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길윤형, 서해문집, 2012.) 본문

잡冊나부랭이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길윤형, 서해문집, 2012.)

Dog君 2023. 3. 5. 12:48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가미카제神風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역사적 중요성과 별개로 워낙에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재이기도 해서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우리에게 꽤 친숙하지요. 폭탄을 잔뜩 실은 비행기로 적군 전함에 뛰어드는 자살폭탄공격이라니, 2023년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좀체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가미카제를 말하는 매체는 대부분 전쟁 말기의 광기狂氣나 불가해함을 말하며 놀라고 경악하는 표정을 보이기 바쁘죠.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불과 80여년 전의 일이니 대단히 멀지도 않은 일입니다. 아무리 전쟁 중이었다고 하지만 하나 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버려가며 적함에 자살공격을 감행했던 그 많은 파일럿들은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게다가 일본인도 아니고 식민지 출신의 조선인 가미카제라니요.

 

  이 책은 조선인으로 (지원이건 동원이건 간에) 가미카제가 되었던 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한 어느 저널리스트의 시도입니다. 저자는 이를 위해 당시 신문에 소개된 '미담'의 행간을 읽어보려고도 하고, 남아있는 유족과 주변인의 증언을 들어보기도 합니다. 역사연구의 그것과 별반 차이없는 많은 노력 끝에 이 책은 조선인 가미카제의 행적을 상당 부분 복원해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 덕에 독자인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조선인 가미카제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야 할 가치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가미카제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끝끝내 미완의 과제로 남습니다. 모르지요, 정말로 제국 일본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 깊이 동감했을 수도 있고, 가미카제를 통해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극복해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은 여러 추측만을 남길 뿐 속시원한 답을 독자에게 내어놓지는 못합니다.

 

  기실 이 책의 시도가 완전히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예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니까요. 나와 가장 가까운 연인이나 가족의 마음도 알기 어려운데, 80년 전 사람의 속을 어찌 알겠습니까. 역사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비슷한 시도를 했던 다른 역사책들도 비슷한 결말을 맞았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최영우·최양현의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나 박광홍의 『너희는 죽으면 야스쿠니에 간다』 역시 전쟁 당사자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시도했지만 이들이 독자에게 남긴 것 역시 마침표보다는 쉼표와 물음표에 훨씬 가까웠습니다. (물론 그렇게 질문을 남기는 것이 진짜 좋은 역사책이라고 탕수육은 생각합니다. 강형욱이나 오은영 같은 명쾌한 해답은 역사학에서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 책이 이렇게 물음표만 남발하고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이 책은 후반부에서만큼은 꽤나 단호하고 명료한 메시지를 던지는 듯합니다. 이 책의 후반부는 일본군에서 훈련받은 파일럿들이 초기 한국 공군의 주역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길게 설명합니다. 이는 꽤나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가미카제를 정식전술로 채택했던, 사람의 목숨마저도 소모성 전쟁물자로 생각할 정도로 인명경시풍조가 만연했던 일본군의 문화가 한국군으로 그대로 이어졌다는 말이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1949년 5월 공산군의 토치카에 자폭공격을 감행했다는 '육탄 10용사'의 신화는 가미카제의 그것을 쏙 빼닮았습니다. 어디 육탄 10용사만 그렇겠습니까. 국가의 부름 앞에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는 일을 칭송하고 신화화하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낯설지 않습니다.

 

  물론 누군가의 희생정신은 존중하고 기려야 마땅합니다. 당장 지금 제가 누리는 꽤 많은 것들이 누군가의 희생 덕분인 것 역시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누구나 본받아야 할 숭고한 행위인 것처럼,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장려한다면, 가미카제를 칭송하던 제국 일본의 광기어린 사회분위기와 그것이 얼마나 다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체에서는 흔히들 가미카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지만, 가미카제와 지금의 우리는 대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요. 가미카제는 그저 80년 전 제국 일본의 그것일 뿐 우리와는 완전히 무관한 일일까요.

 

  한국인들에게 독고다이는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독불장군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도곡다이는 특공대特攻隊의 일본식 발음일 뿐이다. 특공대라는 말의 의미도 다르다. 한국인에게 특공대는 일상적인 업무보다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부여받은 '정예 집단'을 뜻한다. (...)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독고다이는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 배, 어뢰형 잠수정 등을 타고 적함에 돌격해 '다이아타리體當たり 공격'(몸체공격)을 감행하는 부대를 뜻한다. 다이아타리는 기본적으로 자살공격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독고다이에 선발된 이들은 모두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일본군의 독고다이에 편성돼 전사한 이들 가운데 조선인이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한국인들에게 잊힌 주제였다. 최근 들어 조금씩 조명되고 있는 조선인 B·C급 전범, 사할린 동포,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 등과는 달리 조선인 특공대 문제에 관해서는 아직 변변한 연구서 하나 나오지 않고 있다.
  이처럼 안타까운 현실이 된 이유는 조선인 특공대의 경우 피해 당사자들이 모두 전사했고 비행기 조종이란 업무의 특성상 대상 인원이 극소수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은 유족들도 일본을 위해 자살공격을 감행한 '친일파의 가족'이라는 낙인이 두려워 사정을 드러내 말할 수 없었다. (14~15쪽.)

 

  《매일신보》 지면 속에 등장하는 조선인 특공대원들은 일본 천황을 위해 그리고 '영미귀축'을 무찌르기 위해 유구한 대의에 순하는 존재들로 그려져 있다. 그들은 눈앞에 임박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유구한 대의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살기로 한 황군의 전사들이었다. 이에 견줘 유족들의 증언 속 대원들은 그저 비행기를 좋아하던 10대 소년이자 일본의 지긋한 차별에 괴로워하던 20대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은 가족에게 상냥하고 인자한 모범생이었으며, 죽음을 향해 나가기 앞서 "동생들은 절대 군대에 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여린 성품의 소유자들이기도 했다.
  조선인 특공대원들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 진실은 아마도 두 극단의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25쪽.)

 

  (...) 불과 다섯 대의 비행기로 항공모함 두 대에 큰 피해, 경순양함 한 대 침몰이라는 믿기 힘든 전과를 기록한 것이다. 이는 일본 해군의 자존심인 구리다 함대 전체가 거둔 전과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불행은 시키시마대의 전과가 너무 뛰어났다는 데 있었다. 애초 오니시는 미군의 압도적인 항공모함 전력을 일시적으로 무력화하기 위해 특공을 도입했다. 그러나 예상을 훨씬 뛰어남는 전과를 올리게 되자 일본 군부는 이를 전세 역전을 위한 필승의 전술로 받아들이게 된다. (...)
  (...) 사실, 일본이 도입한 특공작전은 비행기를 통한 가미카제 작전뿐만이 아니었다. 일본 해군은 레이테 해전 석 달 전인 1944년 8월 24일 '해군특수병령'을 개정해 특공을 해군의 정식 작전으로 채택했다. 이후 해군은 작으느 비행기 앞에 폭탄을 장착한 채 적함에 돌격하는 오우카櫻花, 사람이 탄 작은 어뢰로 적함을 들이받는 가이텐回天, 폭탄을 가득 실은 작은 배로 적함을 들이받는 마루욘테マル四挺 등 다양한 특공 병기를 개발해 실전에 사용하게 된다.
  (...) 반성회 모임에서 간사 역할을 맡았던 히라츠카 세이치平塚淸一 전 소좌는 "군대에서는 결사를 각오하는 작전이라 해도 반드시 살아돌아올 길이 있어야 한다"며 "그것이 없는 특공작전은 결국 생명 경시 풍조를 낳아 일본 해군에게 큰 해악을 끼쳤다"고 말했다. 비행기를 통한 특공을 처음 시작한 것은 오니시였지만, '인간을 전쟁의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특공의 정신은 당시 일본 군부에 만연한 사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풍조가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넣었고, 자국뿐 아니라 주변 많은 나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39~42쪽.)

 

  김상필의 침묵은 무슨 의미였을까. 1920년대 초반에 태어나 민족적 차별에 시름해야 했던 엘리트 청년들의 내면에는 복잡한 상념이 들끓고 있었다. 김상필은 특조 지원의 이유로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의 명예"를 들었고 "그것이 결국에 있어서는 나라를 위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 다른 특공대원 노용우는 "내지의 학생 출신들이 호국의 신으로 사라질 때마다 느꼈던 미안한 마음"을 지원 이유로 꼽았고, 송효경은 "항공병이 되면 일본 청년들과 대등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속내를 밝혔다. 《매일신보》에 드러난 우악스런 구호들을 벗겨내 보면, 이들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조선인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의 극복이었다. (103쪽.)

 

  이들은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지만, 표면적인 갈등은 없었다. 정통성을 가진 중국군 출신들에 대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민씨는 "김정렬씨가 최용덕 장군 등을 인정하고 잘 모셨다"며 "대립보다는 해방된 조국의 공군을 우리가 한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곱 명 간부의 바로 아래 세대부터는 일본군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공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조종사 가운데서는 압도적인 다수였다. 6·25전쟁이 터지면서 조종사에 대한 수요가 늘자 태평양전쟁 때 실전을 경험한 막내 기수이면서 인원도 가장 많았던 소년비행병 15기 을이 크게 약진하게 된다. 이들은 1970년대까지 네 명의 공군참모총장을 배출하며 한국 공군의 중추로 자리 잡게 된다. (291쪽.)

 

교정. 초판 2쇄

25쪽 밑에서 6줄 : 엘리트들였다 -> 엘리트들이었다

38쪽 8줄 : 구리타 함대를 -> 구리다 함대를

42쪽 8줄 : 히라츠카 세이치平塚淸一 (글꼴 수정)

95쪽 밑에서 10줄 : 조선 총독부의 통계를 보면 일본의 대학과 전문학교에 재학 중이 적격자의 수는 6300명 조선의 적격자의 수는 1002명으로 확인된다. -> 조선 총독부의 통계를 보면 일본의 대학과 전문학교에 재학 중인 적격자 6300명 중 조선인 적격자는 1002명으로 확인된다.

103쪽 13줄 : 송효향은 -> 송효경은

133쪽 밑에서 2줄 : 미키三木吉之助 (글꼴 수정)

143쪽 3줄 : 쥬가에리宙返り

145쪽 5줄 : 쥬카에리宙返り (143쪽과 145쪽의 표기 다름)

304쪽 밑에서 3줄 : 존 무초John Joseph Mucho -> 존 무초John Joseph Muccio

346 밑에서 1 : 메노유目の湯 (글꼴 수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