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역사비평 151호 (역사비평사, 2025.) 본문

학술지를 읽고 독후감을 남기는 일은 잘 없습니다만 이번 『역사비평』만큼은 눈에 띄는 논문이 여럿이라 간단하게라도 독후감을 쓰지 않을 수가 없네요.
임지현 선생님의 「민족주의 비판인가, 헤게모니 다툼인가?―『반일종족의 역사내란』에 대한 탈민족주의적 비평」은 『반일종족의 역사내란』에 대한 서평에 국한되지 않고 『반일종족주의』를 비롯한 '뉴라이트' 역사관 전반에 대한 비평으로 나아갑니다. 사실 이 논문은 제가 얼마 전에 쓴 ㅎㅎㅍ에 대한 글에 직접적인 영감을 준 글이기도 합니다. ㅎㅎㅍ의 책에 대해 굳이 시간과 공을 들여 글을 쓰는 것이 시간낭비가 아닌가 싶던 시점에 이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든 평을 남기긴 해야겠다고 마음먹었거든요. 놀랍게도 이 논문의 서술 중 상당수는 주어를 ㅎㅎㅍ로 바꿔도 거의 성립합니다. 소위 '뉴라이트'와 자칭 '진보적' 역사관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서로를 위해 가장 훌륭한 거름이 되어주는 적대적 공생관계임이 이렇게 또 확인되는 셈입니다. (그나저나 ㅎㅎㅍ은 어젠가, 또 공중파에 나왔더만요. 저 역시도 애청하는 그 방송은 이상하게도 역사 관련 쟁점이 있을 때는 유독 이상한 사람들만 골라서 부르는... ㅠㅠ)
옥창준 선생님의 「달의 뒷면―'태평양 연구자'로서 브루스 커밍스」는 브루스 커밍스에 대한 특집 논문 두 편 중 하나입니다. 홍석률 선생님의 나머지 한 편도 훌륭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옥창준 선생님의 논문이 좀 더 와닿았습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학자로 명성이 높습니다만 그의 연구범위를 한국학만으로 좁혀서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약 10여 년 전에 나왔던 (저희 방송에서도 다뤘던) 『미국 패권의 역사』에서 잘 드러난 것처럼 그의 연구는 미국의 대외적 영향력이 확대되어간 과정에 대한 비판적 접근에 더 무게중심이 있다고 보는게 옳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옥창준 선생님의 이 논문은 브루스 커밍스에 대한 우리 이해의 범위도 함께 확장시켜 줍니다.
남기현 선생님의 「공공역사가의 협력으로 만드는 지역 근현대사 교육」은 『역사비평』에서 계속되고 있는 공공역사 특집에 수록된 논문입니다. 『역사비평』은 최근 다양한 현장의 공공역사 실천들을 연이어 소개하고 있는데요, 여기에 실리는 대부분의 논문들은 학술논문보다는 공공역사의 현장에서 수행된 경험들이 풍부하게 수록된 현장 보고서에 가깝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기현 선생님의 이번 논문은 지역의 근현대 유산을 조사하고 그 결과물을 지역의 교육현장에서 응용한 경험을 담고 있어서, 근현대사가 전공이고 지역사에 관심이 많은 저에게 특히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꼭 이 논문만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형태로 공공역사를 수행 중이신 모든 분께 『역사비평』의 공공역사 특집을 계속 따라 읽어주십사고 부탁드립니다. 진짜 유익합니다.
이 책 필자들이 내세우는 실증주의의 더 큰 문제는 책의 곳곳에서 보이는 본질주의적 서술이다. 사실과 실증을 내내 강조하면서도 특정한 시대상을 초역사적인 상수로 규정하는 반역사적 본질주의가 너무 강하다. "한국인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누대의 원수로 간주하고 그 감정을 의리로 추구하는 정신사의 전통을 갖고 있다", "한국인의 정신문화에서 역사와 정치는 구분되지 않았으며, 정치의 변동에 따라 역사의 해석도 달라지곤 했다", "국민이 두 쪽으로 갈라져 심하게 다투는 현상은 다른 나라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 한국인의 독특한 정신문화" 등등의 진술은 아무리 대중용 방송 원고라고 해도 민망하다. 역사의 한 장면을 골라 한국 민족의 특성을 부정적으로 본질화하는 이런 진술들 역시 민족 본질주의의 면모를 드러낸다. 일본은 서유럽처럼 건강하고 정상적인 민족국가를 갖지 못했다는 마루야아 마사오의 회한 비슷한 정서가 이영훈의 민족주의적 한탄에서도 잘 느껴진다.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본질주의적 일반화는 정치적 선정주의와 만나 더 조잡한 서술로 이어지기도 한다. "반일종족의 역사 내란"이라는책 제목도 그렇지만, 10장과 11장 챕터 제목인 "위안부 사기극", "반일종족의 역사난동" 등의 표현은 선을 넘어 지나치게 선정적이다. 또 "북한이 수백 명의 일본인을 납치했다"는 주장 등도 사실에 대한 저자들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엄밀한 실증의 잣대를 들이대면, 이 역시 입증되지 않은 수치이다. 확인된 수치로 는 북한의 13명과 일본 정부의 17명 설이 있을 뿐이다. 후술하겠지만,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노동의 강제성을 반박하는 대목에서도 자료의 취사선택 등에서 '실사구시'의 정신을 무시하는 자의성이 발견된다. 실증적이지 못한 실증주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영훈 등의 실증적 작업은 기존의 역사서술이 반일 민족감정을 고양하기 위해 사용한 조악한 통계나 근거 없는 낭설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그런데 이 실증 작업은 독도 영유권, 한일병합, 토지조사사업, 일본군 위안부, 강제노동, 식민지 조선인의 실정법적 국적 문제, 일제의 쇠말뚝 등등의 문제에서 기존의 반일 민족주의적 역사서술이 '거짓말'이라고 폭로하는 데 그치고 있다. 반일 민족주의의 '거짓말'을 폭로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사실을 강조하는 것 말고는 방법론적 고민이 없다. 그래서 식민지의 복합적인 과거를 재현하는 작업은 사실과 거짓말의 이분법으로 단순 축소 환원된다. 독도와 백두산에 대한 '변경사'나 '환경사' 방법론이나, 토지조사사업, 총력전 동원 체제 등의 식민지적 근대 국가체제가 갖는 억압성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방법론의 비판 등이 뒷받침될 때 그 사실이 갖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임지현, 「민족주의 비판인가, 헤게모니 다툼인가?―『반일종족의 역사내란』에 대한 탈민족주의적 비평」, 191~192쪽.)
(...) 동유럽 강제노동자들에 대한 배상을 주관한 '기억·책임·미래재단'은 합법적으로 체결된 계약이라 해도 노동자가 그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면 강제노동이라고 정의한다. 독일 정부의 입장도 같다. 이들이 강제노동의 피해자로 인정받은 것은 계약조건을 재협상하거나 계약을 파기하고 옮길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차대전 이후 인권적 감수성의 확대와 더불어 국제노동기구(ILO)의 강제노동에 대한 정의가 노동자 권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온 큰 흐름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영화 〈군함도〉의 광고 포스터 문제에서 드러났듯이, '징용공'들이 노예노동이었다고 과장해야만 강제노동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들이 자유의사에 따른 계약노동자로 도일했다고 해서 강제노동이 아닌 것도 아니다. 징용공의 자발성과 강제성에 대한 해석에서도 역시 현재주의와 맥락주의가 충돌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식민지 시기나 총력전 체제의 노동 동원 당시에는 국제사회가 1930년의 강제노동 정의를 따랐으므로 강제노동은 없었다는 맥락주의적 해석도 가능하다. 반대로 현재주의의 관점에 서면, 2014년의 강제노동 수정조약을 근거로 총력전 체제의 노동동원도 강제노동이라는 반론도 성립된다.
(...)
일본 정부나 니시오카 등 극우의 논리에 대해 악의적인 부정론이라는 도덕주의적 반발은 한국의 민족주의적 역사가들이 사실을 무시한다는 식의 반론을 불러올 뿐이다. 일제 식민지 지배 역사에서 강제노동을 이해하는 관점은 맥락주의와 현재주의의 건강한 지적 긴장을 놓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의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기준에 서야 한다는 놀리가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강제노동의 과거를 한·일 간의 민족적 감정싸움에서 구출해 일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고양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야말로 동아시아의 전후 세대가 그들의 고통을 책임감 있게 기억하는 길이다. 급격한 인구 감소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초대해서 같이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일본과 한국의 사정에서, 지금 여기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강제노동의 그림자는 없는지 살펴보고 그 관점에서 과거를 되씹는 일은 절박한 과제인 것이다. (임지현, 「민족주의 비판인가, 헤게모니 다툼인가?―『반일종족의 역사내란』에 대한 탈민족주의적 비평」, 197~199쪽.)
반일 민족주의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은 '건국, 호국, 부국'을 자랑하는 부국강병적 민족주의 역사학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국가권력의 시녀였던 근대 역사학의 일국사적 패러다임에 대한 진정한 반성에서 출발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반일 민족주의 비판이 친일 민족주의 비판과 나란히 서고, 식민지 수탈론에 대한 실증적 비판이 식민지 근대의 폭력성에 대한 고발과 접목되고, 역사의 사실성과 기억의 진정성이 서로를 벼리는 방식으로 교차하고, 일본의 수정주의적 역사부정론과 한국의 민족 본질주의를 동시에 해체할 때, 길은 열릴 것이다. 역사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도 마찬가지다. (임지현, 「민족주의 비판인가, 헤게모니 다툼인가?―『반일종족의 역사내란』에 대한 탈민족주의적 비평」, 203쪽.)
커밍스는 지방까지 포괄하며 한국 내부의 정치적·사회적 동향을 비중 있게, 또한 심층적으로 다루었지만, 그렇다고 한국 내부의 좌우익 갈등이나 남북한 갈등 차원에서 전쟁의 기원을 찾은 것은 아니다. 『기원』에서 커밍스가 주장한 내전론, 혁명전쟁론의 기본 갈등 구조는 한국인의 혁명적 민족주의와 미국의 반혁명 정책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기원』은 물론 한국 내부의 동향을 과거 연구에 비해 획기적으로 많이 다루었고, 여기에 독보적인 부분도 많지만, 그만큼이나 미국의 대한 정책, 나아가 전반적인 미국의 냉전 정책에 대해서도 세밀한 분석을 하고 있다. 서술 분량으로도 비슷하다.
커밍스는 미국의 대한 정책을 단일하게 보지 않고 내부의 다양한 흐름과 그 상호 경합관계를 주목한다. 현지 미군정의 정책과 워싱턴의 정책을 구분해 보고, 미국 내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적 대외 정책의 차이와 경합을 분석한다. 루스벨트의 국제주의 외교 정책은 소련도 하나의 강대국으로 인정하고 전후 세계질서의 동반자로 포함시키며 자유롭고 열린 세계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고 파악한다. (...)
그러나 냉전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배타적으로 강조하고 확보하려는, 즉 소련과의 국제적 협력보다는 미국의 힘을 일방적으로 행사하려는 민족주의적 기류가 대두하여 국제주의적 정책과 경합했다는 것이다. 커밍스는 정치경제학적 시각에서 국제주의는 세계적 경쟁력으 확보한 월가의 자본 분파를 대변하는 흐름이고, 반면 민족주의는 주로 미국 국내에서 활동하며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해 국가의 보호를 요구하는 자본 분파를 대변하고 있다고 본다.
커밍스는 해방 직후 미군정의 정책은 워싱턴의 국제주의 정책의 궤도에서 이탈해서 한국에서 형성된 탈식민 사회혁명의 열기를 완전히 무시하고 탄압하며, 일제 식민지의 인적·제도적 유산을 복귀시키는 방향으로 갔다고 강조한다. 이에 한국에서 분출된 혁명적 민족주의와 정면 충돌했다는 것이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지방인민위원회는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 모두 와해되었고, 미군정과 친일경찰에 대한 불만 때문에 1946년 가을 10월 '추수봉기'가 발생하여 약 1,000여 명가량이 사망하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갈등과 폭력이 발생되는 과정이 내전(한국전쟁)의 기원을 형성한다는 주장이다. (홍석률, 「탈식민과 냉전, 제3세계의 주체성―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 2권)을 재평가하며」, 320~321쪽.)
(...) 『기원』의 한국전쟁 서술은 1945년의 충돌과 갈등, 폭력이 그냥 직선적으로 쭉 나아가 전면전쟁으로 이어지는 느낌이다. 1945년에 이미 조성된 갈등과 폭력이 어떤 전환점을 거쳐 남북한 사이의 전면전쟁으로 내재화되고 증폭되었는지에 대한 계기적 설명이 부족하다. 그러하기에 전쟁에 관여된 행위자들이 전쟁으로 가는 전환점의 중간중간에 전쟁 아닌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그리 크게 상정하지도 않는 것 같다.
커밍스는 미국의 정책을 분석할 때, 특히 에치슨의 선언 같은 것을 분석할 때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어떤 정책이 현실화되었을 때 그것이 이처럼 다양한 선택안 가운데서 미국 내부의 경합을 거쳐 현실화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커밍스가 남북한 포함한 한국인 행위자를 이야기할 때, 이러한 복수의 가능성에 대한 고려는 현저히 떨어진다. 소련을 이야기할 때도 사실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면에서 커밍스도 제3세계 행위자들의 주체성을 충분히 인정하지는 못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든다. (...) (홍석률, 「탈식민과 냉전, 제3세계의 주체성―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 2권)을 재평가하며」, 325~326쪽.)
(...) 커밍스의 확장된 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은 바로 「동북아시아 정치경제의 기원과 전개」(1984)이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저자로서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연구 주제를 동북아시아의 경제성장으로 넓힌다. 이 글에서 커밍스는 한국과 대만의 경제성장을 일국적으로 접근하는 기존의 경제성장론을 비판하면서, 일본-한국-대만이 상호 연계된, 그러나 미국 패권(hegemony)하에 매우 계층적인 정치경제 단위를 형성했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패권은 근대 아시아의 일본 제국(Imperium)을 대체하고, 상대적으로 간접적이면서 구조적인 지배의 방식(Dominion)을 창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관점이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커밍스가 스스로를 한국전쟁 연구자로 국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커밍스가 볼 때 한국전쟁의 대상 한국이 중요했던 이유는 바로 미국의 환상이 투영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에게 해방 이후 한반도는 "아시아에서 우리의 전체적인 성공이 달려 있는 이데올로기의 전쟁터이자, 문명의 시험장, 인류의 운명이 심사되고 있는 경기장"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에게 한반도는 국익의 투영지였고, 더 중요하게는 중국과 일본을 바라보는 태도 속에서 한반도의 위상이 결정되었다.
한국전쟁이 미국-동아시아 관계를 알리는 첫 단추였다면, 동북아시아의 경제성장은 미국-동아시아의 관계의 제2국면이었다. 미국은 일본제국이 만들어놓은 대만-한반도-일본이라는 연결망을 이어받아 이를 미국 중심으로 재편한다. 1940~50년대 미국이 태평양 너머에서 맞닥뜨린 것은 '미국의 꿈'에 저항하는 아시아였으나, 1970년대에는 분위기가 완전히 변화한다. 1970년대 미중 화해 이후 중국이, 그리고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대만과 한국이 미국의 꿈에 서둘러 동참하고자 했다. (...)
커밍스가 보기에 미국의 진정한 힘은 바로 그와 같은 경제적 구조를 창출할 수 있는 구조적 힘이었다. 미국은 패권적 강대국으로서 같은 무리 중의 일인자로서 제국처럼 지배하지 않았고, 폭넓고 관대한 다민족적인 국가로서 합의에 따라 위임된 권한을 가지고 세계를 선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커밍스의 입론은 미국이 태평양을 지배하면서, 그와 같은 미국의 패권 아래에서 동북아시아에서는 일본 중심의 질서가 형성되었다는 아리프 딜릭(Arif Dirlik)의 관찰과도 맥이 닿아 있었다. (옥창준, 「달의 뒷면―'태평양 연구자'로서 브루스 커밍스」, 350~351쪽.)
(...) 탈냉전기 이후 미국은 대서양에서의 유럽과의 관계에서 발전한 협력, 집단 안보, 법의 지배, 자유 무역과 다자간 협의 등을 태평양 지역에서 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전히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익숙했던 일방적 방식으로 세계를 다루고자 했다. 9·11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전쟁을 거치면서 조지 W. 부시가 보여준 부시주의가 전형적인 사례였다.
이는 커밍스가 기대했던 세계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대서양주의의 방향이 바뀌어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해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대서양주의와 유사한 일련의 다자적 기구와 새로운 관계가 나타나길 바랐다. 그러면서 미국이 1945년 이후 적대해온 중국, 북한, 베트남을 수용하고 미국이 새롭게 등장한 체제에서 동등하면서 주도하는 위치를 차지하기를 원했다.
(...)
커밍스는 한국과 동아시아 지역을 통해 미국의 패권이 공식적인 식민 통치 없이 군사기지와 동맹 망을 통해 주변 지역을 관리했다는 점을 간파했다. 이와 같은 간접적인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미국인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제국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메리카 대륙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미국의 역사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산사였지만, 커밍스가 보기에 미국의 서부 개척부터 태평양으로의 확장은 지배권(Dominion)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옥창준, 「달의 뒷면―'태평양 연구자'로서 브루스 커밍스」, 352~3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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