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 (박훈, 어크로스, 2025.) 본문

저자의 명성 덕분일까요, 제 타임라인에서 벌써 몇 번이나 이 책을 보았습니다. 책이 나온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는데 벌써 감상들이 올라온다는 것은 그만큼 가독성이 높고 내용이 논쟁적이라는 뜻이겠지요. 대부분의 감상은 이 책이 역사적 변수로 주로 지목하는 개인의 리더십이나 3부에서 두드러지는 이승만에 대한 고평가 부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런 논점은 저희 역시 방송에서 언급하기도 했으니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겠고, 이 자리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최근에 저희 페이지에서 보기 드물게 대박이 난 글이 있었습니다. 어느 '진보적'(이라 자칭하는) 한국사 강사의 책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제 평생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저도 꽤 놀라고 신기했는데, 각양각색의 반응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분은 사실관계의 오류에 대한 제 지적에 공감하셨습니다만 사실 저는 역사학에서 사실관계의 확인은 너무 기초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더 문제삼고 싶었던 것은 그 책이 민족주의적 적개심을 맹목적으로 뿜어낸다는 점이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했다는 '결과'를 과거로 무한히 소급하여 일본을 규탄하고 일본의 악습을 인종적·생물학적으로 본질화하는 태도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난과 규탄에만 급급하는 자세가 현실에 무익할 뿐임은 물론이구요.
저는 그런 적개심이 어쩌면 하나부터 열까지 일본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마음상태의 다른 표현형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식민지의 잔재나 제국주의의 트라우마에 속박될 필요가 없는 정치적·경제적 기초체력을 이미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믿습니다. 해방으로부터 약 한 세대가 지나서 태어났고 민주화와 산업화 이전의 삶을 경험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80년대생 이후부터는 더욱 더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이전의 한국에게, 훨씬 이르게 근대화와 산업화를 달성한 일본은 좋으나 싫으나 의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선례이면서도, 대놓고 따라할 수는 없는 적국이었지요. 그러니 한편으로는 일본을 모방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멸시하는, 묘한 검정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싶구요.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서구와 일본이 걸었던 제국주의적 길을 따르지 않고도, 충분히 민주화와 산업화를 달성하고 '열강'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음을 증명하는 중입니다. 저는 그런 자신감과 자부심을 바탕에 깔고 있을 때 우리를 식민지배했던 일본조차도 비로소 여유있게 바라볼 수 있고 그로부터 미래를 위한 통찰도 충분히 도출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토착왜구'나 '친일매국세력'을 운운하지 않고 친일부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던 과거를 수십년째 아쉬워하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물론 저 역시도 침략하고 지배했던 역사가 망각되지 않도록 단단히 새겨야 한다는 점에는 아무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단순한 비판과 규탄을 넘어서 그로부터 성찰의 내용을 도출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통찰의 지점을 찾아낼 수 있도록 일본의 근대사를 차분하게 직시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가 독자에게 말하고 싶은 근본적인 메시지 중 하나도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S. 이 책은 다루는 시기에 비해 분량이 썩 충분하지는 않기에 다른 글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의 이야기를 조슈번을 중심으로 바꾸고 그 외의 빈틈까지 채운 허수열·김인호의 『조슈 이야기』(지식산업사, 2023.)와 (이 책에서는 마냥 좋은 관계로만 묘사되는)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은근한 갈등이 식민지의 헌병경찰제도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설명한 「제국의 헌병,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다」(『일본사 시민강좌』, 연립서가, 2024.)를 권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이 있다. 이 시기 막부와 반막부파(토막파討幕派)의 싸움은 수구와 개혁의 싸움이 아니라는 점이다. 막부도 반막부파도 필사적으로 개혁에 나섰다. 누가 더 과감하게, 더 철저하게 신속히 개혁하느냐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개혁에 조금 미진했고, 조금 늦었던 막부는 무너졌다. 그러나 막부는 미래의 개혁을 위한 많은 유산을 남겨놓았다. 잘 정비된 근대적인 관료 기구와 유능한 관료, 서양에 정통한 지식인, 전문가, 요코스카 제철소 같은 산업기반, 서양 국가와의 원만한 외교관계 등등. 그 덕분에 메이지 정부의 출발지는 맨땅이 아니었다. 막부가 남겨놓은 유산들은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개혁의 토대가 되었다. (102쪽.)
요시다 쇼인이 메이지 유신의 과격한 이상주의, 광신적 민족주의, 잠재적 침략주의를 대표한다면, 사카모토 료마는 명민한 현실주의, 국제 정세에 대한 통찰, 점진적 평화주의를 상징한다. 아베 신조는 요시다 쇼인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사카모토 료마를 좋아한다.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시대에는 요시다가 빛났겠지만, 미래의 일본은 사카모토에게서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 페리가 왔을 때 료마는 때마침 검술을 배우러 에도에 유학 와 있었다. 사카모토는 서양 오랑캐의 목을 따겠노라며 큰소리쳤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1년 넘는 에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카모토는 도사번 최고의 난학자인 가와다 류조를 찾아갔다. 우리는 이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카모토는 정신 승리만으로는 서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했을 것이다. '풋워크footwork의 경쾌함', 사카모토 료마의 특징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방향 전환이다. (108~109쪽.)
가쓰 가이슈, 한국 독자들에게 좀 낯선 이름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낭인이 된 사카모토 료마가 스승으로 섬긴 인물이며, 막부의 가신으로 메이지 유신군이 도쿠가와 막부의 수도 에도까지 쳐들어왔을 때 막부 측 총사령관이었다. 말하자면 역사의 패배자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멋있고, 의미를 남긴 패배자를 알지 못한다. '멋진 패배자'의 이야기다.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정치적 후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막부에 반란을 일으켰던 조슈번의 정벌에 실패하자, 권력을 유지할 길은 막부를 포기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정봉환을 단행해 270년간의 막부 체제를 폐지하고 자신도 쇼군 자리에서 내려왔다. 막부를 지탄하던 여론이 순식간에 바귀어 그의 용단을 지지했다. 그가 노린 대로였다. 요시노부의 노림수는 지지 여론을 모아 천황 밑에 신정부를 세우고 그 실권자가 되려는 것이었다. 막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리려 계획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당황했고, 그 반전을 꾀한 것이 왕정복고 쿠데타였다.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이다.' 쿠데타로 천황을 손아귀에 넣은 그들은 하루아침에 '관군'이 되어 '역적' 도쿠가와 씨를 치러 에도로 행군했다. 그들을 막아선 사람이 갑자기 막부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가쓰 가이슈였다. 그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탁월한 재능 덕에 승진을 거듭했지만, 막부 주류 세력을 좇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막부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막부의 종말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든 최대한 의미 있게 '마무리'해야 할 터였다. 권력에 대한 미련은 질긴 법이지만, 역사의 대세를 거스르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러나 그걸 통찰하는 사람은 드물거니와, 통찰했다 해도 미련을 끊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
가쓰는 반막부 세력의 중심지인 사쓰마번의 리더 사이고 다카모리와도 친교를 맺었다. 1864년 사이고를 만나 막부 독재를 허물고 웅번雄藩(큰 봉건국가) 연합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속내를 밝혔다. 놀란 것은 사이고였다. 그는 이를 '공화정치'라 명명했다. (...)
반하기는 가쓰도 마찬가지였다. (...)
진영을 뛰어넘은 두 호걸은 만남은 몇 년 후 일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관군'이 에도성 총공격을 앞두고 있을 때, 얄궂게도 (혹은 다행히도?) 양군의 지휘관은 두 사람이었다. '공화정치'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싸울 일은 없었다. 에도성 외곽에서 단둘이 이틀 동안 회담했다. 둘은 외세 침입을 눈앞에 둔 마당에 오직 국가만을 생각하자고 했다. 사이고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고, 가쓰는 예상치 못한 양보안을 내놓았다. 사이고는 점령군이었지만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사이고는 나에 대해 막부 중신의 예우를 잃지 않았다. 담판할 때에 시종 자세를 바로하고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조금도 승리자의 위광을 내세워 패장을 경멸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담판 없이 총공격이 이뤄졌다면 100만 명의 에도 주민은 참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군 간에 벌어졌을 처절한 전투는 두고두고 깊은 원한과 분열을 초래했을 것이다.
(...)
승자는 승자의 품격을 지켜야 한다. 조그만 승리에 우쭐해서 점령군처럼 행세하는 자에게 승복할 패자는 없다.
가쓰는 패자의 품격을 지켰다. 회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막부군을 끝까지 설득했고, 막부 가신들을 이끌고 도쿠가와 가문의 본거지인 시즈오카로 선선히 물러났다. 막부 가신들은 그를 사쓰마 및 조슈와 타협해서 막부를 팔아먹은 자라고 매도했지만,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이후 메이지 정부의 거듭된 입각 요청에 응하지 않고, 남은 생애 동안 그가 한 일은 주군과 가록家祿(집안 대대로 세습되어 물려받는 녹)을 잃고, 생계가 막막해진 막부 가신들과 그 식솔들을 챙기는 것이었다.
한 사회의 변혁 과정에서는 승리한 세력의 행태도 중요하지만, 패자의 '패배하는 방식'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할 때가 많다. 대세를 읽지 못하고 무모하게 집착을 부리면, 무고한 인명을 잃고 큰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한다. 물러나면서 행한 총질로 폐허가 되면 사회 재건은 그만큼 어렵다. 자기 세력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존망을 염두에 두고, 미련을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다. 가쓰 가이슈가 이끈 '질서 있는 퇴각'이 일본을 살렸다. (121~127쪽.)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 체결되었다. 그로부터 지난 150년 동안 한국이 겪어야 했던 일본과의 부대낌, 그야말로 '파란만장'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하기 어려운 역사를 새삼 반추하려 한다. 21세기 초반인 지금 유쾌하지도 않은 이 기억을 굳이 반추하려는 것은, 이제야 그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게 가능해진 이유는 대한민국의 성장이다. 과거 세계 열강에 처참하게 능욕당했던 한국이 제국주의적 방법을 쓰지 않고도 '세계 열강'의 하나가 되었다. 세계 10대 강대국이니 경제 대국이니 하는 나라치고 한국과 같은 과정을 거쳐 성장한 국가는 없다. 대한민국의 도약에 가장 당황한 나라는 아마도 일본일 것이다. 서양 열강에 혹은 대국 중국에 대해 느끼는 열등감을 한국(조선) 멸시로 견뎌온 게 근대 일본의 민족주의다. 그런데 그것을 떠받치고 있던 기둥이 한국의 도약으로 현재 무너지는 중이다. 혐한 정서는 그 당혹감의 적나라한 표현이다. (151쪽.)
정치적 리더십은 어떠했나. 흔히 우리는 조선 정치 하면 당쟁을 떠올린다. 그러나 19세기 조선에는 이렇다 할 당쟁이 없었다. 대략 여덟 개 정도의 대가문이 권력을 과점하면서 남인을 비롯한 다른 세력들은 지방으로 배척당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세도정권이다. 수십 년에 걸친 정치 엘리트의 분열로 정치세력 간 노선은 극단적으로 갈라졌고, 타협과 단결의 가능성은 줄었다. 격렬한 당쟁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적절한 붕당정치까지 사라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흥선대원군 집권(1864년 초) 후 한국병합까지 조선 정계는 의미 있는 정치적 리더십을 구축하는 데 끝내 실패했다. 강력하고 유능한 정치력이 있으면 웬만한 어려움은 돌파할 수 있다. 절체절명의 시기에 그 장기적 부재는 치명적이었다.
도쿠가와 시대에 일본은 막부가 전적으로 정치를 담당해왔고 주요 번들은 권력에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1853)를 계기로 서양 세력의 압력이 강해지자 사쓰마번, 조슈번 같은 세력이 중앙정치에 뛰어들었다. 막부와 이들 사이에 격렬한 정쟁이 벌어졋지만 그 과정을 통해 정치 엘리트 간에 국가가 가야 할 방향을 둘러싹 광범한 논의와 합의가 진전되었다. 1860년대 이후 정쟁은 격화되었지만 양쪽 다 근대화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거부하기는커녕 이미 서술한 대로 막부와 반막부파의 싸움은 누가 먼저 근대화를 달성하느냐 하는 경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동결되어 있던 천황이 부활해 강력한 통합 장치 역할을 했다.
한편 조선에서 정치 엘리트 간 분열 못지않게 치명적인 것은 민중의 이반이었다. 세도정치하 환곡제도의 악용과 행정 문란이 주범이다. 홍경래의 난(1811), 진주 민란(1862), 갑오농민전쟁(1894), 만민공동회(1898) 등을 통해 조선 민중은 기성체제에 세차게 도전했다. 조선 엘리트층은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며 그 정치적·도덕적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그렇다고 민중세력이 새로운 비전을 실현하는 데 이른 것도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했고 외세 침입에 틈을 열어주었다. 민중 봉기라는 전통은 20세기 들어서도 3·1운동, 4·19학생운동, 6·10만주화항쟁, 촛불시위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반면 일본 민중은 이 시기 반란다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없다. 오시오 헤이하치로大塩平八郎의 난(1837)은 오사카를 불태우고 전국에 충격을 주었지만 반나절 만에 끝났다. 메이지 정부에 도전한 하기萩의 난(1876), 세이난 전쟁(1877) 등도 사무라이들의 반란이었지 민중은 가담하지 않았다. 민중은 막부와 사쓰마, 조슈의 상무을 대체로 방관했다. 대신 엘리트층은 민중의 요구를 선제적으로 수용해 개혁을 감행했다. 재정 부족에 직면한 번 정부는 농민 증세 대힌 사무라이의 봉록을 삭감했다. 메이지 정부는 성립 직후 전국에 걸쳐 토지 조사를 실시하고 세제를 개편했지만(지조개정地租改正) 농민의 이익은 크게 침해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니 거대한 민중운동이 일어나 정치판을 뒤집어버리는 일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20세기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 시민들은, 특히 한국 시민들과 비교해볼 때 정치 변혁에 관심이 적다. 양국의 정치 패턴은 그런 면에서 매우 대조적이다. (154~158쪽.)
외교에서 상대 국가를 한 덩어리로 인식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상대 국가 내부에도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정치세력이 서로 갈등하고 있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 내부를 돌이켜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의 일본이나 지금의 일본이나 마찬가지다. 당시의 일본이라고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처음부터 조선 침략을 시도한 것은 아니다. 침략도 그럴 만한 힘이 있어야 하고 힘이 된다 하더라도 그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에 대한 정책을 놓고 일본 조야는 격심한 갈등과 혼선을 겪어왔다. 1868년 메이지 유신부터 1910년 한국병합까지 42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일본의 대한정책은 병합을 예정하고 일직선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구불구불한 것이었다. 그 길의 모양은 일본 내부의 조선 갈등과, 국제 정세의 영향,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의 대응 역량에 따라 휘어졌다 구부러졌다를 반복했다. 청도, 러시아도 조선에 야심이 있었지만 일본이 유독 두드러진 공격성을 보인 것은 새삼 재론할 필요도 없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건 이것대로 비판의 날을 뾰족이 세워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일본은 원래 그런 나라이니 애초부터 조선을 침략하려 했다며 목소리만 높이는 것은 이 시대의 쓰라린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너무 값싸게 치는 일일 것이다. (179~180쪽.)
우리의 역사 서술에서는 항상 일본은 악마화한다. 결국 한국을 집어삼킨 일본의 행위를 소급적용하는 사고습관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군들 한국병합에 분노하지 않으랴. 그러나 모든 시기와 사건에서 일본은 항상 침략적이었다고 무작정 전제하는 것은 역사를 규탄의 재료로만 삼는 자세다. 이런 역사 교육은 맹목적인 적개심만을 갖게 해 우리의 현명한 대일 태도를 방해한다. 우리가 역사에서 얻어야 하는 것은 규탄만이 아니라 지혜다. 게다가 일방적인 일본의 악마화는 다른 세력들, 예를 들어 청이나 러시아 세력에 대한 비판을 무디게 한다. 더욱 심각한 점은 수많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략 야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우리 자신, 특히 당시의 위정자들을 민족주의 혹은 반일이라는 이름으로 감싸는 것이다. 아마도 2000년 한국 역사상 가장 무능했을 당시의 위정자들을 치켜세우는 최근의 일부 논의는 그 적나라한 폐해다. (204쪽.)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 세력은 한반도에서 물러나고 조선은 위안스카이와 민씨 세력의 독판이 되었다. 이로부터 청일전쟁이 일어난 10년 동안 실질적인 '조선 통감' 위안스카이와 민씨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시간에는 물리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이 있다. 같은 10년이라도 예를 들어 1820~1830년의 10년과, 이 시기 10년의 '역사적 밀도'는 천양지차다. 세상은 열 배의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밀도가 높은 시기인 만큼 더욱 농밀하게 살아내야 했지만, 조선의 위정자들과 조선을 개혁한답시고 군림하던 위안스카이가 이 10년 동안 무슨 개혁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에 일본은 세이난 전쟁이라는 내란을 진압하고 부국강병과 문명개화에 매진했다. 그 주역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지주들의 반발을 억누르고 초긴축 재정을 단행했다(마쓰가타 디플레이션). 그 효과로 1880년대 중반 '공업 발흥'이라 불리는 호경기가 찾아왔다. 세수는 늘어났고 예산의 10퍼센트대에 머물던 군사비는 25퍼센트를 돌파했다. 1889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개설해 반정부 세력까지도 일본이라는 국가 아래 결집시켰다.
이 '밀도 높은 역사적 10년'이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 정한론 분쟁(1873),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등에서 드러난 양국의 국력 차이는 아직 일본이 한국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 직전 양국의 국력 격차는 심하게 벌여져 있었다. 10년 전의 국력 차이만 유지했더라도 일본은 감히 한반도를 침략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인 간에 벌어진 시비에서는 남을 탓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 간에는 제일 먼저 자신에게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일본의 침략 근성에 대한 비판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226~227쪽.)
청일전쟁으로 장구한 세월 동안 유지되어왔던 중국의 영향력은 사라졌다. 그 틈을 러시아와 일본이 치고 들어왔다. 그러나 중국 세력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불과 50여 년 만에 한반도에 복귀했다. 남쪽에는 일본 대신 미국이 들어왔다. 최근 격화되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천하의 요충지' 한반도를 다시 위협하고 있다. 가공할 만한 역사의 반복이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조건이 있다. 계속되는 역사의 장난 속에서도 기어이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이라는 존재다. 대한민국의 시민들이야말로 '역사의 장난'을 거부할 '민족사의 주체'다. '청일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28~231쪽.)
20세기 일본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나? 이는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근현대 한국은 그들을 대상으로 배우고 저항하며, 당하고 이겨내며 만들어진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일본사는 낯선 대상이다. 밉고 불쾌해서 공부를 회피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선진국이 된 마당에 한국 시민도 20세기 일본을 냉정하게 직시할 때가 되었다.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 시민의 시각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어디까지 성숙했는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235쪽.)
러일전쟁은 20세기 총력전의 서막이었다. 기관총, 철조망, 참호전이 등장해 대량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 전사자는 10년 전 청일전쟁의 열 배 였다. 전쟁 비용도 엄청났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군이 한 달 동안 사용한 200만 발을, 일본은 난샨南山 전투에서 하루에 쏟아부었다. 군비는 20억 엔(당시 재정 규모 3억 엔)에 다다랐는데, 이 중 78퍼센트는 국내외에서 조달한 빚이었다. 국가 경제력과 국민의 지지를 총동원하는 전쟁 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일본은 런던과 뉴욕에서 막대한 전비를 조달했다. 이를 위해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인 스에마쓰 겐초末松謙澄와 하버드대학 출신인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郎를 각각 영국과 미국에 파견했다. 국내에서도 비상특별세법을 만들어 엄청난 증세를 했다. 지가의 2.5퍼센트였던 토지세(지조地租)는 논밭 5.5퍼센트, 시가지 20퍼센트로 급증했고, 소득세는 일률적으로 1.7배 증가했다. 비상특별세법이 1904년 4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시행된 결과 일본 국민은 1903년의 납부액과 같은 금액을 한 번 더 내야 했다(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전쟁은 국민의 혈세로 국민의 피를 만주 벌판에 뿌리는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비상특별세는 폐지되지 않고 일본 군부의 배를 한껏 채워주었다. (248~251쪽.)
일본은 왜 이리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못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지만 '돈'에 주목한 연구도 있다. 전쟁이 터지면 특별회계로 임시군사비를 편성하는데 이 예산은 군사기밀이라 의회도 대장성大藏省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다. 임시군사비를 포함한 직접 군사비는 1931년에 4억 6000만 엔 정도였지만, 1940년에는 약 80억 엔으로 급증했다. 이 막대한 돈이 의회는커녕 정부의 통제도 없이 군부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 돈이 엉뚱한 데 쓰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임시군바비가 편성되었는데, 군부는 이 돈을 중국과의 전쟁 수행에만 쓴 게 아니라, 아무도 승인하지 않은 미국 및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데 빼돌렸다. 그 결과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태평양에서 일본의 해군 전력을 미국을 능가한 상태였다. 이러니 전쟁 욕심이 나지 않을리 없었다. (303쪽.)
구보타는 "일본은 36년간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 일본이 (한국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돼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국 측 수석대표 홍진기는 "마치 일본이 점령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은 잠만 자고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말하고 있으나, 한국인은 스스로 근대 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한이회담은 그 후 4년 반동안이나 열리지 못했다(이원덕,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 이런 발언이 과연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차리하더라도, 아마 이 두 가지 인식이 일제 식민지 시대를 바라보는 한일 양 국민의 대체적인 입장일 것이다. 물론 패전 후 오랫동안 일본의 진보 진영과 리버럴 지식인들을 비롯해 적잖은 일본 시민들이 식민 지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견지해왔으나, 나는 많은 일본인의 속내에는 '그래도 일본 덕에 조선이 발전한 면도 많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한켠에 있음을 수시로 느껴왔다. 표현하지 못했던 그런 속내가 최근의 우경화 분위기 속에서 분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333~335쪽.)
'잡冊나부랭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격돌! 한국사 배틀 (김대한, 알키미스트, 2025.) (0) | 2025.08.26 |
|---|---|
| 조슈 이야기 (허수열·김인호, 지식산업사, 2023.) (0) | 2025.08.18 |
| 황현필의 진보를 위한 역사 (황현필, 역바연, 2025.) (0) | 2025.08.10 |
|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제임스 A. 로빈슨, 시공사, 2012.) (0) | 2025.07.29 |
| 대체로 무해한 한국사 (김재호, 생각의힘, 2016.) (0) | 2025.06.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