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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김정인, 책과함께, 201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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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김정인, 책과함께, 2015.)

Dog君 2025. 6. 2. 13:44

 

  모든 학문이 다 그러하듯 역사학 역시 전문화와 세분화의 정도가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연구가 깊어지는 거야 좋은 일입니다만 그러다보니 역사 전체를 일관된 서사narrative로 구성하는 경우는 의외로 찾기가 어려워지기도 했습니다. 시중에서 인기있는 『총, 균, 쇠』나 『사피엔스』 같은 책들이 일관된 서사로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정리하는 것과는 좀 다르지요. 그런 와중에 최근 들어 경제사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 혹은 한국사 전체를 아우른 책을 몇 권 읽으면서, 경제 말고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아우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추측에 정확히 부합하는 책이 바로 김정인의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입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는 김정인의 '민주주의 한국사' 3부작의 첫 번째입니다. 이 시리즈는 이 책에 이어 2017년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식민지기)를 거쳐 2025년에 『모두의 민주주의』(해방 이후)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첫 권으로 2015년에 나온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는 1801년(공노비 해방)부터 1919년(3.1운동)에 이르는 '장기 19세기'를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로 재구성한 결과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인민, 자치, 정의, 문명, 도시, 권리, 독립의 7개 개념을 중심으로 내용을 배열하여 이들이 어떻게 발아하고 뿌리내렸는지를 따라갑니다.

 

  이들 과정을 찬찬히 따라가다보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서구로부터 외삽된 것만도 아니고 내부로부터 발아한 것만도 아닌, 내재적 요인과 외재적 요인이 서로 경합하고 스며들면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분제와 봉건제의 전근대적인 질곡을 부수고/부서지고 다양한 방향으로부터의 모색이 서로 만난 끝에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한국근현대사의 서사가 완성되는 셈입니다. 

 

  저는 이렇게 한국근현대사를 하나의 서사로 꿸 수 있다는 것이 일단 놀라웠습니다. 저도 대학에서 한국근현대사를 가르치면서 저 나름의 서사를 만들기는 했습니다. 저는 한국의 근현대사가, 하나하나의 인간이 독립적이고 존엄한 존재이자 주권의 담지자임을 자각하고 자유로운 의지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해서 수강생들 각각이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이자 새로운 세상을 만들 주체임을 알게끔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희망이 얼마나 달성되었는지는 매 학기 의문이지요. ㅠㅠ

 

  그러한 제 서사에, 어쩌면 이 책이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그간 근현대사 서술을 주름잡았던) '민중'이나 '민족'과는 다른, '민주'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때마침 (물론 간행 시기를 고려하면 한참 늦었습니다만...) 만날 수 있어서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식민지기와 해방 이후를 다룬 다음 두 권까지 마저 읽으면 화룡점정이겠지요. 어서 읽고 다음 감상도 어서 올리겠습니다.

 

  오늘의 한국인을 아우르는 통합적 가치는 민족주의도, 민중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이 둘은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보수/우'와 '진보/좌'로 전선을 가르는 분열적 가치로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 가치로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차지하던 이데올로기적 위상을 보는 듯하다. 정치에서 일상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가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이제 민주주의는 보편적 가치가 되었다. 역사학자로서 묻지 않을 수 없다. 4·19혁명부터 5·18민주화운동을 거쳐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희생을 마다않고 민주화를 이룬 역사적 동력은 과연 어떤 경로를 거쳐 축적된 것일까?
  그럼에도 민주주의의 틀로 역사를 들여다보는 풍토가 역사학계에는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민족주의적·민중주의적 시각이 더 앞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는 외부에서 수입된 제도'라는 오리엔탈리즘적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어떻게 탄생하고 변화했는가"라는 민주주의의 역사성을 역사학계는 따져본 적이 없다. 자본주의의 궤적은 궁구했으나, 민주주의의 역사는 홀대했다. 자본주의의 맹아에 대해서는 논쟁했으나, 민주주의의 기원은 돌아보지 않았다. (7쪽.)

 

  조선 정부의 혹독하고 유례없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의 교세는 날로 성장했다. 1795년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할 당시 조선의 천주교인은 4000여 명 정도였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병인박해(1866) 무렵에 는 2만 명을 넘어섰다. 이렇게 사람들이 희생을 무릅쓰고 천주교를 믿은 이유는 무엇일까? (...) 역사학의 안목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주교를 믿었던 인민이 꿈꾸던 세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내세가 아닌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랐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은 곧 '천주교는 왜 박해를 받았을까?'라는 질문과 상통한다.
  답은 명확하다. 천주교의 인간관이 성리학적 신분 질서와 다르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으며, 곧 하느님에 버금가는 존재이므로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을 사는 귀한 존재라고도 가르쳤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이 만든, 인격을 가진 존엄한 존재이니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사람은 누구나 평등한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천주교 교리를 따른다는 것은 사실상 신분제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
  평등한 인간관에 바탕을 둔 천주교의 가족관 역시 성리학적 수직 질서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추구했다. 천주교에서는 부모와 자녀도 서로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평등한 관계라고 가르쳤다. 즉 자식은 부모를 존경하고 순종해야 하며, 부모는 자녀를 부양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부모는 자녀를 너무 엄격하게 다루거나 자식에게 지나치게 분노해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말라고 했다. 자식의 동의 없이 결혼을 시키거나 며느리를 구박하는 일도 엄격히 금했다. 천주교는 부모와 자식 관계는 물론 부부 관계도 평등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부부는 서로 신뢰해야 하며, 일부일처제를 지키고 축첩을 금할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남성이 천주교인이 되려면 우선 첩을 내보내야 했다. 축첩생활을 계속할 경우 천주교인 자격을 박탈당했다. 남편은 또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거나 딸만 낳더라도 아내를 탓하지 말고 집안의 괴로움을 함께 나누어야 하며, 폭언과 폭력을 금하도록 했다. 아내를 보호하고 관용으로 대하는 것이 남편의 의무라고 가르쳤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는 수평적이고 쌍무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은, 성리학의 신분 차별과 수직적 인간관계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반체제적이었다. (...)
  천주교의 결혼관 역시 혁명적이었다. 부모라도 자식에게 강제 결혼을 시켜서는 안 되며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할 것을 가르쳤다.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딸을 시집보내는 일도 금지시켰다. 과부의 재혼에 대해서는 적극 지지했다. 이 같은 결혼관은 시대를 매우 앞서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교인끼리 결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
  이처럼 19세기에 신분제가 해체되고 만민평등의 인민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천주교의 평등적 사회관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반면 조선 정부에게 평등한 개인과 사회의 존재를 일깨우는 천주교는 이단이고 반역일 뿐이었다. (...)
  천주교인이 된다는 것은 유교 통치와 사회 질서를 거스러는 반역 행위로, 농민봉기 못지않게 불온한 일이었다. 그것이 천주교를 박해한 이유였다. (67~70쪽.)

 

  (...) 동학농민군의 여섯 가지 개혁안에 등장하는 내용은 대부분 경제 정의 문제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동학농민군이 주장한 개혁안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 오지영의 '폐정 개혁한 12개조'의 혁신성이 매몰되어 이를 제외한 대부분 개혁안의 내용이 경제 정의 실현에 관한 것임을 간과한 것은 문제라 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동학농민군이 1862년 농민항쟁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은 경제 정의 문제를 강도 높게 제기했다는 것이다. (...) (154~155쪽.)

 

  1893년에 선교사로 건너온 무스(J. R. Moose)는 기독교가 조선을 어두운 과거로부터 해방시켜 더 맑고 나은 시대로 이끌어가고 있다고 단언했다. 시골 마을마다 교회가 들어서면서 술고래가 맑은 정신으로 살게 되었고, 투전꾼은 도박을 끊고 성실한 일꾼이 되었다. 매일 싸우기만 하던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돕겠다고 서약했다. 도둑은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고 훔친 물건을 돌려주거나 돈으로 갚았고, 살인한 사람은 관청에 찾아가서 자수를 했다. 이처럼 놀라운 일상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기독교라고 했다. 무스는 기독교가 마을 사람들의 삶에 불어넣는 힘이 바로 조선의 미래를 열어가는 열쇠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그는 기독교를 통한 문명화의 가능성을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조선의 시골 마을들을 완전히 기독교화하라. 그러면 조선인들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미래가 보장될 것이다. 누가 정치권력을 잡든지 간에 말이다."
  서양인의 눈에 조선과 대한제국 지배층의 폐쇄성은 이슬람 국가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인민은 달랐다. 천주교를 받아들일 때처럼 기독교의 전래에 배타적이지 않았다. 이는 일본인이나 중국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중국에는 많은 수의 선교사가 활동했지만, 기독교를 서양 열강의 앞잡이라며 거부감을 보이는 일이 많았다. 일본에서는 주로 지식인과 학생들이 서양 문명에 대한 관심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일이 많아 인민 속에 기독교가 널리 확산되지 못했다. 1910년 무렵에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한국의 기독교인 수가 더 많았다. 그러니 복음의 전도사이자 문명의 사도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 땅을 찾은 서양 선교사들에게 한국의 인민은 문명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하는 '깨어 있는 민족'이었다. (178~179쪽.)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되었다. 지금은 이날을 신문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왜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가 창간된 1883년 10월 1일이 아닌 《독립신문》이 창간된 날을 기념하는가. 《독립신문》을 창간한 주역은 서재필이고, 《한성순보》를 구상한 사람은 박영효다. 두 사람은 모두 급진개화파로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다. 《한성순보》는 근대 개혁을 추진하던 정부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의 박문국이 제작했던 순한문의 정부 기관지로서 갑신정변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반면에 《독립신문》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래의 사회 변화와 인민의 성장을 바탕으로 탄생한 신문이었다. 인민을 계몽하고 인민을 대변하고자 한 순한글 신문이었다. 한글로 기사를 작성하고 상업 광고를 게재했으며 시골에 사는 범부와 아낙까지 독자로 여기는 신문은 《독립신문》이 처음이었다. (188쪽.)

 

  소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늘어난다는 것은 서구 문명, 즉 문명을 삶으로 체화하는 인민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학교에서 배우는 문명의 가치와 소학교의 일상을 통해 익히는 문명의 삶은 인민에게 시민성을 깨우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했다. 학교라는 공동체에서 학생들은 "물품을 파괴하거나 더럽히고 망가뜨리는 일을 삼가고, 약속한 시간을 반드시 지키며, 서로의 역할과 책임을 나누고, 또한 각자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는 공민(公民)", 즉 시민으로 자라났다. (216~217쪽.)

 

  (...)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몰려들면서 서울은 급속히 성장했다. 18세기 서울은 3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사는 도시로 발전했다. 거리를 정비하면서 경관도 날로 바뀌어갔다. 도로와 다리를 수리하고, 청계천 지류에서 흙을 퍼내는 준설 작업이 이루어졌다. 1760년에 두 달에 걸쳐 준설 작업을 하는 데 쌀 2300석과 돈 3만 5000여 냥이 들었다. 연인원 15만 명의 서울 시민이 동원되었고, 5만 명가량의 노동자가 고용되었다. 청계천의 다리들도 차례대로 돌다리로 교체되었다.
  시장도 날로 커져갔다. 18세기 말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은 "지금 종로의 북쪽 거리가 조금 협소하여 더 넓혀야 한다. 상인들을 동원하여 자기 상점 간판을 내걸게 하고 동대문에서 남대문 사이의 상점들을 새롭게 바꿔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실제로 거리 정비와 함께 시장의 모습도 달라졌다. 허가 상인들이 장사하는 종로의 시전거리와, 무허가 상인들이 장사하는 시장인 이현(동대문 안 광장시장 근처)과 칠패(남대문과 서소문 사이)가 서울의 3대 시장으로 성장했다. 이제 서울은 명실상부한 전국적 시장권의 중심이자 국제 교역의 도시가 되었다. (...) (224~225쪽.)

 

  (...) 만민공동회는 만민이 공동으로 모여 국정을 토론하고 결정하는 공론장이 되었다. 김덕구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른 것은 평범한 인물이 만민공동회의 상징으로 등장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구두 수선공이던 김덕구는 11월 21일에 만민공동회 집회에 참가했다가 황국협회의 습격으로 사망했다. 만민공동회는 그가 평범한 시민으로서 애국과 충의를 실천하다 순국한 의사(義士)라고 추앙하며 사회장을 추진했다. 12월 1일에 수많은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운구 행렬이 종로를 거쳐 남대문에 도착했다. 상여 뒤로는 수많은 만장과 수천 명의 인민이 따랐다. (...)
  겨울의 초입에서 찬비와 추위를 무릅쓰고 철야농성을 불사하던 만민공동회는 결국 정부의 폭력적인 진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하지만 조직적인 지도부 없이 인민의 자발성에 의거하여 몇 달 동안이나 집회와 시위를 지속했다는 점, 그리고 이로써 전국에서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내는 연대의 전통이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만민공동회는커다란 성과를 남겼다.
  만민공동회는 농촌에서 주로 농민들이 이끌었던 집회나 시위와 달리, 도시라는 공간에서 상인, 학생 등이 주도하는 새로운 양상의 집회이자 시위였다. 특히 정부 각료가 참여한 관민공동회는 인민의 집회에 정부 각료를 입회하도록 하여 안건을 결의하고 각료들의 서명을 받아 황제에게 재가를 요구한, 직접 민주주의의 형태를 띤 민회였다. (263~264쪽.)

 

  서양에서 등장한 천부인권론에 따르면 모든 인ㄴ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자신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에 대해 하느님이 준 권리, 즉 '자연권'을 가진다. 자기 보존의 권리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며, 이를 위해 인간은 누구나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권리를 천부적으로 갖고 있다.
  갑신정변 때 발표된 〈혁신정강〉 제2조에는 인민평등지권, 즉 인민 평등의 권리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조선 정부는 나라를 뒤집는 반역의 주장이라 배척했지만, 인민들에게는 세상의 변화를 실감하게 하는 의미심장한 징후였다. 비록 소수에 불과하지만 권력 안에서 인민 평등을 천명한 세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의 주모자로서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는 고종에게 올린 〈건백서〉에서 '통의(通義)'라는 개념을 써서 인민의 자유는 하늘이 내려준 권리, 즉 천부인권이라 주장했다.
  (...)
  권리 개념의 대중화는 곧 권리의 자각과 통한다. 권리의 자각은 '나의 마땅한 권리를 권력이 억지로 빼앗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정치적 자각으로 이어진다. 권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미 조선에는 동학처럼 천부인권을 주장하는 흐름과 세력이 있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고 하늘이 곧 사람이라는 동학의 교리는 원형적 형태의 천부인권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인민 스스로 체득한 천부인권이지만, 그것을 계몽하고 대중화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은 역시 인민과 인민, 인민과 권력을 이어주는 신문이었다. 《독립신문》도 일찍부터 천부인권의 사상을 강조했다. (296~298쪽.)

 

  독립, 자주, 평등의 가치를 내세우며 민족 생존의 권리, 즉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기미독립선언서〉는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과 "전 인류의 공존동생권"을 내세우며 민족마다 자유 발전과 인류로서 차별 없는 대우를 강조하고 있다. "민족적 양심과 국가적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는 방법이자, 각자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독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서 개인 민주주의, 즉 민권의 확보는 집단 민주주의의 실현, 즉 자주독립을 통해 가능하다는 입론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3·1운동에서 민족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적 논리는 민주주의였다.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는 것은 민족의 정당한 권리이므로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은, 민족의 독립이 곧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구현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이에 전 민족 구성원, 즉 인민들이 동조했다는 것은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이해와 동의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민주주의는 대세가 되었다. 나라를 잃은 민족으로서 독립을 염원하는 인민에게 민주주의는 독립 후 건설한 새로운 국가가 추구해야 할 가치였다. 독립운동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과 좌우라는 세력으로 갈라졌지만, 민주주의는 그들을 하나로 엮는 교집합이었다. (...) (376~3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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