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잡史나부랭이 (15)
Dog君 Blues...
장지필(張志弼)이라는 사람이 있다. 형평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형평운동이라는 동전의 한쪽 면에 강상호가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장지필이 있다고나 할까. (형평운동도 모르고 강상호도 모르신다면, 장지필의 유명세도 딱 그 정도라고 보시면 된다 ㅎㅎㅎ)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했고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는 각자들 찾아보시고... 그런데 이 사람, 한때는 전국구 스타였건만 의외로 말년의 행적이 명확하지 않다. 아마 형평운동의 주요 조직인 형평사가 대놓고 친일로 기울었던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머 암튼 명확하지가 않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해방 후에는 은퇴하여 충청도 어디서 소를 키우다가 (이건 좀 의미심장하네!) 대략 1970년대 중반에 죽은 걸로 나온다. 무슨 백과, 무슨 사전, 할 것 없이 공..
최승구(崔承九)라는 사람이 있다. 1892년에 태어난 시인으로, 호는 소월(素月)이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1910년대부터 저항정신이 뚜렷한 시를 여럿 발표했다고 한다.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가 1970년대에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고, 1982년에야 작품집이 간행될 수 있었다고도 한다. 이런 성과들만으로도 충분히 기억할만한 사람이겠으나 사실 그보다는 나혜석의 연인이라는 점으로 더 많이 알려진 사람이기도 하다. 최승구도 그렇고, 나혜석도 그렇고, 이런 신변잡기만으로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싶어 다소 안타깝기는 하지만... 머 암튼 그게 본론은 아니니까 각설하고. 그런데 최승구가 세상을 떠난 해가 언제인지 자료마다 다르게 나온다...
사료史料로 인용되는 사진 중에 간혹 그런 사진이 있다. 너무 유명해서 못 찾는 사진. 위 사진이 꼭 그렇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군중대회에서 찍힌 사진이다. 현대사 책 좀 보신 분이라면 낯이 익을거다. 김일성이 이 날 대중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련 책에서 이 사진이 상당히 자주 나온다. 그런데 막상 이 사진의 정확한 출처를 찾으려고 하면… 안 나온다... 블로그고 언론기사고 엄청 많이 나오기는 하는데 제대로 출처를 밝힌 경우가 거의 없다. 드물게 출처를 밝힌다 해도 그냥 '자료사진' 정도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하다 못해 이 사진이 처음 실렸던 당시의 신문기사가 있다면 그걸 이야기해줘도 되련만 글쎄, 여기저기서 인용은 많이 하는데 도통 출처가 안 나온다. 물..
조선 말에 서양을 방문했던 조선인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다. 외국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지금도 해외여행 가면 누구나 실수담 하나씩 만들고 돌아오는데, 그런 정보가 전혀 없었던 백수십년 전에는 오죽했겠나. 수탈과 침략으로 점철된 한국근현대사에서 그나마 미소 머금으며 들을 수 있는 역사 이야기가 아마도 조선인의 서구 여행기일 것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라서 그런가, 조선인의 서구 여행기는 많은 사람의 손과 입을 거쳐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디테일한 부분에서 오류가 생기기도 한다. 얼마 전에 우연히 그런 것 하나를 알아챘는데, 그게 뭐냐면... 1883년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 일행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팰리스 호텔Palace Hotel에서 엘리베이터를 처음 탔을 때 지진이 난 줄 알..
누구도 속시원히 답해주지 않는 사소한 질문에 답하는 잉여력 터지는 역사학도의 잡글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이번에는 '유엔결의안 제195호(III)’를 이야기하는데요, 사실 이에 관해서 미리 꼭 말해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엔결의안 제195호(III)’의 해석문제는 여전히 이견의 여지가 많은 문제라는 점입니다. 앞의 글에서 제가 “역사학계의 정설定說”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사실 역사학계 내에서도 의견이 완전히 통일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꼭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차이로만 이해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유엔결의안 제195호(III)’의 해석 문제가 대체로 진보와 보수의 차이에 따라 구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과 100%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
커피 이야기를 계속 쓰고 싶었지만 자료를 모두 한국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바람에 이를 어쩌나 하고 어리버리 하고 있다가 생각난 주제, 남북관계 한창 좋을 때 물들어온 김에 노젓는 마음으로 잡은 주제, 오늘은 이른바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선 이 기사부터 읽어보시죠. [조선일보]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 뺀 교과서 집필진의 이상한 해명 한번쯤 들어보신 적이 있는 이야기일 겁니다. 1948년 남한과 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후 유엔이 결의안을 통해 남한정부만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역사학계에서는 이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교과서 집필 기준에서도 이 내용을 자꾸 빼려고 한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신문기사나 칼럼, 사설..
징크스가 있습니다. 설레발을 치는 순간부터 일이 잘 안 됩니다. 아무리 잘 되고 있어도, 여기저기 설레발을 치는 순간 바로 슬럼프에 빠집니다.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블로그에 올리는 글만 해도 그렇습니다. 블로그에 달리기에 자신이 붙는다는 글을 쓰자마자 곧바로 컨디션 난조가 오는 것도 그렇고, 이 카테고리의 바로 지난 글에서 쌓아둔 소재가 많다고 호언장담하고 두 달 넘게 글을 안 쓰고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징크스만 탓할 수는 없습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밍기적대다가는 정말 아무 글도 쓰지 못할테니까요. 대부분의 자료를 한국에 두고 오는 바람에 마땅히 글 쓸 상황도 못 되지만 억지로 힘을 내서 키보드를 두들겨보기로 했습니다. 이럴 때는 무엇이건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이..
누가 보건 말건 그저 나 하나 재미있자고 쓰는, 그래서 문장도 개판이고, 그런데 퇴고도 제대로 안 하고 막 쓰는, 잉여력 터지는 역사학도의 판문점 TMI 시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지난 시간에 휴전협정 조인 이후에 살짝 반전이 있다는 것까지 말씀을 드렸죠. 그 반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휴전협정 조인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네, 바로 이 사진이 휴전협정 조인 당시의 모습입니다. 교과서에도 나오고 관련 연구서에서도 많이 인용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때 휴전협정을 조인했던 건물은 사실 휴전회담을 벌였던 그 건물은 아닙니다. 휴전협정 조인을 위해서 별도로 더 큰 건물을 따로 지었고, 바로 거기에서 휴전협..
한가하고 게으른 역사학도의 잉여력 터지는 TMI 시간. 오늘은 판문점이 휴전회담 장소가 된 이유를 찾아갑니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초반, 전선戰線은 매우 드라마틱하게 변했습니다. 남과 북 양측 모두 각자를 패배 직전까지 몰아넣었고, 인천상륙작전과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거듭 뒤집히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1951년 중반 정도부터는 전선戰線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교착된 채로 일진일퇴의 공방전만이 거듭됩니다. 양측 모두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이런 상황은 자연스럽게 휴전회담 논의로 이어졌구요. 휴전회담 장소로 처음 고려된 곳은 덴마크 국적의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였습니다. 덴마크는 UN군의 일부로 남한 측을 지원하고는 있었지만 인도..
지난 시간에는 ‘판문점’이라는 표기가 1951년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료를 통해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판문점’이라는 지명은 1951년에 휴전회담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말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요. 2편에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판문점’이라는 지명이 1951년 휴전회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라고 서술하는 책들은 한결같이 하나의 근거를 지목합니다. 바로 1995년에 남북회담사무국에서 펴낸 『판문점수첩』입니다. 바로 이 책 8쪽에서 관련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새로운 회담장은 널문리의 점막(店幕) 앞 콩밭에 지어졌다. 그런데 새로운 휴전회담의 장소가 된 「널문리」를 중국측이 한자로 표기할 수가 없어 회담장소인 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