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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君 Blues...

1-1. 지난 7월 3일 창원에서 열린 ROAD FC 058을 직관하고 왔다. 스포츠 경기야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것인데 그것을 직관하고 왔다고 굳이 그것을 블로그 글로까지 정리하는 유난을 떠는 이유는... 내 인생 첫 스포츠 직관이기 때문. 1-2. 나는 UFC를 통해 MMA를 처음 접했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MMA는 UFC만 봤는데, 어느 순간부터 국내 리그에도 조금씩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국내에도 TFC나 AFC, 더블G FC 같은 단체가 많이 있지만 내가 가장 먼저 눈을 준 것은 ROAD FC. 아무래도 국내 MMA 해설의 독보적인 존재였던 김대환이 대표로 갔다는 점 때문에 가장 먼저 눈이 갔다. 물론 제대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SNS와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면서 ..
런던에서 리플리로 가는 방법은 지난 번에 썼으니 그것을 참고하시고... 이번에는 리플리로 간 진짜 목적, 에릭 클랩튼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한다. 하필 내가 간 날 날씨가 궂어서 사진 상태는 전반적으로 구리다. 에릭 클랩튼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는 음악 팬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다. 에릭 클랩튼은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영국을 거쳐간 캐나다 공군의 에드워드 월터 프라이어Edward Walter Fryer와, 마을에 살던 패트리샤 몰리 클랩튼Patricia Molly Clapton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에드워드는 유부남이었던데다가 마을을 곧 떠났기 때문에 사실상 패트리샤는 미혼모였다. 1945년 3월 30일 에릭 클랩튼이 태어났을 때 패트리샤는 불과 16살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도 미혼모와 '사생아'에 대한..
20대 초반부터 에릭 클랩튼에 빠져 살았다. 요즘 트렌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빈티지한 블루스 기반의 늙다리 기타리스트에게 내가 왜 그렇게 빠져들었는지는 나 스스로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때가 한창 우울의 끝을 찍을 때라서, 뭐라도 좋으니 마음 줄 곳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때부터 에릭 클랩튼에게 무섭게 빠져들었다. 하나둘씩 앨범을 사모았고, 기타도 배우기 시작했다. 2007년과 2011년에 있었던 두 번의 내한공연 때는 연봉 600만원짜리 대학원생 주제에 30만원이 훌쩍 넘는 S석 티켓을 사고 그랬다. 돈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쌩쑈 덕에, 그래도 20대의 우울한 시기를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었다. 마치 10대 후반에 이상은에게 빠져들었던 딱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난 여름에 잠깐 파리에 갔다. 나에 대한 두 번의 소매치기 시도를 포함해 내 일행 중 한 사람이 당한 소매치기 때문에 파리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은 매우 나빠졌고 그래서 가급적이면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도시가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장소가 두 군데 있었다. 첫번째는 로트렉이 커리어 초기에 그렸던 인물화를 많이 보유한 오르세 미술관이었고, 두번째는 페르-라셰즈 묘지Cimetière du Père-Lachaise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굳이 우열을 따지자면 페르-라셰즈 묘지가 더 나았다. 페르-라셰즈 묘지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페르-라셰즈 묘지를 계기로 유럽 도시의 공동묘지에 대해 꽤 호감이 생겼다. 다른 사람들의 유럽 여행기에서 공동묘지가 자주 언급되는 것을 보면..
春夏以來, 旱勢太甚, 殿下焦勞、勤恤, 避殿、減膳, 祀典徧擧, (...) 理冤獄, 日不暇給봄·여름 이래로 가뭄 기운이 매우 심하여, 전하께서 애써서 노력하시고, 부지런히 구휼(救恤)하시며, 피전(避殿)하시고, 감선(減膳)하시며, 사전(祀典)을 두루 거행하시고, (…) 원통한 옥사(獄事)를 다스리시기에 날로 겨를이 없으십니다.- 각주 : 성종실록 성종1년(1470년) 6월 2일.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의 번역을 내가 약간 다듬었다. 조선시대의 아홉번째 임금인 성종이 즉위한 이듬해는 유독 가뭄이 심했다. 봄부터 여름까지 비다운 비가 오지 않았다. 특히 삼남지방의 가뭄이 심했다고 한다. 한창 곡식이 여물어야 할 봄과 여름에 이렇게 날이 가물었으니 문제가 보통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대로면 그 해 소출에 문제가 ..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인구를 다해봐야 30만 남짓 되는 작은 도시다. 그곳에서 나서 그곳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다 보냈다. 서울로 올라온 것은 스무살짜리 대학 새내기가 된 해의 늦겨울이었다. 변화를 싫어하는 천성은 그때도 마찬가지여서 서울로 삶터를 옮긴다는 것이 이만저만 걱정되는 일이 아니었다. 경상도에서 신입생이 올라오면 선배들이 빙 둘러싸고는 막대기 같은 것으로 쿡쿡 찌르며 “말 해봐, 말 해봐” 하며 놀린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들은 참이었다. 내 서울 생활은 그렇게 걱정 반 스트레스 반으로 시작되었다. 내 걱정은 틀리지 않았다. 서울은 모든 것이 낯설고 놀라웠다. 말투는 어색했고, 사람은 너무 많았다. 사투리를 쓰지 않는 노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서울에서 처음 알았고, 1년에 두 번 이상 눈이 ..
스무살이 넘은 한국 청년은 으레 한번쯤 술독에 빠진다. 천성적으로 술을 아주 싫어하거나 알콜분해능력이 아주 낮다면 모를까 20대의 첫 몇년동안 술 앞에서 (되지도 않는) 객기를 부리는 것으로 일종의 성인식을 치른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돈 없는 대학생에게 술만큼 값싸게 하룻밤 즐길 수 있는 것이 또 없었으니까. 술이 술을 부르다 못해 소주 안주로 맥주를 마시는 지경이 되도록 술을 퍼마시며 치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게 알콜에 찌들어 있는 와중에도, 단 한가지만큼은 술에 관해서 동의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목이 마를 때 맥주 생각이 난다는 말. 나도 잘 안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난 다음에 들이켜는 차가운 맥주 한 잔이 얼마나 시원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증이 날 때 맥주가 가장 먼저 떠..
타고난 눌변이다.특히 임기응변이 잘 안 되는 편이어서 미리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처하면 더 말이 꼬인다. 낯가림도 심하다.처음 만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잘 없다. 인생의 첫 20년을 그렇게 살았다. 대학에 들어가서 그런 성격을 고치려고 애썼다.입학하고 졸업할 때까지 연극을 했고, 일부러 사람도 많이 만났다. 사람 성격이라는 것이 의외로 쉽게 바뀌는 것이라서, 그런 식으로 의식적으로 두 학기 정도 살고 나니말수와 말주변이 꽤 늘었다.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말도 간혹 들었고, 달변이라는 이야기도 여러 번 들었다. 그렇게 다시 한참 시간이 지났다. 낯가림이 심한 나,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둘 모두 내 인격의 일부가 됐다. 친한 사람을 만나면 수다 떨고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너무 즐겁다.동시에 가..
네덜란드의 가장 큰 공휴일은 King's Day다. (네덜란드어로는 Koningsdag. 발음은 [코닝스다흐]라고 하더라...) 현 국왕인 빌럼-알렉산더르Willem-Alexander가 2013년에 즉위한 후부터는 (2014년부터) 4월 27일이다. 왕의 생일이기 때문에 왕이 바뀌면 King's Day 날짜도 바뀌고, 국왕이 여성이면 이름도 Queen's Day가 된다. 부활절이니 추수감사절이니 하는 보통의 명절과는 느낌이 좀 다른데, 경건한 느낌보다는 즐긴다는 느낌이 강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그 날 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주택가에서는 필요 없는 옷가지나 가재도구 같은 것들을 내놓는 벼룩시장이 열리는데, 따로 세금이 붙지 않기 때문에 잘만 하면 쓸만한 물건을 싼값에 구할 수 ..
네덜란드는 한국에 비해 전체적으로 식재료가 저렴하다. 고기도, 야채도, 과일도, 대체로 다 그렇다. 대신 식당에서 사먹으면 가격이 엄청 뛴다. 아마도 인건비가 비싼 때문이겠지. 과일의 경우에는 가격이 싼 대신 한국보다 당도가 살짝 낮은 느낌이다. 예컨대 바나나 같은 건 처음 먹으면 약간 텁텁한 맛이 있죠. (물론 여러 조건마다 조금씩 맛이 달라질 수는 있다. 여기 바나나는 약간 후숙을 해서 먹으면 훨씬 더 나아진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사과만큼은 마음에 쏙 든다. 크기도 적당하고 맛도 좋다. 사진에 있는 사과가 마트에서 파는 비닐포장 한 꾸러미인데, 1.5kg에 2.5유로 정도 한다. 한국돈으로 3000원 정도. 물론 품종에 따라서 더 싼 것도 있다. 여기는 사과를 품종으로 구분해서 파는데, (한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