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역사비평 146호 (역사비평사, 2024.) 본문
'서울의 봄'이라는 역사적 용어를 사용했음에도 영화는 모든 시선을 군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가둔다. 이 과정에서 엄혹한 유신 시절에조차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재야 운동권 세력과 운동권 학생들,그리고 추상적이나마 민주화될 한국 사회를 꿈꾸며 기대감에 부풀었던 시민들의 모습은 재현되지 않는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서울의 봄〉에는 '진짜' 서울의 봄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진짜 문제는 이러한 영화 속 서사로 인해 '서울의 봄'이라는 역사 용어가 실패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읽힐 가능성마저 있다는 점이다. 영화 속 이태신의 패배는 역사적으로 민주화된 한국을 꿈꿨던 시민사회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참군인' 이태신과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유신의 잔당들은 신군부의 권력욕에 무너졌지만, 1980년대 시민사회는 훨씬 다채로운 색깔을 만들어내며 각자의 방법으로 엄혹한 '5공'의 통치를 이겨냈다. (김재원, 「퇴행한 이분법으로 쌓은 천만 관객 - 〈서울의 봄〉」, 538~539쪽.)
(...) 지역 간 차이나 개별 지역의 특징을 파악하려면 객관적인 구조와 거시적인 배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해당 지역에 형성된 사회 문화의 역사적 맥락과 지역주민의 행위들, 개별적이고 사소한 사건들의 의미에 대한 다성적 독해와 다원적 해석을 거듭 시도해야 한다. 국가사 중심의 일원적 역사 해석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한국사에서, 지방은 대개 중앙권력의 일방적 통치 대상으로 설정됐다. 때로 지방에서 발발한 주민들의 반발이나 저항에 주목하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국가의 정책과 통치 행위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실현되었는지 살피는 타자화된 지방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지역에 대한 애착에 바탕을 둔 열정적인 향토사가들의 작업조차 대체로 중앙 중심의 국가사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기존의 주류 역사에서는 잘보이지 않는 사람과 사건들, 독특한 장소성이 투사된 지역사, 동질적으로 보이는 지역공동체에 균열을 내는 혼종적인 사람과 문화,국가나 공동체를 횡단하는 주체와 사건을 발견하고 가시화하며 그 의미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저자 역시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모순이 개별 지역사회에 어떤 비극을 초래했는지를 보여주는 한편, 당사자인 지역주민과 삶의 장소인 지역사회에 접사 렌즈를 들이댄다. 전체적으로 보면 구조적 요인이 너무나 압도적이며, 지역 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혼돈’이라는 공통점이 더 많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상황이 만들어내는 미시적인 사건과 갈등, 그 혼종적 의미를 생각하게 해주는 대목도 보인다. (허영란, 「거시사와 미시사, 지방사와 지역사를 잇는 다릿돌 - 『혼돈의 지역사회』」, 565~566쪽.)
지방사와 지역사,거시사와 미시사는 대립하거나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서로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접근법이다. 이 책은 소재와 대상 시기, 문제의식과 방법의 여러 지점에서 양자의 요소를 아울러 담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학계에서는 '문화적 전환'이라고 말할 정도로 역사학의 면모가 다원화되었다. 이 책에는 그런 변화를 추동한 고민과 관심, 그것을 위한 다양한 시도 또한 반영되어 있다. 진지하고 성실한 한 역사학자가 개척해온 연구의 궤적 자체가 그 사회의 자기 성찰이자 미래를 선취하는 역사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허영란, 「거시사와 미시사, 지방사와 지역사를 잇는 다릿돌 - 『혼돈의 지역사회』」, 573쪽.)
(...) 기존 연구들은 미국과 한국 측 자료에 입각하여 북한이 정전협정을 위반했음을 지적하는 데 머물렀다. 그런데 저자는 북한이 어떠한 주장을 내세우는지 그 자체를 먼저 확인했다. 그리고 북한이 생산한 자료를 '무시'하지 않고 그 논리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주었다. 이로써 저자는 기존 연구들이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된 북한의 땅굴을 기습남침 용도로 파악했던 설명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즉 저자는 1960년대 초 비무장지대의 갱도식 진지 구축과 북한 전역의 요새화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고 이는 기본적으로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었음을 강조한다.
더 흥미로운 지점은 북한이 구축한 땅굴이 6·25전쟁 시기 중국의 갱도전에서 유래된 것이며, 이 땅굴 전략은 베트남전쟁 시기 북베트남에 전수되었다는 설명이다. 즉 동아시아 사회주의 진영의 군사기술의 냉전적 연쇄가 존재했던 것이다. '데칼코마니'처럼 저자는 동아시아 자유 진영의 군사기술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발견해냈다. '한반도 남방한계선에 구축된 철책이 미국이 남베트남 17도선에 만든 것과 유사한 것으로 기획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허은의 『냉전과 새마을』(창비, 2022)이 만주국의 집단부락에서 말라야의 신촌, 남베트남의 신생활촌, 한국의 대공(對共)새마을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자유 진영의 냉전적 군사전략의 연쇄를 발견한 것과 비교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다만 북한의 땅굴 기술이 북베트남에 실제 영향을 미친 것인지는 추후 연구가 더 진행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도미엔이 『붉은 혈맹─평양,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전쟁』(2022,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밝혔듯이, 베트남전쟁 시기 북한의 북베트남에 대한 군사지원에 대해 북한과 베트남은 서로 상이한 설명을 하고 있으며, 당대부터 미묘한 입장의 불일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향후 비무장지대를 포함한 한반도 정전체제 관련 제도, 기구, 국가 등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면 한다. (김도민, 「한반도 비무장지대(DMZ)라는 '공간' 연구의 새로움과 어려움 - 『DMZ의 역사』」, 577~578쪽.)
필자들이 공공성을 둘러싼 논의의 여지를 열어놓은 이유는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서로 토론하고 경합하며 설득하는 과정이 공공역사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 전문가가 권위에 의지하는 '꼰대'가 되거나 홀로 고립되지 않으려면, 이러한 접근은 매우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역사가 고도로 상업화되고 정치화된 지금 한국의 현실에 적절히 대응할 수있을지 불안하기도 하다. 한국에서 공공역사 논의가 이제 출발점에 선 만큼, 앞으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함께 찾아가야 할 것이다. 다시 허영란의 질문을 환기하며 글을 마쳐본다. "역사를 진지하게 대하지는 않지만 과거성이 인기 있는 상품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학자와 공공역사가는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291쪽). (이정선, 「'전략적 모호성'을 토대로 한 한국 공공역사 논의의 첫걸음 - 『공공역사를 실천 중입니다』」, 588~5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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