 일반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종종 비평가와 지식인이, 잘못된 욕망과 관점에 빠진 '어리석은 대중'과 스스로를 분리하고, 이들에게 '올바른 관점과 태도'를 가르쳐야 한다는 식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겁니다. 그런 말을 하는 전문가조차도 우리 사회 구성원의 하나에 불과하고, 지극히 좁은 자기 분야를 조금만 벗어나면 그 역시도 비전문가인 것은 마찬가지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작금의 세태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전지적 시점에서 가르치고 계몽하겠다는 자세보다는, 그러한 세태를 일단 긍정한 다음에 실질적인 개선책을 모색하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일 겁니다.

 

  제가 속한 역사학에서도 이런 태도가 가끔 발견됩니다. 비전공자 사이에 널리 퍼진 역사적 오해와 오류(예컨대 유사역사학)에 대해 말할 때 역사학 연구자들도 종종 '가르치는 듯한 태도' 혹은 '군림하는 듯한 태도'를 보일 때가 있거든요. (여기에는 당연히 저도 포함됩니다 ㅠㅠ) 독자가 역사책을 읽고 나서, 그래 뭐가 틀렸는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그 다음은 뭐냐, 당신이 내놓는 대안은 뭐냐,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면, 그건 대체로 이런 태도 때문입니다. (제가 "대중(화)"이라는 표현을 거북해 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구요.)

 

  이러한 태도는 한국의 역사와 사회를 대하는 저자의 인식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저자의 전작인 『추월의 시대』(공저)에서부터 느꼈던 것인데, 저자는 한국 사회를 다른 '선진국'에 비겨볼 때 '결핍'이나 '결여' 같은 것을 거의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간 한국의 역사와 사회는 언제나 선진국에 비해 뭔가 부족하거나 지연된 것으로 인식되기 마련이었습니다. 근대 이래(강화도조약 이후) 한국 사회에 대체로 일반적이었던 이런 '자격지심'에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근대 이래로 한국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적(서구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서구가 선취한 사회적 규범과 경제적 풍요를 따라잡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국은 언제나 뭔가 결핍되어 있거나 지연된 상태일 수밖에 없었죠. (역사학만 해도, 1960~1970년대에는 한국사보다 서양사가 더 인기가 많았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그것도 이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24년의 한국은 더 이상 결핍이나 지연을 말할 필요가 없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의 지위에 오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없거나 늦춰진 것을 채우기 위해 기준이 되는 누군가에 계속 스스로를 비겨보고 그를 따라잡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가치와 목표를 우리의 경험과 역사를 통해 도출하는 작업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의 지향(미래)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저자는 현재의 한국을 전근대의 경험이 누적된 결과로 설명합니다. ("한국은 자신들이 전근대 문화에서 습득한 방식으로 근대화를, 근대 민족주의의 형성을 이룩했다", 284쪽.) 꼭 한국 뿐만 아니라 비서구의 근대를 설명할 때는 대체로 서구로부터의 영향(제국주의건 뭐건 간에)을 중심에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거명한 근대 민족주의만 해도 그렇습니다. 민족주의(내셔널리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점이야 이제는 상식이지만, 이 과정에서 전근대의 경험은 누락되는 대신 근대 민족주의의 형성을 자극한 서구의 문화(신문이나 지도 같은 것들)에만 과도하게 이니셔티브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민족주의의 형성 과정도 서구가 이미 성취한 민족주의의 발전 과정을 답습한다고 이야기했던 경우가 많구요.

 

  여기서 참고할 수 있는 것이 베네딕트 앤더슨에 대한 파르타 채터지의 비판입니다. 채터지는 앤더슨이 서구의 근대 민족주의 경험을 몇 개의 모듈적 형태modular form로 정리하고 비서구는 이들 중 하나를 선택할 뿐이라고 했다고 보고, 이러한 태도가 비서구의 민족주의 형성 과정에서 비서구의 상상력의 여지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Partha Chatterjee, "Who's imagined community?", The Nation and Its Fragments: Colonial and Postcolonial Historie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3.) 그런 점에서 이 책이 근대화 과정에서의 '상호작용'에 주목한 것은 긍정적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이 이를 '선교 근대화'라는 표현을 쓴다는 점입니다.(이상 319쪽.) 저는 이러한 표현이 저자의 당초의도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뿐더러 오해를 유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표현 역시도 '선교'라는 외부(서구)로부터의 충격에 이니셔티브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책에서 논거로 들고 있는 세부 내용들이 대단히 새롭고 놀라운 발견은 아닙니다. 이 책이 역사학, 인류학, 철학 등에서 각기 쌓아올린 결과물을 통합한 결과물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 책의 주요한 통찰 역시 어느 정도는 (제가 속한) 역사학에서 이미 선취된 것입니다. 학계 밖에서 보기에 좀 그리 보일 수는 있겠습니다만, 기실 한국의 역사학 연구자들이 방문 닫아 걸고 평안도 우물 갯수 세는 데만 집착하는 것은 아니고, 이병도와 신석호의 학풍에만 매몰된 자들도 아니며, 여지껏 내셔널리즘에 쩔어서 다른 생각 못하는 청맹과니도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의 역사관을 논하는 책 초반에서 인용하여 기준으로 삼은 것이 한홍구나 김동춘(거기에 더해 노무현과 신영복 등까지)이라는 것은 약간 아쉽습니다. 70~8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내고 밀레니엄을 전후하여 문명(文名)을 날린 분들을 2024년 현재 한국 사회의 역사관을 논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다소 어색해 보입니다. 물론 김동춘의 저작이야 어떤 의미에서 고전의 반열에 올라갔다고 할 수 있지만, 지난 세기에 나왔던 책이 여전히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이 약간 서글픈 일이긴 합니다. 더욱이 70~80년대의 내셔널리즘에 멈춘 듯한 역사학자 한홍구의 대중적 저작에 대해서는 도무지 학문적 권위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몇몇 기관에서 벌였던 작태까지 생각하면, 어휴...) 물론 이 책이 정말로 많이 인용하는 역사학자가 김정인 선생님이라는 점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되겠죠. (제가 아직 김정인 선생님의 책은 읽지 못해서 본격적인 논평까지 하기는 어렵지만 이 책에 인용된 것으로만 미루어볼 때 꽤나 경청할만한 내용 같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런 아쉬움은 저자가 아니라 제가 속한 학계를 향한 것입니다. 저자가 한홍구나 김동춘을 인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저를 포함한 ㅠㅠ) 다음 세대 연구자들이 아직 그만한 연구성과를 제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학계의 연구성과를 방대하게 섭렵하여 이를 바탕으로 거시적인 통찰을 제시하고자 했던 저자는 오히려 제 몫 이상을 한 셈입니다. 착실하고 미시적인 실증이 역사학의 기본 덕목임을 모르지는 않으나 거시적인 통찰을 위한 단단한 주춧돌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도 역사학 연구자의 더 많은 개입과 논평이 필요함을 새삼 절감합니다.

 

  현대 한국 사회의 작동양상의 기저에는 전근대로부터 누적된 경험이 깔려 있을 것이라고 보는 이 책은 첫 절반 정도를 할애해서 한국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주요한 키워드가 '청산사관'과 '단절사관' 등입니다. 한국의 역사적 경험은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니 이를 청산해야 한다거나 혹은 역사적 경험과 현대 한국은 대체로 단절되었다, 는 관점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텐데, 여기서 말하는 '청산사관'과 '단절사관을 제게 좀 더 친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연속'과 '단절'의 문제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은 이러한 관점들을 넘어서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연속'과 '단절'은 두부 자르듯 딱 나눠지지는 않고 대체로 서로 밀접하게 얽힌 상태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청산사관론자와 단절사관론자가 별개로 존재하는게 아니라는 거고, 양자가 언제나 반드시 충돌하는 것(95쪽.)도 아니라는 겁니다. 식민지와의 관계를 예로 들어봅시다. 이 글에서 예로 든 진보좌파와 민주화세대의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현대 한국은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와 그 후예가 여전히 득세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그 세계관의 한구석에는 식민지기의 경제성장은 허상에 불과했고, 현대 한국의 경제적 풍요와는 무관한 것이라는 관점도 자리를 차지합니다. 식민지 조선과 현대 한국이 필요에 따라 연속되기도, 단절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불일치는 작금의 기득권 세력을 역사적 역적으로 몰아가기 위해 역사적 논거를 임의로 취사선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의 의심이기도 합니다. ㅋㅋㅋ

 

  이야기가 잠깐 옆으로 샜습니다만, 아무튼 저는 그래서 이 책이 꽤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이 책을, 진지하게 참고할만한, 그리고 매우 흥미로운 관점으로 받아들입니다. 다만 역사학을 전공한 저는 이 책의 관점에 대해 전체적인 논평을 할 깜냥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식의 논증에 회의적인데다가 제가 하는 역사학의 방식은 이런 식의 거시적인 논증보다는 미시적인 실증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다른 분의 논평이 정말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태도를 지지하고 저자가 이런 작업을 계속해주기를 바라는 제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존중은, 이 작업이 좀 더 합당한 논증과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책의 세부적인 내용에 가능한 상세하게 각주를 다는 일일 겁니다. 그게 (미시적인 디테일에 집착하는) 역사학 연구자의 역할이기도 하겠죠. 저자도 이러한 작업을 계속 이어갈테니 저도 제 자리에서 저 나름의 일을 계속하는 것으로 그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결론은 각자 할 일을 계속 잘 하자는 뭐 그런... (뭐야, 결론이 왜 이래)

 

  거듭 말했지만 한국 사회의 '상식'은 사실상 '따라야 할 도덕 기준'이란 의미까지 가졌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는 '상식'이란 말을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한다고 생각했을 때, 번역어에선 쉽게 찾아보기 어려울 특징이다. 하나의 예시를 들자면, 어떤 아이돌 가수가 안중근 의사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무지'의 문제가 아니라 '부조리' 또는 '부도덕'으로 규탄당할 일이다. 내가 이런 세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과 별개로, 한국 사회에 이런 종류의 압박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36쪽.)

 

  (...) 향후 '상식'이 우리 공동체에서 '독재자'의 지위는 벗어던지더라도 모종의 균형추 역할을 하려면, 그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민주주의적이고 문명주의적인 관점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5장의 중반부에서 '상식'이 '가족 규범' 내지 '가족 규율'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 기원 자체는 존중해야 하지만, '상식'이 민주공화국 공동체 내에서도 계속해서 역할을 하려면 좀 더 '보편적인 규범 혹은 규율'의 속성을 추구해야 한다. 같은 내용도 민족주의 관점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문명주의 관점으로 서술하도록 하라는 주문은 바로 그러한 요구이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이미 민주주의가 심화되어 있고 여전히 따라야 할 보편적 가치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이 작업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그러한 과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빨리 깨닫고 실천하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 (408~4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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