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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손아람, 들녘, 2010.)

Dog君 2016. 9. 16. 17:20


1-1. ‘보스턴 리갈Boston Legal’이란 미드가 있다. 유학을 가네 어쩌네 분수에 안 맞는 지랄똥을 처싸고 다닐 때, GRE 공부에 도움이 될거라는 조언에 보기 시작했다가 결국 인생미드 비슷하게 된 미드다. 보스턴 리갈이 보여주는 미국 법원의 풍경은 한국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배심원제에 따라 운영되는 미국 법정은 한국에 비하면 뭐랄까 배심원들을 사이에 놓고 벌어지는 일종의 게임처럼 보인다. 화려한 언변이나 극적인 논리전개로 배심원의 마음을 사로잡는 뭐 그런 것들… 검사와 변호사 혹은 변호사와 변호사가 각자 준비해온 논리들을 주고 받으며 법정 분위기를 들었다놨다 엎었다뒤집었다 하는 과정들은, 제임스 스페이더와 윌리엄 새트너의 실 없는 농담만큼이나 재미있다.


1-2.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과정들이 마당극처럼 느껴지는, 요새 말로 특이점이 오는 때가 있더라. 그 순간부터는 애초에 법法이 목표했던, ‘인간다움’ 같은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이 되고, 법 조문의 해석을 두고 벌이는 치열한 논리싸움이 더 중요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법이 인간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고 법정다툼이란 거 결국엔 그냥 '텍스트 해석의 기술’로 전락해 버리는 거 아닐까 싶다는 거. 그런 느낌이 들면, 법이란게 다 뭐야 시발 싶어서 맥이 탁 풀린다.


2.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역사학이 참된 인간다움을 구현하는 수단이 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지식의 고고학인지 계보학인지를 말했다는 푸코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역사학’도 결국 ‘학문’인 이상 논리의 정합성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삼을 수밖에 없고, 그 정합성과 합리성을 따지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다움’의 자리는 좁아지게 마련이다.


3-1.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소수의견’의 후반부가 살짝 그런 느낌이 든다. 법 조문 위에 단단히 쌓아올린 변호의 논리, 증인으로부터 내가 원하는 증언을 얻어내기 위한 화려한 말 기술의 향연, 상대의 논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극적인 순간에 제출되는 결정적인 증거들… 영화화되기에도 충분한 극적 구성이다. (아직 보지는 못했다.) 후반부 어느 순간부터는 페이지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책에 몰두하게 된다.


3-2. 그때 특이점이 왔다. 우리의 ‘인간다움’은 법전에 쓰여진 텍스트의 질서와, 배심원들의 결정과, 판사의 권위 위에서만 입증될 수 있는 것이구나. 그들이 망루에 올라간 이유나, 망루에서 불에 타 죽고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 자체는 그 특이점 이후부터는 중요한 것이 아니구나. 뭐야, 전반부에서는 안 그랬잖아.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각 캐릭터들은 또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들은 어떤 지점에서 고민하고 흔들리는지, 그랬는데, 후반부에서는 그냥 후반부에서는 그냥 ‘텍스트 해석의 기술’만 범람하는구나. 왜 그래, 왜. 우리가 우리의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은 ‘사법적 승리’ 뿐이냐.


4-1. 전반부와 후반부의 각 챕터에는 번호가 거꾸로 매겨져 있다. 전반부는 ‘2의 1’, ‘2의 2’로 번호가 매겨져 있고, 후반부에는 ‘1의 1’, ‘1의 2’로 매겨져 있다. (‘3’은 에필로그에 해당한다.)


4-2. 전반부와 후반부에 매겨진 번호는 우리 생각이 밟아야 하는 순서일지도 모르겠다. 법 조문 위에서 ‘인간다움’을 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 해도, 우리 생각의 순서까지 거기서 만족하고 멈추면 안 될 것 같다. 후반부를 수놓은 ‘텍스트 해석의 기술’은 ‘인간다움’을 논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에 불과할 뿐, 실제로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현실이 뿌리박아야 하는 건 전반부의 ‘사람'과 ‘고민'과 ‘사건'에 있어야 할테니까.


  대학생들이 많았다. 직장인들이 더 많았다. 세상이 변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옆 테이블에 앉은 아이들은 내 시절과 똑같은 빛깔의 술이 담긴 잔을 기울이고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늙은이들이 우뚝 선 나라의 참을 수 없는 고루함, 그리고 마치 논리적 귀결인 것처럼 따르는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해. 나도 한때 같은 의견을 말하고, 듣고, 또 말했다. 변하는 건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다. 대석과 나는 이 나라에 우뚝 선 늙은이가 됐다. 젊은이들이 그렇게 본다. 난 서른일곱이고 나 스스로 그렇게 늙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스무살 아이들에게 중년의 변호사가 신입생보다는 대통령에 가까워 보인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내가 한때 그랬으니까. (pp. 27~28.)


  “경찰이 내 아들을 죽였어요. 검찰은 그놈들한테 죄가 없다고 하고. 근데 정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겁니까? 정말 검사를 고소하는 게 안 됩니까?"

  남자의 눈시울이 붉었다. 그가 운다고 해도 듣기 편하게 말해줄 수는 없었다. 선배이자 스승일지도 모를 형사법원 재판관에게 배당된, 검사 후배들의 법률적 판단의 과오를 살펴달라는 소송은 결코 가망이 없을 거라는 말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계속 질문을 던졌고, 나는 빙빙 돌려 대답했다.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하나였다. 내가 해줄 수 없는 말도 같았다. 곧 할 말이 떨어졌다. 나는 그를 몇초간 바라보다가 불편함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남자가 다시 물었다. 정말로 그게 답니까? (p. 42.)


  블라인드를 걷고 책상을 쓸어냈다. 아침햇살을 타고 부유하는 먼지들. 산산이 흩어진 먼지는 결국 서로 자리만 바꿔 내일 아침의 일과로 가라앉는다. 빈 책상 위에 박재호 사건의 공소장 부본만을 올려 뒀다. 의자를 책상에 바싹 당겨 앉았다. 첫인상은 같다. 묻고 있는 죄목에 붙는 법정형량의 무게에 비하자면 공소장 부본 그 자체는 알 수 없이 가벼웠다. 난 자주 생각했다. 법정형량을 공소장 부본에 포함된 활자의 개수로 나눈다. 검사의 손끝에서 탄생한 활자 하나가 지탱하는 형량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각각의 접속사와 대명사들이 갖는 구속력은? 공소장은 응당 무거워야 할 만큼 무거운 적이 없었다. 딱 필요한 만큼만 무거웠다. 그것은 언제나 낱장과 낱장의 종이들이었다. 속박당하는 자의 삶만큼 구체적이지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내가 검사가 될 수 없었던 이유라고 생각했다. 연수원의 검찰실무과정 과목에 내가 제출한 모의 공소장에는 줄곧 비슷한 교수의 코멘트가 붙었다. 말이 많다. 오직 법 위에서 말하라. 불필요한 말을 줄여라. 필요와 불필요를 구획하는 문제에 설 때마다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검사가 된 자들의 공사장에는 그런 두려움이 없었다. (p. 45.)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수의견이 자기 자리를 찾을 때. 달이 해가 되는 때. 늙은 나무의 그늘로부터 새싹이 돋아나는 때. 나는 가슴 한구석을 저리게 찔러대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후략) (p. 105.)


정의가 없는 구가가 거대한 강도집단이 아니고 무엇인가?

_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p. 109.)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

현실은 이데올로기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효과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이데올로기에 의해 부인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결코 “나는 이데올로기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_루이 알튀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p. 202.)


  “혐의를 끝까지 부인한다면 유죄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정하세요. 1992년으로 하죠. 그때 살인을 교사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사건 당시 개정 이전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살인교사의 공소시효는 15년입니다. 검사는 조 회장님이 혐의를 갑자기 인정할 거라 예상하지 못할 테니 대비가 안 되어 있을 겁니다. 또 피해자가 고아이기 때문에 대비한다고 한들 거짓말을 반박할 방법이 없겠죠. 그러면 법원은 공소시효만료로 면소를 결정할 겁니다."

  “무죄를 주장하면 유죄가 되고, 유죄를 주장하면 무죄가 된다. 그게 될 법한 소리요?"

  “그냥 게임이라고 생각하시죠. 그럼 편할 겁니다.” (p. 223.)


  도저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오후에 사무실을 나섰다. 차를 타고 무작정 나서 법원 근처를 맴돌다가 아현동으로 갔다. 동네는 저번에 갔을 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이미 사방에서 건축공사가 바쁘게 진행 중이었다. 맨땅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철근들은 강건한 싹처럼 지하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낮추며 자라났다. 재래시장은 철거되었다. 비린 국물의 국밥은 이제 먹고 싶어도 맛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국밥집 아주머니는 어디로 갔는가. 다른 곳에서 또 그 맛대가리 없는 국밥을 팔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세상에 주어진 하루마다 많은 생물들이,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상들이, 많은 문화들이 도태된다. 그것은 멸종이고 멸종은 적자생존의 법이다. 연민은 자연의 법을 거스르는 허위인가 나는 진화론자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연민은 왜 진화했는가. 그렇다면 연민은 왜 도태되지 않았는가. (p. 256.)


(전략) 법정을 나설 때 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으스대는 얼굴. 이 법정에서 자신만이 정의롭고, 자신만이 솔직하고, 자신만이 실천주의자라고 공표하는 확신에 찬 얼굴. 정의의 진짜 적은 불의가 아니라 무지와 무능이다. 역사를 통틀어 그래 왔다. 집중이 안 됐다. (p. 383.)


  신성모독죄로 아테네 법정에 제소되었을 때 소크라테스는 역사에 남을 달변으로 자신을 고발한 자를 반대신문했다. 재판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는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행위가 되레 범죄로 여겨졌다. 배심원은 500명이었다. 500명이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 꼭 필요한 현인이라고.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만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주장했다. 배심원 여러분! 저에게 합당한 판결은 사형이 아니라, 아테네 영빈관이 대접하는 만찬입니다. 그게 기소된 피고인의 주장이었다. 그 터무니없는 오만에 소크라테스의 편이었던 배심원들이 다 달아났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은 선고받았다. (p. 392.)


  봄이 온다.

  태양이 창궐하고 계절이 마땅한 권리를 나눈다.

  새들은 날의 오름을 노래하고 바람은 보아야 할 시절을 이르되, 지구의 땅과 물 위 사람들을 제하고는 결코 法의 이름을 빌리지는 아니하리라.(끝) (p.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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