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그들이 있었던 곳 (정찬, 말하는나무, 2026.) 본문

2002년에 나온 『광야』를 새롭게 쓴 것입니다. 『광야』에서 밑줄 그었던 부분과 『그들이 있었던 곳』에서 밑줄 그은 곳이 꽤 비슷한 것을 보니 '광주'에 대한 제 마음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 벌의 옷에 생명의 즙이 고여 있음은, 옷을 만드는 이는 안다. 작업장에 들어가면 포르말린 냄새가 코를 찌른다. 원단 더미에서 나는 냄새다. 한여름에는 섭씨 40도를 웃돈다. 겨울에는 덧버선을 두 개씩 포개 신어도 동상에 걸린다. 그 속에서 몸이 망가진 동생은 노동의 능력을 잃고 볕 없는 방에서 홀로 투병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열여섯 살밖에 안 된 어린 처녀였다. 프레스 작업을 하는 이들은 손가락이 자주 잘린다. 철판을 강타하여 절단, 압축, 조형하는 프레스에는 안전장치가 있으나 사용주는 작업 능률을 올리기 위해 그것을 제거한다.
그 모두가 학살이었다. 다만 그 속도가 느릴 뿐이었다. 속도의 느림은 사람들을 교묘하게 마취시켜 학살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데도 학살임을 알지 못하게 했다. 그것에 비해 학살임을 명백하게 보여 주는 얼룩무늬들의 행위는 차라리 정직했다. 위장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용주들에게 신물 나게 들었던 교묘한 혀 놀림도 없었고, 번듯한 가면도 보이지 않았다. 학살의 대상으로 광주를 선택한 것 역시 정직의 발로였다. 유신 권력에 학살이 필요했다면 광주일 수밖에 없다. 사용주가 프레스의 안전장치를 제거하는 것은 노동자가 자신과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신 권력이 광주를 선택한 것도 그와 흡사했다. 전라도는 그들과 너무 다른 곳에 있었다. (55~56쪽.)
"우리에게 계엄군을 막을 힘이 없습니다. 그들은 해방광주의 시간을 탈취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결코 탈취당할 수 없는 시간이 있습니다. 진실이 만들고 있었고 앞으로도 만들 시간입니다. 진실은 인간의 혼을 가장 격동적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그 움직임이 만드는 시간은 일상의 시간과 다릅니다. 공수특전단의 무참한 폭력은 시민들에게 진실을 일깨웠습니다. 진실은 시민들의 혼을 흔들어 죽음을 넘어서는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죽음은 진실을 지키기 위한 불꽃이었습니다. 죽음을 껴안고 싸웠던 이들은 알 것입니다. 해방광주는 죽음의 혼이 켠 진실의 등불임을, 비통하게도 우리는 해방광주를 지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진실의 등불입니다. 죽음이라는 불꽃을 통해."
박태민의 눈빛이 처음으로 빛나고 있었다.
"신군부는 우리를 패배시킬 것입니다. 해방광주는 무너지고 장려했던 탑은 흔적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죽음의 노래가 만장처럼 펄럭이며 폐허의 빈터를 덮을 것입니다. 그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빈터일 뿐입니다. 승리의 군단에 철저히 짓밟힌, 하지만 황혼이 지고 어둠이 내리면 무언가 보일 것입니다. 불꽃입니다. 죽음의 불꽃 말입니다. 눈이 있는 자는 어두운 하늘을 가르는 불꽃을 볼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불꽃이자, 죽음이 지킨 진실을 불꽃입니다. 진실은 스스로의 시간을 창조합니다. 창조된 시간은 젊은 혼을 격동시킵니다. 격동된 혼은 전사의 혼입니다. 해방광주의 전사는 사라지겠지만 새로운 전사들은 역사의 시간, 그 광야를 가로지르며 진실의 불꽃을 향해 달려올 것입니다. 해방광주의 패배는 잠시의 패배입니다. 역사의 광야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박태민의 입가에 어렸다. (212~213쪽.)
전투 초기 시민군은 적극적으로 사격했다. 계엄군 특공조가 어둠에 몸을 은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둠을 향해 무작정 총을 쏜 것이었다. 방어선이 무너지고 특공조가 건물로 접근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표적의 실체가 눈에 보이자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것이었다. 시민군 가운데 총을 처음 만져본 이들이 적지 않았을 뿐 아니라, 총기 조작에 능숙한 군 제대자도 사람을 표적으로 하는 사격에 낯설었다. 한 생명을 살해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웠다. 시민군 사령관 역할을 했던 박남선조차 접근하는 계엄군을 조준까지 했으나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그들이 총을 든 것은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승리를 믿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계엄군을 죽이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들이 총을 든 것은 침몰하는 해방광주와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241~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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