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28 (정유정, 은행나무, 2013.) 본문
1. 재난이나 좀비 같은 소재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재난/좀비란 그냥 조건이나 맥거핀 같은 것에 가깝고 실제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에 대처하는 인간군상의 자세에 있기 마련인데, 사람이 살면서 그런 조건에 노출될 일이 얼마나 있겠나.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조건 속에 사람들을 억지로 밀어넣고는 그 속에서 벌어지는 악다구니들을 한참이나 늘어놓은 다음 '사람이란 무릇 이런 존재들이지 쯧쯧' 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뭐 특별히 사람에 대한 신뢰감이 강한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나를 포함한) 세상 사람 누구나 언제든 악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조건이 생기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인간이 수천수만년동안 문명을 개량하고 도덕관념을 지키려고 애써온 것도 그래서라고 믿는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조건에서나 나타날 것 같은 악다구니들을 보며 불신을 키울 시간에,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인간다움’이란 인간을 태어나서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이 아니다. 동물로서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과 본성을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 혹은 힘이 내가 생각하는 ‘인간다움’이다. 개인적으로는 ‘도덕’ 같은 것이 거기에 들어갈 것이고, 집단적으로는 ‘사회’나 ‘시스템’ 같은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사람도 어차피 동물…’이 포함되는 모든 말을 아주 싫어한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짐승을 자처하면 어쩌라고 시발. 그런 소리 할거면 옷은 왜 입고 사회 생활은 왜 해. 아프면 동물병원 가고, 사는 집은 동물원으로 옮기지 왜.)
2. 그런데. 그런데. 살다가 적어도 한 번 정도는 그런 일을 겪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이 점점 커지고 있다. 도덕이 무너지고 사회와 시스템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광우병 파동은 사회와 시스템이 더 이상 개개인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건이었고, 그 가능성은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를 통해 현실화되어버렸다. 재난이라는 게 그냥 맥거핀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맥도날드 머핀만큼이나 내 주변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세상이 우짜다 이리 됐지 시발.
3. 멀게는 아우슈비츠에서 그랬고, 가깝게는 한국전쟁 때 그랬던 것처럼, 지옥도를 이겨내는 힘은 결국 다시 사람이다. 악惡과 폭력의 무한연쇄를 끊어내는 힘은 결국 ‘동물다움’에 맞서는 ‘인간다움’에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온 프리모 레비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그것이고, 최악을 피했던 몇몇 민간인 학살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고, ’28’의 마지막에서 서재형의 선택이 보여주는 것이 그것일 것이다. 아니 꼭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그렇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해야 한다.
하나 더. 이 소설과 가장 먼저 연결되는 사건은 구제역 파동 당시에 벌어진 가축 살처분이다. 가축 살처분은 그 자체로도 어마어마한 폭력이지만, 소수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태도와 꼭 닮았다. 말 못하는 짐승이나 언로가 막힌 소수자나 제 목소리를 낼 기회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저자가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소재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또 하나 더. 소설 후반부의 ‘화양’은 80년 5월 광주이다. 저자 스스로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집을 참고했다고 밝히기도 했고, 본인이 5월 광주의 경험자이기도 하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화양’의 한자 표기는 아마도 ‘火陽’일텐데, ‘광주(光州)’와도 이미지가 살짝 겹친다.
(전략) 막막한 심정으로 스타가 발작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신음을 멎게 해주고 싶고, 몸을 떨지 않도록 해주고 싶고, 눈을 떠서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정작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조언을 들려주지 않았다. 바람에 걷어차인 산막 문짝만 시끄럽게 덜컹거렸다.
링고는 낯설고 고통스러운 감정에 휩싸여 산막 안을 오락가락했다. 오래전, 레스토랑 사설 동물원에서 늑대 행세를 하며 밥을 얻어먹던 시절처럼 자신에게 화를 내고 스스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때의 분노가 모욕에서 기원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분노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무력감과 비통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스타는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온 첫 존재였다. 스타를 잃고 싶지 않았다. (p. 107.)
기준은 매년 1월이면 휴가를 내서 산으로 떠났다. 전역한 후부터 매년 홀로 백두대간 구간 종주를 해오는 중이었다. 어떤 해엔 네 구간을 주파하고, 어떤 해엔 두 구간에 그칠 때도 있었다. 계획대로 전진하는 때도 있고 적을 이기지 못하고 고전하는 때도 있었다. 고독감, 물이나 식량 부족, 산짐승을 만나거나 길을 잃는 일, 추위, 폭설. 무엇보다 무서운 적은 배낭이었다. 30킬로그램이 넘는 짐을 지고 눈과 강풍을 헤치며 걷다보면 생각마저 사라지곤 했다. 체감온도가 영하 40도를 넘는 곳에선 이중화도, 고어텍스도 소용없었다. 사나운 이빨에 살을 찢기는 느낌이었다. 그럴 때의 배낭은 짐이 아니라 저승사자였다. 그래도 기준은 오롯이 홀로 되는 며칠을 사랑했다. 그 며칠은 세상과 사람이 사라지고, 삶과 죽음만이 자신을 지배하는 본능의 시간이었다. (p. 145~146.)
5분쯤 기다려봤지만 현진은 답을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절대 밖에 나가지 마세요.” 했더니 이미 나와 있노라고 대꾸했다. 차례 상에 놓을 음식이 없어 과일이라도 살까 하고 아침 일찍 시장에 나왔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산 사람 목숨보다 죽은 양반을 밥이 더 중요해요?"
그녀가 묻자 아버지는 만호공파의 수많은 가훈 중 하나를 답으로 들려주었다.
“풍랑은 풍랑에 맡겨두고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거다.” (p. 193.)
갱 라인에 몸이 묶인 채 달아나는 쉬차의 비명이 눈보라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늑대들의 포효가 흉곽을 물어뜯고 심장에 발톱을 박았다. 아아, 갱 라인을 풀어줬더라면, 싸울 기회를 줬더라면, 도망칠 기회를 줬더라면, 살 기회를 줬더라면. 홀로 살겠다고 밧줄을 끊을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귀에 익은 하울링이 들려왔다. 희뿌연 시야 정면에 커다란 다갈색 눈이 불쑥 나타났다.
“대장, 내 아이들은 어쨌어?” (pp. 217~218.)
화양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불이었으나 불을 대하는 안팎의 태도는 이렇듯 확연하게 달랐다. 두려움으로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만 똑같았다. 안쪽은 자신이 죽음의 손아귀에 갇혔다는 사실에, 바깥쪽은 자신에게 죽음의 손이 뻗어 올까 봐. (pp. 232~233.)
10명의 군인들이 착검한 총을 들고 구덩이 삼면을 에워쌌다. 나머지 둘은 스키 폴만큼이나 긴 죽창을 쥐고 철장 문을 열었다. 덤프의 적재함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개들이 구덩이로 떨어져 내렸다. 처음엔 몇 마리씩, 곧 무더기로. 떨어진 개들은 곧장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누워 자빠진 동료의 몸을 딛고 서로의 머리를 밟으며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구덩이를 에워싼 군인들은 착검한 총 끝으로 개들을 찍어서 구덩이로 다시 떨어뜨렸다. 죽창 군인 둘은 철장 벽에 붙어 버티는 개들을 창으로 찍어 떼어냈다. 큰 개, 작은 개, 검은 개, 희 갠들이 눈을 찍히고, 뱃가죽이 뚫리고, 등을 꿰인 채 핏물을 내뿜으며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백구 한 마리가 창살을 발로 움켜쥐고 버둥거렸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피투성이가 돼서 구덩이로 떨어지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다른 한편에선 굴삭기가 구덩이를 덮기 시작했다. 개들은 떨어져 내리는 흙과 쓰레기 더미 속에서 울부짖었다. 그 울음이 윤주에겐 사람의 말로 들렸다.
살려주세요. (pp. 240~241.)
이 한심스러운 병원을 구원한 건 시 당국이나 정부가 아니었다. 이전부터 화양의료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자원봉사를 해오던 노인 20여 명이었다. 왕년의 목수, 아코디언을 켜는 카바레 악사, 전기 수리공……. 그 중 자신을 ‘재야의 장의사’라고 소개한 62세 남자가 가장 젊었다. 박남철 과장은 ‘전염병 고위험군’이라는 이유를 들어 노인들의 뜻을 거절했지만 결국에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관중석을 떼고 환자가 누울 자리를 만든 이도, 환자나 진료팀에게 인스턴트나마 식사를 배달하는 이도 그들이었다. 청소와 세탁물 처리, 환자 치다꺼리, 사망자 처리, 벼락치기로 마련한 ‘통합병원 구급차’ 운전까지 도맡았다. 그사이 시 당국이 결정한 대책은 딱 두 가지였다. 지하 아이스링크를 영안실로 사용한다. 보조경기장 뒤편 공터에 임시 화장터를 만든다. (p.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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