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 (이명제, 푸른역사, 2024.) 본문
20년쯤 전에 일본에서 대히트한 '귀무자'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게임의 빌런은 오다 노부나가인데요, 그냥 빌런도 아니고 무려 악마(;;;)로 나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물론 어디까지나 게임이니까 상상력에 제한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아니 그래도 일본인들이 그렇게 애정한다는 오다 노부나가를 끝판왕 악마로 만들어도 괜찮나 싶습니다. (한국에서 그랬다간...)
실존인물인 오다 노부나가를 악마로 만들고 이를 게임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역사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이야깃거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특별히 영웅시한다거나 특별히 악마화하는 그런 마음 없이 말이죠.
소현세자 서사는 '인질 소현세자'의 모습을 첨단의 서양 문물을 수용하고자 했던 선구자이자 정체된 조선을 깨울 현실주의자, 전쟁 포로들을 구출한 노예 해방가, 동장 경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영가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 중 하나는 소현세자가 패전에 대한 대가로 인질 생활을 수행하면서도 전쟁의 참화를 온몸으로 겪고 있는 또 다른 피해자, 즉 조선인 전쟁 포로들을 적극적으로 구출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모습은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쓴 인조와 극적으로 대비되었다.
구출한 전쟁 포로를 활용하여 농장을 성공적으로 경영하거나 명·청 교체를 바라보면서 현실주의적 안목을 갖게 되는 모습도 중요한 포인트다. 심양에서의 인질 생활은 차기 국왕으로서의 자질을 준비하는 수련의 장으로 탈바꿈했고, 소현세자는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제 소현세자는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나갈 리더십을 갖춘 인재로 변모했다. (139쪽.)
이명제의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는 소현세자에 대해 널리 퍼진 역사적 오해에 도전합니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저자는 다양한 사료를 성실하게 섭렵하며 소현세자의 행적을 상당 부분 복원하고 그에 대한 오해도 바로 잡고자 노력합니다.
저자도 여러 차례 지적하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소현세자를 서구 문물을 추구한 선구자이자 현실주의자로 만들고 끝내는 억울한 독살의 피해자로까지 만든 것은, 역사에 투영된 지금 우리의 열망과 욕망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우물 안에 갇혀 있다가 결국에는 식민지로까지 전락했다는 한국 근대사의 충격과 비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계속 되묻게끔 합니다. 그리고 아마 소현세자가 그런 질문의 결과겠지요.
하지만 그런 우리의 열망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이 책을 통해서도 충분히 공박됩니다. 소현세자에게 덧씌워진 선구자와, 현실주의자와, 노예 해방가와, 경영가의 이미지는 대체로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를 독살의 억울한 희생자로 보기 어려운 것도 물론입니다. 반대로 조선이 그렇게 꽉 막힌 사회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소현세자의 존재와 상관없이 조선에는 외래의 과학기술(곤여만국전도와 시헌력)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었고, 천주교의 자발적인 학습에서 드러나듯 사상적으로도 정체停滯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열망과 욕망이 투영되면서 왜곡된 역사상은, 조금만 진지하게 살펴보면 쉬이 반박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오해는 사라지지 않는 걸까요. 진지한 연구자들이 아무리 책도 쓰고 팟캐스트도 하고 방송까지 해도, 이런 식의 오해는 여러 버전으로 변주되면서 반복될 뿐입니다. 소현세자 말고도 광해군과 정조가 딱 그러하고, 또 그 반대편에는 선조나 인조, 노론을 놓고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식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따지는 것 이상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식의 독재』의 독후감에서도 썼던 것처럼, 근대 이래로 우리는 한국의 역사를 논할 때 늘 무언가 결핍되거나 지연된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결핍과 지연이 누구의 책임인지를 묻게 되고, 그 결과 영웅시와 악마화가 교차하는 역사상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공동체의 역사적 경험을 논하면서 역사를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결핍이니 결여 같은 것을 트라우마처럼 상기시키지 않아야 할 겁니다. 그 때서야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할 것도 온전히 배울 수 있을 것이고, 역사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무궁무진한 콘텐츠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소현세자 독살설도, 그냥 그대로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 소현세자는 홍타이지가 생존해 있을 때는 도르곤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밝혔다. 도르곤이 조선이나 소현세자에게 호의적인 인물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언급니다. 그런데 섭정이 된 후 태도가 일변해 소현세자에게 준마까지 선물했다. 도르곤의 이 같은 태도 변화에는 조선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소현세자의 2차 귀국 역시 조선의 왕위 계승권자와 사적인 유대관계를 형성하려는 복안에 따른 것이었다.
소현세자의 2차 귀국은 조선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인질 문제가 정치적으로 오염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도르곤은 인질들에게 관용을 베출어서 조선 내에 '친도르곤' 세력을 조성하려 했고,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위협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현세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상황은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108쪽.)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봤을 때 소현세자는 오래전부터 지병을 앓아왔고, 인조와의 관계로 인해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조가 직접 소현세자의 독살을 사주하고 이형익이 독살을 수행했다는 기존의 독살설은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새로운 사료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185쪽.)
과거의 인물에게 현재의 열망을 투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하지만 그 열망이 자칫 과도할 경우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는 끊임없는 긴장 상태에 놓여야만 한다. 현재의 과도한 열망으로 시계추가 기울어졌다면 돌려놓아야 한다. 소현세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21세기의 '영웅' 소현세자가 아니라 17세기 격변기의 '인간' 소현세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192~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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