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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과 생명운동의 역사 (김소남, 소명출판, 2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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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과 생명운동의 역사 (김소남, 소명출판, 2017.)

Dog君 2026. 7. 6. 11:52

 

  저자의 박사학위논문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 주도 협동조합운동 연구 : 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을 책으로 다듬은 것입니다. 700쪽이 훌쩍 넘는 벽돌책이라 일단 겉모습만으로도 독자를 압도합니다. 내용 역시 독자를 압도하는데요, 1960년대 이후 한국 협동조합운동의 역사를 지학순 주교가 이끈 민주화운동으로 잘 알려진 원주 일대를 주무대로 서술하면서 이 일대의 리 단위 마을에서 수행된 각종 협동조합운동, 마을자치운동, 그리고 주민의 소득 증진을 위한 각종 사업들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디테일하게 설명됩니다. 수없이 많은 활동가의 이름과 지명이 쉴 새 없이 등장해서, 뭘 또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쓰셨나 싶은 마음에 책장을 덮고 싶었던 적이 몇 번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보니 협동조합운동의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굳이 권하고 싶지 않은 것도 솔직한 마음입니다. ^^;;

 

  그럼에도 이 책을 굳이 소개하고 싶은 것은, 이 책에 깔린 문제의식이 너무 묵직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협동조합운동에 주목한 것은, 그에 깔린 가치들이야말로 현재 한국 사회에서 꼭 눈여겨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1960~1970년대의 협동조합운동은 관 주도의 운동과 아래로부터의 협동조합운동으로 구분됩니다. 이 책은 새마을금고나 농협 등으로 대변되는 전자를 산업화 과정의 저곡가 정책 등으로 농촌 지역이 피폐해진 결과로 추진된 강제적 운동으로 보고 서술 대상에서 제외합니다.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따라 자발적으로 조직된 협동조합운동으로, 이들 운동은 공존과 나눔, 신뢰의 가치에 기반한 운동이었습니다.

 

  이러한 협동조합운동은 양극단으로 나뉜 한국 사회의 이념 지형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모색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유의미합니다. 저자는 언젠가 도래할 (혹은 지향해야 할) 통일 한국에서도 양 극단의 체제에 속했던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는 제3의 흐름으로 협동조합운동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1980년대 들어 협동조합운동이 선택한, '한살림선언'으로부터 시작되는 사상적 모색에 눈길이 갑니다. 애초 농촌 지역의 협동과 자립을 목표로 했던 협동조합운동은 1980년대 들어 강원도 일대를 벗어나 좀 더 일반적인 사회운동으로 나아가게 되고 급기야 1989년의 한살림선언을 기점으로 서구 자본주의적 근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삶의 방식 전반을 재조직하자는 움직임으로까지 나아갑니다. (여기서 주된 이론적 기반으로 작용한 것이 동학이라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이런 흐름이 당시 한국이 거둔 경제적 성취 및 민주화에 대한 요구와 연관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니 저자에게 협동조합운동은 한국사에서 여러 차례 제기되었던 대안 이데올로기에 대한 모색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항으로 주로 설명되었습니다만 두 흐름 모두 성장과 진보에 대한 강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비판이 숱하게 제기되었습니다. 그런 비판들이 그저 비판에서 끝나지 않으려면, 아마 이 책에 해답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기 협동조합운동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즉, 위로부터의 개발독재 하에서 농협과 수협, 새마을금고 등 관 주도 협동조합운동의 전개와 밑으로부터의 자발적인 민간 주도 협동조합운동이 그것이다. 당시 관 주도의 협동조합은 박정희정권의 산업화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고, 한국사회에서 만연한 고리대 청산의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나름대로 일정한 협동조합의 역할과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 자체는 협동조합 원칙에 기반한 조합원의 자율성과 주체성, 민주성 등을 크게 훼손하는 한계가 명백히 있었다. 반면, 박정희정권 하 관제 협동조합에 대항해서 지역단위를 중심으로 민간 주도로 자발·자율·민주성을 지니면서 협동조합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개발독재에 의한 압축성장의 폐해와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통해 급격히 확산된 신자유주의의 범람 및 그 부작용을 극복하고자 전개되는 오늘날의 협동조합운동과도 연결되면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협동조합이 가지는 본래의 가치와 원칙을 잘 반영하고 있는 민간 주도의 협동조합운동을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한국의 근현대 협동조합운동사에서 상당히 강한 관 주도의 협동조합운동이 전개되었던 시대적 상황에서 면면히 흘렀던 민간 주도의 협동조합운동을 재구성·재조명한다는 점이다. 둘째, 위로부터의 개발독재를 통해 '착취성 경제'에 기반한 경제성장과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이의 기반이 된 관제협동조합과 질적으로 다른 '협동', '공존', '나눔', '신뢰' 등을 통해 지역에서 전개된 민간의 자발적·자율적·민주적인 협동조합운동을 주목할 수 있다. 셋째, 일제시기부터 상이한 국가건설운동으로 인해 정치세력들의 상호 갈등과 대립, 분단과 전쟁, 독재 등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에서 지역에 기반한 민(民)의 자발적·자주적인 조직의 결성과 협동운동의 전개를 통해 양극단의 정치세력을 아우르며 통합적·평화적인 길을 모색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제3의 흐름이자 중도파세력을 중심으로 다시 재조명할 수 있다. 넷째, 조만간 현실로 다가올 통일 한국의 미래에서 양극단의 사회와 체제가 아니라 민(民)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민주적·자주적인 협동조합을 통해 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대안체제로서 그 역할이 주목될 수 있다. (24~25쪽.)

 

  당시 세계 천주교회는 화해와 쇄신을 통한 인류의 복지와 평화, 구원을 촉진시킬 수 있는 교회로 변화하기 위해 세계적인 진보학자들과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성직자보다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 '교회 안의 구원보다는 현대사회의 제 문제 해결에 동참하는 교회', '교회일치운동' 등을 주창하는 등 자체 혁신을 도모하였다. 세계 천주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세상의 변화에 무관심하고 전통만을 고집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던 태도에서 벗어나 현대사회와의 대화와 적응을 적극화하며, 교회의 역사에서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반성·쇄신할 것을 표명하였다. 또한 가톨릭만이 유일한 종교라는 확신을 버리고 세상의 다양한 종교와 사상들도 고유하고 유익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 성직자들이 권위주의를 버리고 봉사자로서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 종교행사를 거행함에 있어 신부 1인 중심에서 공동체의 모든 참여자가 함께 예배하도록 할 점 등을 표명하였다. 아울러 평신도는 단순히 사목의 대상이 아니라 사제·수도자와 함께 인류 구원을 위한 고유한 사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평신도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토록 하였으며, 분열된 기독교 내 제 교파들이 서로간의 반목을 버리고 교회일치를 이루도록 제안하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채택한 혁신적인 헌장과 교령, 선언은 세계교회를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으며, 중장기적으로 전 세계의 교회개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공의회에 참가한 전 세계의 주교들은 그들 나라의 교구로 돌아가 각 교구 내 평신도운동과 교회일치운동, 교구가 소재했던 지역과 국가를 둘러싸고 직면했던 사회적 현실문제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흐름을 만들어 나갔다. (...)
  1960~70년대 전 세계 천주교회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의회 이전의 폐쇄적·권위죽의적인 교회상에서 벗어나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사제와 함께 교회의 혁신과 사회문제에 적극 나서는 교회상으로 변화되어 갔다. 이러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과는 한국 천주교회를 큰 변화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는데, 이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창설된 천주교 원주교구와 지학순 주교였다. (85~87쪽.)

 

  1965년 9월 초 지학순 주교는 공의회의 마지막 회기인 제4차 회기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인 주교 6명과 함께 로마를 방문하여 마지막 폐회식까지 전 과정을 둘러보았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과 가르침을 철저히 수용하였다. 그는 귀국한 후 본격적으로 원주교구가 그 정신과 가르침에 기반한 평신도 중심의 교구가 되도록 하기 위해 제반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이를 위해 먼저 지학순 주교는 자신을 대신해서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주교의 구상을 추진할 인물과 조직기반 마련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지역유지이자 혁신계열의 지도자였던 장일순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원주교구가 평신도 중심의 교구가 될 수 있는 조직기반이 마련되도록 추동하였다. 지학순 주교는 정치활동정화법에 의해 활동을 제약받았던 장일순을 원주교구 사도회 회장에 임명함으로써 그가 원주교구를 배경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하였고, 1966년 5월 교구 신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자도 아닌 김영주를 주교 비서실장이자 기획실장에 임명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1960년대 중후반 지학순과 장일순을 중심으로 김영주, 김영일, 장상순, 박재일 등 1차 원주그룹이 형성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90쪽.)

 

  지학순 주교는 부임 초기 원주교구가 관할하고 있었던 농촌과 광산촌, 어촌 등의 지역을 둘러보면서 대부분의 농민과 광산노동자, 서민 등이 어려운 사회경제적, 문화적, 지리적 조건 하에서 곤궁하게 살아가는 현실을 보았다.
  (...) 지학순 주교는 전교도 중요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는 인식하에서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을 하였으며, 고리채에 시달리던 지역주민들을 위한 해결방안을 강구하였다. 당시 지학순 주교는 1962년 부산 초당동성당에서 주임신부로 봉직하면서 보았던 부산지역의 신협운동을 교구 차원에서 지원하기로 하였으며, 그 결과 1960년대 중후반 원동성당 내 신협의 창립을 필두로 황지신협(1966.11), 문막신협(1966.12), 단구동신협(1968.2), 삼척신협(1969.10) 등이 설립되도록 추동하였다. 아울러 1960년대 후반 침체에 빠졌던 신협운동을 본격적으로 활성화하기 위한 조직으로 교구 내 진광중학교 부설 '협동교육연구소'를 설립하도록 하는 한편, 1972년 신협 강원지구평의회의 창립을 지원하면서 향후 원주그룹이 이들 조직들을 기초로 원주를 넘어 강원도지역의 신협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토록 하였다. (95~96쪽.)

 

  원주그룹은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면서 농촌과 광산지역의 각 단위 신협이 경제적 차원에서 금융기관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1970년대 후반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결합시키고 있었다. 신협의 운영에 운동성을 부여하고 협동조합 원칙에 기반을 두고 충실히 운영되도록 하면서 지역사회의 현안에 신협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도록 추동하였다. 그 결과 원주그룹이 관할하던 지역의 신협은 다른 지역보다 한층 더 운동성과 협동조합적인 내용을 가지고 운영되었고, 이를 통해 협동조합운동이 발전적으로 전개되었다. (162쪽.)

 

  (...) 국가에서 추진하였던 새마을운동과 재해위가 전개하였던 부락개발운동은 근본적인 성격의 차이가 있었다. 1970년대 전반 새마을운동은 새마을가꾸기사업에서 착수되어 발전된 것과 같이 농촌부락의 입장에서 추진된 환경개선10대사업이 대부분이었다. 부락개발사업의 경우, 수해를 입은 농촌부락을 선정하여 생산협동체인 작목반과 이를 총괄하는 부락총회를 구성토록 하는 등 부락민의 생산소득증대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며, 신협과 구판장·소비조합의 설립·운영을 통해 농민 주도의 부락개발운동이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 핵심이었다.
  (...)
  1973년 5월 부락개발사업이 착수된 여주 보통부락에서 당시 이장이자 새마을지도자였던 경근호의 구술과 같이 부락단위에서 새마을사업은 대부분 환경개선사업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정부와 재해위는 새마을운동과 부락개발운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한 것이 교육사업이었다. 그러나 교육의 접근법과 내용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1970년대 전반 부락개발사업에 참여한 농민지도자들은 점차적으로 이를 인식하였다.
  (...)
  새마을운동 초기 새마을가꾸기사업과 환경개선10대사업의 추진을 통해 일종의 농촌근대화적 성격을 가진 교육이 실시되면서 일정한 농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던 새마을교육이 1972년 말 유신체제의 성립을 전후로 대중지지의 결집을 통한 정권의 안정과 유신체제의 유지에 필요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한 범국가적인 정신운동으로 점차 변질되었다. 또한 농촌새마을운동에서 전개된 마을공동체 중심의 사업이 한계에 도달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지 못하면서 1974~75년을 기점으로 그 활동이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 새마을운동의 중점이 점차 농촌에서 도시와 공장으로 옮겨가면서 농촌새마을운동은 농촌새마을운동은 농촌근대화운동이자 농촌개발운동의 성격에서 완전히 완전히 벗어났다. 따라서 1970년대 전반 농가소득증대를 위한 대표적인 정책이었던 통일벼 보급과 이를 통한 이중곡가제의 실시를 통해 미곡의 상품화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농민층을 중심으로 정권에 대한 지지가 나타나면서도 새마을운동은 그 자체가 농촌근대화 또는 전문적인 농민양성의 역할과 기능에서 점차 이탈되어 갔다. (343~346쪽.)

 

  1970년대 후반 재해위 관할의 구판장과 새마을구판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사한 점들이 많았다. 부락단위로 구판장이 설립·운영된 점, 구판장 규모의 영세성과 소비성 물품 중심, 부락 내 부녀회의 주도성과 윤번제에 의한 운영에서 위탁제로의 변화상 등이었다. 그러나 양자는 내용적으로 커달나 차이가 있었다. 먼저 새마을구판장은 주관자가 주로 새마을지도자나 마을금고 이사장이었으며, 면단위에 설립·운영된 농협구판장과 연계되면서 운영되었다. 당시 새마을구판사업은 유신체제 하에서 관제협동조합의 설립과 운영이 협동조합 7대원칙에 기반하여 운영되기 어려운 구조 속에서 체계적인 지도와 협동조합교육이 수반되지 못한 채 관제적 농촌개발운동과 결합된 것이었다. 그러나 재해위 관할 농촌부락에서 신협의 부대사업으로 운영된 구판장·소비조합은 재해위에 의해 활발히 전개되었던 협동조합교육을 통해 형성된 농민지도자와 농민들의 참여에 의해 협동조합 원칙에 입각해서 자발적·자주적으로 운영되었다.
  둘째, 당시 농촌신협과 구판장의 조합원이었던 농민들은 재해위의 협동조합교육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낸 출자금·예탁금·적금 등을 기초로 신용을 기반으로 한 대부사업과 구판장·소비조합의 운영에 참여하면서 조합원의 의식이 성장할 수 있었다. 농민들은 월례회와 정기총회 등을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반영시키면서 신협과 구판장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신용에 기반한 자금대부와 각종 계 자금의 신협자산화를 통해 고리대 청산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신협과 구판장을 '농민자치조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농촌신협과 구판장의 대내외적 활동과정에서 행정기관과 마을금고, 농협 등의 간섭과 탄압을 경험하면서 농민들은 조합원의 의식이 더욱 성장할 수 있었으며, 관제협동조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이러한 기반 위에서 재해위 관할 지역에서 농촌신협을 중심으로 한 가농의 조직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조합원인 농민들에 의한 쌀생산비조사활동과 농협민주화운동이 어느 지역보다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그러나 농협과 마을금고 등 관제협동조합과 새마을구판장에 참여한 농민들이 유신체제를 적극 지지하면서 가농운동을 탄압하는데 농촌부락 일선에서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양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1970년대 재해위의 추동을 받아 농촌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민간 주도 협동조합운동의 핵심은 신협운동이었다. 당시 신협운동과 구판장·소비조합을 통한 소비조합운동은 그 과정에서 관제농협의 민주화를 추동했을 뿐만 아니라 관 주도 새마을운동의 전개에 따라 '마을회의'나 대동계, 마을금고 등을 중심으로 부락 내 권력을 유지·행사하던 기존 권력구조를 신협임원들이 주도해 나가기도 하였다. 또한 1970년대 농촌부락에서 신협과 구판장을 통해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정부 주도의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는 기반위에서 부락단위에 기반한 농민 주도의 농촌개발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핵심체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440~442쪽.)

 

  1983년 11월 사개위는 사회개발부로 재편되었다. 당시 사회개발부로의 개편은 그 인적구성원 뿐만 아니라 향후 원주그룹의 활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으며, 1979년 9월 사개위 출범의 연장선상이면서도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측면이 있었다. 하나는 재해위와 사개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을 하였던 원주그룹이 김영주를 필두로 시간차를 두고 '탈원주(脫原州)'를 통해 사회개발부에서 물러난다는 의미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사회개발부가 출범하면서 최기식 신부를 중심으로 원주교구의 사제가 사회개발부의 사업을 실제적으로 총괄하게 된 점이었다.
  이러한 기구개편의 배경은 원주그룹이 중심이 된 사개위의 활동과 사업추진 방식에 대해 원주교구 내 신부들에 의한 강한 비판적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직개편을 주도한 사제들은 사개위의 제반 사업이 원주교구 내 가장 대표적 사업이지만 지학순 주교의 개인적 차원의 결정에 기반해 일부 평신도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교구에 소속되어 있는 사개위가 지나친 폐쇄성을 가지고 제반 사업을 추진해 왔다고 보았다. 사제들은 사개위의 제반 사업과 활동들이 교구의 선교적 측면에서 한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사제들은 가톨릭 200주년사업의 추진을 계기로 원주교구가 영성적 사업을 상당 부분 복원해야 한다는 목표 하에 사회개발부로의 개편을 이끌면서 이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원주그룹과 원주교구 사제들의 인식은 큰 차이를 드러내면서 전개되었고, 그 결과 최기식 신부가 주도하는 사회개발부의 출범으로 귀결되었다. 당시 사회개발부로의 개편은 원주그룹과 사제들의 갈등이라는 내부적 요인 외에 정보기관의 개입으로 인한 외부적 요인으로 크게 작용하였다.
  (...)
  당시 사개위 사무국장 김영주의 구술과 같이 군사정권의 정보기관은 원주그룹에 의한 부락개발운동과 협동조합운동 등을 무력화하고자 지속적인 감시와 압력을 행사하였으며, 원주그룹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제 및 평신도에 대한 접근을 통해 그 유기적 협력관계의 저지와 인식차를 증폭시키고 있었다. 이와 같이 사개위의 목적과 위상, 방법론에 대한 원주그룹 및 사제 간의 인식차이와 갈등은 1978년 1월 공소사목부의 출범, 1979년 말 사개위로의 개편, 1983년 말 사회개발부의 출범 등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
  한편, 사개위에서 활동하였던 원주그룹의 구성원들이 사회개발부를 차례로 떠나게 된 것은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1980년대 전반 사개위는 농촌과 광산지역에서 소비조합운동을 중심으로 미제레오와 세베모 등 외원기관의 자금지원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제반 사업을 전개하였다. 1981년 9월 전두환정권이 서울올림픽의 개최권을 따내면서 전 세계적으로 한국사회의 발전상이 점차 알려졌으며, 미제레오와 세베모는 한국사회의 발전상에 따라 원주교구가 추진하는 제반 사업에 대해 자립하여 추진토록 점차 요청하였다. 그 결과 사개위는 지속적으로 외원기관의 지원자금 확보를 위한 프로젝트 신청 여부를 심각하게 고심하였다. 원주교구는 세베모에 신청한 1983년도 농촌소비조합육성 계속사업의 지난한 승인과정과 1984년 말 세베모에 신청한 신규사업의 승인여부가 1985년 말까지도 불확실하게 되면서 더 이상 기존체제로 제반 사업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사회개발부로의 개편시 사무국장 김영주의 퇴진과 함께 다수의 상담원들이 차례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530~536쪽.)

 

  원주그룹은 생명파괴의 현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분단된 한국사회에서 일체생명을 신령한 것으로 존중하고 이웃을 한 가족으로 여기는 전통뿐만 아니라 토지와 물, 바람과 대기, 빛과 그늘, 풀과 나무, 벌레와 짐승들까지도 하나의 총체적인 통일된 생명체로 보는 영성적·공동체적인 생명의 세계관과 이에 기초한 전사회적·전우주적인 협동적 생존의 확장 가능성이 숨겨진 채로 드러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숨겨진 채로 드러나 있는 민중적 세계관과 생명의 세계관을 토대로 제3세계 민중운동과의 연대속에서 한국 사회의 극심한 생명파괴 현상과 분단시대를 극복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 원주그룹은 원주보고서를 통해 근대 산업문명의 전개에 따라 생명파괴와 반생명현상이 극심하게 된 현 사회를 진단하고 이를 대응·극복하기 위하여 '생명'을 핵심적 내용으로 하는 제반 사상과 진보적 과학사상 등에 토대를 두고 경천·경인·경물(敬天敬人敬物)에 기반한 '생명의 세계관'을 확립하고 '협동적 생존의 확장'으로 나아가자는 생명운동으로의 전환을 한국사회에 제창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1970년대 초 민중의 기본적 자유권과 생존권에 기반한 '생명' 인식과 이를 통한 제반 협동운동의 추진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즉, 원주그룹은 전일적인 '생명의 세계관'을 통해 우리와 인류와 근대 산업문명의 역사를 바라봐야 하며, 민중과 인류뿐만 아니라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과 뭇 생명들까지도 포괄하는 전생명계의 '협동적 생존의 확장'과 영성적·공동체적인 새로운 생존방식을 창조·발전시켜 나가는 운동을 제창했다는 점에서 1970년대 초 '생명' 인식과는 차원이 다른 질적인 변화상을 보여주었다. 또한 자연과학의 원리이자 생태학의 원리를 적용하면서 생명을 순환성·다양성·관계성이라는 세 가지 특성에 기반하여 사회의 원리와 운동의 원리로 바라보는 생명인식론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차원이자 영성 차원에서 우주생명까지 논하였다. 이는 하나의 개체 생명이 태어나서 자기생명과 이를 억압하는 환경·구조 속에서 타고난 본성과 삶대로 살 수 있도록 하는 생명보존운동의 차원에서 논의된 1970년대 초의 '생명' 인식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546~548쪽.)

 

  1980년대 광산지역의 노동운동은 사북항쟁으로 큰 전환기를 맞았다. 이를 통해 1970년대 탄광지역 노동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어 광산노동자들이 스스로 노조의 민주화와 노동운동을 고양시킬 수 있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재해위의 초청교육을 받은 일부 광산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이재기 어용지부장과 대립하면서 노조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사북항쟁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기도 하였다. 한편, 사북항쟁의 진압으로 인한 여파는 신군부에 의한 노동운동 정화조치 및 노동관계법의 개정을 통해 탄광지역의 상당수 지부장이 물러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군사정권은 사북항쟁을 통해 더 이상 1970년대식 어용지도부를 통한 탄광지부의 통제와 간선제를 통한 노조통제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사북항쟁이 진압된 직후인 1980년 말 신협과 소비조합을 운영하고 있는 탄광지부를 중심으로 직선제를 통한 지부장 선출을 전국광산노조에 요구하는 주장이 커져갔다. 이를 통해 1981년부터 태영 등 다수 탄광지부에서 직선제를 통해 지부장이 선출되는 과정으로 나아갔다. 이를 통해 1970년대부터 재해위 관할 탄광노조의 노조간부와 광산지구협의회에 소속된 임원들이 각 탄광노조의 지부장으로 대거 선출되었다. (...) (654~655쪽.)

 

  선언(한살림선언―옮겨적은이)은 원주보고서와 마찬가지로 동학사상을 주요한 사상적 기반으로 하였다. 특히, 동학사상 중에서도 해월의 식일완사상과 향아설위사상, 수운의 불연기연사상과 개벽사상 등이 크게 원용되었다. 이는 1980년대에 나타난 모심과 밥사상 등으로 상징되는 장일순의 생명사상과 사상기행을 통해 김지하가 추적해 나간 동학사상의 흐름과 맞닿은 것이었다. 또한 원주보고서가 주로 모든 생명의 순환관계를 표현한 이천식천과 만민평등·생명평등사상에 기초해 동학의 사회적 전망을 보여주는 개벽사상을 중심으로 동학사상을 살펴보던 것에서, 장일순과 김지하의 동학에 대한 지속적인 '학습'과 '탐색'이 깊어지고 넓어진 것을 의미하였다. 1980년대 초 원주보고서에서 가톨릭의 생명론이 주요한 사상적 기반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에 비해 선언이 한층 동학사상에 경도되면서 원주그룹의 활동 배경이자 사상적·경제적 토대였던 가톨릭 원주교구와는 일정한 긴장관계가 유발되는 요인이 되었다. (705쪽.)

 

  1960~80년대 원주그룹이 전개하였던 부락개발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은 박정희정권의 개발독재 흐름과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지역을 중심으로 사람들 간의 관계가 신뢰에 기반해서 지속가능한, 아래로부터의 경제개발이 가능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의 모범적 사례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였다. 또한 박정희정권의 개발독재에 의한 농협과 수협, 새마을금고 등 위로부터의 관제협동조합이 그 주체성과 자발성을 크게 훼손하였던 현실에서 아래로부터의 민간 협동조합운동이 농민·광부들이 중심이 되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컸다. (720~721쪽.)

 

  1980년대 말 원주그룹은 '한살림연구회'의 결성을 주도하면서 근대 산업문명이 전 인류와 전 생명계를 위기로 몰아넣는 시대적 상황을 진단하였다. 또한 그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 한살림모임의 창립을 통해 '한살림선언'을 제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살림선언은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도 이원론적 기계론의 세계관이자 산업주의에 관한 한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이 미개가 없는 낡은 세계관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소외·분열시키고 억압·파괴시키는 죽음의 질서인 근대 산업문명 전반에 대항하여 생명을 총체적으로 살리는 생명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사회운동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원주그룹은 사회혁명이라는 것이 새로운 삶과 변호를 전제하되, 혁명대상 조차도 '때리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라는 긴 안목의 통찰 속에서 국가주의를 넘어선 민(民)의 자립과 자치를 지향하였다. 원주그룹은 '문명사적 통찰'을 통해 근대 산업문명에 기반한 자본주의·사회주의를 넘어서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생명평화공동체'라는 새로운 문명에 대한 비전과 대안사회의 꿈을 꾸면서 이를 '생활공동체운동'과 '생명문화운동'을 통해 실현코자 하였다.
  1960~80년대 농촌·광산지역에서 전개된 원주그룹의 생명협동운동은 당시 적실성이 있는 운동이었다. 당시 민간협동조합은 농민과 광산노동자들의 바람과 활동을 담아낼 수 있는 하나의 그릇이었으며, 농민운동 및 노동운동과의 긴밀한 관련 속에서 전개된 특징이 있었다. 원주그룹이 생명협동운동을 전개하면서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은 국가권력의 교체에 초점을 맞추었던 일종의 지식인 차원의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사회의 가장 힘없는 약자의 삶에 천착해서 철저히 민중지향적이고 풀뿌리 지향적인 시선을 통해, 자신들이 딛고 서 있는 지역의 민중과 학습·토론하면서 지역사회의 현실을 보다 나은 지역자치공동체로 만들어 나가고자 한 것이었다. 원주그룹은 사회운동적 측면에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반독재투쟁과 제반 협동운동을 전개한 후에 생명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이는 정치와 제도 등의 정치투쟁·권력투쟁에 몰두한 사회혁명만으로는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자각 속에서, 생활에 기반한 협동체들을 기반으로 협동적인 방향으로 생활양식이 변화되지 않으면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는 긴 안 목의 통찰을 통해 '생명의 세계관'에 입각한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조'로의 전환을 의미하였다.
  원주그룹의 생명협동운동은 한국사회 내에서 새로운 대안적 사회운동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생명공동체운동, 생명평화운동, 생명살림운동 등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생명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사상적·운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또한 '문명사적 통찰'을 통해 산업문명을 넘어서서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생명평화공동체'에 기반한 통일한국의 새로운 사회상을 제시해 주었다. 또한 '호혜'와 '연대', '협동'과 '살림', '공존'과 '평화'의 지향 속에서 국가주의의 틀을 넘어 동아시아와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평화적·생명적 질서'를 마련해 나갈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일정하게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졌다. (722~724쪽.)

 

교정. 초판

98쪽 밑에서1줄 : 게제하면서 -> 게재하면서

156쪽 밑에서5줄 : 요컨대 1970년대 초 원주그룹의 '생명'론이 민중의 기본적 자유권과 생존권에 기반해서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제반 협동운동의 전개를 통해 박정희군사정권의 군사적 폭력과 정치적 탄압, 민중생존권과 인간의 존엄성 훼손·으로부터 저항하는 제한적인 의미의 '생명운동'이었다. : 비문

240쪽 2줄 : 재해대책애서 -> 재해대책에서

340쪽 4줄 : 농촌부락의 입장에서 환경개선10대사업이 -> 농촌부락의 입장에서 수행된 환경개선10대사업이

364쪽 2줄 : 1973~79년간 한우지원사업으로 지원된 농촌부락의 신협 설립 현황을 나타낸다. 〈표Ⅲ-3〉은 이 시기 한우지원사업 관할 부락에서 -> 〈표Ⅲ-3〉은 1973~79년간 한우지원사업으로 지원된 농촌부락의 신협 설립 현황을 나타낸다. 이 시기 한우지원사업 관할 부락에서

366쪽 8줄 : 채 안 경우가 -> 채 안 되는 경우가

371쪽 밑에서1줄 : 의해 잦은 금융사고가 -> 의해 금융사고가

407쪽 각주60번 : 1977년 8월 중순 8명의 독일 파견 원주를 중심으로 한 강원도 출신의 여성간호원들이 귀국하였고 : 비문

439쪽 밑에서2줄 : 부녀구판장의 운영하였으며 -> 부녀구판장을 운영하였으며

458쪽 9줄 : 등이 논의되었다 -> 등을 논의하였다

458쪽 12줄 : 노연에 -> 노동문제연구소에

459쪽 2줄 : 이문영소장 -> 이문영 소장

497쪽 2줄 : 금욕으로 -> 금력으로

497쪽 밑에서9줄 : 광업소측은 -> 광업소측과

513쪽 3줄 : 할 수 기반이 -> 할 수 있는 기반이

515쪽 밑에서1줄 : 박현채교수 -> 박현채 교수

520쪽 8줄 : 등이 전개되었다 -> 등으로 전개되었다

522쪽 밑에서2줄 : 추진되었다 -> 추진하였다

523쪽 밑에서7줄 : 이흥근신부를 -> 이흥근 신부를

527쪽 밑에서1줄 : 이는 본당을 중심으로 -> 본당을 중심으로

528쪽 1줄 : 사제들이 -> 사제들은

548쪽 4줄 : 영성차원에서 -> 영성 차원에서

561쪽 사진캡션 : 됴요사토 -> 도요사토

588쪽 6줄 : 지달용상무의 -> 지달용 상무의

612쪽 밑에서2줄 : 급중과 -> 급증과

627쪽 1줄 : 광산지구협의회의 전환을 추진하였다 -> 광산지구협의회로 전환하도록 추진하였다

641쪽 밑에서6줄 : 이경국상담원이 -> 이경국 상담원이

650쪽 2줄, 7줄 : 김규벽위원장이 -> 김규벽 위원장이

669쪽 7줄 : 됴쿄 -> 도쿄

685쪽 밑에서3줄, 밑에서3줄 : 백승치신부가 -> 백승치 신부가

691쪽 각주58번 : 도쿄생할클럽은 -> 도쿄생활클럽은

723쪽 5줄 : 따듯하게 ->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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