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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한경제원조정책 1948~1960 (이현진, 혜안, 200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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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한경제원조정책 1948~1960 (이현진, 혜안, 2009.)

Dog君 2016. 9. 16. 10:59


1-1. 현대사 연구 분야에서 1950년대, 좀 더 정확하게는 48년 이후의 이승만정권기는 뭐라 딱 정의하기가 참 애매한 시간대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우리의 인상은 해방 직후의 혼란을 거치며 집권한 후 한국전쟁 때 역대급 무능&학살 스킬을 시전한 후 내내 부패와 무능에 찌들어 있다가 4월 혁명으로 한방에 훅 간 정도의 이미지 정도에 불과해서 뭐 딱히 다른 이야기를 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이 느껴지니까. 더욱이 4월 혁명과 5.16 쿠데타가 거대한 ‘단절’ 처럼 느껴지는 탓에 그 이전에 있었던 것들은 그냥 없던 걸로 퉁치고 60년대부터 새로 시작하는 걸로 하자…는 심리도 좀 있는 것 같고.


1-2. 요새 50년대 쪽을 공부해서 그런가, 그렇게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자꾸 목젖 아래 3cm 지점 쯤에서 입밖으로 나올랑말랑 간질간질하다 ㅋㅋㅋ. 박정희 정권이 야심차게 내놓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장면 정권기에 수립된 경제개발계획과 크게 차이가 없고, 그 장면 정권기의 경제개발계획은 다시 이승만 정권기에 수립된 경제개발계획을 모체로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하다못해 60년대의 전사前史 정도의 의미로라도 50년대를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4월 혁명과 5.16 쿠데타가 무슨 수십수백만명씩 단번에 날려버린 문화대혁명이 아닌 이상에야 50년대와 6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다 거기서 거기일텐데 뭐가 얼마나 단절적이겠냐 말이다. 자, 이 정도로 자락을 깔아놓으면, 50년대는 한국현대사의 첫단추가 꿰어지는 시기였다고 우길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ㅋㅋㅋ.


2. 경제 분야에서 한국 현대사의 첫 단추를 채울 때 절대 빼먹으면 안 되는 것은 단연 미국 원조다. 그 과정이야 어쨌건 간에 미국에서 밀려들어온 무상원조물자들은 50년대 내내 한국경제에서 가장 큰 덩어리였다. '우리가 그래도 미국 때매 먹고 살았다’는 명제가 여전히 많은 이들의 입에서 유효할 수 있는 것도 이 덕분인데, 근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럼 지금 우리 경제가 이렇게까지 뒤틀린건 그 때 첫 단추를 잘못 채운 때문은 아닌가 하는 의심, 누구나 합리적인 수준에서 해 볼 수 있다.


3. 미국의 원조를 중심으로 한국경제의 첫 단추 채우기를 분석한 이 책의 결론은 대충 이렇다. 미국이 뭐 한쿡이 예뻐서 그렇게 원조를 퍼 준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퍼먹은 원조물자가 한국 입장에서 좋은 것도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미국의 대한경제원조는 철저히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종속된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이렇다할 발언권조차 가질 수 없었다는 것. 그러니까 미국의 대한경제원조라는 것은 결국 미국에 대해 한국정부의 종속성이 심화되는 과정에 불과했을 뿐, 그것에 대해 대단한 환상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 물론 50년대 말에 원조정책의 변화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도 한국이 자립하라고 어이구 내 새끼 우쭈쭈 잘 하네 하면서 보행기 태운게 아니라 그냥 어쩔 수 없는 상황변화에 따른 것이었고, 그나마도 이승만 정권이라는 희대의 작가급 마무리투수 덕분에 제 의도를 잘 살리지도 못했다는 것.


4. 뭐랄까, 우리는 역사를 평가할 때 의도와 결과를 혼동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미국의 대한경제원조나 박정희 정권기의 경제개발에 대해서 특히 그런 것 같은데, 한국경제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가 그렇다는 거고, 그것이 곧 애초부터 치밀한 의도나 계획의 결과는 아닌 것 같다. 별로 공부한 것도 없는 초심자의 섣부른 결론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의도는 오히려 다른 곳에 있었거나 혹은 계획 같은 것은 거의 없었던 쪽에 가까운 것 같고, 지금 우리가 보는 결론이란 그냥 무작정 이리저리 헤매다보니 얻어진 우연의 산물에 가깝지 않나 싶다. 그러니까 그것을 두고 좋았니 나빴니 말하는 것 자체가 좀 우스운 것 같다는 거지. 뭐랄까 비유하자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부富란 열심히 일해서 얻어진 결과가 아니라 그냥 로또를 맞은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 돈을 번 거야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로또를 사야 한다는 결론을 내면 그건 쫌 이상하잖아.


5. 이 책은 1950년대의 한국경제를, 뭐랄까 화면에는 안 나오지만 ‘무한도전’을 바깥에서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는 김태호PD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고나 할까… 쫌 그렇다. 그러니까 이 책은 1950년대 한국경제를 규정하는 대략적인 아웃라인을 그리는데 치중한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 정부 혹은 한국 경제 내부의 행위자들에 대한 분석은 대체로 소략한 편이다. 그럼 그 다음은 뭐겠냐. 김태호가 짜놓은 판에서 유재석과 박명수와 정준하와 하하와 광희가 어떻게 무한도전을 만들어가는지를 분석해야겠지? 자, 그건 이제 내 몫이라고 감히 말해보면서… 자, 이제 공부하자.


(전략) 원조 물자에 대한 이러한 원화적립 계정을 ‘대충자금계정(Counterpart Fund)’이라고 지칭하는데 당시 한미 양국은 위 규정에 따라 물자가 수입되면 원조물자 취급시 잠정적 환산율인 450원:1달러를 적용하여 이 매상금을 환산한 한국 통화를 조선은행 특별계정에 예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대충자금계정은 한국 정부와 협의함을 전제한다는 단서가 있지만, 원조당국의 동의 없이는 사용할 수 없는 성격의 규정이었다. 이렇게 자금계정에 대한 운영 권한은 전저긍로 원조당국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원조의존도가 높았던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 원조당국인 미국이 가진 한국에 대한 발언권은 당순히 경제면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적인 측면까지 확대될 수 있었다. (pp. 74~75.)


  결국 ECA 대한경제원조계획을 부흥계획으로서 평가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이 계획에서 제시되고 있는 한국의 자립 수준과 관련하여 파악해야 할 것이다. ECA 대한경제원조계획에 대한 토론에서 번스의 특별보좌관 키니(Robert A. Kinney)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계획은 농업경제로부터 공업경제로의 강인한 전환을 도모하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기존 설비와 국내 자원을 최대한 이용하는 차원에서 구상된 것이었다. 따라서 ECA 대한경제원조계획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석탄광 개발, 전력 개발 문제는 경제부흥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철로 건설 및 수송과 관련된 것이었고, 농업생산의 증대를 위한 제한적인 범위에서의 개발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계획을 주도했던 경제협조처장 호프만이 당시 한국의 자립경제 달성에 회의적이었다는 사실에서 시작단계에서부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줄곧 대한원조와 관련하여 ‘부흥’과 ‘자립’을 목표로 내걸었던 이유는 오히려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 효과를 기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가 기정사실화된 이후 미국은 한국이 미국의 경제원조를 통해 생존,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아의 비공산 국가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미국식 체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이들 나라가 공산주의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후략) (pp. 89~90.)


  4개월간의 논의 끝에 1953년 12월 14일 조인한 ‘백·우드 협약’은 한국 경제재건이 국제연합과 미국의 원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중략) 특히 본 협약은 원조물자 판매대금을 통한 대충자금 설치를 규정하고 이에 대한 인출은 합동경제위원회가 승인한 목적과 방법에 의해서만 사용한다고 명시했다. 당시 국가재정 중 대충자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이는 결국 한국의 국가재정이 원조의존적 국가재정으로 확립됨을 의미했으며, 미국은 원조를 매개로 한국의 국가재정운영에 관여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합동경제위원회가 비록 형식적으로는 심의기관이지만 합동경제위원회의 논의를 통해 대충자금 방출이 결정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의 원조의존적인 경제체제가 지속되는 한 경제운영 전반에 걸쳐 합동경제위원회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pp. 190~191.)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프로그램을 구상할 때 일본에서의 구매를 증가시키기 위해 한국이 일본에서 구매할 수밖에 없는 항목들을 집중분석하였고, 그 대표적인 것들로 비료, 원면과 면사, 산업 장비들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백두진을 비롯한 한국 정부 인사들은 일본산 비료가 유럽산보다 1톤당 3달러 50센트나 비싸다고 지적했고, 기계류에 대해서도 구미 지역으로부터의 선진기술의 도입을 희망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물품을 일본에서 구매하는 것을 반대했다.

  한국 정부의 계속적인 저항에 대해 미국은 ‘원조상품 도입의 지연’이라는 방식을 통해 대응했다.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 정부의 대일강경책은 일본을 중심에 둔 아시아 정책을 진행하고 그 일환으로 한일관계의 강화를 중시하는 아이젠하워 정권의 구상에 큰 장애요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에 미국은 한국 측의 절박한 물자공급 사정을 이용하여 원조프로그램의 승인을 지연하는 전술로 대응하여 원조상품의 대일 구매에 한국 정부가 저항하지 못하도록 했다. (p. 192.)


  또한 1957년 이후 합동경제위원회 회의 안건을 살펴보면 1950년대 전반과는 달리 기술원조계획과 장기적인 개발계획에 대한 논의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략)

  또한 합동경제위원회에서 논의된 기술행정부문의 대충자금 방출의 건을 살펴보면 정부재정관리 및 통계개선 부분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원조프로그램에서 계획된 기술원조가 행정인력들의 재정관리 기술에 그 목적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역시 당시의 기술원조가 원조의 삭감에 따르는 조치였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p. 239.)


  1957년 3억 8천 2백 90만 달러였던 미국의 대한 원조는 1958년 3억 2천 1백 20만 달러, 1959년 2억 2천 2백 20만 달러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원조의 감소는 위기의식을 불러 왔으며 경제개발계획을 통한 자립적인 경제성장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무상원조에서 유상차관으로의 전환 역시 계획의 필요성을 제고하였다. 개발차관기금은 무상원조와 달리 이자를 붙여 원금을 갚아야 하며, 차관 계약시 채권자 측에서 제시하는 조건에 맞는 계획을 제시해야만 승인받을 수 있었다. 개발차관기금의 차관을 받기 위해서는 단일 사업과 관련된 계획을 제시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한국 정부의 관료들은 차관을 승인바디 위해서는 개발계획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p. 252.)


  그러나 자유당은 1960년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구조적 개혁보다는 경찰력에 의존해서 부정선거로 대처하는 방안을 택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정선거의 후유증, 선거자금문제, 2·4보안법 파동 등으로 여야의원들이 정면충돌하고 정국불안이 조성되었다. 따라서 경제관계 입법 및 경제안정책들에 관한 논의는 계속 국회 회기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경제개발계획이 실행에 옮겨질 수 없었던 갖아 중요한 이유는 정부가 임박한 선거에 대비해서 근본적인 행정개혁과 경제개혁조치를 취할 만한 여유와 자율성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앞서도 지적하였듯이 당시 경제개발계획을 안정적으로 추구하기 위해서는 재원의 확보문제가 가장 중요하였다. 그런데 미국의 원조가 감소되고 있고 기본적인 재원이 부족한 한국의 상황에서는 조세징수와 차관도입에 의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원조는 삭감되고 정부 수입은 제한되어 있는데 국방, 경찰비는 오히려 증가함으로써 그 피해는 결국 산업투자의 위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와 같이 1950년대 후반에 수립된 산업개발위원회의 경제개발3개년계획은 비록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계획 자체가 지니는 중요성과 그것이 이후 한국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미친 영향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이 계획안은 무엇보다도 경제의 계획화를 도모한 한국 정부 최초의 종합계획안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으며, 이 시기 작성 조사한 각종 자료와 계획 수립에서의 경험은 이후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기여하였다. (pp. 265~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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