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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실의 시대, 역사 부정을 묻는다 (강성현, 푸른역사, 202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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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실의 시대, 역사 부정을 묻는다 (강성현, 푸른역사, 2020.)

Dog君 2021. 5. 21. 01:14

 

  그러나 선금('전차금') 때문에 '자유 폐업' 규정은 현실에서 작동하기 어려웠다. 창기는 대개 그런 규정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설령 알고 있더라도 창기가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우선 창기가 경찰에 폐업을 신고할 때 업자 등의 방해가 매우 심했다. 만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운 좋게 폐업계가 수리되었다고 해도, 이번에는 업자가 민사재판을 걸어 선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선금을 성판매로 갚도록 하는 계약은 당시 일본 민법상으로도 위법이었다. 그러나 재판소는 이 계약을 형식상 창기가업 계약과 금전대차상의 계약으로 나누어 전자는 위법이지만 후자는 유효하다며 결국 선금 반환을 명령하는 판결을 내렸다. 따라서 돈을 갚을 수 없는 창기는 공창제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108~109쪽.)

 

  고바야시 히데오는 도쿄를 축으로 한 동심원의 주변부로 가면 갈수록 인플레가 격렬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 버마의 경우 1943년 10월 이후로 인플레가 극심했다.
  (...) 따라서 1만 1,000엔은 도쿄에서는 132엔의 가치밖에 안 되었다.
  (...) 전쟁이 끝났을 때 도쿄의 물가는 1.5배 상승하는 것에 그쳤지만, 버마는 1,800배까지 올랐다. 버마는 도쿄보다 1,200배나 높은 상승률의 인플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은 문옥주의 총저축액이 2만 6,551엔이고 이것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8억 3,000만 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제사가인 그가 전시 하이퍼인플레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는 자신이 정해 놓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일본 극우파의 의도적 선별과 왜곡 수법을 실증주의의 외양으로 단순 활용하고 있다. (118~119쪽.)

 

  그리고 화폐 수입에 있어서 이것을 송금하는 것이 허용되었더라도 조선에서 그것을 현금으로 인출하는 데는 큰 제약이 있었다. 동남아 지역의 인플레가 격증하자 일본 정부는 송금액을 제산했고, 강제 현지 예금제도, 조정금 징수제도, 예금 동결조치 등을 도입하여 동남아 지역의 인플레가 일본과 조선으로 파급되지 않도록 했다. 결국 전혀 가치가 없는 군표를 모은 꼴이 되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122쪽.)

 

  알렉스 요리치는 'いあんふ[Ianfu]'(위안부)라는 소리를 듣고 당시 니세이 병사들이 참고했던 사전에 따라 prostitute라고 번역했다. 다시 말해 prostitute는 현재의 의미에서 '창녀'를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위안부'를 지시, 번역하는 특정 개념이었다. 미군 번역·통역 병사를 육성하는 군정보대언어학교MISLS가 펴낸 용어사전에는 일본어 단어 '軍慰安婦(군위안부)'가 나오면 'army prostitute'로 번역하도록 제시했다. 이렇게 보면, '직업적 종군자'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군 위안부'의 동어반복이 되는 셈이다. (145쪽.)

 

  문옥주의 증언이 여러 개의 큰 따옴표 문장으로 분절된 채 연이어 구성되어 있다. 한 번에 말한 듯 보이지만, 1992년 봄부터 1995년 여름에 걸쳐 여러 차례 듣고 기록한 것이다. 평생 일해야 했다는 말과 남자들은 나를 좋아했다는 말이 한 문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구술 녹취 원본을 들어보지 못했지만, 모리카와가 그렇게 연결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더 말하고 싶지 않은 전시 '위안부' 생활과 생환, 한반도에서의 또 다른 전쟁, 가부장제를 온몸으로 지탱했으나 '위안부'였음을 정말 어렵게 고백하자 관계를 끊는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삶. 죽음을 앞두고 문옥주는 군 '위안부' 생활 속에서도 자신이 빛났다고 생각하는 생의 한 장면,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줬지만 죽은 애인 야마다 이치로, 고생 많았던 불쌍한 일본 병사들을 떠올린다.
  (...) 그것은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들이 끝내 살아낸 삶과 경험들,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할 길 없었기" 때문에 60대가 되었지만 그 답을 찾겠다는 할머니들의 각기 나름의 방법이었다. 문옥주의 증언은 끔찍한 경험과 빛나는 장면, 자기 가족을 먹여살린 장면이 한데 맞물리면서 동거하고 있다. (167~168쪽.)

 

  전쟁을 치르는 국가가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역할은, 일제든 한국이든, 변함없이 위안·위무·위문이었다. 각종 오락과 유흥은 물론 성(섹슈얼리티)의 제공을 포함했다. 여성사의 시각과 방법으로 한국전쟁을 수행한 이임하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남성 국민을 '병사형 주체'로, 여성 국민을 '위안형 주체'로 젠더화했다. 위안, 위무, 위문은 위안하는 주체의 계급에 따라 민간외교의 활동으로 치장된 오락, 유흥, 성의 제공이거나, 유엔군 위안소에서 은혜로운 미군의 노고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유흥과 성의 제공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219쪽.)

 

  (...) 재료들(사실들)을 두고 세세하게 전문적으로 싸울수록 그 세세함과 전문성에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회피하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다. 요즘처럼 탈진실시대에는 팩트 싸움이라는 게 진영논리의 다툼으로 흘러갈 때가 많다. 서로 자신이 팩트고 상대방이 팩트가 아니라는 식의 공방을 하다보면, 반지성주의가 싹을 틔우고 맹렬히 자란다. 어쩌면 역사수정주의의 효과는 역사를 부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팩트'에 대한 냉소, 즉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따분하고 재미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무감각하게 하는 데 있지 않을까? 팩트'주의'(팩트를 주장하는 사람, 상황, 구도를 주의하라!)나 팩트'충'에 대한 혐오는 이를 반증하지 않을까? (241~242쪽.)

 

  (...) 역사적 진실의 문제는 '과거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피해자에게 진실을 추구하는 문제는 차별과 배제로부터 벗어나 인간 존엄을 회복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정론자들이 진실을 억압하고 부인할 때,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차별받고 배제되어 왔던 감정을 되새기는 체험을 하게 되고 인간 존엄이 크게 침해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결론적으로 나는 진실 논거도 역사부정죄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 요건이라 판단한다.
  정리하면, 역사부정론자들이 학문·사상·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반인도범죄 등 매우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해 진실을 부인하고 왜곡하는 것은 진실·피해자·인간 존엄·차별의 논거를 바탕으로 처벌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엄격하고 제한된 역사부정죄 입법을 신중한 방식으로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48쪽.)

 

교정. 1판 2쇄

61쪽 19줄 : 이배영 -> 이배용

64쪽 10줄 : 21일 자 -> 21일자

119쪽 13줄 : 하이퍼인플레 맥락을 -> 하이퍼인플레의 맥락을

119쪽 15줄 : 실증주의 외양으로 -> 실증주의의 외양으로

176쪽 20줄 : 야쿠네 겐지로 -> 아쿠네 겐지로

219쪽 12줄 : 위안·위무·위문이었다 (같은 문단 다른 줄에는 "위안, 위무, 위문"으로 나오므로 표기 방식 통일)

233쪽 9줄 : '위안부'의 정의 범위에도 -> '위안부'의 범위에도

248쪽 5줄 : 차별과 배제되어 왔던 감정을 -> 차별받고 배제되어 왔던 감정을

248쪽 6줄 : 체험을 겪게 되고 -> 체험을 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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