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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君 Blues...

지금까지 스페인 내전은 자주 좌파와 우파의 충돌로 묘사돼 왔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하며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좌우의 충돌 말고도 이 전쟁에서는 두 개의 갈등 축이 더 나타나는데, 하나는 국가의 중앙집권과 지역적 독립 간의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권위주의와 개인의 자유 간의 갈등이다. 우파 국민 진영은 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난 결속력이 강한 세 가지 극단적 경향이 한데 결합했기 때문에 공화 진영에 비해 훨씬 통일성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우익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으며, 권위주의적이었다. 반면에 공화 정부는 공존이 불가능하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중앙집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대표되는 권위주의자들이 지역주의자, 자유주의자들과 어지럽게 한데..

이 책은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을 계기로 집필되었습니다. 사회적 소수자를 적대하고 우방을 존중하지 않으며 제도적 절차까지 의심하는(부정선거 음모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민주주의를 침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浮上은 전세계의 모범을 자임했던 미국 정치의 일탈처럼 보입니다. 이런 식의 극단주의자 혹은 독재자가 트럼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은 알베르토 후지모리(칠레), 우고 차베스(베네수엘라) 등도 유사한 궤적을 밟았다고 지적하지요. 저자는 이들 "포퓰리즘 아웃사이더"(31쪽)는 당장의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단기적 유혹에 빠진 기성 정치인과의 연합이나 이들의 공백을 틈타 집권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들이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 자체를 ..

90년대 말부터 0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는 지적인 백화제방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김대중 정권이 출범하면서 확보된 제도적 공간에서 80~90년대를 거쳐 숙성된 진보적 담론이 꽃을 피웠다고나 할까요. 김규항, 진중권, 강준만, 임지현, 김정란 등, 당시에 글 좀 썼다 하는 분으로 당장 기억나는 이름만 꽤 여럿입니다. 지금 시점에서야 이들에 대해 여러 평가가 가능하겠습니다만, 어쨌거나 저(를 전후한 세대)가 그들에게서 지적인 수혜를 크게 입었던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저자인 권혁범 선생님의 글도 그 시기에 참 많이 읽었습니다. 제 손에 집히는 책과 잡지에는 그의 글 한 두개는 꼭 실려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워메, 생산력 무엇...) 당시에 그가 주력했던 것은 민족주의 비판이었습니다. 한국현..

『태극기와 한국 교회』를 읽고, 그러면 100여 년 전 한국에서 활동한 이름없는 선교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어떤 활동을 하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태도로 한국을 대했는지, 좀체 알 기회가 없었거든요. 그러고 당장 책장을 살펴보니 이 책이 있더군요. 『조선은 우리 집이올시다』는 1897년 조선에 와서 1920년 조선에서 숨을 거둔 선교사 조세핀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을 다룹니다. 그는 작은 교회의 목사와 결혼하여 아들과 딸 하나씩을 낳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습니다. 한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슬픔이었지만 그는 온전히 신앙의 힘으로 이를 견뎌냅니다. 그리고는 급기야 저밀리 동아시아에서의 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합니..

1996년 개봉작인 인디펜던스 데이가 20년만에 후속작을 내고, 2000년 개봉작인 글래디에이터는 24년만에 후속작을 낸 것처럼, 2012년에 나온 『조선을 떠나며』의 후속작인 『다시 조선으로』가 12년만에 나왔습니다. 전작이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를 떠난 재조일본인을 다루었다면 후속작은 같은 시기 한반도로 돌아온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책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로 유입된 인구 규모가 대략 2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하는데(37쪽) 당시의 인구규모를 생각하면 이들을 빼놓고 이 시기를 이해할 수는 없겠습니다. 해방 직후의 정치 상황은 (2000년대를 전후하여 대학가에서 주로 읽던 ㅋ)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등의 책을 통해 이미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친숙합니다. 하지만 그들 책에서 다루..

애초부터 포체투지와 전장연의 지하철 행동, 나아가 장애운동 전반의 목적이 대중들의 공감과 동정을 유발하는 것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안일한 착각일 수 있다. 분명 기어가는 행위는 활동 당사자들에게도 수치스러운 행위이지만 이들은 "생존을 위해 최후의 보루"로 남아 있는 자기 몸을 내던지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전사들의 노래』, 108쪽) 이 권리 주장은 나아가 단지 기존의 권리 목록을 단순히 답습하면서 정부에 이를 반영할 것을 행정적으로 요구하는 차원의 주장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는 한 사회 내에서 권리를 생각하는 기존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며, 이를 국가와 동료 시민들 앞에서 정당화하려는 주장이다. 이들은 이동권과 활동지원서비스 보장 등의 요구들이 단지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채택되는..

난지도 매립지의 역사는 서울시가 산업화와 도시화, 발전 과정에 수반하는 물질적, 사회적 문제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보여준다. 난지도는 쓰레기 매립장이라는 기피 시설을 시야에서 가린 채 서울의 쓰레기 위기를 막아냈지만, 단순 매립은 다른 환경 문제를 초래했다. 난지도는 도시 하층민에게 삶과 노동의 공간을 제공했지만, 서울시가 빈민층의 노동력을 확보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재활용품 거래로 도시 경제에 기여하며 도시 환경의 물질 순환을 매개했고, 이를 통해 도시 성장의 필수적 조건을 제공했다. 주민들의 노동은 난지도 관리 비용 감축과 매립지 사용 기간 연장의 핵심적 요인이 되었다. 서울 시민들 역시 고도성장의 부산물인 쓰레기와 그 위험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난지도는 쓰레기..

역사책 읽는 것은 제 삶에서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만, 역사책을 읽다보면 종종 허무해질 때가 있습니다. 역사(책)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란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역량이나 업적을 쌓았거나 신분이 꽤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런데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읽는 저는 대단한 역량도 없고 신분도 낮은 (직장인이란 현대의 노비...) 저는 그저 길바닥에 널린 범인凡人에 불과하죠. 역사책 속 인물과 역사책 바깥 현실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있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 밀려오는 허무함이란... 그래서인지 우리는 역사를 이야기할 때 종종 야사野史 같은 것에 마음이 끌리고, 위대한 인물의 위대하지 않은 면에 흥미를 가집니다. 그런 우리에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의 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을 다룬..

요즘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한국의 개신교만큼 좋은 소리 못듣는 종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온 사방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들고 다니시는 분들의 배후로 개신교가 지목되는데다가, 나쁜 짓 했다고 뉴스에 나오는 사람 중에 목사나 장로나 집사는 또 왜 그렇게 많으신가요. 이웃한 천주교만 해도 정의구현사제단 등 사회적 소수자를 위해 활발하게 목소리를 경우가 많이 보이니 더욱 그래 보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는 개신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개신교가 태극(기)이라는 국가/민족 상징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과정은 곧 개신교가 조선의 민족 문제에 깊이 공감하고 연대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개신교가 타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전광훈이니 태극기부대니 하는 것으로 한국의 개신교가 과..

우리나라 지명 중에 '陽'(볕 양)자가 들어간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陽'의 뜻이 그때그때 달라진다는 겁니다. 서울의 옛 지명인 '한양(漢陽)'은 '한강[漢水]의 북쪽'이라는 뜻이지만 안양시의 관양동(冠陽洞)은 '관악산(冠岳山)의 남쪽'이라는 뜻이니 '陽'이 어떨 때는 북쪽을 의미했다가 또 어떨 때는 남쪽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하나의 글자가 정반대의 의미를 함께 갖고 있는 셈입니다, 아이고 참. 알고보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양지바른 곳'을 뜻하는 '陽'은 강을 기준으로 하면 북쪽을 지칭하고 산을 기준으로 하면 남쪽을 지칭하기 때문이죠. 남쪽에서 해가 뜨면 강은 북쪽 사면에 양달이 생기고 산은 남쪽 사면에 양달이 생기잖습니까. 이걸 알고 나면 우리나라의 여러 지명에서 '陽'이 들어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