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상놈과 국왕 (계승범, 역사비평사, 2026.) 본문

잡冊나부랭이

상놈과 국왕 (계승범, 역사비평사, 2026.)

Dog君 2026. 8. 15. 05:57

 

  가장 잔혹한 신은 역사의 여신 클리오라고 하지요. 클리오의 전차 바퀴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와 역사적 진보에 뒤쳐진 이들을 가혹하게 짓밟고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했다는 이 말은, 자본의 축적과 사회의 성장이 누군가의 희생 위에 있으며 인류의 역사적 전진 또한 수많은 희생 위에서 가능하다는 뜻으로 독해됩니다. 그 희생이란 아마도, 하루하루를 고단히 살아가는 우리 같은 평범한 직장인들의 것이겠죠. 우리 같은 장삼이사가 역사를 공부할 때, 현실자각타임이 종종 오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어느 문명의 흥망성쇠니 어느 황제의 통치정책이니 어느 국가의 성공 비결이니 하는 것들과 우리의 일상은 유관장 삼형제의 영웅담과 장팔사모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모가지가 뎅겅뎅겅 잘려나가는 황건적 졸병의 운명만큼이나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역사책에서 황건적 졸병 같은 이들이 뭐라도 해보겠답시고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면 괜히 더 반갑고 마음이 쓰입니다. 이 책에서 묘사되는 하서국은 딱히 대단할 것 없는 신분적 배경을 가진 장삼이사에, 했던 일들도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니며 양측의 말들을 전달하는 하급 공무원의 그것입니다. 그런 그가 후금과 조선을 오가며 한참이나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매일매일 각자의 현장에서 갈려나가는 지금 우리들의 모습과 꼭 닮았지요. 그를 통해 역사의 흐름이 유의미하게 바뀐 것도 아니고, 그를 안다고 해서 현대의 독자들이 뭔가 대단히 새로운 역사상을 새로 알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서국이 마냥 불쌍한 엑스트라인 것만은 아닙니다. 통역사의 본디 직분은 다른 이의 말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영혼 없는' 일이지만 하서국은 누구보다 광해군의 외교노선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또한 상황에 따라서는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대담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순전히 자기의 노력만으로 아내와 자식들의 면천(免賤)을 얻어내는가 하면 무려 국왕과 직접 대면하는 기회까지 얻습니다. 별볼일 없는 장삼이사에게도 '생전 개쩌는 순간'은 있었던 것이죠.

 

  보통의 직장인의 마음으로 『상놈과 국왕』을 읽으며, 모처럼만에 역사책을 읽으며 마음 둘 곳을 찾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도성에서 한참 떨어진 북방 변경의 지방직 말단 통역사이었던 하서국처럼 우리 역시도 역사와 시대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는 너무 작은 존재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서국이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는 와중에 '개쩌는 순간'까지 만들어냈던 것처럼, 신분은 비루할지언정 국왕과 동일한 외교적 비전을 공유하며 자기 목소리를 내기도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화양연화 같은 순간이 있을 것이고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기회도 있겠지요. 혹시 아나요, 그리고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나 계승범 선생님 같은 어느 눈밝은 역사학자가 자료 더미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발굴낼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또 그때의 어떤 독자는 우리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기 나름대로의 마음 둘 곳을 찾은 것 같다는 위안을 얻을지도 모르고요.

 

  요컨대 건주여진의 통일과정(1585~1589)과 다른 여진 부족들을 상대로 한 대대적인 정복 사업(1599~1613) 사이에 휴지기(1590~1598)가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왜란 기간(1592~1598)과 거의 일치한다. 즉, 누르하치의 입지를 굳혀준 두 차례의 정복 사업은 왜란 기간을 빼고 그 전후로 전개되었으며, 왜란 중에는 방어에 치중했을 뿐 무력을 앞세운 팽창 정책을 추구하지 않은 양상이 확연하다. (...) 1593년에 해서여진·몽골 연합군을 격파한 여세를 몰아, 또 왜란이라는 '기회'를 이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누르하치는 왜 해서여진을 상대로 좀 더 적극적인 정복 사업을 펼치지 않고 오히려 군사행동을 자제했을까?
  흔히들 임진왜란이라는 특수한 정세가 누르하치의 군사적 팽창에 '호기'를 제공했다는 설명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 하지만 그런 설명이 논리적 타당성을 갖추려면, 왜란 발발 이전에 명과 조선이 여진 정책을 어떻게 구사했는지, 그것이 왜란을 계기로 어떻게 불가능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반드시 왜란 때문이었는지 등에 대해 명확한 해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명의 건주여진 견제 정책이 왜란으로 인해 어떻게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증은 의외로 별로 없다.
  앞서 간단히 언급했듯이, 조선과 건주여진의 관계는 1467년 조·명 연합군의 건주위 원정을 계기로 완전히 끊어졌다. 이런 상황은 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125년 동안 이어지던 중이었다. 외교 관계가 아예 없는데 조선이 건주여진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었겠는가? (...)
  그렇다면 이제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의 군사력이 한반도에 집결한 상황이 과연 누르하치에게 군사적 팽창의 '호기'를 제공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당시 세계 최고 전력이라는 일본군 15만, 그런 일본군에 맞서 싸운 조선군의 우수한 화력(화포·함포), 동아시아 최고 강대국인 명의 5만여 군사 등 줄잡아 20만이 훨씬 넘는 무장병력이 한반도에, 다른 말로 건주여진의 남쪽에 집결한 미증유의 상황에 접하여 누르하치는 과연 그것을 군사 팽창의 호기로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위기감을 느꼈을까? (38~39쪽.)

 

  신충일 일행을 마중할 때 누르하치는 군사적 위세를 전혀 과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달포쯤 지나 여희원의 한일 일행을 맞이할 때는 일종의 무력시위를 마치 퍼포먼스처럼 보여준 것이다. 이렇듯 방문단을 맞이하는 현격한 차이만 보아도 당시 누르하치가 조선에 대해서는 되도록 유화정책을 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을 강하게 위협할 처지도 안 되었을뿐더러 세조 때(1467) 조선군이 건주위 추장 이만주를 잡아 처형한 이래 130여 년간 끊겼던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다시 정상화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78~79쪽.)

 

  이처럼 선조는 겉으로는 양위를 거듭 거론하면서, 동시에 세자 광해군을 집요하게 궁지에 몰아넣었다. (...)
  (...) 그를 무엇보다 괴롭힌 것은 선조의 양위 소동 그 자체였다. 부왕 선조가 선위교서를 내릴 때마다 세자는 열흘이고 보름이고 식사도 거른 채 매일 땅에 엎드려 전교를 거두어달라고 읍소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왕에게는 절대적 충성을, 신료들에게는 겸양과 효성 같은 유교 덕목을 실천적으로 보여줘야 했다. 부왕 선조에게 세자를 폐위할 만한 어떤 사소한 꼬투리도 제공해서는 안 되는 살얼음판의 연속이었다. 국가비상사태를 맞아 군신 간의 합의에 따라 황급히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으로서는 그 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전쟁이라는 비상시국에 당면해 세자 광해군이 국토를 직접 누비며 보여준 분조 및 무군 활동은 조야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반면에, 왜군이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는데도 하루라도 빨리 요동으로 망명하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선조는 명 황제로부터 질책을 여러 번 받는 등 위신을 크게 잃었다. 조선에서 왕의 권위는 추락하다 못해 땅을 뚫고 지하로 들어갈 지경이었다. 전쟁과 분조를 계기로 형성된 선조와 광해군의 긴장 관계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전하였다. 세자에 대한 국왕의 견제는 갈수록 심해졌고, 그럴수록 광해군의 세자 지위도 더욱더 불안해졌다. (99~100쪽.)

 

  먼저 입후入後 문제와 관련해, 아들이 없어 친족의 조카를 양자로 들인 후에는 비로 나중에 친자가 태어나더라도 파계하지 않고 오히려 친자를 중자衆子(적자 가운데 장자를 제외한 아들)로 취급하는 경향이 16세기 후반 선조 대에 대세로 굳어지고 있었다. 이미 한 번 정한 부자의 의리를 쉽게 바꿀 수 없으니 친자를 중자로 삼는다는 판례가 쌓이던 때였다. (...)
  이런 판례들을 광해군과 영창대군의 사례에 적용해보자. (...) 요컨대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세자 광해군의 지위가 불안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근본 이유가 종법 문제에 있지는 않았다. 특히 왕실의 경우에 한번 세운 세자를 단지 종법상의 이유로 바꾼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만일 나중에 정위正位(왕비)에게서 대군이 탄생했다는 이유로 세자 지위를 뒤바꿔야 한다면, 이는 심한 국가적 혼란을 초래할 터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내에서 세자 책례 때 확정한 군신의 의리에도 심각한 문제가 되는 사안이었다. 즉, 백관이 세자 광해군에게 하례를 올린 이상 그 군신 관계는 영원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세자 광해군이 위협을 느꼈다면, 그것은 영창대군의 종법 서열이 광해군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인 문제에 기인하였다. (...)
  세자 광해군에게 드러내놓고 견제하는 선조의 태도로 국왕의 의중을 감지한 일부 신료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런 기류는 선조가 인목왕후를 계비로 맞이할 때부터 형성되었고 영창대군의 탄생을 계기로 가시화되었다. 선조도 세자 광해군을 더 심하게 홀대하며 무시하였다. 세자가 문안을 와도 선조는 문밖에서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명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했으므로 세자가 아니니 앞으로는 문안하러 오지 말라는 극언도 되풀이하였다.
  세자 광해군을 대하는 태도가 이러했음에도 선조는 정작 세자를 바꾸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안을 내리지 못하였다. 광해군을 모질게 모욕하면서도 세자를 교체하려는 구체적 시도는 없었다. (...) (104~105쪽.)

 

  광해군은 이렇듯 멀고도 험한 길을 돌아 마침내 용상에 앉았지만 세자 시절 쌓인 트라우마는 쉽게 씻기지 않았다. 그저 독서를 좋아하고 사색을 즐겼던 그는 대범하거나 과단성이 있지는 않았다. 세자로 지낸 16년 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진 정치적 혼란 속에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정작 그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전혀 없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조정의 분위기와 선조의 기분을 살피는 '눈치'뿐이었다. 이런 경험은 그를 더욱 소심하고 조심성 있는 성격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신료들을 직접 불러다 놓고 혼내면서 휘어잡는 기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즉위 후에도 광해군은 여러 복잡한 사안을 풀기 위해 신료들과 직접 일일이 만나기보다는 승정원을 통해 문서로 논쟁하고 홀로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강하였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대면 소통보다는 문자로 소통한 셈이다. 이런 정치 스타일은 타고난 성격 외에도 세자 시절의 경험이 그대로 이어진 불안감과 불신감의 결과로 보인다.
  세자 시절 그의 귓가를 맴도는 비수 같은 말은 "장자도 적자도 아니"라는 비아냥이었다. 주로 선조가 광해군을 홀대하고 모욕을 줄 때 내뱉은 언사이지만, 이 말의 의미는 네가 비록 세자의 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세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폭언과 다름없었다. 더 큰 문제는 선조가 죽으느 후에도 장자 임해군과 적자 영창대군이 여전히 살아 숩 쉬는 현실로, 광해군에게는 목구멍에 걸린 가시와 같았다. 임해군은 민심을 크게 잃기는 했어도 광해군이 즉위하던 1608년에 서른여섯 살의 장년이었다. 언제라도 왕위를 직접 노릴 수 있는 '1순위' 존재였다. 유일한 적자 영창대군은 어린아이였지만, 그저 살아 숨 쉬며 무럭무럭 자라기만 해도 그 자체로 국왕 광해군을 위협할 '0순위' 정적이었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고는 새 국왕이 안정을 찾기가 어려웠다. (106~108쪽.)

 

  (...) 조선군이 이미 요동에 들어와 있다는 한인 포로의 진술이 워낙 '핵폭탄'급인지라 후금 지도부는 여전히 믿지 못하는 태도를 보였다. 누르하치와 그 아들들은 하서국을 의심하며, 조선군이 요동에 진주해 있다는 사실을 왜 숨기냐면서 다그쳤다. 이에 대한 하서국의 답변을 직접 들어보자.
  (...)
  하서국은 지금까지 일종의 '그림자 외교관'처럼 활동했으나 외교 현장에서 주체적 결정권이 없는 향통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발언은 누구의 지시도 아닌, 자기의 독자적 판단에 따른 말이었다.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즉석에서 자기 목숨을 걸고 단호하게 조선을 대변한 셈이었다. 그의 발언 내용은 사실이기도 하지만, 특히 국왕 광해군의 생각을 후금 현지에서 그대로 대변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81~182쪽.)

 

  누르하치의 3차 국서를 들고 1620년 3월 초순에 한양에 들어온 하서국은 국왕과 비변사의 논쟁이 격화하면서 회답 방식을 결정하지 못하는 바람에 5월까지 두 달 남짓 머물렀다. 다른 기록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비변사와 국왕 모두 하서국을 직접 불러다가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일부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비변사는 하서국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후금에 자주 드나들면서 누르하치의 명령을 수행하는가 하면, 비변사와 사사건건 대립하던 국왕 광해군의 뜻을 잘 따르는 하서국의 모습이 좋게 보일 리 만무하였다. 이에 비해 광해군은 하서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를 신임하였다. 후금의 조선 침공 여부는 전적으로 누르하치의 판단에 달렸는데, 그런 누르하치를 수시로 대면하여 조선 국왕과 강홍립의 뜻을 잘 풀어 통역하는 하서국이야말로 광해군 자신의 '아바타'와도 같다고 느꼈을 테다. (186~187쪽.)

 

  (...) 후금은 조선과 정식으로 우호 관계를 체결하고 온 세상에 이를 밝히고자 하였다. 명-후금-조선의 삼각관계에서 후금이 원했던 것은 조선이 제안한 것처럼 명나라의 눈을 피해 각보지계各保之界(각자 자기 땅을 지킴)하는 정도의 은밀한 관계 유지가 아니라, 후금과 조선의 우호 관계를 국제무대에서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명의 맹방이던 조선을 후금의 우방으로 전환함으로써 배후의 위협 요인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명을 외교적·전략적으로 고립시키는 효과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금은 기회만 있으면 조선에 공개적인 맹약 체결을 요구하였다. (202쪽.)

 

  긴장을 전혀 놓을 수 없는 이런 외교 현장 허투알라에서 조선을 대표한 차관 정충신의 옆에 붙어 그림자처럼 수행한 통역관은 하서국이었다. 서신을 휴대하지 않은 채 후금을 방문한 정충신이 후금 측 참모진과 나눈 모든 대화는 하서국의 입을 통해 오갈 수밖에 없었다. 통역을 하는 하서국이 개인 의견을 주체적으로 피력할 수는 없었을지라도 그간 조선 조정의 주장이 전향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간파했을 것이다.
  조정 내 두 대립 축이 국왕과 전체 신료라는 점은 하서국도 빠르게 알아챘을 것이다. 이전부터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누르하치의 '조서'를 받은 지금 조선이 결국 어떤 태도를 보일지, 국왕과 비변사 신료들 사이의 아주 중대한 차이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어렵지 않게 간파하고 그 나름대로 이해했을 테다. 또한 얼마 전 한양에 올라가 국왕을 직접 알현하여 후금 관련 문제로 갖가지 대화를 나눴기에 국왕의 뜻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테다. (...)
  통역을 해야 하니까 했지만, 하서국도 사람인지라 눈앞에서 벌어지는 회담을 보며 내적 갈등이 없었을 리 없다. 그러나 회담 과정에 직접 개입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그런 권한도 없고, 잠시 틈을 보아 정충신에게 이런 식으로 회담에 임하면 왕명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건의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미천한 신분의 '그림자 외교관' 하서국이 지닌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아무런 현장 결정권도 없이 그저 통역만 해야 했던 하서국의 안타까운 표정과 어색한 몸가짐이 이 순간 문득 짙디 짙은 먹구름처럼 머리 위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건 단지 이 글을 쓰는 저자만의 상상일까? (205~206쪽.)

 

  이러한 점들을 두루 종합해보면, 후금의 요동 장악 이후 하서국의 이름이 각종 자료에서 뜸해지다가 결국 죽음으로 막을 내린 이유는 꽤 선명하게 드러난다. 즉, 후금의 요동 장악 이전까지는 조선과 후금 사이에 비록 긴장이 조성되었을지라도 아직은 서로 간에 타협이나 절충의 여지가 있었다. 따라서 하서국의 외교 활동도 상당히 바쁘게 이러우지면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하서국이 조선의 정식 관원도 군관도 아닌 일개 향통사 신분으로 허투알라-만포-의주-한양을 왕래하며 조선과 후금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이런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후금이 요동을 완전히 장악함에 따라 명과 조선을 잇는 육상 교통로가 끊기고, 이를 계기로 후금이 만포가 아닌 '의주를 통해 조서'를 보내면서 명나라를 제치고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 되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조선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며 이중외교를 구사할 여지는 사실상 사라졌다. 광해군과 비변사가 서로 대립하고 갈등이 절정으로 치달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렇듯, 조선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하에서는 하서국의 입지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조선과 후금이 서로 우호 관계 유지에 더 주력하던 때는 하서국도 조선과 후금을 분주히 오가며 아슬아슬하게나마 외교적 줄타기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일개 향통사인 하서국이 한양과 허투알라 사이에서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절충의 여지가 거의 사라짐에 따라 '주변인'인 하서국의 활동 폭도 점점 좁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조정은 결국 그를 외교보다는 첩보 수집 쪽으로 내몰았고, 점차 긴장이 고조되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하서국은 그만 후금에 의해 처형되고 말았다. 간첩이라는 역할을 마다하고 차라리 후금에 정식으로 망명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그는 조선국 만포에 남아있는 처자식의 얼굴들을 먼저 떠올렸으리라. (223~224쪽.)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