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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畵나부랭이

적과의 동침

Dog君 2011. 4. 28. 22:43


1-1. 영화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자면... 확실히 수작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이라거나 관객의 감성을 끌어내는 방식은 다소 진부한 편이다. 갑자기 10년전 이야기로 돌아가는 장면은 확실히 좀 에러가 아니었나...싶다. 게다가 중간의 폭격장면은 되려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수준... 설희(정려원)의 당돌한 성격도 '황태자의 첫사랑' 뭐 이런 느낌...

1-2. 출연진만으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데 오히려 그게 독이 된건 아닌가 모르겠다. 유해진, 변희봉, 김상호, 신정근 같은 이름은 어디에서 하나만 있어도 ㅎㄷㄷ할텐데 그 이름들이 한 영화에 다 몰려나오니 이런 일이 또 어디있을까. 강력하고 쟁쟁한 조연진이 오히려 김주혁과 정려원을 압도해보린 느낌. (그런 면에서 정려원이란 배우는 보고 있으면 좀 안타까울 때가 있다. 절대 불성실하거나 능력이 부족한건 아닌거 같은데 누가 상대역이 되는지 누가 조연이 되는지에 따라 자기존재감의 부침이 심하단 말이지.)

1-3. 세세한 부분에서의 아쉬움을 제외하고 큰 틀에서 이야기를 짜맞춰가는 방식에서는 진부함과 긴장감이 적절하게 맞물린 느낌이 든다. 물론 이 지점에서는 '웰컴 투 동막골'과 꾸준히 비교당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 나름의 독창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2시간 가까운 러닝타임도 비교적 잘 채워넣은 느낌이다. 여러 디테일한 부분들을 보면 감독의 전작인 '킹콩을 들다'는 보지 못했지만 박건용 감독이 무척 성실한 감독인 것만은 확실한 듯 하다.


2. 여기까지는 영화 자체에 관한 이야기고... 한국전쟁에 관심이 많은 현대사 전공자로 꼰대 같은 소리 좀 하자면... 한국전쟁의 의미에 관해서는 뭐 냉전 중의 열전이 어쩌고 남북 분단의 고착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보통사람들 일상에는 별로 안 와닿는 얘기들이 많지만 그런 소리들은 각설하자.

3-1. 한국전쟁 기간 동안 거의 대부분의 마을은 좌익과 우익 진영으로 나뉘어 참혹한 살육이 오고갔다. 마을 안에서 나뉜 곳도 있고 마을끼리 나뉜 곳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같이 참혹했다. 영화에서는 사람들끼리의 갈등이 희화적인 수준에서 봉합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러하지 못했다. 영화에서처럼 빈부 격차가 꽤 컸던 경우에는 더했다.

3-2. 영화가 거기까지 치고 나갔다면 아마 이 영화는 무척이나 냉소적이고 하드보일드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더 끔찍했을 것이고. 디테일한 측면에서 보여준 꼼꼼함을 생각하면 감독도 그 부분까지 치고 나갈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을 했겠지만 상업영화로서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거기까지 이야기하기는 좀 부담스러웠겠지.


4-1. 하지만 그러한 대립을 이념 대립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영화가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그들이 택한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수사들은 투철한 이념에 충성이 아니라 단지 살기 위한 여러 선택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4-2. 영화 초반에서 백씨(김상호)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신과 아부를 거듭하는 속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협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저 스스로 빨간 완장을 둘렀다는 점에서 구장(변희봉)을 비롯한 석정리 사람들도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이다.


4-3. 역사 속의 사람들은 그렇게 조금씩 치사하게 살아간다. 그곳에는 투철한 인민해방전사도, 자유민주주의의 충실한 수호자도 없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에게 허용된 선택의 범위 내에서 최대한 많은 선택을 할 수 있고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르며 살아간다. 학자들은 그런 것들을 두고 '전유'니 '자율적 공간'이니 하는 어려운 말을 써대지만 실상 그것들은 세상에 대한 다소 비굴하고 치사한 타협들을 이르는 말이다.

4-4. 구장이 손녀딸 설희의 색동옷을 찢어 붉은 완장을 만든 것도, 미군이 밀려오는 참혹한 현장에서 울부짖으며 다시 만세를 부르는 것도 그래서이다. 여기에 대고 자유의 수호가 어떻고 인민해방이 어떻고를 논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5-1. 한국전쟁은 끔찍한 학살과 죽음으로 점철된 비극적 사건의 일련이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과연 사람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줄 정도의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참혹함은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개개인이란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거대한 물리력 앞에서 우리는 항상 무력한 존재가 아니던가.

5-2. 그러나 동시에 역사는 그러한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보통 사람 하나하나에 달려 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도 한국전쟁기 학살에 관한 여러 사례연구들은 마을 사람들 간의 끈끈한 유대관계와 복수를 복수로 갚지 않으려는 인간성이 끔찍한 학살을 막을 수 있는 열쇠임을 말해준다.

5-3. 문제는 다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사람도 결국 동물'이라며 끓어오르는 감정에 무책임하게 나 자신을 내맡길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다운 것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할 것인가. 비인간적인 참극을 되찾는 것은 우리가 인간적이 되는 길 뿐이다.


6.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에 관해서는 좋은 연구서들이 많이 나와있다. 이론 부분인 비전공자들에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평이하게 쓰여진 편이라 대중서로도 괜찮은 편이다. 한 3개만 꼽자면...

윤택림, 인류학자의 과거여행, 역사비평사, 2003.


김경학 박정석 외, 전쟁과 기억, 한울아카데미, 2009.

박찬승, 마을로 간 한국전쟁, 돌베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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