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조슈 이야기 (허수열·김인호, 지식산업사, 2023.) 본문

(어느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ㅋ)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를 읽었으면 허수열과 김인호의 『조슈 이야기』도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가 시기를 흑선내항 이후로 한정하고 주요한 변수도 정치적 리더에서 찾았기 때문에 (책의 재미에도 불구하고) 설명에서 다소 구멍이 뚫린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슈 이야기』는 그 구멍을 채우기에 제격입니다.
『조슈 이야기』 역시 대체로 일본의 근대사를 다루면서도 그 중심에 조슈번을 둔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개항 이후 근대 일본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모두 조슈번 출신이니 근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 조슈번을 중심에 놓는 것은 그다지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조슈번이 도막倒幕 세력의 중심에 서고 막부의 군사적 견제까지 견뎌낼 수 있었던 원인을 조슈번의 오랜 역사와 경제적·군사적 측면에서 찾습니다.
따지고보면 조슈번이 그토록 일관되게 막부 타도 입장을 견지한 것은 (심지어는 어떤 순간에는 양이攘夷의 원칙을 포기하기까지 하면서) 세키가하라 전투와 그 이후의 역사를 모르면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도쿠가와 막부 체제에서 각 번들 사이에 분명한 위계가 있었다는 점 역시 함께 알아야 하구요. 이렇게 되면 조슈번만이 아니라 삿초도히薩長土肥, 즉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번이 도막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자연스럽게 설명이 됩니다.
조슈번이 막부의 군사적 압력을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도 흥미롭습니다. 흔히 조슈의 군사적 성공은 (도막倒幕을 위해 양이攘夷의 원칙조차 버린 결과인) 서양과의 적극적인 교역 내지는 다카스기 신사쿠의 리더십 정도로만 설명됩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에 더하여 양 군의 무장을 직접 비교하는 데에까지 나아갑니다. 막부군이 활강총인 게벨 총으로 무장한 것에 비해 조슈군은 (강선腔線 덕분에 사거리와 명중률이 현저히 개선된) 라이플총인 미니에 총으로 무장했다는 것이죠. 이 덕분에 조슈군은 보더 먼 거리에서 흩어져 싸우는 산병전술散兵戰術을 택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훨씬 적은 병력으로도 막부군을 저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긴, 조슈번의 성공을 그저 훌륭한 역량을 가진 이들이 우연히 많이 태어난 덕분이라고만 말하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들지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역사에서도 조슈번의 비중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육군의 대표적인 군벌이 된 조슈번이 이후 통감과 총독 중 대부분을 배출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조슈번(벌)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일 뿐 아니라 이후 2차 세계대전까지 치달아가는 과정과, 더 나아가서는 현대 일본의 역사에서도 조슈번(야마구치현)을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여전히 유지되니까요.
다만 이 책에도 흠결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있어서, 책의 전반적인 주제에서 벗어나는 '군더더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임진왜란의 경과를 다룬 1장의 전반부와 한일관계사를 고대부터 훑어오는 4장의 전반부, 주로 독도 영유권 문제를 다룬 5장은 조슈의 역사와 이를 통해 본 일본의 근대사라는 이 책의 전체적인 주제에서 다소 벗어난 느낌입니다.
'반일과 혐한의 기원'이라는 부제 역시 썩 흡족하지는 않습니다. 조슈번을 통해 본 일본의 근대사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을, 민족주의적인 교훈으로만 한정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식민지기 조선의 경제성장에서 두드러진 민족간 불평등을 섬세하게 짚어내어 식민지근대화론과 치열하게 논쟁하면서도 '수탈' 같은 (다소 감성적·원색적으로 들릴 수 있는) 개념/표현과도 거리를 두었던 허수열 선생님의 지적 섬세함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아마도 이런 아쉬움은 이 책이 허수열 선생님의 유작이라는 점과 약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임지고 판단할 저자가 안 계신 상황에서 원고를 대거 잘라내는 등의 결정을 하기는 어려웠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랬다가는 자칫 고인의 의도를 훼손할 수도 있으니까요.
마지막에 불만을 약간 더하기는 했습니다만, 이 책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일 역사갈등의 기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참고할 가치가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가 대체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는지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양이결행일攘夷決行日인 1863년 5월 10일이 되자, 각 번들은 막부의 뜻에 따라 양이를 결행하지 않았지만, 오직 조슈번만이 양이를 결행하고 나섰다. 조슈번은 시모노세키 해협[下關海峽, 馬關海峽]을 봉쇄하고, 미국 상선 펨브로크호(Pembroke), 프랑스 군함 키엔샹호(Kien-Chang), 네덜란드 군함 메두사호(Medusa)에 대해 아무런 통고도 없이 포격하였다. (...)
피해를 입은 3개국은 그 보복으로 조슈번의 군함과 포대를 파괴했다. 하지만 조슈 번사들은 재빨리 포대를 수복하고 계속 해협을 봉쇄하였다. 또한 다카스기는 처음으로 기헤타이[奇兵隊]라는 일종의 민병대와 같은 비정규 군대조직을 창설하여 서양 군대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기헤타이는 신분에 제한을 두지 않고 군인을 모집했기 때문에, 군인의 자격을 무사계급으로 한정했을 때에 견주어 더 많은 병력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 뒤 평민군[平民軍]으로 발전하는 계기도 되었다. 다카스기 신사쿠가 기헤타이[奇兵隊]를 창설한 것은 병제兵制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혁신이었다.
그러나 조슈번은 이렇게 서양세력과 직접 맞부닥치게 되면서, 서양세력에 맞선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영국은 나마무기 사건[生麦事件]과 관련하여 1863년 2월 막부와 사쓰마번에 배상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막부는 영국의 위협에 굴복하여 배상금을 지불했지만, 사쓰마번은 그 요구를 무시했다. 1863년 6월, 영국은 7척의 군함을 가고시마만으로 보내 조속히 범인을 처벌하고 2만 5천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사쓰마번이 영국의 요구를 거부하자, 1863년 7월 2일 새벽, 영국군은 3척의 사쓰마번 군함을 탈취하였다.
그러자 사쓰마번이 포격을 개시하였고, 사쓰마와 영국 사이의 전쟁 즉 사쓰에이 전쟁[薩英戰爭]이 시작되었다. 영국의 대포는 최대 사거리가 약 4km였던 것인데, 사쓰마의 대포는 1km에 지나지 않아, 병기만 놓고 보면 영국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지만 전투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개전 3시간 후, 영국 함대의 기함이 사쓰마 해안 포대의 포탄에 맞아 함장이 사망하였고, 총사령관도 부상을 입었다. 양측의 교전은 이튿날에도 계속되었지만, 7월 4일 마침내 영국함대는 철수하고 말았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영국은 6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군함 1척이 대파되었으며, 또 다른 선박 1척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와 달리 사쓰마번 측의 피해는 사상자가 약 10명 정도이고, 포문 8대가 파괴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포격으로 가고시마 죠카마치[城下町]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사쓰에이 전쟁을 통해 사쓰마번은 영국함대의 강력한 힘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일본에 들어온 서양사람들을 참살하고, 서양사람들의 시설물을 파괴하여 쫓아내는 그런 양이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큰 피해를 불러올 거이라는 점을 똑똑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양이攘夷의 실행을 위해서는 우선 외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기술이나 지식을 배워 부국강병으로 국력을 키운 후에, 대등하게 겨루는 그렇나 양이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다라서 영국과 적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화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까지도 하였다. 영국 역시 사쓰마번의 강력한 군사력을 경험함으로써 사쓰에이 전쟁을 계기로 양자는 오히려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조슈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864년 7월, 조슈번의 시모노세키 해협 봉쇄로 많은 경제적 피해를 입었던 영국은 조슈에 대해 보복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네덜란드·미국에 참가를 요청하여, 4개국 연합함대를 구성하였다. 4개국 연합함대는 17척의 군함으로 8월 5일부터 7일에 걸쳐 조슈의 포대를 포격하고 육전대를 상륙시켜 포대를 점거·파괴하였다. 이것을 '4국 함대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四国艦隊下関砲撃事件]'이라고 부른다. 조슈 역시 이 전쟁을 치르면서 서양의 강력한 군사력을 뼈저리게 느꼈고, 사쓰마와 마찬가지로 서양과 화친하여 국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런 생각을 '대양이론大攘夷論'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존왕양이론에서 존왕 즉 도막倒幕(막부 타도)만 남기고 양이를 포기한 것이었다. (206~211쪽.)
(...) 제2차 조슈정벌에서는 공격하는 막부측의 병력이 수비하는 조슈측보다 수십 배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슈군은 모든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 기적 같은 승리 뒤에는 늘 그럴만한 까닭이 있기 마련이다.
첫 번째로는 조슈번의 번정 개혁에 따라 번의 경제력이 증강된 점이고, 두 번째로는 조슈번의 절박함이다. 이미 제1차 조슈정벌에서 막부에 공순恭順하여 겨우 번의 해체를 막은 바 있었던 조슈였기에, 이번에는 더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공순의 과정에서 맺힌 원한도 있었다. 그와 달리 막부의 요구로 동원된 여러 번들은 이 전쟁에서 희생을 치르고 싶지는 않았으니 자연히 전쟁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셋째로 조슈에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나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와 같은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고, 막부군에 견주어 훨씬 근대화된 군제軍制를 채택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슈군은 막부군이 주력으로 사용하는 게벨 총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미니에 총을 보유하였다. 이에 새로운 무기의 보유에 따라 산병전략散兵戰略을 택할 수가 있어 일당백의 군대가 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이들 요인 가운데 세 번째와 네 번째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총기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무렵의 소총은 전장식 활강총에서 전장식 라이플 총을 거쳐 후장식 라이플 총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전장식과 후장식은 화약과 총알을 넣는 방향으로 구분되는데, 전장식은 총구쪽으로부터 장전하는 방식이고, 후장식은 후미로부터 장전하는 방식을 말한다. 또한 전장식의 경우에는 탄알과 장약을 일체화한 카트리지 형태로 장전하게 된다. 활강식 총과 라이플 총은 총열 안쪽의 총강에 나선형의 홈(강선腔線. rifling)이 파여 있는지 여부로 구분한다. 나선형 홈이 파여져 있으면 즉 라이플링이 있으면 라이플이고, 아무것도 없이 밋밋하면 활강식이다. 이렇게 라이플의 경우에는 총강에 나선형 홈이 파여져 있기 때문에, 총알에도 이 나선형 홈에 걸릴 수 있는 장치가 붙게 된다.
전장식 활강총으로 대표적인 총이 게벨 총(Geweer Musket)이다. 전장식 라이플총은 그 총을 처음 개발한 프랑스 육군 대위 미니에(Claude-Étienne Minié)의 이름을 따서 미니에 총이라고 불렀다. 또 미니에 총은 제조공창의 이름을 따서 미국제는 스프링필드 총(Springfield Trapdoor)이라고 하였고, 영국제는 엔필드 총(Enfield Riffle)이라고 하였다. 라이플 총에서는 탄환이 나선형 홈을 따라 회전하여 회전 관성을 갖게 되고, 이로써 안정된 탄도를 가지게 된다.
후장식 라이플 총으로서는 전장식 라이플 총인 미니에 총을 후장식으로 개조한 스나이더 총(Snider Riffle)이 있다. 물론 그 뒤로도 계속 총기 기술은 발전했지만, 여기서는 관심 밖이고, 주로 라이플 총과 활강총의 위력의 차이에 주목하고 싶다.
당시의 실험결과에 따르면, 미니에 총은 200야드 밖의 물체에 대해서도 80퍼센트의 명중률을 가졌는가 하면, 게벨 총의 명중률은 그 절반인 42퍼센트였다. 300야드 밖의 물체에 대해서는 게벨 총의 명중률은 16퍼센트로 사실상 총으로서의 기능이 없는 것과 달리, 미니에 총의 경우에는 여전히 55퍼센트의 명중률을 보여주고 있었다.
(...)
막부는 1853년 페리의 내항 이후, 군사개혁에 착수하여 네덜란드로부터 대량의 게벨 총을 구입하였고, 일본 안에서도 모조 게벨 총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게벨 총을 수입할 무렵인 1853년에 개전한 크리미아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미니에 총의 일종인 엔필드 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즉, 선진국에서는 게벨 총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창고에 박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수입한 게벨 총은 당시 이미 구닥다리로 되어 버린 총이었다.
그런데 조슈는 시쿄 전쟁[四境戰爭] 이전에 사쓰마번의 중개로 영국 무기상인 글로버(Thomas Blake Glover)를 통해 다량의 미니에 총을 구입하였기 때문에, 막부군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우수한 성능을 가진 총을 보유할 수 있었다. 미니에 총은 막부군이 주로 사용하던 게벨 총에 견주어 사거리도 길고 명중률도 높았기 때문에, 조슈군은 막부군의 사거리 밖에서 산개散開하여 공객하는 산병전술散兵戰術을 사용할 수 있었다. 실제 전투에서 막부군은 자신들이 가진 게벨 총의 사정거리 바깥에서 흩어져 숨어서 공격하는 적과 싸워야 했으니 이기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조슈군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 결국 장비 차이가 병력수 차이를 뒤집고 조슈가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든 가장 주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1860년대 이후 서양에서는 후장식 라이플인 스나이더 총이 급속히 보급되었다. 전장식의 경우에는 장전을 위해 총을 세워야하므로 병사들이 장전과정에서 적의 공격 목표로 노출되기 쉬웠다. 그러나 후장식의 경우에는 엎드린 자세에서도 탄환을 장전할 수 있기 때문에 훨씬 안전해지며, 또 탄알과 장약이 ㅏ나의 카트리지 안에 일체화됨으로써 장전 과정이 쉽게 빨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1860년대에는 전장식 미니에 총인 엔필드 총 역시 급속도로 구닥다리 총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일본에 서양무기를 판매하던 글로버 같은 무기상인들은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 창고 속에 박혀 있는 총들을 일본으로 수입하여 막대한 이익을 올렸던 것이다. (236~242쪽.)
삿초도히[薩長土肥] 특히 조슈벌에 따른 정권장악은 조선 및 타이완 총독의 임명에서도 두드러졌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관련이 있는 조선주재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聲]와 미우리 고로[三浦梧樓]는 모두 하기(조슈번) 출신이고, 제1대~제3대 한국통감 역시 모두 조슈 출신이었다. 또 제1대와 제2대 한국부통감 역시 조슈 출신이었고,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 뒤 제1대와 제2대 조선총독도 모두 조슈 출신이었다. 내각총리대신과 마찬가지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 역시 '조슈벌의 독점'이 두드러졌다.
대만총독부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제1대 대만총독은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로 사쓰마 출신이었지만, 제2대에서 제5대까지의 대만총독은 모두 조슈 출신이었다.
번벌에 따른 군권軍權의 지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일본제국 기간 동안 원수로 임명되었던 사람은 모두 29명인데, 그 중에서 조슈와 사쓰마 출신이 각각 4명, 8명으로 다른 어떤 번藩보다 많았다. 특히 황족 출신 원수 7명을 제외하면, 조슈와 사쓰마 출신 원수가 전체 원수의 절반을 넘었다. 또한 기간을 1918년 이전과 1919년 이후로 구분하여 보면, 전자의 경우에는 모두 15명의 원수 중에서 황족 출신이 3명, 조슈 출신이 3명, 사쓰마 출신이 8명 등으로 조슈와 사쓰마 및 황족이 아닌 원수는 단 1명에 지나지 않았다. 나아가 해군 원수의 경우에는 사쓰마 출신이 압도적이었다.
육군 및 해군 대장의 경우에도 조슈와 사쓰마에 따른 군권 장악이 두드러졌다. 일본제국의 육군 대장은 모두 134명이었는데, 그 중에 황족 출신이 9명, 조슈 출신이 19명, 사쓰마 출신이 15명으로 이들 셋의 합계가 전체의 약 1/3을 차지하였다. 특히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초기[1918년까지]에는 황족과 조슈 및 사쓰마 출신 대장은 26명으로 전체 48명의 과반을 차지하였다. 쉽게 말해 18년까지 임명된 육군대장 가운데 절반 이상이 황족이어나, 조슈 출신이거나 사쓰마 출신이었다.
해군 대장의 경우에는 일본제국 기간에 모두 77명이 임명되었는데, 사쓰마 출신이 압도적 다수였다. 특히 메이지 시대 및 다이쇼 초기[1918년 이전까지]에 임명된 해군 대장 가운데 대략 2/3는 사쓰마 출신이었다. 조슈 출신은 단 1명도 없었다. 말하자면 해군의 군권은 사쓰마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처럼 메이지 유신으로 출범한 메이지 정부는 혁명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지만, 메이지 시대를 지나 다이쇼 시대가 시작되고,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정치 권력과 군사 권력을 소수의 번 출신 인사들이 독점하는 행태는 점차 감소하였다. 그렇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대일본제국일 몰락하는 그 시점까지도 일본의 정치와 군대에서 이들 조슈와 사쓰마 출신의 정치가와 군인은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국 시대에도 형태와 내용을 조금 달리하면서, 야마구치현의 아베 일가처럼 조슈 출신의 지배력을 이어가고 있다. (255~258쪽.)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받은 전쟁배상금 2억냥은 당시 일본 돈으로 환산하여 3억 6천만 엔이었고, 이것은 청나라의 3년 치 예산, 일본의 4년 반 치 예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청국에서 막대한 배상금을 받게 된 일본은 그것을 다시 부국강병에 활용함으로써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관영官營 야하타제철소[八幡製鐵所]가 이 전쟁배상금으로 지은 근대적 대규모 제철소였다.
관영 야하타제철소는 1901년 2월에 제1고로[東田第一高炉]에 화입火入이 이루어졌고, 11월에 조업을 개시하였다. (...) (264쪽.)
사실 정한론은 다카모리 등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정치적 술책이었다. 이후 정한론의 조창자인 에도 신페이는 고향인 사가현으로 돌아가서는 반란(1874년)을 도모하다가 목이 달아났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세이난 전쟁(1877년)을 일으켰다가 조슈 출신의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칼에 목이 달아났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이러한 무장봉기와는 손절하고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여 훗날 정우회政友會의 전신인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였다(〈征韓論時代〉(一). 《東京日日新聞》, 1932년 2월 29일). (...)
요컨대, 유신정부 인사들의 정한론은 폐번치현 등으로 위축된 지방 사족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는 수단으로, 그리고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정한론은 집권 세력인 오쿠보 등을 제거하기 위한 정쟁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가공의 이데올로기일 뿐이었다.
(...)
1870년대의 다카모리식 정한론은 조선인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주어 조선인은 물론 일본인들의 동의도 제대로 얻지 못하게 했다면, 후쿠자와 유키치 등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한 1880년대의 정한론은 조선 왕조의 폐악과 잔혹성을 폭로하면서 제기하여 국내외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불러왔다. 특히 조선인에게도 조선 왕조는 일본제국주의의 힘을 빌려서라도 타도해야 할 부패한 권력이라는 생각을 심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실제의 역사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보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정한론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였고, 일부 친일 조선인들은 후쿠자와식 정한론에 심취하여 조선 왕조 멸망을 정당화하고 일본의 침략을 마치 선한 해방자의 호의처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327~331쪽.)
교정. 초판 1쇄
80쪽 10줄 : 토요토미 -> 도요토미
109쪽 3줄 : 전투용 범주 슬루프(Sloop-of-war)
121쪽 밑에서4줄 : 범주帆走 슬루프(sloop-of-war)
124쪽 2줄 : 범주형 슬루프함
134쪽 1줄 : 전투용 범주 슬루프함 (109, 121, 124쪽 표기 통일)
125쪽 2줄 : 네델란드 -> 네덜란드
126쪽 사진캡션 : 네델란드 -> 네덜란드
176쪽 밑에서 5줄 : 네델란드 -> 네덜란드
186쪽 밑에서9줄 : 결국그들은 -> 결국 그들은
197쪽 밑에서6줄 : 나가이 우타[長井雅樂]의 -> 나가이 우타[長井雅楽]를
207쪽 6줄 : 두지 않았고 -> 두지 않고
207쪽 9줄 : 평민군[平民軍] -> 평민군平民軍
207쪽 10줄 : 병제[兵制] -> 병제兵制
207쪽 13줄 : 것인가는 -> 것인가를
213쪽 밑에서5줄 : 부셔진 채로 -> 부서진 채로
237쪽 밑에서9줄 : 미뉴에 -> 미니에
238쪽 6줄 : 활강식총과 -> 활강식 총과
238쪽 9줄 : 파져있으면 -> 파여져 있으면
238쪽 11줄 : 파져있으면 -> 파여져 있으면
238쪽 14줄 : 게벨총 -> 게벨 총
238쪽 15줄 : 미니에(Claude Etienne Minie) -> 미니에(Claude-Étienne Minié)
238쪽 17줄 : 엔필드 총(Enfield riffle) -> 엔필드 총(Enfield Riffle)
238쪽 사진 캡션 : 미니에총 -> 미니에 총
239쪽 1줄 : 라이플총 -> 라이플 총
239쪽 3줄 : 라이플총 -> 라이플 총
239쪽 9줄 : 미네에총 -> 미니에 총
241쪽 5줄 : 엔필드총 -> 엔필드 총
242쪽 9줄 : 미니에총 -> 미니에 총
242쪽 10줄 : 엔필드총 -> 엔필드 총
250쪽 밑에서7줄 : 마사다케 -> 마사타케
256쪽 5줄 : 조슈출신 -> 조슈 출신
256쪽 6줄 : 조슈출신 -> 조슈 출신
258쪽 6줄 : 초기 [1918년 이전까지] -> 초기[1918년 이전까지] (띄어쓰기)
260쪽 11줄 : 사츠마번 -> 사쓰마번
261쪽 캡션 : ② 번별란의 기호 ■는 조슈벌[長州閥], ●는 사쓰마[薩摩閥]을 의미한다. (삭제)
263쪽 4줄 : 3억량 (...) 2억량 -> 3억냥 (...) 2억냥
264쪽 밑에서1줄 : 화입[火入] -> 화입火入
323쪽 2줄 : 소요시토시[宗義達] -> 소 요시토시[宗義智]
325쪽 5줄 : 이다가키 -> 이타가키
327쪽 5줄 : 이다가키 -> 이타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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