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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君 Blues...
1. 출장을 다녀왔다. 과천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태우고 (그것도 상급자들로만!) 두 시간 가까이 운전을 하니 절로 긴장도 되고 그래서 또 피곤하고 그랬다. 하지만 출장 자체는 일정이 별로 빡빡하지 않았기 때문에 꽤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금요일 퇴근 시간 훨씬 전에 과천에 돌아올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몇 가지 일을 더 처리했다. 2. 그리고 학교 앞으로 갔다. 스승의 날 모임을 15일로 기억하고 있어서였는데, 막상 가보니 13일이었단다. 에이. 내가 왜 그걸 몰랐지. 두 시간이나 걸려서 간 길을 그냥 돌아오려니 그것도 좀 아닌 것 같아서 연남동 이심에 가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왔다. 아무 거나 사장님 마음대로 내려주세요 했더니 홍해에서 온 커피가 있다 하시고는..
대체로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대충 두 가지 점은 불만족스럽다. 이성경험이 많지 않은 것(귀책사유가 어느 쪽에 있건간에)과 여행을 많이 해보지 않은 것. 그 중에서도 여행에 관해서는 여행을 안 한 그 자체가 후회된다기보다는 좀 더 많은 것을 봤으면 내 식견도 그만큼 더 넓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가벼운 아쉬움 정도랄까. 천성이 집돌이라서 '집 나가면 고생' 마인드가 워낙 강하기도 하고 낯선 스펙터클에 대한 호기심도 적어서 누가 날 다시 20대로 시간여행을 시켜준다 해도 결과는 별로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내가, 카드값 수습될만하면 자꾸 외국에 나가고 있다. 늘상 2박 아니면 3박 정도 하는 짧은 일정이지만(비행기값 아깝지 않냐는 이야기 많이 듣는다만은 불변의 내 천성과 ..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을 때 젊은 몽골 혁명가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사회주의는 낙관이 지배했던 19세기의 산물이었다. 이성의 힘으로 세상 모든 진리를 파악하고 무한히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사회주의의 뿌리였다. 그러니 아마도 그들 역시 꿈에 부풀었을 것이다. 무한히 성장하면서도 그 결실은 모두에게 고르게 나눠지는 삶을 실현할 몽골이라는 땅. 하지만 세상은 젊은 혁명가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인민의 자발성과 노동계급의 진취성이란게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거라던가. 그 다음 이야기, 뻔하다. 인민들이 원하고 노동계급이 지향하는 바라는 것은 실상 당이 원하고 지향하는 것이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에게는 가혹한 탄압과 숙청이 이어지더라는,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흔한 이야..
오징어엔 땅콩, 노래방엔 새우깡, 끝날 땐 비틀즈 렛잇비 하듯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짝들이 있는데, '징기스칸'의 이미지가 단단히 들러붙은 몽골이 딱 그렇지 않나 싶다. 하긴 징기스칸의 시대라는 것이 수천수만년의 몽골 역사 동안 딱 한 번 역대급 포텐이 터져서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의 영향을 받은 때였으니까 이만한 무게감도 아주 놀랍지는 않다. 징기스칸의 말발굽은, 작게는 결혼식 때 양 볼에 찍는 연지곤지에, 크게는 러시아라는 거대한 국가로 남았다. 그렇다고 '징기스칸'만으로 몽골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을 터이다. 징기스칸이 죽고 원조(元朝)가 중원(中原)에서 물러난 후에도 몽골인들은 여전히 몽골초원에서 자기들의 삶과 역사를 쌓아갔다. 몽골은 러시아에 이어 두번째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원..
1-1. 뭐가 그리 바쁜지 하루가 어떻게 가고 일주일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면서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고보니 벌써 4월이다. 1-2. 예전에 농활 때였나, 쪼그려 앉아 김도 매고 고랑도 파고 하는 일들이 무엇 하나 몸에 익지 않아서 처음에는 요령도 피우고 언제 끝나나 하고 시계만 쳐다보보게 되지만, 어느 정도 몸이 익숙해지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게 되는 때가 있다. 일에 몰두하다가 문득 허리를 펴고 뒤를 돌아보면 아, 내가 이만큼이나 일을 했구나 싶어서 내심 뿌듯하고 막 그랬던 기억이 난다. 1-3. 아직 초짜이고 하는 일도 죄다 서툴러서, 나는 그저 닥쳐 오는 일들만 겨우겨우 넘기는 수준이지만,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면서 아 내가 하는 일이 그래도 영 삽질만은 아니었다보..
1. 11시 좀 넘어서 잠들었는데 눈 뜨니 2시였다. 한참을 뒤척뒤척해도 잠이 안 왔다. 3시 좀 넘어서 결국 일어났다. 할 것도 없어서 컴퓨터 앞에서 멍 때리고 있다가 십자수를 했고, 모니터에는 UFC 100대 명경기 같은 것을 틀어놓았다.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고 두들겨 맞는 근육남들을 보면서, 김장철 총각김치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제부터 지금까지 계속 우울하다.
2013년 1월의 일이었다. 친한 선배를 통해 고양이를 입양하지 않겠냐는 문자를 받았다. 그 때의 나는 오랜 자취생활에 슬슬 지루함을 느끼는 차였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나는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물론 뭐... 그렇게까지 씨니컬하지는 않았고, 지금 빨리 안 데려가면 안락사 당한다는 이야기가 꽤 크게 작용하기도 했던 것 같다.) 마 암튼 그러저러한 과정을 거쳐서 나는 유기묘(인지 그냥 도둑고양이인지) 2마리를 키우게 되었다. 학대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고양이들이었기 때문에 친해지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2년 넘게 지난 지금도 다른 집 고양이들처럼 살가운 사이는 아닌 것 같다) 어쨌거나 (서로에게 별다른 기대 안 하면서) 한 집에서 같이 사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고양이를 키워서 ..
내 또래의 연구자들과 비교할 때 내 장서량과 독서량 수준은... 상당히 낮다. 오랜 자취생활 때문에 집이 좁아서 책을 얼마 이상 가질 수 없었다는 변명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은, 그렇다고 다른 사람은 뭐 고대광실에 사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공부한답시고 그렇게나 깝치고 다니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정도 장서량과 독서량은 살짝 부끄러움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는 수준이라 하겠다. 암튼간에 직업적으로든 뭐든 책과 글을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마 그런 얘기. 근데 직업을 말하기 전에 내 독서의 기원은 1명의 인물과 1곳의 플레이스로부터 비롯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엄따. 먼저 1명의 인물. 고2 때 담임선생님 되시겠다. 나와 같은 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만한, 비범한 분이셨는데, ..
진주에서 태어나서 꼬박 20년을 살았고, 스무살이 되던 해에 그곳을 떠났다. 1차적으로는 타지로 대학을 가느라 그랬던 것이지만, 딱히 진주에 남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미련 같은 것도 없었다. 그 동네 사람들이야 서부경남의 중심이니 경상우도 학맥을 잇는 곳이니 뭐니 하지만, 적어도 근대도시로서의 진주는 그다지 매력이 없다. 1925년에 도청이 이전한 이래로 시세(市勢)가 딱히 확장되지 못한 채로 여기까지 왔으니까. 혁신도시니 공공기관 이전이니 뭐니 나발을 불어도 30만 초반의 인구수도 별달리 늘지 않을 것 같다. 상황이 이러니 스무살 안팎의 젊은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진주를 떠나는게 당연하지.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마 가장 큰 것은 유등축제 때문인 것 ..
어릴 때부터 코피가 이상할 정도로 많이 났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 코피가 잦아진다는데 나는 그런 것도 없이 사시사철 코피가 주르륵주르륵 났다. 그렇다고 코파기에 몰두했던 것도 아닌데 그랬다. 야한 생각...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코찔찔이 어릴 때부터 그랬으니 그것도 설득력은 살짝 떨어진다(라고 강변해본다). 언제는 코피가 한 시간인가 두 시간인가 멈추지를 않아서 응급실에 간 적도 있다. (응급실이라고 해서 아주 응급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 20분 정도 간격으로 오는 버스를 30분 정도 타고 나가서 병원에 갔다;;; 별달리 아프거나 어지럽거나 한 것도 없었지만, 아버지 등에 업혀 가는 것이 엄청 기분 좋은 일이어서 어른들이 호들갑을 떨어도 그냥 잠자코 있었던 기억이 난다.) 시도때도 없는 코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