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이철우 외, 푸른역사, 2020.) 본문

얼마 전 ㅎㅎㅍ의 책에 대해 제가 지적한 것들 (그거 진짜 많이 우려먹죠? 제가 그 정도로 관심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십셔 ㅋㅋㅋ) 중 하나는 식민지기에 대한 역사학의 최근 연구성과에 너무 무관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그렇다면 식민지기에 대한 역사학의 최근 연구성과를 어떻게 확인할 것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애초 기획은 『반일종족주의』에 대한 반론이었지만, 식민지기에 대한 역사학의 연구가 어느 지점에서 어느 수준까지 진척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책으로도 무척 유용합니다.
무려 18명의 저자가 참여했기 때문에 이 책이 다루는 쟁점도 그만큼 다양합니다.
먼저 황상익, 이송순, 정태헌, 박찬승, 강성현, 허영란의 글은 식민지미화론(저는 '식민지근대화론'보다는 이 단어를 더 권하고 싶습니다.)에 대한 실증적인 반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식민지민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보다는 민족간 불평등을 강화하고 내지 경제에 대한 종속성을 강화한 것에 불과했다는 주장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근거들(숫자들!)이 이들 챕터에서 제시됩니다.
강성은, 김창록, 김상규, 변은진, 조시현의 글은 구체적인 숫자와 데이터가 제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배에 관한 법적·제도적 쟁점을 중심으로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확인하고 미화론의 허구성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앞선 분류와 기본적으로 비슷한 문제의식 위에 있습니다.
미화론의 인식론적 기반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은 이철우, 박한용, 전재호, 서승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철우는 '뉴라이트'의 본격적인 부상浮上을 알렸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필진 중 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반일종족주의』 류의 식민지미화론이 역사학의 경도傾倒를 비판한다는 최초의 문제의식으로부터도 너무 크게 일탈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홍종욱, 김정인, 김헌주의 글은 제가 가장 열심히 읽은 글입니다. 한국사학계가 그간 식민지기의 역사에 대해서만큼은 민족주의적 경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도 (그 반대 극단인) 식민지미화론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균형감각이 빛을 발합니다. 이러한 균형감각이 있을 때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도 보다 성숙해질 수 있음은 물론이구요.
Ps. 이 책의 정독을 거의 끝마쳤을 즈음, 이 책에 공저자로 참여하신 이송순 선생님의 부음을 전해들었습니다.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습니다만 (달리기라는 공통분모가 있긴 했습니다. 작년 학술대회 참여차 머무르던 부산에서 권해주셨던 해운대 러닝코스는 정말 끝내줬습니다.) 누구보다 성실한 연구자이셨던 것은 물론이고 학문에서 얻은 통찰을 당신의 삶을 통해서도 구현하려고 애쓰셨던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노무현 정부 말기에 등장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운동은 복잡한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 '재인식'은 1980년대 이래 한국 근·현대사의 주류적 관점을 대표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주적으로 삼았고, 그러한 역사의식에 터 잡고 있다는 이유로 진보정치를 명시적인 타격 대상으로 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총설에 해당하는 이영훈의 첫 논문과 남북한 관계를 주제로 하는 글들이 그 점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참여한 모든 연구자들이 그러한 목적을 공유한 것은 아니었다. 다수는 역사 서술에서 가치 지향성을 배제하자는 취지에 공감했고, 사실로써 말하게 한다는 '고지식한' 실증주의를 표방하기도 했다. 일제하에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음을 주장하는 연구들도 일제를 미화하는 것이 아님을 누누이 강조하는 조심성을 보였다. 일제시대에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음을 주장한 주익종은 그러한 서술의 목적이 "일제 덕분에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한국인이 잘 살게 되었음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고 "조선인의 만족도가 높아진 것은 아니다", "주관적인 궁핍도는 더 심해졌다"고 부언했다. 일제하 공업화의 성과 및 해방 후의 연속성을 보여주고자 한 김낙년도 그것이 일제 지배를 긍정하거나 합리화하는 것과 무관함을 강조했다. 더욱이 김낙년의 연구는 양적 성장을 부각시키려는 것보다는 에커트Carter Eckert와 우정은 등의 개발국가론을 반박하는 데 주안점을 가지고 있었다.
편집위원을 대표하여 머리말을 쓴 박지향은 '인식'(《해방전후사의 인식》)을 공격의 타깃으로 삼는다는 기획 의도를 내세우면서도 필진의 다양한 동기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필자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전개하고 있고 모든 필자들이 편집위원들과 동일한 사고를 하는 것도 아님"을 명시했다. 그러나 이영훈은 그러한 조심성을 보이지 않았다. '난장자본주의론'으로써 김대중 정부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뒷받침한 그는 이 단계에서 노골적으로 노무현 정부에 대한 적대감과 냉전적 시각을 드러냈다. '인식'에 담긴 역사철학과 방법론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인식'이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지향한다고 성토하는 한편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비웃었다. 그는 "젊은 시절 한때 그 혁명에 영혼이 팔려 본" 자신이 사용했던 '사회구성체'와 같은 개념을 매도하면서 '문명'이라는 비과학적 개념을 등장시켰다. '난장자본주의론'에서 이미 선을 보인 그 개념은 이제 방법론적 '대안'으로까지 승격되었다.
(...) 필진 중 《해방전후사의 인식》에도 참여했던 이완범이 '인식'을 좌편향적이라고 규정한 편집진의 태도를 비난하고 나서기도 했다. (이철우, 「자기 부정의 역사 서술」, 20~21쪽.)
김낙년은 일견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을 문제 삼는 데 그치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으로의 미곡 이출을 수출로 표현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라는 항변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것을 빌미로 문제의 본질을 총체적인 소득 증가가 있었는가, 산업화가 이루어졌는가, 시장 통합이 일어났는가로 축소하고 있다. 민족차별이 없었음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한일관계를 주구너국가들이 만든 유럽연합EU에 비유하고 있으니 그의 시야에서 제국주의는 완벽히 소거되어 있다. 그러한 사고와 어법은 한일 과거사에 대한 주익종의 해설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은 법적으로 유효하게일본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승전국도 식민지도 아니어서 일본에 대한 아무런 배상 청구의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영훈과 함께 이승만학당을 이끌어가는 그가, 이승만이 들었다면 노발충관怒髮衝冠했을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철우, 「자기 부정의 역사 서술」, 23~24쪽.)
이영훈이 종족과 부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진짜 이유는 "문명 이전의, 야만의 상단에 놓인 종족 또는 부족"(251쪽)이라는 서술과 "원래 영어의 부족tribe이 제국주의 시기 서양 열강들이 식민지의 토착민을 낮추어 부르던 말"(21세기연구회, 《지도로 보는 세계 민족의 역사》, 25쪽)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알 수 있다. 곧 한국의 민족을 종족 또는 부족이라고 부름으로써 한국인을 "이웃을 불변의 악의 종족으로 적대하는 감정에 사로잡힌 부족, 미개한 집단심성과 정신문화를 갖고 있는 부족으로 단언하기 위해서"였다.(강성현, 〈한국 역사수정주의의 현실과 논리: '반일 종족주의 현상'을 중심으로〉, 《황해문화》 105, 137쪽). 따라서 그는 "반일 종족주의 청산을 위한 일대 문화혁명을 추진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252쪽). (전재호, 「민족주의와 반일 종족주의」, 59~60쪽.)
(...) 민족자결은 시대정신이었다. 온갖 민족은 야만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권을 추구했다. 독립운동은 굳이 말하면 '근대문명 세력'이 되고자 한 싸움이었다. 야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문명의 폭력에 맞서 몸부림이라도 쳐야 했다. 《반일 종족주의》는 야만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야만으로 몰아붙이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 (홍종욱, 「일본제국주의 식민 통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 64~65쪽.)
《반일 종족주의》에는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도 있다.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 다른 시기와 달리 유독 일본 통치기는 반일과 독립을 절대가치로 하여 서술되어 있다. 윤리적인 평가는 가능하고 또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교과서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담담하게 서술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반일 종족주의》의 물질주의, 샤머니즘 비판은 한국 사회의 아픈 곳을 정확히 찌른다. (...)
한국인의 전근대적 심성에 대한 절망과 외형적인 근대화 혹은 경제 성장에 대한 칭송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영훈이 쓰는 '근대문명 세력'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반일 종족주의》는 전형적인 계몽주의 문명사관에 서 있다. (...)
물질주의와 샤머니즘이 뿌리 깊다는 《반일 종족주의》의 설명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다만 한국 사회에 자리 잡은 부정적인 흐름 가운데 얼마간은 식민주의가 남긴 유산일지 모른다. 자기를 직시하려는 《반일 종족주의》의 시도는 무시할 수 없지만 아울러 자기 긍정도 필요하다. 재일조선인 역사학자 안병태는 "내재적 발전의 시각에 서면서도 '아시아적 특질' 및 '저지적沮止的 요인'을 중시하여 '전全 구조적 파악'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보편주의에 빠진 자본주의 맹아론을 물리치고 자기 역사를 직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안병태는 조선인의 저항이 전근대적이었다는 비판에 대해, "조선인이 '유교주의, 유교 원리에 바탕한 경직성'을 주체적으로 극복할 원리와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초래된 거침없는 '경제적 합리주의, 상황 대응적 유연성'에 저항한 결과이기도 하다는 보다 긍정적인 시각은 불가능한 것일까"라고 자기 긍정을 잃지 않았다.
문제는 민중이다. 물질주의와 샤머니즘에 젖은 민중이라도 역사를 만들어갈 주체는 그들밖에 없다. 이는 역사학은 무엇인가라는 정의의 문제다. 민중을 직시하고 또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화려한 일본의 마츠리祭り는 문명적으로 보이고, 쇠락한 우리네 성황당은 야만적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사회의 전통을 보편적 가치의 일부로 승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샤머니즘으로 멸시할 것인가야말로 제국 중심과 식민지를 가르는 지점이었다. 시인 김수영은 사회악에 맞서지 못하고 그저 조그마한 일에 분개하는 비겁한 자신에 분노했지만, 동시에 "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며 이 땅의 '무수無數한 반동反動'을 노래했다. 탈식민은 자기 직시와 자기 긍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홍종욱, 「일본제국주의 식민 통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 69~70쪽.)
(...)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전국 토지의 40퍼센트가 총독부 소유지로 수탈되었다'는 서술은 1974년부터 2003년까지의 국정 국사교과서의 문제였다. 2011년 한국사 교과서의 완전 검정제가 실시된 후 어떤 교과서에서도 이러한 서술은 하고 있지 않다. (...) (이송순, 「쌀을 팔아 다른 소비를 늘렸을 것이라고?」, 109~110쪽.)
일본에서 도입된 우량품종이 재래품종보다 생산성이 월등히 높고 그 우량품종의 보급률이 1910년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기 때문에 평균 단보당 생산량이 급증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1910년대 새로 도입된 우량품종이 한국의 재래품종에 비해 어느 정도 생산성이 높았던 것일까. 한국은 여름철의 집중호우를 제외하면 일본에 비해 건조한 지역이다. 당시 한국의 대다수 논은 천수답으로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지지 못했다. 1910년대 보급된 품종―와세신리키早神力, 고코료미야코穀良都, 타마니시키多麻錦―은 "농촌 실정을 감안하여 관개가 불량하고 비료 투입이 적은 상황에서 비교적 좋은 성적을 내는" 것으로 선정되었지만 일본의 농업 환경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품종이 한국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실제 우량품종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1914년부터 1929년까지의 단보당 생산량은 0.8석에서 1.0석 사이를 오갈 뿐 증가 추세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송순, 「쌀을 팔아 다른 소비를 늘렸을 것이라고?」, 112~113쪽.)
1920년 조선과 일본을 동일한 관세법 체제에 편입시켰고, 조선 쌀의 일본 이입세는 철폐되었다. 이제 조선 쌀은 어떠한 보호 장치도 없이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일본 시장으로 팔려나갔다. 조선의 쌀 생산량은 1917~1921년 평균 1,410만 석에서 1922~1926년 평균 1,450만 석으로 40만 석 증가하는 데 그쳤지만, 일본으로의 이출량은 같은 기간 동안 연평균 220만 석에서 434만 석으로 200만 석 이상 증가했다. 이러한 추세는 계속 확대되어 조선 쌀 생산량 대비 이출량은 24.5퍼센트(1920~1924), 32.3퍼센트(1925~1929), 44.3퍼센트(1930~1936)로 계속 증가했다. 반면 조선인 1인당 쌀 소비량은 0.71석(1915~1919)에서 0.43석(1930~1936)으로 감소했다.
한국인의 주식은 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지역별로 각종 잡곡을 섞어 먹는 게 현실이었다. 김낙년은 쌀 소비량 감소에 대해 "쌀을 대량으로 수출하다보니 귀해져서 가격이 비싸졌다. 소작농의 경우 생산한 쌀을 소작료와 그 외 불가피한 지출에 충당하고 나면 먹을 식량이 부족해 비싼 살을 팔아서 값이 싼 잡곡으로 바꾸어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잡곡의 1인당 소비량도 감소하여 1인당 전체 식량 소비량은 2.03석(1915~1919)에서 1.64석(1930~1936)으로 감소했다.
(...)
일제강점기 조선 쌀은 '수탈'된 것은 아니고 '수출'되었다는 주장은 일본이 강제성 없이 대가를 주고 조선 쌀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물론 깡패나 도둑처럼 빼앗아간 것은 아니다. (...)
식민지와 본국 간의 거래를 독립국가 간의 수출이라는 용어로 등치시키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국가 간의 무역에 필수적인 관세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없고, 시장과 정책이 모두 일본 본국의 필요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이라면 식민지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강제적' 거래에 해당하지 않을까. 이것은 전시체제기 공출이라는 시스템으로 현실화되었다. (이송순, 「쌀을 팔아 다른 소비를 늘렸을 것이라고?」, 115~117쪽.)
(...) 조선 공업화는 대공황 이후 일제의 블록경제 건설과 중국 침략 준비라는 외적 요인에 더해 피폐해진 조선 농촌에서 확대되어간 민중운동에 따른 식민 통치 위기라는 내적 요인이 맞물리면서 전개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 경제의 역할은 일제의 침략정책에 부합되도록 일본의 중공업제품을 소화하고 이에 종속적으로 부응할 수 있는 낮은 수준의 공업지대로 조정되었다. 당연히 조선 경제의 산업연관성은 고려될 수 없었다.
경제 발전이 안정적으로 지속되러면 최종 완성품 생산과 이를 뒷받침하는 각 부문의 유기적 결합이 이뤄져야 한다. 기술 집약도가 낮은 부품만 생산하여 외국에 공급하는 하청경제와, 산업 연관 속에서 완제품을 생산하는 경제구조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산업연관성과 주도적 완결성이 없는 경제는 외부 환경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물론 조선 공업화로 공업 생산액을 증가했다. 1918~1940년에 농업(1.7배)에 비해 광업(21.1배), 공업(8.4배) 증가율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전체 산업 생산에서 농림수산업 비중(90퍼센트→64퍼센트)이 격감하고 광공업 비중(10퍼센트→36퍼센트)이 상승하여 1911~40년 1인당 생산 증가율은 매년 2.3퍼센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본에서 자본재 이입→조선에서 원재료와 중간제품의 가공·생산→일본으로 이출'하는 구조가 고착되었다. 1920년대와 1940년대의 공업제품 구성 변화를 비교하면 식료품 비중(38퍼센트→24퍼센트), 생활재 비중(50퍼센트→25퍼센트)이 모두 감소했다. 반대로 생산재는 급증(9.5퍼센트→44퍼센트)했다. 1918~1940년에 일본으로 이출된 생산재는 100배 이상 폭증(300만 엔→3억 6,000만 엔)했다. 공업제품 이출액 가운데 생산재 비중은 62퍼센트에 이르렀다. 반면에 공장 운영에 필수적인 설비·기계·도구와 같은 자본재 비율은 1940년대에도 4.2퍼센트에 불과했다. 실제로 기계의 이입 의존도는 1940년 75퍼센트나 되었다. (정태헌, 「조선 공업화는 한반도 경제에 무엇을 남겼나」, 122~123쪽.)
조선인 자본의 지위는 어떠했을까? 1920~1940년 회사의 납입 자본액은 10배 가까이(1억 8,000만여 엔→16억여 엔) 증가했다. 전체의 80퍼센트를 점하는 광공업 회사의 자본액이 급증(3,000만여 엔→11억여 엔)했기 때문이다. 1926~1939년 공업 생산액도 급증(5억여 엔→18억여 엔)했다. 그러나 회사 납입 자본액에서 조선인 자본의 비중은 10퍼센트 남짓에 불과했고 그나마 1941년에 8.5퍼센트로, 해방 당시에는 7.4퍼센트로 더 떨어졌다. 즉 조선 공업화를 주도한 일본 자본과 달리 조선인 자본은 영세한 주변적 존재에 머물러 있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조선인 공장 수가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인 공장 수를 능가하고 조선인 회사 수도 빠르게 증가하여 일본인 공장과의 격차가 좁혀져 조선인도 조선 공업화의 혜택을 입었고 이 경험이 해방 후 산업화의 자양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조선인은 어떤 업종에 진출했을까? 1939년 공장(가내수공업 제외) 생산액을 보면 정미업(41.8퍼센트)이 압도적이었고 그다음이 양조업(11.8퍼센트), 동물 유지 제조업(9.5퍼센트)이었다. 이 3개 업종이 63.1퍼센트를 차지했다. 이 중 경화유 공장에 판매되어 유지 공업 원료로 사용하는 동물 유지 제조업 생산물을 제외하면 정미업과 양조업은 전통적 소비재 업종이었다. 자본, 기술, 노동력이 필수적인 중화학 공업과의 산업 연관은 없었다. 조선인 자본은 조선인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노동집약적 틈새 부문에서 영세기업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정태헌, 「조선 공업화는 한반도 경제에 무엇을 남겼나」, 124~125쪽.)
공업 생산이 증가할수록 자본재 등 핵심 소재와 부품의 일본 의존도가 커지는 식민지 산업구조는 일제의 패전으로 종속적 분업관계가 무너지자 바로 파탄에 빠졌다. 1946년 광공업 공장의 조업률은 5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오래된 설비가 고장이 나 교체하려 해도 국내에서 부품을 구할 수 없는 탓이었다. 해방 전후(1944년 6월과 1946년 11월) 남한의 공장과 노동자 수를 비교하면 모두 격감(-40.9퍼센트, -52.4퍼센트)했다. 산업별 생산지수(1940년=100)도 해방 직후인 1946년, 1947년, 1948년에 광업(1.4, 17.8, 25.6), 제조업(25.8, 28.4, 37.1), 전기업(25.7, 31.6, 55.9) 모두 격감했다. 농업 역시 1948년(86.1)까지 격감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조차 1946년에 해방 전의 정점이었던 1941년의 43.5퍼센트로 생산이 축소된 데다가 한국전쟁으로 또 하락했고 1969년이 되어서야 1941년 수준을 회복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해방 후 경제 재건에서 일제하 기업 경험의 역할도 제한적이었다. 1930년에 존재한 공장 가운데 1938년까지 존속한 것과, 1938년에 존재한 공장 가운데 1949년까지 존재한 것을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전자는 22.8퍼센트, 후자는 6.8퍼센트에 불과했다. (...)
앙구스 메디슨의 역사적 통계는 지나치게 확대 추계된 점이 있지만 일반적 추이를 파악하는 데 유효하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도 종종 활용하는 이 통계에 따르면 조선의 1인당 국내 총생산은 1911년(777달러)을 지나 1937년(1,482달러)에 정점을 찍은 후 감소 추세로 반전되어 1945년(616달러)에는 일제시기 이전으로 회귀된 모습을 보였다. 해방과 더불어 조선 공업화의 기반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의 하나로 전락해 있었다. (정태헌, 「조선 공업화는 한반도 경제에 무엇을 남겼나」, 126~127쪽.)
(...) 1931년에 조선인 아동을 위한 보통학교는 1,701개교, 일본인 아동을 위한 소학교는 465개교였는데, 인구 비례로 보면 조선인 1만 1,952명당 1개교, 일본인 1,137명당 1개교였다. 조선인 학생은 48만 7,000여 명, 일본인 학생은 6만 7,000여 명으로, 이는 조선인 인구 42명당 1명, 일본인 인구 7.8명당 1명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또 학령 아동 취학률은 조선인 아동은 19.9퍼센트, 일본인 아동은 99퍼센트였다. 일본인 아동들은 사실상 의무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조선인 아동들은 5분의 1 정도만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나타난 것은 조선인 아동들을 위한 보통학교가 그만큼 부족했기 때문이다. 3면 1교, 1면 1교제로 학교 수가 상당히 늘어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학교가 부족했던 것이다.
(...) 1920년대 이후 보통학교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보통학교 졸업자 수도 그 상승폭이 완만하나마 꾸준히 늘어났다. (...) 1920년대 고등보통학교의 숫자는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1920년 보통학교가 641개교이던 것이 1935년 2,274개교로 늘어난데 반해 고등보통학교는 1920년 23개교에서 1935년 45개교로 늘어나는 데에 그쳤던 것이다. 특히 공립 고등보통학교의 숫자가 192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간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보통학교 졸업생들의 고등보통학교 진학률도 크게 낮아졌다. 1920년 28.6퍼센트, 1923년 18.6퍼센트, 1926년 10.0퍼센트, 1930년 8.1퍼센트, 1935년 5.8퍼센트로 진학률이 낮아진 것이다.
(...) 1931년에 조선인 고등보통학교와 일본인 중학교의 숫자는 거의 비슷하였다. 이는 인구 비례로 보면, 조선인 60만여 명에 1개교, 일본인 1만 4,000여 명에 1개교가 된다. 학생들의 숫자도 1만 6,503명, 1만 3,498명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이는 인구 비례로 보면, 조선인의 경우 1,239명당 학생 1명, 일본인의 경우 39명당 학생 1명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 경성제대 학생 수는 조선인이 342명, 일본인이 756명으로 일본인이 훨씬 많았다. 즉, 경성제대는 조선인 학생들보다는 일본인 학생들을 위해 개설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문학교 및 대학의 학생 수는 조선인이 1,534명, 일본인이 1,923명으로, 조선인의 경우 인구 1만 3,322명당 1명, 일본인의 경우 인구 275명당 1명에 해당하였다. (...) (박찬승, 「한마디로 '교육 억제' 정책이었다」, 134~137쪽.)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 이후에도 조선인으로 하여금 일본어를 깨우칠 수 있는 정도의 보통학교 중심의 교육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조선인들을 위한 고등보통학교와 같은 중등교육, 전문학교와 대학과 같은 고등교육은 별로 필요하지 않다는 인식을 작고 있었다. 따라서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의 개설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여전히 조선인을 식민지민으로서 차별대우를 하고 있었다. (박찬승, 「한마디로 '교육 억제' 정책이었다」, 137쪽.)
"큰 돈을 버는 매춘부"라는 주장은 사실 이영훈이 처음 주장한 게 아니다. 일본 극우 역사부정론자는 일찍부터 군'위안부'의 수입이 장군이나 장교보다 좋았다고 주장해왔다. 그들을 따라 이영훈도 문옥주 할머니의 군사우편저금의 액수를 사례로 "오늘날의 가치" 운운하면서 '위안부'의 수입이 거액이었다는 이미지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예컨대 문옥주의 경우 1945년 9월까지 총 2만 6,551엔을 저금했는데, 그게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8억 3,000만 원이라는 식이다. 그녀가 악어가죽 가방, 고급 녹색 레인코트, 다이아몬드를 샀다고 강조하기도 한다(324쪽). 그러나 이건 당시 '위안부'의 화폐 수입이 가지는 가치의 허상을 숨긴 기만적인 거짓 주장이다.
문옥주의 저금액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녀는 1943년 3월 6일 500엔부터 시작했다. 그 후 각각 수백 엔 단위로 총 10차례 저금했고, 1944년 8월 통장을 잃어버렸다가 1945년 4월 4일부터 5,560엔으로 재개했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4월 26일에 5,000엔, 5월 23일에는 만 엔, 9월 23일에는 300엔을 저금했다. 다시 말해 종전 직전인 4월과 5월에만 2만 560엔이다. 버마에서 모은 이 돈은 도쿄의 엔화 가치로 환산해보면 얼마일까? 1945년 6월 기준으로 도쿄 물가지수는 152였고, 랑군은 30,629였다(1941년 12월을 100으로 함). 고바야시 히데오 교수의 '대동아공영권'의 물가지수 자료 계산에 따르면, 문옥주의 2만 560엔은 도쿄에서는 102엔의 가치에 불과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도쿄의 물가는 1.5배 상승하는 것에 그쳤지만, 버마는 1,800배까지 올랐다. 버마는 도쿄보다 1,200배나 높은 상승률의 인플레였다. 다시 말해 문옥주의 저금은 전혀 가치가 없는 돈('군표')을 모은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동남아 지역의 인플레가 격증하자 일본 정부는 송금액을 제한했고, 강제 현지 예금제도, 조정금 징수제도, 예금 동결 조치 등을 도입해 동남아의 인플레가 일본과 조선으로 파급되지 않도록 했다. 경제사가인 이영훈이 전시 하이퍼인플레 맥락과 이러한 사정을 모를 리 없다. (...)
노래를 잘 불러 인기가 있었던 문옥주는 일본의 패전이 임박한 랑군에서 많은 연회에 불려가 노래를 불렀고 큰 액수의 팁을 많이 받았다 한다. 군표를 갖고 있어도 거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장교들이 팁으로 준 것이다. 그녀도 그 돈을 쓸 곳이 딱히 없기 때문에 적므을 했을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랑군 시장에는 보석가게가 있었고 루비나 비취가 아주 쌌다고 한다. 그녀는 하나 정도는 갖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큰마음 먹고 다이아몬드를 하나 샀고 사이공의 중국 시장에서 악어가죽 핸드백과 구두를 샀다고 회고했는데, 이영훈이나 일본 극우 역사부정론자는 '위안부'의 고수익 주장을 정해놓고 그녀의 회고를 파편화시키고 선별해 착취하듯이 배치했다. (강성현, 「일본군'위안부'가 돈 잘 버는 '매춘부'였다고?」, 171~173쪽.)
일각에서 "구역질나는 책"이라는 반응이 터져나왔다. 《반일 종족주의》야말로 거짓과 망언으로 가득한 책이고 이영훈은 친일파 거짓말쟁이라는 성토가 쏟아졌다. 그런 책에 동조하는학자, 정치인, 기자 등을 향해 "부역·매국 친일파"라는 날선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빞나은 탈진실post-truth 현상―사실의 진위와 상관없이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현상―을 차단하기는커녕 더 휘말려 들어가게 할 뿐이다. 이영훈은 NHK와의 인터뷰에서 이 "공격"에 대해 "그럼 너는 반일 종족주의자"라는 반격이 가능해진 것을 바람직한 변화로 거론했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들을 박해받는 피해자로 위치시키고 있다. 이걸 두고 피해자 코스프레한다며 비웃고 넘기거나 무관심하면 안 된다. 거짓을 발화하는 이영훈의 위치, 《반일 종족주의》 책이 놓인 배경과 맥락을 드러내고 그런 거짓 주장을 상대화하는 방향으로 적극적인 논쟁을 시작하면서 그 정체의 민낯을 까발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는 반일 종족주의 프레임으로 각색된 이영훈'들'의 시각과 인식, 주장의 재생산을 우파 간 트랜스내셔널한 연대와 네트워킹 현상의 관점에서 세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반일 종족주의 시각과 프레임으로 선별되고 착취 왜곡된 역사자료에 대해, 생산 맥락을 고려해가며 말을 걸고 자료가 들려주는 풍부하고 맥락적인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영훈이 절취하고 왜곡 찬탈한 '위안부' 피해자의 다성적인 목소리를 마주하고 응답해야 한다.
군'위안부' 문제는 일본군'위안부'의 역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악의적인 의도와 비틀린 주장으로 가득한 이영훈의 "우리 안의 위안부"론을 뒤로하고, 우리는 포스트식민과 냉전·분단국가 및 사회와 그 일상에서 군'위안부' 문제가 어떻게 계속되었는지, '위안부' 피해자들이 이중 삼중의 억압을 뚫고 운동을 통해 어떻게 스스로 주체가 되었는지를 풍부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런 시도와 결과가 켜켜이 쌓여갈 때, 《반일 종족주의》라는 '백래시'를 통해 펼쳐지는 부정과 혐오에 반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마련될 것이다. (강성현, 「일본군'위안부'가 돈 잘 버는 '매춘부'였다고?」, 173~174쪽.)
필자는 2013년에 《파시즘적 근대 체험과 조선 민중의 현실인식》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전시 파시즘기 민중 경험이 8·15 이후 대중 의식에 미친 영향―'전체주의적' 민족의식의 근대적 기원〉이라는 글로 맺음말을 대신한 적이 었다. 여기서 굳이 '전체주의적 민족의식의 기원'이라 하지 않고 '근대적 기원'이라고 한 이유는, 《반일 종족주의》의 주장처럼 조선 후기까지 한국인의 심성에서도 전체주의적 연원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연구자로서의 조심성 때문이었다.
필자의 책의 주된 결론 가운데 하나는, 전시체제기에 '비국민'으로 낙인찍히면서까지 반일 저항을 모색했던 청년세대는 물론 일제강점 이후 태어나 교육받은 이들의 의식세계에는 일정하게 전체주의적 성격이 내재해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식민지+전쟁+파시즘'이 중첩된 당대에 이들의 행위는 반일 민족운동으로 평가될 수 있어도, 반일의 대상이 사라진 8·15 이후 상황에서는 오히려 내재된 전체주의적 성격이 급속도로 발현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반일 종족주의》가 '삼국통일, 토지 기맥론, 유교적 사생관'의 변형을 통해 오늘날 한국인의 민족주의, 즉 '반일 종족주의'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기에는, 일제강점기 특히 전시체제기의 너무나 중요한 매개고리를 누락시킨 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주장을 펼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변은진, 「왜 항일 독립운동을 언급하지 않는가」, 179쪽.)
(...) 이영훈과 김낙년은 통계수치에 대한 현상적 분석을 중심으로 교과서의 식민지 수탈론을 비판한다. (...) 박찬승(〈식민지 근대화론에 매몰된 식민지 시기 서술〉,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은 식민지 근대화론이 식민지기 역사가 한국인이라는 주체가 소외되고 배제된 역사라는 점을 소홀히 여긴다고 지적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통계를 바탕으로 한 현상적 분석에 매몰되면서 한국인이라는 주체의 관점에서 식민지기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 시각에서 보면 토지조사사업이 한국인의 정부인 대한제국의 양전지계사업을 계승한 측면이 강조되어야 하며 산미증식계획에서는 당시 농민의 치열한 수리조합 반대투쟁, 즉 한국인의 주체적 대응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서는 당시 한국 경제가 사실상 일본인에게 장악된 이상 한반도의 경제성장률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되물었다. 양자 간의 핵심 쟁점인 수탈성에 대해서는 일본인과 한국인 지주가 조선총독부 권력의 강력한 뒷받침 아래 소작인으로부터 고율의 소작료를 거두어들이는 것도 수탈에 해당한다고 해석한다. 유통과정보다는 생산과정에서의 수탈에 더 주목한 것이 식민지 수탈론이라는 얘기다.
뉴라이트의 교과서 비판과 역사학계의 《대안 교과서》 비판은 각자가 식민지기를 바라보는 관점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통계적 실증에 기반한 현상적 분석과 함께 일국을 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라는 관점에서 구성한 역사와 한국인이라는 주체가 식민 지배에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초점을 맞춰 구성한 역사가 '근대화'와 '수탈'이라는 두 가지 프리즘을 생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김정인, 「교과서와 역사 사이」, 220~221쪽.)
(...) 식민지 근대화론의 실증에 입각한 연구성과들은 식민지기를 바라보는 역사학의 시선에 변화를 가져왔다. 정연태(《한국 근대와 식민지 근대화 논쟁》)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전근대사와 근대사, 근대사와 동시대사를 거시적·계량적으로 분석하거나 식민정책과 식민지의 비교 연구로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정책 및 한국 사회 변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평가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객관화하고 세련화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식민지 수탈론에서는 일제 수탈과 민족 저항이라는 자명한 전제에 너무 쉽게 안주한 나머지 수탈의 실상을 생생히 밝히는 데 매우 소홀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래서 종전까지 수탈정책의 대명사였던 토지조사사업조차 논란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학의 태도는 식민지 수탈론이 한국 사회의 민족자존의식과 반일주의 정서에 기초해 30, 40년간 지배 담론의 지위를 누리면서 교과서와 대중역사서에 반영되는 현실에 기댄 결과임을 되짚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역사학계의 성찰은 한국인도 주체로서 수탈당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응해 자기 발전을 도모했다는 인식에까지 이르게 된다. 문영주(〈'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식민지기 경제의 양적 성장을 실증하고 한국인의 적응이 있었음을 보여주었으며 근대적 경제재도가 해방 전후에 연속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한 점을 평가했다. 또한 역사학이 '한국인'이라는 주체에만 집착할 경우 세계사적으로 서구적 근대의 충격과 이의 수용을 통해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한 부분으로 성립된 식민지 자본주의의 역사성을 간과할 가능성이 있음을 우려했다.
(...)
역사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성찰적 접근이 여전히 교과서에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더 난감하다. 물론 이영훈이 주장하는 40퍼센트설은 이제 어느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식민지 수탈론이라는 시각을 전제한 내용은 여전히 교과서를 지배하고 있다. (...) (김정인, 「교과서와 역사 사이」, 222~223쪽.)
요컨대 한국사 연구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적인 관점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2000년대 전후로 이러한 흐름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면서 다양한 결들의 연구성과가 제출되었고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를 탈구축하자는 논의가 활발하였다.
저자들 역시 이러한 연구성과를 섭렵한 점은 참고문헌 등에서 드러난다. 참고문헌에 없었더라도 이 연구들의 존재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한국사 연구의 성과와 동향을 도외시하고, '반일 종족주의'로 귀결시켰다. 한국사학계를 비난하기 위한 의도적인 누락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비학문적인 태도이다. (김헌주, 「'반일 종족주의 사태'와 한국사 연구의 탈식민 과제」, 236쪽.)
(...) 《반일》은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지만, 대중적 폭발력을 가졌다. 이러한 폭발력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반일》의 폭발력을 언급할 때 한일 극우 혹은 역사수정주의 세력의 동맹이라고만 해석하는 것은 사태의 다른 측면을 간과할 수 있다고 본다. 비록 《반일》에서 '종족주의'라고 거칠게 비판했지만, 그릇된 반일 민족주의 신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좀 더 정교하고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예컨대 《반일》에서도 지적했던 조선총독부 말뚝 설치 주장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비판된 바 있다. 또한 일제의 강제 병합 초기에 조선총독부가 단군 고서를 비롯한 51종 20만 권의 서적을 압수하여 비밀리에 소각했다는 '신화' 또한 선행 연구에 의해 극복되었다. (...)
아울러 낙랑군 재요서설 등으로 대표되는 대고조선론을 굳건하게 믿는 쇼비니스트의 활동도 중요하다. 해방 이후 다양한 연구들에 의해 입증된 학설을 무시하고 '식민사학'의 딱지만 붙이는 방식의 활동에 대해서는 많은 빞나이 이루어졌다. 이들이 정계와 언론계 등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상이 해방 이후 한국사 연구 및 교육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반일》은 그 지점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파고들었는데, 학문적으로는 극복되고 있지만 여전히 잔존해 있는 '신화'들을 고발하는 전략으로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반일 종족주의' 여파를 무시 일변도로 대응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혹은 다시금 식민지 반봉건사회론과 '원시적 수탈론'을 소환하는 것 또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탈식민의 지향이다. 극단적인 반일 신화와 인종주의적인 자민족 혐오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김헌주, 「'반일 종족주의 사태'와 한국사 연구의 탈식민 과제」, 239~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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