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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은둔 사이 (김대현, 오월의봄, 202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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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은둔 사이 (김대현, 오월의봄, 2021.)

Dog君 2023. 3. 10. 14:22

 

  저에게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입니다. 제 경험과 감각의 범위가 좁으니 책으로 그 범위를 넓혀보려고 한다...고 설명하면 될까요. 제가 알지 못하는 경험과 감각을 저는 책을 통해 약간이나마 살펴보곤 합니다. 애초에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저와 다른 정체성을 조금이나마 알아보려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런 애초의 목표는 대체로 온전히 달성되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일생에 걸쳐 쌓아온 정체성과 경험을 단 몇 시간의 독서경험으로 이해하는 것이 말처럼 쉬울리가 없으니까요. 이런 사실과 이런 생각과 이런 경험이 있구나...하는 정도만 혀끝에서나마 느껴진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요.

 

  의외로 이 책은 저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데는 성공한 것 같습니다. 성소수자의 '소수성' 혹은 '규범으로부터의 일탈' 같은 것들을 곰곰 생각하다보니 도리어 '평범함' 혹은 '정상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거든요. 대부분의 정체성에서 메이저리티에 속한 제가 무의식적으로 그려오던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평범하지도 당연하지도 않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저도 입으로는 올바른 척 말하고 글쓰고 다니지만 종종 무의식 수준에서 어쩔 수 없는 한남아재 본능이 툭툭 튀어나올 때가 있어서 스스로 당황스럽고 민망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독서경험을 통해서 저의 '평범함과 정상성을 희구하는 무의식'을 다시 한 번 들여다 봐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소수자들이 게토에 모이는 이유는 그곳에서라도 스스로 자연스런 존재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저 처음부터 거기에 그리고 살았던 사람처럼, 그게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동네가 이 하늘 아래 애석하게도 그곳밖에 없기 때문이다. 길가의 돌이 스스로 돌임을 설명하지 않고, 이성애자들이 스스로 이성애자임을 설명하지 않듯이, 애써 남에게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나를 그저 하나의 자연으로 놓아두어도 되는 시간이 그들에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소수자의 커밍아웃이 그 자체로 운동이 되고 선언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앞서 말한 저 모든 걸 뚫고 남에게 또 다른 '부자연'으로 받아들여질 스스로를 감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커밍아웃으로 이성애 사회의 구조적 억압이 사라질 리 없음에도, 그것이 조금이라도 허물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잣니에게 쏟아질 여러 불편과 시선을 감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반이 나는 준비됐는데 왜 내게 터놓고 살지 않느냐 묻는다면, 슬프게도 이 사회는 한낱 당신의 선의로 구성돼 있지 않고, 나아가 그것은 높은 확률로 선의가 아니라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 답할 수밖에 없다. (92~93쪽.)

 

  나는 드라마에서 자주 본 대로 (...) 연애를 하게 될 것이다. 그녀와 떨리는 손을 쥐고 마음 졸여가며 아껴둔 스킨십을 나눌 것이고, 방송에서 본 대로 이벤트를 하고 선물을 나눌 것이다. 그런 몇 번의 연애 끝에 하얀 면사포를 쓴 아내와 결혼을 할 것이고, 내 집에서 오손도손 지내며 내 얼굴을 똑 닮은 아이를 가질 것이다. 매 아침 식탁엔 따뜻한 밥이 오르겠고, 내 아이는 썩 공부를 잘할 것이며, 그런 아이의 재롱을 즐거이 보아가며 화목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 (...)
  그러나 이성애자들 모두가 실제로 그런 장밋빛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저 장대한 생애사의 관문마다 주어진 교범에 맞게 역할을 다하는 일은 쉽지 않은 퀘스트이자 만만찮은 강도의 노동이 필요하다. 연애와 결혼과 집 장만과 육아와 저축과 자녀교육과 노후를 막상 맞닥뜨렸을 때의 무게는, 으레 그렇게 되리라던 이성애의 교범보다 언제나 무겁다. 자연스러운 전개처럼 이어지던 그 교범들의 구체적인 내용은 실은 늘 당사자가 새로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 창발의 실천 가운데 이성애를 포함한 인생은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힘은 그것들에 내 마음이 동한다는 것이다. 이성애는 주어진 제도이고 교범이지만, 거기에 동하는 이성애자의 마음은 전부 다른 색깔과 경로를 갖는다. 따라서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은 언제나 남들이 떠드는 것 바깥에 있다. 인생이 재밌고 탄실하려면, 주어진 제도를 따르든 말든 그 마음의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
  이성애의 세계에 살고 싶어 이성애를 좇아왔는데 그 삶의 핵심이 이성애 제도가 아니라면, 그 교범을 따르는 것 외에 인생에서 몸소 챙겨야 할 게 이토록 많았던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이성애 동산의 그 누구도 내게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썩 내키지도 않았던 몇몇 경험과 관계들 사이에서 내가 무얼 원해왔는지 새로 더듬어보지만, 그마저도 쉽지는 않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도 습관과 훈련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새 무엇엔가 배신당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사회는 인간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을 너무 가르치지 않아왔던 게 아닌가. 그런 것쯤 모른 채 살아도 괜찮다고, 한때 나를 안심시켰던 그 모든 것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161~163쪽.)

 

  (...) 퀴어들의 그림자가 남김없이 들춰질 때는 다름 아닌 그들 중 하나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다. 가족에게 커밍아웃하지 못한 퀴어의 경우, 그의 빈소는 함부로 생전 고인의 정체를 발설하지 말아야 할 함구의 장이 된다. 또는 석연찮은 이유로 목숨을 잃은 경우라면, 고인의 사인은 빈소에서조차 함부로 캐묻지 말아야 하는 침묵의 공동空洞 속에 내버려진다. 그런 공간에서 고인의 죽음이 적확히 추모되기란 힘들다. 말하자면 그는 죽어서까지도 벽장 속 신세에 머무는 것이다.
  (...)
  한 사람의 죽음에 이리도 많은 염려가 필요한 것이야말로 주말마다 게토에 모여 밝게 웃는 퀴어들이 실은 소수자임을 드러내는 뼈저린 증거다. 퀴어 커뮤니티는 서로가 소수자임을 눈치 없이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그만큼, 누군가의 죽음에 섣불리 슬퍼해선 되는 묵계가 흐르는 곳이다. 섣불리 슬퍼해서는 되는 슬픔이라니, 슬픔은 소수자의 삶처럼 어딘가 하나 나사가 빠진 모양새다. (17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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