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2002.) 본문
1-1. 인간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중국이라는 나라는 특출나기로는 단연 독보적인 위치가 아닐까 싶다. 세계사에서 뭔가 대단한 발견이나 흐름 같은 게 생겼다 하면 꼭 그 어딘가에 중국이 연루되지 않은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르네상스로 유럽의 인문정신이 꽃필 수 있었던 것은 고전에 관한 관심의 증폭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러한 관심이 일어나는 데는 인쇄술이 발달하여 출판물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이 원인인데, 그 인쇄술이라는 게 알고 보니 중국에서 들어온 거더라...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준의 일정한 봉토를 떼어주는 중세 봉건제가 등장한 것은 기사 계급의 무장력을 보장하기 위해서였고, 그런 기사 계급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기사의 전투력이 일정한 시점에 비약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고, 기사의 전투력이 상승할 수 있었던 것은 등자의 등장이 결정적이었는데 그 등자라는 게 알고 보니 중국에서 건너온 거더라... 그랬던 중세 봉건제가 붕괴한 것은 기사 계급의 전투력이 떨어졌기 때문이고, 기사 계급이 전투력이 떨어진 건 화포가 발달했기 때문인데, 그 화포라는 게 알고 보니 중국에서 건너온 거더라... 이쯤 되면 중국은 가히 인간사의 먼치킨이라 하겠다.
1-2. 이런 엄청난 나라가 1949년 10월에 느닷없이 빨갱이 나라가 됐다니 이거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는가. 2차 대전이 끝나고 전 세계가 냉전 질서에 맞춰 라인 타던 이 시기에, 그 잠재력의 끝을 알 수 없는 뭔가 거대한 저 형이 갑자기 공산주의자가 된 상황. 전 세계의 사회주의자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겠지만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진영은 순간적으로나마 멘붕을 겪지 않았을까.
롤프형, 놀래지 마.
1-3.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의 의미가 단지 엄청나게 큰 공산주의 국가가 새로 등장했다는 것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론상으로 볼 때 원래 사회주의라는 체제라는 건 익은 감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자본주의가 익을 대로 익다 못해 썩어서 곪아터질 지경까지 이르러야 달성되는 거였는데, 이건 뭐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 계급이 성숙하기는커녕 여전히 봉건제적 농업에 매달린 인구가 절대 다수였던 중국에서 사회주의가 뙇!했다는 건 가히 짬짜면 급 발상의 전환이었다. 제국주의적 폭압에 신음하며 변변한 공업화조차 달성하지 못했던(따라서 자본주의적 발전이란 것조차 언감생심 꿈도 못 꿨던) 그 많은 식민지 국가들에게도, 온 인민이 다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사회주의 평등세상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의 교리에 좀 더 많은 변용과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점만으로도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사를 공부해 볼 필요가 있다. (아, 이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이 많은 뻘소리들을 서론으로 늘어놨구나.)
중국사회가 당면한 가장 절박한 문제는 빈곤이며 빈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산업발전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 장동손의 글은 당시 맑스주의자임을 선언한 진독수의 반론을 불러일으켜 사회주의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야기하였다. (중략) 논쟁의 주제는 중국사회 발전의 방향과 관련하여, 중국사회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적실성에 관한 것이었으며, 계급투쟁에 의한 혁명적 변혁논리와 단계론적 발전논리가 대립되었다.
양계초, 장동손과 같은 단계적 발전론자들이 사회주의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사회주의가 가장 진보적인 세계관이라고 생각하였고, 맑스가 사회주의이론을 발전시켰다는 점까지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사회는 사회주의를 실현할 만큼 발전하지 못했으며 더구나 볼셰비키적 방법에 의한 사회혁명과 경제발전전략에는 반대를 하였다.
이들의 논리는 첫째, 중국사회가 당면한 최대과제는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둘째,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산업의 발달 즉 경제발전이 가장 시급한 과제이며, 셋째, 경제발전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본주의적 경쟁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넷째,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은 중국사회에서 계급투쟁과 노동운동을 강조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중략)
이에 대해 당시 공산주의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한 진독수, 이대교 등 맑스주의자들이 격렬하게 반론을 제기하였다. (중략) 맑스주의 지식인들은 개량주의적이며 점진주의적인 개혁노선에 반대하면서 볼셰비키혁명의 경험에 따라서 중국에서도 사회혁명이 단행되어야 하고,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당의 건설과 노동운동의 조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pp. 74~76.)
2. 이런 식의 논쟁은 한국에서도 소위 ‘사회구성체 논쟁’이라는 것으로 진행된 바 있고, (심지어는) 러시아 혁명에서도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대립으로 표현된 바 있다. 그러고보면 결국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건, 사회주의라는 오소독스를 각각 다른 경험과 조건을 가진 사회들에게 어떻게 변용시켜 적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라고도 볼 수 있겠다.
모택동은 6중전회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맑스주의의 중국화를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모택동이 말하는 맑스주의의 중국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연안시대에 쓰인 모택동의 저작을 분석해보면, 모택동은 맑스주의의 중국화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맑스주의의 보편적 이론을 중국적 특수성에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모택동은 맑스-레닌주의를 보편적 이론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맑스와 레닌의 모든 이론을 기계적으로 중국에 적용하려는 것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p. 263.)
3-1. 그렇다면 과연 중국의 조건은 무엇이었는가. 두말할 것 없이 절대 다수의 농민이다. 실제로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농민들에게 지지를 획득하는 방식으로 생존하였고 또한 성공하였다. 그렇다면 농지개혁에 대한 입장 혹은 성공 여부가 사회주의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잣대가 되는 셈이다.
장개석 정부는 사회개혁을 추진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특히 중국 농촌사회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토지문제에 대하여 장개석정권은 거의 그 중요성과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동적인 정책을 견지함으로써 광범위한 농민들의 불신과 이탈을 조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국민당정부의 지도자들이 토지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중략) 그러나 국민당은 ‘토지법’을 제정하기만 했을 뿐 그것을 실행하지 않았다. (중략) 사실 국민당이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지주계급이 중심이 되어 농민들의 토지개혁요구를 억압하였고, 국민당은 그와 같은 지주계급을 공산당과의 대결과정에서 가장 신뢰하는 계급적 기반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국민당정부가 농민들의 지지를 상실하게 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pp. 322~323.)
중화소비에트토지법은 중농에 대하여는 상당한 배려를 하려고 하였다. 중농의 경우는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토지의 재분배과정에서 제외하였으며 분배과정에서도 빈농과 더불어 중농에게 유리하게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pp. 175~176.)
무시하면 가만 안 둬.
3-2. 빈농뿐만 아니라 중농까지 지지층으로 포섭할 수 있었기에 중국공산당은 한 때는 국민당군에게 피떡이 되도록 뚜디리 맞아가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토지개혁 문제가 트리컨티넨탈에서의 변혁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라고 거칠게 추론해 볼 수도 있겠다. 박명림 선생이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의 남한 점령 정책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의 이유를, 한국 전쟁 이전에 이미 이승만 정권의 토지개혁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상대적으로 북한의 토지개혁이 남한의 민중들에게 호소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으로 본 것도 이것과 약간 맥이 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4. 다시 문제를 좀 더 일반화시켜보면, 보편적 명제를 어떻게 지역적 특수성에 맞게 변용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건 굳이 정치적 원칙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현실 정치에서의 영향력이라는 문제에서도 소련의 (지역적 특수성을 무시한) 지도를 때로는 변용하고 때로는 차단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했다. 예를 들어서, 1차 국공합작의 경우에도 중국공산당은 (개혁적) 우파와 연합하라는 소련의 지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가, 무기력하게 국민당에게 끌려다니기만 하다가 결국 수십만 명의 당원들이 속수무책 죽어나갔다. 북한 역시 김일성 유일체제의 성립이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문제 꽤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사실 중국공산당의 지도부 사이에서는 광범위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대체로 모두 동의하면서도,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대두되는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관계, 당의 독립자주원칙을 관철하는 문제 등에 대해서는 미묘하고도 심각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특히 소련과 코민테른의 입장을 대변한 것으로 알려진 왕명이 1937년 10월에 모스크바로부터 귀국하면서 이러한 견해차이는 모택동과 왕명의 논쟁으로 표출되고 권력투쟁의 양상까지 보여주었다. (p. 252.)
따라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잖아.
5. 아까 토지개혁 문제를 이야기했었는데, 이 지점으로 다시 이야기를 돌려놓고 한 가지 아이디어 붙이고 글을 마쳐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마도 위화의 글을 먼저 읽어서 그런 것 같다. ㅎㅎㅎ.) 이야기를 돌려놓은 다음에 시각을 정치가 아닌 농민 개개인의 시점으로 이동시키면 전체적인 구도가 좀 많이 달라진다. 무슨 말이고 하니, 결국 농민들이 중국공산당을 지지한건 무슨 역사의 진보가 어떻고 민중의 전진이 어떻고 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중요한 건 땅 나눠주는 정당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그렇다면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이란 것도 신민주주의니, 자본주의를 넘어선 그 다음 단계인 사회주의 뭐 그런 거 아니고 그냥 근대를 향해 가는 또 하나의 어떤 경로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론에서 배링턴 무어 이야기도 살짝 나오긴 했는데... 에이 뭐 더 생각하자니 머리 아프니까 여기서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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