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추월의 시대 (김시우 외, 메디치미디어, 2020.) 본문
1. '세대론' 책에는 좀처럼 손이 안 간다. 『88만원 세대』가 나왔을 때는 이야, 하면서 읽었지만 그 이후로 쏟아져 나온 '세대론'(혹은 '세대'를 전면에 내세운) 책은 대체로 다 불만족스러웠다. '내가 더 좆됐어요' 내지는 '이 새끼들아, 이게 다 너네들 때문이다'에서 딱히 더 나아가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세대론'이란 『88만원 세대』 이래로 주어와 목적어만 몇 군데 바뀌었을 뿐 서술어는 거의 그대로인채로 똑같은 소리만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2021년 현재까지도 이런 경향은 그대로인데, 『K를 생각...』 같은 괴작에 쏟아지는 세간의 관심과 상찬을 보면 당분간 나아질 전망도 안 보인다.
2. '세대'를 말하고 있기는 『추월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책에는 '내가 더 좆됐어요' 대신 '우리 세대(80년대생)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담겨 있다. 동의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내게는 일단 그것만으로도 합격점이고 기존의 세대론에서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고 느껴진다. (대부분의 독자를 당황케 하는) 마치 '범죄와의 전쟁'의 화보를 연상케 하는 저자들 사진마저도 '무언가를 해내고 말 것이다'라는 의지의 표현인 듯 느껴져서 책 내용과 잘 조응하게 컨셉을 잡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후까시 터지는 표정과 자세 때문에 책을 처음 펼치고 한 번 빵- 터지고 시작하는 것만큼은 도저히 어쩔 수가 없다...)
3. 나는 '우리 세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자기 세대에 대한 짙은 자신감이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더 좆됐어요' 류의 세대론은 자기 세대의 경험을 (부정적으로) 특권화한 다음에 그 책임을 기성 세대로부터 찾는 식으로 도출된 결론이기 때문에 절절한 피해담 이상의 무엇을 보여주지 못한다. 현실적인 실천방안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 책은 80년대생을 '낀 세대'가 아니라 앞뒤 세대를 '매개할 수 있는 세대'로 본다. 즉, 소극적으로 규정당하는 세대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는 세대라는 것이다. 앞뒤 세대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책에서는 "살해"라는 표현을 썼다.) 대신 선택적으로 취사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 사회공동체 내에 각자의 역할과 경험을 가지고 공존하고 있는 다른 세대들 사이에서 80년대생만의 장점을 긍정하는 자신감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나는, 『서울리뷰오브북스』 2호에 실린 서평에 "자기 세대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가 다른 세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느 정도 뻔한 결말이다"라고 한 것에 이견이 있다.)
(...) 전후좌우를 고찰해볼 때 1980년대생들은 기성세대의 열등감을 이해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이자, 본인들이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나 선진국에 진입했음을 명확하게 인지한 마지막 세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1980년대생들은 선배 세대가 서로의 성과를 내세우며 인정 투쟁을 하는 산업화와 민주화 모두의 수혜를 뚜렷하게 받고 자란 첫 세대이기도 하다. (...) 산업화의 물적 기반과 민주화의 공기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1980년대생들은 비록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났음에도 산업화와 민주화가 모두 위대한 성취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1980년대생만의 특수성이 생겨났다. (20쪽.)
(...) 후속 세대에 필요한 방법론은 적어도 가장 힘센 두 세대에 대한 '살해'는 아닐 것이다. 앞서 말했듯 '살해'가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핵심적인 오류가 상대방을 부인한 것이기에, 후속 세대는 일단 출발선에서 두 선배 세대의 성과를 모두 긍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그들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와 관련해서 86세대에 대해 우리 저자들이 제안하고 싶은 실천적인 대안은 '역사화해서 집에 잘 보내드리기'라는 방책이다. (161~162쪽.)
4-1. 『추월의 시대』의 이러한 자신감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도 관련이 있다. 한국에서 역사란 현재의 권력관계에 대입하여 설명되는 예시 정도에 그치거나 혹은 특정 집단의 정당성을 확인/부인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책의 표현을 패러디하자면 '역사의 (지나친) 현대화'라고나 할까. 그래서 한국사, 특히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대체로 'Yes or No'(좀 있어보이게 쓰자면 'to be or not to be' ㅋㅋㅋ)로 수렴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역사로부터 무언가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역사를 '역사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냥 역사를 현재로부터 뜯어내서 일단 그 자체로 텍스트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거다. 그래야 그로부터 얻어낼 것은 얻어내고 버릴 것은 버릴 수 있지 않을까. 당대의 모순과 양립불가능성은 그냥 당대의 것으로 그대로 남겨두고 현재의 우리는 현재의 우리대로 고민하면 안 되겠냐 이거지.
(...) 군부독재 세력은 "경제성장과 안정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민주화를 말하는 빨갱이들을 선택해서 혼돈의 세계로 가든지 양자택일하라"고 윽박질렀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현재 본인들이 노동으로 일궈낸 경제성장의 성과 자체를 불신하고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양자의 논리는 견고했으며, 하나를 받아들이면 그 논리 체계 전부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보였다. (...) 그러나 시민들은 그런 논리는 필요 없고 내게 필요한 것을 둘 다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경제성장도 하면서 최소한의 자유도 달라고, 더 이상 이렇게 억압하지 말라고 했다. 일관성의 세계를 사는 이들에게 이것은 땡깡이었고(군부독재 측에서 볼 때), 아니면 충분히 계몽되지 못한 무지몽매함이었다(민주화운동 세력 측에서 볼 때).
하지만 결국 이들만이 세상을 바꾸면서 균형을 맞추는 사람들이었고, 그 요구가 실제로 세상을 바꾸었다. 그것은 땡깡이나 무지몽매함이 아니었다. 다만 삶이었다. 삶은 일관적이지 않다. 일관성의 관점에서 삶을 들여다본다면 삶은 모순투성이일 것이다. 그러나 모순은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에서 삶을 재단하는 그 말 속에 있다. 그 일관된 말 속에 삶을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삶은 모순이 되는 것이다. (...)
후세대의 관점에서는 선악善惡을 기준으로 가치판단을 하고 전체를 도려낼 이유가 없다. 다만 호오好惡를 평가하고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멀리해도 된다. 당대의 사람들을 평가할 때는 그 시대 사람들의 딜레마를 깊이 숙고해야겠지만,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중화학공업 정책은 긍정하면서 유신은 부정하고, 민주화운동은 긍정하면서 주체사상은 부정하는 것이 모순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게 모순이라는 태도가 과도한 일관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79~81쪽.)
여기서 '역사화해서 집에 잘 보내드리기'라는 방책이 가지는 전략적 함의가 드러난다. 히어로의 위선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히어로를 퇴장시킬 수 없다. 유일한 방책은 히어로가 이미 자신의 미션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음을 깨닫게 하는 것뿐이다. 사실 한국의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는 역사상 모든 사회에 존재했던 그 어느 세대와 비교해도 본인들이 의도한 바를 멋지게 성공시킨 세대이다. (...)
'역사화해서 집에 잘 보내드리기'에서 '역사화'는 '성과를 인정하고 상대화하기'라는 작업을 포괄한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폐쇄적 서사에서 걸어 나와 상대화할 때 양쪽 다 대한민국에서 성공을 거두었음을 인지할 수 있다. (...) 그 점을 보여주면서 두 성공한 세대를 인위적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은퇴 연령에 도달했을 때 집에 잘 보내드리는 것이 후속 세대의 임무가 될 것이다. (165~166쪽.)
4-2. 사실 이런 태도는 예전부터,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그래야 하지 않을까'하는 정도로 막연하게 고민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의외로 이 책에서 이런 자세를 발견하게 되어 몹시 반가웠다.
5. 그런데 이 책의 단점 역시 이 장점으로부터 비롯한다. 이 책은 궁극적으로는 세상에 대한 '분석'보다는 '정책 제안'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실제로 저자 중 한 사람이자 헬마우스 채널의 CP인 이의 개인 SNS도 특정 정당 소속 정치인의 입장에서 쓰는 글이 많다. 이 책이 논증의 꼼꼼함에서 다소 소홀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애초 목적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단점은 바로 다만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이 책은 이른바 '중도' 혹은 '이도 저도 아닌 중간의 대다수'를 위한 정치를 지향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문제는 이 '중도'라는 층이 그야말로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집단이다보니 이들을 어떤 특정한 정치적 구호나 정책으로 대변하는 것이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는 거다. 개인적으로는 과연 그런 구호나 정책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에 좀 더 서술에 힘을 실렸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이 책에는 그에 대해서 시원한 응답이 안 보이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정책 제안'이라는 측면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몇% 부족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6. 하지만 적어도 내게 『추월의 시대』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좀 더 크게 다가오는 책이다. 이 책에 대한 박한 평가의 대부분은 주장의 선명성을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하는 논증에 맞춰져 있는 것 같은데, 이 많은 필자들이 이 짧은 분량으로 책을 쓴다고 했을 때 저자들 스스로가 이미 그런 약점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견했을 것이다. 따라서 저자들은 논증을 치밀하게 전개하기보다는 최대한 넓은 범위로 다양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자 임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저자들의 의도가 그랬다면 그 의도는 (적어도 내게는) 꽤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최소한 기존의 세대론이 갖고 있던 무기력함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은 보여주었잖은가. 물론 『추월의 시대』에서 던진 화두들을 어떻게 주워담을지는 전적으로 저자들의 몫이다. (던졌으면 주워담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러니 독자인 나는 헬마우스 팀이 『추월의 시대』 다음으로 내놓을 결과물을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겠다... 머 그런 결론.(...이라고 쓰고보니 헬마우스가 유튜브를 중단... 음?)
ps. 책 내용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와 상관없이 아래 부분에 밑줄을 진하게 그었다. 이 부분에 밑줄을 그으며 예전에 들었던 미디어 특강 생각도 나고 그랬다.
(...) 지금은 모두가 TV 대신 유튜브를 시청하고 있다. 기본적인 촬영기법이나 편집의 완성도도 그렇고 출연자들의 '훈련된 진행력'이나 유명세도 평균적인 유튜브 크리에이터들보다 훨씬 더 높은데도 말이다. 이런 현상이 가능한 것은 유튜브가 미디어 플랫폼인 동시에 SNS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단순히 영상 콘텐츠를 보는 것뿐 아니라 누군가와 '관계 맺음'이라는 행위를 하기 위해 유튜브를 본다는 것이다.
(...) 유튜브 세계에는 관계가 있다. 비록 나의 지인들과 직접 연결되는 SNS보다는 훨씬 더 일방향일지라도, 화면에 등장하는 크리에이터와 내가 일상의 시간들을 함께한다는 감각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상 사이사이의 빈 시간을 유튜브 크리에이터와 함께하는 시청 습관을 들이게 된 것이다. 누구나 지금 혼자 있다는 감각은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 (...) (112~113쪽.)
ps2. 그 외에 밑줄 그은 부분들은 아래와 같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사유 실험을 생각해볼 수 있다. 각 국가의 상위 1퍼센트의 역량을 비교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미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것이다. (...)
그렇다면 상위 10퍼센트의 역량을 비교한다면 어떨까? 일본이나 유럽이 우위를 보일 것이다. (...)
그러면 20퍼센트, 아니면 30퍼센트를 비교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때부터는 한국이 앞서 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는 사람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 그만큼 피곤한 사회다. 서로 아득바득 경쟁하며 싸우다가 헛힘만 쓰고 아무도 이득을 보지 못하는 '헛똑똑이의 역설' 같은 상황이 왕왕 펼쳐지기도 한다. 그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시민들이 교육을 중시하고 열심히 살아보려고 한다는 사실 자체는 한국 사회의 큰 경쟁력이다. 한국 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더 나은 성취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사실상 이것밖에 없다. (34~35쪽.)
이렇게 볼 때 1987년 6월항쟁을 지지하여 제5공화국을 무너뜨린 시민들의 3분의 1 정도가 직후의 대선에서 신군부 출신 노태우 후보를 지지했다는 것도 놀랍지 않다. 그들은 군부독재 권위주의 정부를 붕괴하는 데는 동의했지만, 그 정부를 주도한 세력을 완전히 퇴출시켜야 한다는 견해까지 동의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1987년 대선 당시에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에게만 주목하여, 후보 단일화 실패가 민주화의 진전을 좌절시켰다는 식으로 규정하곤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분석하는 중도파의 역할이라는 맥락에서는 다른 측면도 보인다. 군부독재 권위주의 정부를 붕괴한 후에 그 세력에게 민주적 정당성이 있는 권력을 줘도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군의 시민 그룹도 존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74~75쪽.)
(...) 86세대는 당시에 정치적 승리를 거뒀고, 특히 2004년 총선에서 동년배 정치인들이 진입하기는 했으나 아직은 사회경제적으로 기성세대의 주류는 아니었다. 86세대의 장기독재를 지적하는 논의들에서는 이 점을 간과하는 경우가 있다. 정치권, 언론계, 대학, 그리고 일부 상위권 대기업의 풍경만을 살핀다면 2000년대 중반 어느 시점에 주류가 된 그들이 쭉 그 자리를 놓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담론계에서 자주 묘사되는 영역이기에 사회의 상당 부분을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렇다고 사회 전체는 아니다. '86세대 장기독재론'에서는 이러한 영역들을 사회 전체로 확장해서 그들의 권력을 과잉되게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이철승 교수의 논의조차 그렇다. (175~176쪽.)
그렇지만 이영훈의 서술에서도 1950년대 한국의 역동성이 일부 엘리트들의 특성이 아니라 당대 한국인의 저력이었다는 점을 숨길 수는 없다. 특히 교육혁명과 농지개혁을 통한 농촌의 자작농 경제 확립 문제에서 더욱 그렇다. 교육혁명은 정부의 공로도 되지만 당대 한국 사회 시민들의 강렬한 욕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교육기관과 학생의 폭증, 외국 유학생의 증가, 공무원 단기시찰이나 장교들의 해외 군사훈련 증가 등은 엘리트의 지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1950년대 역시 암흑의 시대가 아니라 1960년대 이후의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능력을 축적하는 시기였다고 이영훈은 지적한다.
이 감동적이기까지 한 설명을 한국 전근대사라는 배경과 떨어뜨려 설명할 도리도 없다. 이영훈이 저주를 퍼부으면서까지 부정하려고 했던 조선왕조의 문치주의와 성리학 특유의 주지주의가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렵다. (291~292쪽.)
박정희와 일본 우익의 관계는 어떠했던가? 박정희는 영원히 일본인들의 '꼬붕'으로 남았던가? 아니면 한국을 성장시켜서 그들의 뒤통수를 쳤는가? 박정희는 차라리 스스로 천황이 되고 싶었지, 일본 천황의 신하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박정희가 되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1960년대 한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본의 하위 파트너로서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시작하는 것이 경제성장을 위한 최선책이었다. 그리고 한국은 수십 년간 사력을 다해 일본의 하위 파트너 역할에서 결국 탈출했다. 박정희가 다시 살아난다면 어디에 더 눈길이 가겠는가? 한국이 눈부시게 성장하여 일본과의 무역분쟁에도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게 된 현실일까, 아니면 자신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는 사실일까? (...) (345쪽.)
교정. 초판 1쇄
75쪽 2줄 : 권위주의 정부를 붕괴한 후에 -> 권위주의 정부를 붕괴시킨 후에
126쪽 1줄 : 즉, 일반 응답자들은 발전국가에 대한 지지가 2개 응답을 합산해서 3분의 1을 넘을 정도로 많았다. (이 문단이 전반적으로 어딘지 모르게 서술이 이상하다...)
306쪽 밑에서 6줄 : 이양할지에 대한 -> 이앙할지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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