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진주를 여행하다 4 - 진주문고 본문
내 또래의 연구자들과 비교할 때 내 장서량과 독서량 수준은... 상당히 낮다. 오랜 자취생활 때문에 집이 좁아서 책을 얼마 이상 가질 수 없었다는 변명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은, 그렇다고 다른 사람은 뭐 고대광실에 사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공부한답시고 그렇게나 깝치고 다니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정도 장서량과 독서량은 살짝 부끄러움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는 수준이라 하겠다. 암튼간에 직업적으로든 뭐든 책과 글을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마 그런 얘기. 근데 직업을 말하기 전에 내 독서의 기원은 1명의 인물과 1곳의 플레이스로부터 비롯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엄따.
먼저 1명의 인물. 고2 때 담임선생님 되시겠다. 나와 같은 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만한, 비범한 분이셨는데, 아마도 내 인생에 영향을 주기로는 부모님 다음이 아닐까 싶을 정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평소에 연락도 한 번 안 드리는 참으로 고얀 제자라서 감히 태그도 못 걸겠다;;;) 그 많은 영향들을 구구절절 다 쓸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뽀인트 하나만 짚자면, 책이라고 다 책이 아니라는걸 알려주신 거라고나 할까. 조선일보 보다가 걸리면 보는 즉시 찢어버리신다던지 하는 뭐 그랬다... (그 외에 '감각의 제국' 무삭제판이나,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 'Z', '로메로' 등을 고삐리들에게 보여주기도 하셨다. 본인의 담당과목이었던 국민윤리 함양에는 좀체 관심이 없는 분이셨다고 하겠다.) 그때 선생님이 골라주신 책이 한길사에서 나온 니콜라스 할라즈의 '나는 고발한다'였는데, 그걸 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이라는 책도 같이 주셨는데, 이 두 권은 판본만 다를 뿐, 똑같은 책이다;; 그리고 그 책을, 바로 앞 글에서 소개했던 소소책방에서 다시 샀다;;) 그때부터 책 읽는 재미를 조금씩 느꼈던 것 같은데, '김규항', '딴지일보', '한겨레21' 같은 이름들의 뿌리가 다 거기에 있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1곳의 플레이스가 진주문고. 그때도 인터넷 서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학교에 매여사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딱히 결제할 수단이 없기도 했거니와 제목만 보고 책을 덥썩 고를 수 있을 정도로 용돈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는 동네서점 가서 책 사는 것이 오줌 싸고 나서 지퍼 올리는 것만큼이나 당연했다. 사야할 책을 미리 정해뒀다면 모를까, 그득한 책을 앞에 두고 느긋하게 책을 고르려면 당연히 큰 서점에 가야했다. 동네마다 서점 하나씩은 꼭 있었던 그 때도 진주문고는 진주에서 제일 큰 서점이었고, 어지간한 소도시에는 서점 하나 있을까말까한 이 시대에도 진주문고가 진주에서 제일 큰 서점이(지 않을까 하고 추측해본)다. 두어달에 한 번 정도 몇 만원 정도 여유가 생기면 버스를 한참이나 타고 서점엘 갔었는데, 그때가 막 그 동네에 아파트가 지어지고 개발이 시작될 때라 버스에서 내리면 풍경이 꽤 황량했다. (지금이야 개발 윽수로 마이 됐지. 아래께 함 가보이께 고마 마 상전벽해드마요.) 그러고 만원짜리 서너장을 쪼개고 쪼개고 경우의 수까지 다 계산해서 고심고심 끝에 책 고르고 나서, 못 고른 책은 다음에 올 때 꼭 사야지 하고 마음 먹고 막 그랬다.
도서 유통의 주도권이 온라인으로 넘어간지 벌써 오래고(아마도 종로서적이 문을 닫던 그 때 이미 대세는 결정난건지도 모르겠다), 어떤어떤 온라인 서점의 성공이 누구나 본받아야 할 창업신화가 되어 널리널리 퍼지는 시대다. 그런 시대에 할인도 얼마 안 되고, 불편하게 버스 타고 가야 되고, 책 찾기도 어렵고, 가끔은 찾는 책이 없을 수도 있는 오프라인 서점은 암만 생각해도 시대에 뒤떨어진 박물관 속 유물 같다. 이런 시대에 진주문고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아이스크림가게와 약국이 들어선 자리도 원래는 서점이었지만 임대료 수입 때문에 세를 내준 것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간다면 세상에는 아마 온라인 서점만 남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큰 것들만. 그러고 나면,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장 행복한 경험 가운데 하나가 책방에서 자기 손으로 책을 고르는 일"이라는 권정생 선생의 일갈도 그냥 예전에 어떤 분이 했던 추억의 한 마디 정도로 남겠지. 어떤 사람들이 오프라인 가게를 찾는 그 많은 불편함과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하고 온라인 가게의 편안함을 포기하는 것은 (김규항의 글을 인용하자면) "그런 유익들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런 유익들을 얻기 위해 포기할 수밖에 없는 다른 가치 때문이다." 물론, 누구 못지않게 인터넷 서점 의존도가 높은 내가 안 그런척하면서 이렇게 글 쓰는 건 좀 뻔뻔하다 싶다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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