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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벌과 사대 (이규철, 역사비평사, 202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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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벌과 사대 (이규철, 역사비평사, 2022.)

Dog君 2023. 3. 5. 12:51

 

  조선의 대외정책은 흔히 사대주의로 설명됩니다. 태조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한 계기인 위화도 회군 당시에 내세운 명분 중 첫 번째가 '이소역대(以小逆大,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함)'가 불가하다는 것이었으니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대주의가 애초에 DNA에 새겨진 나라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따르면 그런 우리의 상식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15세기에 활발했던 대외정벌, 특히 여진족에 대한 정벌은 사대주의로는 좀체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여진이 오랑캐라고는 하지만 이들에 대한 조선의 독자적인 군사행동은 이미 그 자체로 사대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인데다가, 여진족에 대한 군사행동은 명의 강역을 침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 책은 여진족에 대한 장악력을 두고 조선과 명나라가 서로 경합하는 관계였다고까지 말합니다. 흔히 15세기의 대외정벌은 여진과 왜구의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설명되곤 하지만 당시 조선이 보였던 계획성이나 치밀함을 생각하면 이는 오히려 대외적 영향력 확대를 노린 조선의 적극적 군사행동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죠.

 

  이성계가 회군 당시 들었던 '이소역대' 역시 상징적인 의미가 강할 뿐 그보다는 나머지 3개의 현실적 이유(농번기, 왜구의 위협, 장마철)가 회군의 진짜 이유라는 최근의 연구들까지 더하면 15세기 조선의 대외정벌에 대한 우리의 상식은 상당 부분 수정되어야 합니다. 어디 이 뿐인가요, 조선 초기에는 공민왕의 공격적인 대외정책 기조가 이어져 북방 영토를 개척해야 한다는 인식도 꽤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고 하고요.

 

  그러니까 적어도 15세기까지 사대란 어디까지나 국왕권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된 것일 뿐 모든 것에 앞서는 지고의 가치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정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세종과 세조는 명 황제의 지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거부하기도 했다는 것이죠.

 

  이 책은 정치적 효과를 위해 대외정벌과 사대명분을 활용하는 기존의 양상이 변화하는 시점으로 성종대를 꼽습니다. 상대적으로 국왕권이 약했던 성종이 사대의 명분과 논리에 적극 의존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성종조차도 대외정벌을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는 예외가 없었던 것이, 여진 정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만큼은 성종 역시도 명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종의 대외정벌이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하면서 성종은 대외정벌의 하이리스크를 그대로 떠안게 되었고, 이것이 후대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이 책의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설명은 성종대에서 멈추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성종대 이후의 상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종이야 취약한 왕권 때문에 그랬다 치더라도, 왜 이후의 왕들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그토록 강하게 사로잡혔는지 이 책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이에 대해서는 계승범의 『중종의 시대』를 참고하면 어떨까 합니다. 『중종의 시대』 역시 이 책과 비슷하게 중종대의 몇 가지 조건들이 작용한 끝에 성리학적 명분론이 조선 사회의 압도적 가치로 등극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정벌과 사대』와 『중종의 시대』를 나란히 읽고 나면 성리학적 명분론이 조선 사회를 장악해 가는 과정이 나름 매끈하게 이어진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저에게는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하나 남습니다. 이 책은 대외정벌이 국왕권과 국정 장악력 확보에 있어서 중요한 수단이었다고 말하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국왕권과 국정 장악력의 확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설명이 명확하지 않은 것 같거든요.

 

  성종은 이게 비교적 명확하게 설명됩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수렴청정을 거쳤고 수렴청정 이후에도 대비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에 대외정벌 같은 하이리스크-하이리턴을 노릴 필요가 있었죠. 하지만 이러한 설명이 태종과 세종, 세조대에는 상대적으로 불충분하다는 느낌입니다. 태종과 세종, 세조에게도 대외정벌은 하이리스크였을텐데 이들이 이를 감수하고서라도 대외정벌을 추진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대외정벌의 성공을 통해 그들이 얻은 하이리턴은 또 무엇인지, 독자로서는 궁금함이 생깁니다.

 

  글쎄요, 조선시대 연구자도 아닌 제게 이 질문이 해결될 수 있는 기회가 과연 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잘 기억해놨다가 저자를 실제로 뵐 일이 있으면 여쭤보거나 혹은 다른 책을 통해 해결해야겠지요.

 

  조선의 국왕들은 사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대외정벌의 필요성 역시 강조했다. 그들은 대외정벌의 시행이 사대명분에 충돌된다는 비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15세기의 조선은 사대를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가치로 인식했던 것이 아니라, 국정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정치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정벌 추진과 시행 과정에서 나타났던 조선의 대외의식은 정치적 목표에 따라 변용되었다. 조선에게 사대는 중요했지만 그 위에는 국왕권(國王權)이 위치하고 있었다. 15세기 조선의 국왕들은 누구보다 사대를 강조하면서도 상황에 따라서는 누구보다 먼저 사대의 가치를 변용시켜 적용하는 일에 앞장섰다. 국왕의 권위와 정치적 권한을 유지하고 확대시키기 위해 사대명분을 활용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이 같은 조선의 태도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났던 정책이 대외정벌이었다. 15세기 조선이 가장 공격적인 대외정책, 정벌을 자주 선택했던 이유를 생각해본다면 외부 세력의 행동에 대한 즉각적 대응으로 보기는 어렵다. 조선의 대외정책에 따라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기 때문에 정벌이 자주 시행될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조선의 대외정벌은 명과의 대립을 부를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다. 실제로 명은 조선의 여진 정책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견제했다. 이 점에서 주목되는 부분이 바로 조선의 대명의식이다. 조선은 명과 여진 사이에서 자신만의 정책을 고수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10~11쪽.)

 

  당시 조선에서 여진과 요동 문제를 두고 명과 극한적 대립까지도 불사했던 원인은 건국 세력의 북방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조선은 건국 후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여진 세력까지 포섭해서 실질적 지배력 아래에 두고자 했다. 조선은 이를 통해 북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영토를 확장하고자 했다.
  (...)
  위화도 회군을 통해 우왕과 최영 등이 추진했던 요동 정벌을 좌절시켰던 이성계와 정도전 등이 건국 후 다시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대외의식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준다. 건국 세력이 다시 요동 정벌을 추진했던 것은 최영 등이 주장했던 고국의 땅을 뺏길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이성계 세력 역시 북진의식과 정벌을 통한 국위선양이라는 가치를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성계 등은 위화도 회군의 이유로 4가지를 제시했다. 하지만 4가지 명분 중 첫 번째로 제시되었던 '이소역대(以小逆大)'보다는 나머지 3개의 현실적 이유가 회군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이 기존의 연구를 통해 충분히 규명되었다.
  그렇다면 조선 건국 세력이 다시 요동 정벌을 추진한 것은, '정벌을 통한 대외 영향력 확대와 국위선양'이라는 정책을 통해 국가 체제를 형성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 (48~49쪽.)

 

  실록의 기록에는 당시 조선이 대마도 정벌이 결정된 후 한 달 만에 227척의 전선과 17,285명의 병력, 65일분의 군량을 동원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한 달 남짓한 짧은 시간에 이를 모두 준비해서 정벌에 나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것은 조선이 대마도 정벌을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선의 대마도 정벌은 왜구 피해에 대한 응징이라는 명분보다는 다른 부분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대마도 원정군은 대규모로 편성되었지만 왜구 세력과 결전은 벌이지 않았다. 대마도를 압도할 수 있는 대규모 부대를 편성했으면서도 결전을 벌이지 않았던 것은,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는 전면전을 의도적으로 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대마도 정벌의 목적이 전투를 통한 왜구 세력의 격멸이 아니라 조선의 위력을 보이는 동시에 약탈 활동을 위축시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85쪽.)

 

  당시 조선의 중요한 대외 목표는 영토 확장과 여진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였다. 이를 위해서라도 조선은 명의 일본 정벌 시도를 사전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세종이 태종대에 비해 여진 지역에서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바탕도 이러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판단한다.
  여진 지역에 대한 정보수집이나 관심 표현은 이미 태종대부터 본격화되었지만, 대마도 정벌을 전후한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관련 활동이 적게 나타났다. 이는 대마도 정벌 이후 악화된 일본·대마도와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면서 조선의 국력을 북방 지역으로 기울일 수 있는 때를 준비하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대외적 관심은 명과 여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대마도와의 관계 악화는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들과의 관계가 불안정해진다면 조선은 남부 지역에 대한 불안 요소 때문에 북방 지역에 전력을 기울이기 어려운 상황이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90~91쪽.)

 

  (...) 세종은 집권 전반기동안 누구보다 지성사대를 강조했다. 그리고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파저강 정벌을 준비하면서 세종은 양면적 대명의식의 실체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황제의 지시를 입맛에 맞게 편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자신의 결정에 대한 명분으로 활용했다. 사대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치가 아니라 국왕의 편의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세종의 태도는 파저강 2차 정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정벌을 통해 조선과 세종이 가지고 있던 대명의식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결국 사대명분의 가치는 국왕의 권위를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조선이 가지고 있던 대명의식의 실제였다. (138쪽.)

 

  태종이나 세종 역시 대외정벌의 실패가 가져올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특정 시점에는 정치적 결단을 통해 국정 장악력을 확보하고 국왕권을 확보하는 조치가 필요했다. 물론 국내의 사안으로도 정치적 결단을 통해 국왕권 확대나 정치 주도권 확보가 가능하다. 하지만 국내에서 시행하는 정책들은 설사 성공하더라도 미치는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국왕이 주도해서 보다 광범위한 대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했고, 이것이 대외정벌이었다.
  대외정벌은 군사력을 동원해 외부 세력을 공격하고 성과를 활용하기에 가장 좋은 정책이었다. 대외정벌을 통해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 세력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외정벌은 국왕이 정치적으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정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실패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성공할 경우 얻을 수 있는 성과가 훨씬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세종은 신료들의 강한 반대에도 정벌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시행했다.
  (...)
  세종의 의도는 정벌을 준비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대명분을 자의적으로 활용했던 모습에서도 확인된다. 그에게 사대는 어디까지나 국왕이 통제할 수 있을 때 유효한 개념이었다. 세종은 사대가 국왕의 권위를 넘어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고, 실제로 필요에 따라 자주 변용했다. 세종은 조선에서 가장 존중받아야 할 가치를 군주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의식이 대외정벌이라는 국가의 전쟁 행위를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152~153쪽.)

 

  건주위에 대한 재출병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찬반 양측이 각각 주장했던 논리에서 나타나는 대명사대의식이다. 한명회를 비롯해 재출병에 찬성했던 전승들이나 노사신을 비롯해 재출병에 반대했던 정승들은 모두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면서 중국을 속이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점을 명분으로 사용했다. 대신들의 논의 과정에서 중국을 속일 수 없다는 명제가 이전 시기보다 강력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의사결정 과정에 작용했다.
  세조 재위기까지 조선은 정벌에 관한 문제에서 항상 정치적 현실을 우선시했다. 특히 세종과 세조는 외교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황제의 지시를 직접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를 하는 데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파병에 관한 문제를 결정하고 결과를 보고하는 과정에서 명을 속여서는 안 되고 그들을 섬기는 정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
  반면 성종대에는 정벌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중국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명분과 논리가 전체 상황을 압도했다. 이 상황은 누구보다 국왕 성종이 직접 주도했다. 태조부터 세조까지 조선 초기의 국왕들은 사대를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활용하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외교 사안들을 결정했다. 사대를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했던 주체는 바로 국왕이었다. 이에 비해 성종은 조선의 국왕으로 있으면서도 정치·외교적 현실과 사대명분이 충돌할 경우 명분을 보다 의식하게 되었다.
  (...) 그렇다면 성종이 전쟁과 관련된 국정상의 핵심적 문제에서도 사대를 보다 중시하게 되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성종 역시 국왕으로서의 권위 확대와 정치 주도권 확보를 위해 사대명분을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종은 공식적으로 인정된 후계자가 아니었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거쳤다. 또 수렴청정 기간을 끝내고 단독으로 국정을 운영할 때도 대비가 건재했기 때문에 그녀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태생적으로 전대의 왕들에 비해 정치권력이 약했던 것이다. 더욱이 성종 이전의 국왕들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누구보다 강한 지도력과 권한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했다. 그들은 특히 사대명분을 활용해 군신관계를 정립하면서 강력한 정국 주도권을 확보하고 유지했다. 성종은 전대의 국왕들에 비해 국왕의 정치 주도권이 축소되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성종 역시 국왕권의 강화와 정치 주도권의 확보를 위해 사대명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237~239쪽.)

 

  결국 성종의 북정 실패는 국왕의 권위와 정치 주도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물론 성종대 국왕권 약화의 원인을 정벌 실패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대간의 태도 변화와 국왕의 정치 주도권 축소에서 대외정벌의 실패라는 요소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전대의 국왕들은 정벌의 실패가 가져올 높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준비를 통해 정벌을 시행하고 이를 성공시켜 정치적으로 유용하게 활용했다. 때문에 세종이나 세조 같은 임금들은 측근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대외정벌을 추진해서 시행했다. 하지만 성종대에는 치밀한 준비와 많은 군사, 충분한 군량 등을 확보하고도 정벌에 실패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대외정벌을 통해 정치·외교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국왕들의 시도는 성종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성종대와 같이 대규모 인원을 정벌에 동원할 수 없게 된 것은 물론, 측근들만의 지지로 대외정벌을 추진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성종 이후의 조선에서는 정벌과 같은 위험성 큰 대외정책이 시행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 조성되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성종대에 나타났던 대명의식이다. 앞에서 성종이 명의 요청에 따라 건주위 정벌에 나서면서 사대명분에 지나치게 집착했던 모습을 확인했다. (...)
  (...) 결국 성종대를 중심으로 조선의 사대의식은 명분과 정치적 이익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모두 얻고자 하던 태도에서 원리적 명분에 보다 충실한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성종의 대명의식 역시 국왕권 문제와도 연결시켜 있다. 국왕권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재위 초기의 성종은 사대명분에 의지해서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고 확대시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국왕의 정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북정을 추진하는 단계에서, 사대명분은 오히려 국왕의 권위 신장에 방해가 되는 요소라고 판단했을 개연성이 높다. 성종 스스로가 북정을 논의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명이라는 존재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성종이 북정을 추진하면서 의도적으로 명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으로 수밖에 없다. 사대가 오히려 북정 추진 과정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북정의 실패가 성종에게 왕권 확대의 기회가 아니라 오히려 왕권 축소의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대외의식도 보다 사대에 충실해지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있을 것이다. (273~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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