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항해사 흰닭, 파드레, 그리고 오렌지 반란군의 기이한 모험 (딜런 유, 뿌리와이파리, 2025.) 본문

재기 넘치는 제목이 무엇보다 눈길을 끕니다. 제목의 '항해사 흰닭'은 하멜과 함께 조선에 표착한 '헨드릭 얀손'을, '파드레'는 '신부님(padre)'이라고 불렸던 가톨릭 선교사를, '오렌지 반란군'은 동아시아의 무역을 놓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맞섰던 신흥세력인 네덜란드 상인을 지칭합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책은 16~17세기 동북아시아의 무역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한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이들을 경계하면서도 더 넓은 세상에 대해 조금씩 눈을 떠갔던 한중일 3국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런데 이 짧은 요약에 나라 이름만 6개씩이나 등장한다니, 뭔가 좀 쎄-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 책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정보량이 많습니다. 여느 책이라면 일관되게 이어지는 한 줄기의 서사를 가지게끔 하지만 이 책은 그 서사에서 뻗어나오는 거의 모든 가지를 일일이 다 훑으면서 갑니다. 그러다보니 본래의 이야기와 크게 관련이 없는 이야기들까지 한참이나 읽어야 하는 부분이 적지 않고, 한참이나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책 속에서 길을 잃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ㅠㅠ) 물론 이는 저자가 의도한 것이기도 합니다. 저자가 이미 서두에서 이 책이 "TMI의 대잔치"(15쪽)라고 선언한 것을 보면 말이죠. 그럼에도 너무 많은 정보량 때문에 책의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높은 진입장벽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과 함께, 유럽인들이 출몰했던 16~17세기 동북아시아의 바다를 자유로이 항해하고 싶은 분이 계신다면, 제 나름의 나침반과 경위의를 알려드릴테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는 타임라인을 계속 유념하셔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타임라인이 정말 촘촘합니다. 현대사가 아니고서야 이런 정도로 타임라인이 빡빡하기가 어려운데, 이는 이 책이 워낙 많은 정보들과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모두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때는 곁에 필기구 하나 두시고, 포르투갈의 마카오 확보나 스페인의 마닐라 진출, 중국과의 교섭, 네덜란드의 독립전쟁과 아시아 항로 개척 등 주요한 사건을 타임라인 상에 메모하시면서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그렇게 메모하면서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이 시기의 동북아 바다가 불과 몇 년 사이에 정세가 휙휙 바뀔 정도로 매우 역동적인 공간이었음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메인 서사에서 벗어난 TMI 역시 길을 잃지 않고 즐길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서 보시면 이해하시기가 편합니다. 목차를 보시면 이 책의 전반부는 대체로 3장을, 후반부는 대체로 5장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나머지 장들은 3장과 5장을 이야기하기 위한 전제 혹은 에필로그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먼저 전반부는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각각 마닐라와 마카오를 교두보로 확보하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과정에서 동북아 국가들이 스페인·포르투갈과 각각 어떻게 처음 접촉하고 이들을 이해했으며, 또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동북아 국가들과 교역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중점적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후반부는 벨테브레이(박연)와 하멜의 차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1627년에 조선에 표류한 벨테브레이가 끝내 조선에 정착한 것과 달리 1653년에 표류한 하멜은 부득부득 노력하여 13년만에 일본으로 탈출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동북아에서의 위상 차이에서 비롯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입니다. 즉 벨테브레이가 조선에 표류할 당시는 VOC와 일본의 관계가 소원한 시기였고 표류민을 본국으로 송환시키던 동아시아의 전통적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았던 시기였던 반면, 하멜이 표류한 시기는 VOC와 일본의 관계가 비교적 원만하여 어떻게든 일본에만 가면 네덜란드로의 귀환을 기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불과 26년만에 이런 정도로 동아시아 상황이 급변했다는 겁니다. 이러한 차이를 차분히 따라가다보면 결국에는 오직 네덜란드만이 에도 막부와 (제한적으로나마) 교류할 수 있었던 상황까지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책 내용을 정리해보면 '항해사 흰닭, 파드레, 그리고 오렌지 반란군의 기이한 모험'이라는 제목도 그냥 막 지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저 재기 넘치는 제목처럼만 보였지만 이 세 단어에는 책의 태도와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먼저 '파드레'와 '오렌지 반란군'부터 말씀드리면, 이 두 단어에는 이 책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각각 함축되어 있습니다. 선교사를 의미하는 '파드레'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무역망 확대에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의미합니다. 왕실과 종교가 협력하는 관계를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로 각각 파트로나토Patronato와 파드로아두Padroado라고 하는데, 이러한 협력관계는 후반부에서 네덜란드 독립전쟁 이야기와 엮이면서 동북아시아에서 스페인·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지위가 갈라지는 주요한 변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렌지 반란군'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기존 무역망에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분투한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의 활약을 그리는 후반부를 잘 요약합니다. 이는 단지 동북아시아 무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이미 16세기부터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본국의 상황과,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피해 새로운 아시아 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분투의 과정도 포괄합니다.
마지막으로 '항해사 흰닭'은 이들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이 얼마나 다양한 문헌과 자료를 섭렵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항해사 흰닭'은 하멜과 함께 조선에 표류했던 일등항해사 헨드릭 얀서Hendrik Janse를 의미하는데, 저자는 이의 조선식 표기가 여러 단계를 거쳐 '흰닭'으로까지 변하는 과정을 다양한 문헌을 더듬어서 길게 서술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이 책에서 일관되게 관철됩니다. 저자는 동서양의 각종 문헌과 전거를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섭렵하지요. 1614년에 리스본에서 출간된, 과장 섞인 모험담부터 도교 전통에 등장하는 두꺼비 신선과 여기서 영감을 얻은 일본의 가부키에 더하여 조완벽이라는 조선 선비의 파란만장한 모험기까지, 언제 이런 자료까지 다 살펴봤나 싶을 정도로 방대한 자료를 넘나듭니다.
이렇게 수백 쪽에 걸친 TMI의 대향연을 펼친 것에 비하면 이 책의 말미는 꽤 소박합니다. 특별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냥 마무리되거든요. 역사학자가 이 정도 벽돌책을 썼다면 뭐라도 거창한 이야기로 결론을 맺을 법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자는 옛이야기를 추적하는 그 자체가 즐거웠을 뿐 엄숙한 학문적 결론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제 느낌도 비슷합니다. 책을 읽는 내내 제 머릿속을 맴돈 것은 16~17세기 지구적 무역 네트워크의 구축이라거나 근대 세계의 형성이니 하는 딱딱하고 엄숙한 문장보다는 어렸을 적 밤새워 했던 게임 대항해시대 시리즈의 BGM이었거든요. 처음 시작에서 이 책이 진입장벽이 꽤 높은 것이 아쉽다는 투로 썼는데요, 하지만 그 진입장벽만 어떻게든 넘을 수 있다면 이 책을 읽는 내내 우리는 16~17세기의 동북아시아를 종횡무진 여행하는 타임트래블러가 될 수 있습니다. 손 안에 든 책 한 권으로 이 정도 여행을 즐길 수 있다면 그거 진짜 끝내주는 가성비 아닐까요? ^^
하멜이 조선에 표착하기 27년 전인 1626년 5월 22일, 제일란트에서 플라위트fluyt 700톤 선급의 홀란디아Hollandia호가 일단의 선단과 함께 지금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인 바타비아를 향해 출항하였습니다. (...) 출발한 지 반 년이 지난 12월 14일 마침내 목적지 동인도 바타비아에 배가 도착합니다. (...)
홀란디아호로 바타비아에 도착한 일행은 이후 바타비아에서 흩어져 각자 업무를 맡아 일을 하게 됩니다. 이듬해 이곳의 바다에 익숙해진 이들 중 일부 선원들이 1627년 5월 12일 당시 피터르 나위츠Pieter Nuyts VOC 타이완 지사를 따라, 규모가 작아 역내 항해에 이용되던 야흐트jacht 선급의 아우베르케르크Ouwerkerck, 호이스던Heusden, 슬로턴Sloten 그리고 퀘다Queda에 나눠 타고 타이완의 포트 제일란디아Fort Zeelandia(지금의 타이완 남부 안핑安平)로 출발하여 한 달 조금 지난 6월 23일 타이완에 도착합니다. 이들은 막 자리잡은 타이완의 VOC 거점 요새인 포트 제일란디아를 기지로 하여 바로 타이완 건너 중국 아모이, 그러니까 지금의 푸젠성 샤먼廈門 일대의 무역과 사략선 영업에 투입됩니다.
원래 이들은 그해 7월 28일 계절풍을 타고 일본으로 출발할 예정을 잡아두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 아모이를 직접 공략하여 타이완에 자리를 잡은 게 불과 5년 전인 1622년이었고, 중국으로부터 안정적인 실크 공급을 확보한 VOC는 그동안 유럽 세력으로서는 유일하게 이 해역의 상업 네트워크에 진입하였던 포르투갈을 배제하고 일본으로부터 은을 직접 공급받기 위해 1600년대 초부터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
바타비아의 특별위원회에서는 타이완 지사 나위츠를 대일본 사절로 파견하기로 하고 그 여정을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1627년 7월 무더운 남중국해의 여름,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지 알지 못한 채 일본과의 무역을 협상하기 위해 나위츠 지사를 태우고 일본으로 갈 준비를 하던 배들 중 하나인 아우베르케르크호는 일본 출항 예정 며칠 뒤인 7월 16일 타이완과 아모이 사이의 바다에서 중국 정크선을 한 척 나포합니다. 사로잡은 정크선에는 중국인 150명이 타고 있었는데 70명을 아우베르케르크호로 올려보내고 대신 승무원 16명이 이 정크선에 승선합니다. (...) 그런데, 시기는 바로 7월 한창 태풍이 부는 시기입니다. 그만 태풍에 휘말린 아우베르케르크호와 이 중국 정크선은 다른 VOC의 배들과 헤어져서 높은 파도 사이로 사라져버립니다.
태풍에 휘말려 다른 배들과 헤어진 아우베르케르크호의 선장은 태풍 속에서 놓친 정크선을 포기하고 다시 타이완으로 돌아가 다른 배들에 합류하는 대신, 좀더 남쪽으로 선수를 둘려 계절풍을 타고 일본 규슈의 히라도로 무역을 하러 올라오는 포르투갈 배를 공략하기로 합니다. 과연 얼마 되지 않아 5척의 포르투갈 무역선을 발견한 아우베르케르크호는 '후후, 그럼 슬슬 공략해볼까' 하고 접근을 하는데, 아뿔싸, 이들은 그저 무역선이 아니라 반대로 이미 동중국해상에서 골칫거리인 네덜란드 해적 놈들을 처치하기 위해 무장을 하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동인도 해군 전함이었던 거입니다. 이들에게 나포된 선장과 33인의 선원들은 아우베르케르크호와 함께 마카오로 끌려가 사형을 당하고 배 역시 본보기로 공개적으로 불살라지고 맙니다. (...)
그런데, 이런 일들이 생겨난 발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그 7월의 태풍으로부터 한 달가량 후인 1627년 8월 10일 히라도의 VOC 상관商館에 소형 정크선이 한 척 도착합니다. 놀랍게도 태풍으로 아우베르케르크호와 헤어져 중국 정크선에 타고 있던 네덜란드 선원들 중 12인이 이 소형 정크선을 타고 거의 떠내려오다시피 살아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
테이프를 휘리릭 리와인드해서 다시 보면, 이들이 원래 처음 나포하여 올라탔던 중국 정크선은 태풍이 불 때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떠내려갔었습니다. 한참을 떠내려간 후 섬이 보이자 선원 중 3명이 우선 그 섬에 가서 식수를 구하기로 하고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기록이 없어 더이상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비참한' 사건이 정크선에서 있은 후 이들 3명을 섬에 남겨두고 정크선은 떠나버립니다. 짐작하기로는, 정크선에 있던 남은 중국인들이 이 기회를 틈타 자신들을 잡은 네덜란드인들에게 대항하여 다시 배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포로로 잡은 다음 닻을 올리고 떠나버린 게 아닌가 합니다.
(...) 이들이 도착한 곳은 코리아라는 나라의 남단 섬인 퀠파트Quelpaerts라고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제주도는 19세기까지 서양에 이 퀠파트라는 기묘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들을 체포한 섬의 총독 대장은 이들을 당시의 관례에 따라 심문 조사를 합니다. 신원이 확인되는 대로 표류인을 송환하는 관행을 따르는 것이지요. (...) 문제는 이 1627년이 바로 정묘호란의 해, 당시 한창 후금의 공세로 이미 밀리기 시작한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부산으로 보내 왜관에 통보하고 인수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왜관을 운용하고 있던 대마도에서는 이들을 "자신들이 모르는 사람이라서 인수를 할 수 없다"라고 대답을 합니다送于倭館, 則倭人以爲此非吾輩所之人云云.
(...)
이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들 역시 전쟁에 참가하여 조선을 위해 싸우다 디르크 헤이스베르츤Dirk Gijsberszn과 피터르서 페르바스트Pieterse Verbaest 두 명은 전사를 하고 나머지 한 명 벨테브레이만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이 벨테브레이가 바로 하멜 일행이 만난 박연입니다. (48~53쪽.)
(...) 뭔가 미묘하게도 벨테브레이와 하멜이 알고 있던 세계가 완전히 다른 것이 이 대화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하멜은 이미 정례적으로 네덜란드인이 일본과 교역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벨테브레이는 일본은 외국과의 교역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자칫하면 일본에 가려다 죽게 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멜은 게다가 벨테브레이가 아예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처럼 얘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두 일행 간의 시차는 20년인데 어쩌면 전혀 다른 평행세계 속의 네덜란드인들 같지 않습니까? 17세기 제주도의 푸른 바다 너머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 (55쪽.)
(...) 1520년 역관 이석의 보고가있기 20여 년 전부터 인도에는 '에스타두 다 인디아 포르투게사Estado da Índia Portuguesa'라고 부르는 포르투갈 식민지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1511년 이곳의 고아Goa를 출발한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Afonso de Albuquerque 제독은 당시 이슬람 국가였던 말라카를 점령하고 근거지를 확보합니다. 그런 다음 계속 동진하여 1517년 남쪽 연안에서 중국에 들어와 교역을 시작하겠다고 노크를 하였습니다. (...)
그 첫 번째 일환으로 1516년 고아에서 토메 피르스Tomé Pires를 사절로 해서 페르낭 피르스 드 안드라드Fernão Pires de Andrade와 함께 명나라의 정덕正德 황제에게 보냈습니다. (...)
(...) 그다음 황제 자징嘉靖은 반대로 외국인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정더 황제 당시 포르투갈에 호의적이었던 장빈江彬 같은 측근 세력마저 새 황제 밑에서 힘을 잃고, 결국 불랑기인들은 아예 명으로부터 '해적'으로 찍히게 됩니다. 토메 피르스는 옥에 갇혀 있다 중국에서 명을 다했다고 합니다. 포르투갈 왕의 사절단의 임무는 이렇게 시작하자마자 실패로 끝이 납니다. (...)
하지만 '꺾이지 않는 마음의 포르투갈'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나지 않습니다. (...) 먼저 불랑기와 허락받지 않은 무역이 슬슬 늘어나서 되돌리기 어려운 상태로 확산되자 중국 내부에서도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나을 것 같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먼저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명나라에서는 포르투갈의 대포를 사서 변방에 설치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예 이 대포의 이름을 불랑기라고 부르면서 말이죠. (81~83쪽.)
요약하자면, 포르투갈은 1530년대에 푸젠의 아모이 즉 샤먼과 닝보를 뚫고, 명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불랑기포를 제공하여 거들기도 하면서 광둥의 샹산아오 즉 마카오에 슬금슬금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중국에 미운털이 박힌 불랑기라는 이름을 16세기 중반 '푸더우리자蒲都麗家' 즉 '포르투갈'로 세탁하여 해적 블랙리스트에서 빠져나온 후 얼렁뚱땅 세금을 내는 정식 교역의 상대로 마침내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이전에 어물쩍 뇌물을 주고 발을 걸쳐둔 마카오도 결국 1582년에는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인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87~88쪽.)
(...) 사비에르가 막 일본에 갔을 때는 아직 마카오가 완전히 포르투갈의 거처로 자리를 잡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페르낭 멘데스 핀투의 편력기』에 잘 묘사된 것처럼, 대체로 말라카를 본부로 삼고 중국의 아모이(샤먼) 같은 밀무역이 이루어지던 곳들을 거쳐 일본에 부정기적으로 오가는 중이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포르투갈이 일본에 갔다는 게 시간 맞춰 정기선이 운항하는 그런 게 아니라 여전히 매번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가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으로 가는 제대로 된 항로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채 처음에는 일본의 남쪽 섬인 규슈의 서남쪽 해안 여기저기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히 도착한 곳의 다이묘가 외국인에게 부정적이지 않고 부정적이지 않고 무역을 허용해주면 무역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
그중 가장 먼저 1550년대에 포르투갈인에게 조금 더 정기적으로 기항이 허용되고, 이들이 중국에서 가져온 실크 원사를 판매할 수 있게 된 곳은 규슈 북서쪽 히젠노쿠니에 있던 히라도平戶라는 곳입니다. 히라도는 원래부터 상인이라기보다 해적에 가까운 저장·푸젠 지방의 명나라 상인들이 드나들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도와 말레이반도 지역에 거점을 확보한 포르투갈 상인들이 드나들게 되자 마치 보물선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히라도는 히라도 마쓰우라平戶松浦라는 다이묘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점점 개방되어 1584년에는 스페인, 1609년에는 네덜란드, 1613년에는 그때까지는 동아시아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던 잉글랜드까지 진출해서 상관商館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아직 훗날의 일이고, 남만인이라고는 포르투갈인이 유일하던 1561년 히라도에서 일본 상인들과 포르투갈인들 사이에 거래가 잘못되면서 서로 칼을 빼들고 싸우는 큰 충돌이 발생합니다. 이를 미야노마에 사건宮ノ前事件이라고 하는데, 그 결과로 히라도 측에서는 포르투갈인 출입금지를 통보하고, 포르투갈인들도 여기에 다시 오지 않겠다며 새로운 무역 항구를 찾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던 중 히젠 내 마쓰우라의 라이벌 지역인 '산조조三城城'라는 곳의 성주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가 이를 알게 됩니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영지에서 한적하기 짝이 없던 나가사키라는 어촌 포구를 아예 희사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히라도가 누리던 보물선을 이참에 모두 가져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어 '나가사키'라는 조그만 어촌이 이때부터 동아시아와 세계사에 독보적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나가사키는 처음에는 예수회와 포르투갈 상인들의 독점적 자치영토로 시작을 했습니다. (...)
이렇게 일본이라는 머나먼 왕국의 문을 연 사비에르 신부는 인도 고아로 돌아갔다가 바로 다음 타깃인 중국의 문을 열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갑니다. 먼저 얘기했듯이 명나라로부터 아직 해적의 꼬리표가 떨어지지 않은 포르투갈 상선들과 함께 나선 사비에르 신부는 1552년 중국의 입구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바라던 중국의 문은 열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포르투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의 문을 비집고 들아갔고, 시간이 좀 지난 후 인도-아시아 선교를 맡은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주교에 의해 1580년대에 마테오 리치 신부가 중국에 진입하면서 본격적인 중국 선교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109~113쪽.)
포르투갈은 16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습니다. 마카오를 중심으로 포르투갈의 무역 활동을 한번 소략하게나마 정리해볼까요. (...)
포르투갈 상선의 선장은 '카피탕 모르Capitão mor'라고 부릅니다. 앞서 소개한 『명사』 '불랑기' 기사에 "[정더] 13년에, [불랑기는] 사신 가필단말 등을 보내어十三年遣使臣加必丹末等"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가필단말加必丹末'의 번역을 찾아보면 토메 피르스 대사인지 확실치 않다고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가필단말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바로 '카피탕 모르'를 음차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이를 비슷한 발음의 '카피탄カピタン'이라 부르고 한자로 甲必丹, 加比丹, 加比旦으로 표기하였습니다. 이 카피탕 모르는 영어로 직역하면 captain-major인 포르투갈 식민지의 관리이면서 선장이며 상인입니다. 이 용어는 훗날 일본에서 포르투갈인들이 네덜란드인으로 교체된 후에도 관행으로 남아,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 상관장을 일본인들은 여전히 '카피탄'으로 불렀습니다.
먼저 전형적인 인도양-일본 라인의 카피탕 모르의 루트를 따라가봅시다. 먼저 항해는 에스타두 다 인디아 포르투게사Estado da Índia Portuguesa의 동쪽 끝에 해당하는 고아에서 출발하여 말라카로 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미리 말씀드리는 것은, 이 고아와 말라카에서 포르투갈 왕실은 커미션과 입항세 정도밖에는 징수하지 않아 카피탕 모르는 일단 개인적으로 하기에 따라 상당한 이익을 노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면허제도를 '카르타즈Cartaz'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카르타즈를 보유한 카피탕 모르는 단순한 선장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일종의 기업 역할을 합니다.
고아에서 먼저 인도산 면직물, 와인, 유리제품, 크리스털, 유럽산 탁상시계 등을 싣고 4~5월경 계절풍 몬순을 타고 말라카로 갑니다. 고아에서 실은 화물을 말라카에서는 인도네시아산 향료, 캄포르, 침향목, 동물 가죽 같은 것과 바꾼 다음 목적지 마카오로 갑니다. 말라카 화물은 다시 여기서 중국산 실크, 도자기, 금, 사향 등으로 바꿉니다. 마카오에서 서남 계절풍을 놓치거나, 6월과 1월에 열리는 광저우의 큰 실크 시장 중 하나라도 놓치면 마카오에서 1년간 발이 묶입니다. (...) 만약 6~8월 사이에 계절풍을 타게 되면 다음 목적지 일본으로 출발합니다. 마카오에서 실은 물건들은 다시 일본에서 은, 금, 구리, 칠기, 유럽에 일본어 발음 '뵤부byobu'로 알려진 실크 채색 병풍, 칼, 무구류, 노예(!)와 교환하여, 11월 북동 계절풍을 타고 출항! 다시 마카오로 온 다음 1월의 광저우 시장에서 '일본 은'을 금, 구리, 상아, 진주, 실크로 바꿔 고아로 돌아간 후, 이 물건들을 고아에서 인도의 다른 지역으로 팔거나 유럽으로 다시 싣고 갑니다.
보다시피 16세기에 이미 포르투갈 혹은 포르투갈 마카오의 무역이란 단순히 유럽의 금은이나 시계 같은 신기한 물건을 중국에 가져가서 중국 실크와 도자기로 바꿔 가져가는 단순 구조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16세기 후반 리스본-서아프리카-고아-말라카-마카오-규슈 히라도/나가사키를 잇는 복잡한 무역 구조의 인도양 포르투갈 라인을 형성한 것입니다. (184~186쪽.)
스페인은 이렇게 1520년대에 태평양을 가로질러 동아시아에 도착해서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기도 했지만, 마젤란의 항해 이후 45년간 실질적으로는 안정적인 태평양 횡단 항해루트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서쪽으로는 바람을 타고 그럭저럭 갔는데 동쪽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주 간혹 운이 좋으면 살아 돌아오는 그런 지옥항로였던 거죠. 이 항해 루트는 수많은 사람들과 배를 태평양에 수장시키고 나서 1565년이 되어서야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Andres de Urdaneta라는 바스크계의 수도사이면서 항해사가 멕시코 아카풀코에서 출발해서 필리핀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4개월에 걸친 항해 루트를 완성합니다. 지도를 보시면 서쪽으로 갈 때는 직선처럼 가지면 동쪽으로 올 때는 필리핀에서 북동쪽으로 더 올라가 북미 대륙의 서북쪽으로 건너간 다음 해안을 타고 내려오는 루트를 타게 되어 있습니다. 이후 이 루트는 조금 더 조정되어 쿠로시오 해류를 이용하여 일본 쪽으로 조금 더 가깝게 붙어서 동쪽으로 태평양을 건너가게 됩니다. 정기적으로 태평양을 가로지를 수 있는 항로가 개설되자 이제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채굴한 은을 가지고 필리핀 마닐라로 와서 중국의 실크 원사와 바꿔가는 마니라-아카풀코 갤리선 무역을 정례화하게 됩니다. (190~192쪽.)
유럽의 대부분 주화체계에서는 법정 금-은 교환비율을 지정하였는데, 대체로 1:14에서 1:16의 법정 교환비율을 유지해왔습니다. 인도의 무굴 제국 같은 경우도 일찍부터 금-은 복본위제도로 금화에 대한 은화의 비율을 지정해서 운영했는데, 16세기 초 1:8에서 점차 비율이 하락하여 18세기 중반에는 1:14까지 떨어졌다고 합니다. 대체로 은 가치가 금에 비해 점점 떨어지는 추세였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 이야기의 배경인 16~17세기 당시의 전 세계 법정 또는 시장의 금-은 교환비율을 한번 살펴볼까요.
스페인은 1:12.5~1:14이고, 유럽 전반은 1:11~1:12, 페르시아는 대체로 1:10, 인도의 경우 1670년대 가장 비율이 높았을 때 1:8~1:16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중국은 14세기 후반 1:4~1:5, 16세기 초 1:6, 17세기 초 광둥 지방 1:5.5~1:7. 비율이 전 세계 다른 지역의 반 이상입니다. 이 말은 그러니까 은값이 두 배 이상으로 높다는 얘기죠.
(...)
그런데, 중국은 이마저도 금은이 '화폐'로 사용되지 않았기에 법정비율로 정해진 경우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화폐로서의 은화는 한참 뒤인 19세기 말 1887년에 가서야 광둥성의 양광총독 장쯔둥張之洞의 건의로 처음 주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중국에서 유통되거나 중국으로 유입된 은은 초기의 형태와 상관없이 그냥 은덩어리, 즉 정은sycee 형태로 처리되었습니다. (...) 중국 근세 시기의 금-은 비율이란 것은 따라서 중앙정부 또는 지방정부가 강제하는 법정비율이라기보다 시장가치에 따라 올랐다 내렸다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화폐라기보다 상품commodity에 더 가까워진다는 것이지요. (207~209쪽.)
(...) 1571년을 어떤 학자들은 마침내 전 지구적 네트워크가 시작된 해라고까지 단언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국지적인 네트워크들이 점점 확장되면서 서로 접점을 찾아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연결되는 과정의 완결점이 바로 1565년에 시작되어 1571년에 완료된 마닐라라는 도시의 성립이라고 보는 것이죠. (210쪽.)
이후 쇄국정책이 행해진 에도 일본은 이렇게 멀리 다녀온 덴지쿠 도쿠베에나 야마다 나가마사처럼 이국에 자리잡은 일본인들을 해외 네트워크로 활용하면서 진취적인 일본인의 기상을 휘날리는 케이스로 받아들였을까요? 생각과는 달리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의 주인선 무역을 제외하고 실제 에도 일본에서 이들을 자국의 보호 대상이라든지 활용 대상으로 간주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17세기 중반 이후 쇄국정책이 실행되었다지만, 실제 무역거래는 거래선이 바뀌기는 하여도 외국 물품의 수입이 적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쇄국이란 일본인들이 더이상 일본 국내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그리고 외부에서 일본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인적 장벽에 더 가깝다고 보입니다. 여기 이 동남아시아에 이런저런 이유로 약 1세기 동안 퍼져나갔던 일본인들에게도 빗장을 걸어 잠가 이들이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사람의 쇄국입니다. 바깥에 남은 이들은 정말로 본국과 연결이 끊어진 채 표류하게 되고, 점차 동화되어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다시 각광을 받은 것은 한참 뒤인 1940년대입니다. 미국과의 갈등으로 석유와 천연자원 공급선이 필요해진 일본 제국으로서는 역사에서 찾아낸 동남아시아 일본인들의 행적이 "이야말로 대일본 제국의 씩씩한 모범이 아닌가" 하게 되고, 그리하여 야마다 나가마사는 교과서에서 선각자로 다뤄지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됩니다. 동남아시아에 이런 연고를 주장하면서, 소위 대동아전쟁의 전선 확대를 교묘한 논리로 꿰어 맞춥니다. 현지인들과 함께 서양 세력에 대항하는 아시아의 맏형이라는 논리로 말이지요. '진취적'이라는 말이 국가나 민족과 결합하면 거의 대부분 이면의 폭력을 덮는 데 사용됩니다. 화려한 근대란 이름의 화장은 실은 늘 잔인한 맨 얼굴을 숨기고 있습니다. (338~339쪽.)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이 된 것은 1603년이지만,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1614년 오사카 전투까지 14년의 기간 동안은 이후의 에도 바쿠후 시대를 만들기 위해, 아직 남은 도요토미계의 세력을 꺾고 자신이 쇼군이 된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던 시기입니다. 쇼군이 동아시아적 군주가 되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외부로부터 정당성을 입증받는 것입니다. 도쿠가와는 패권을 잡은 후 그때부터 인근 국가들에 외교문서를 보내 관계를 수립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입니다. 조선의 경우부터 볼까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침략을 일으킨 원흉 도요토미를 무찔렀으니 이제 자기들과 다시 통교를 하자고 요청합니다. 그 후 1607년 처음으로 조선에서 사신이 파견되어 국교 재개의 과정을 밟게 됩니다.
1604년 주인장 제도를 정비한 것 역시 이런 사정의 일부분입니다. 명나라나 조선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파타니, 코친차이나, 캄보디아, 참퍄, 샴 같은 전통적인 동천축 국가들과 여송의 스페인, 윌리엄 애덤스를 통한 잉글랜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같은 국가들에게까지 가능하면 문호를 열게 된 것입니다. 히라도에는 이때 잉글랜드, 네덜란드의 상관들이 들어섰습니다. 1601년부터 1614년 사이에 도쿠가와 바쿠후가 외교문서를 발행한 것이 무려 76건으로 한 해 5.4건의 외교문서가 발행되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경우처럼 외교 관례적으로 문제가 있다 해도 일단 받아들여서 정치적 우선순위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에도 바쿠후의 막중한 과제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1609년 히라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이 설치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1615년 8월, VOC의 야트급 야카르타호가 일본 나가사키 바로 앞바다에서 귀중한 상품을 가득 싣고 나가사키로 들어오던 포르투갈의 산투 안토니우호를 포획하고서는 히라도의 VOC 상관으로 가져가버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연히 나가사키의 포르투갈 측은 일본 측에 일본 영내에서 해적질을 한 것이니 처벌을 하고 잣니들의 배롤 돌려달라고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바쿠후에서는 나가사키의 포르투갈 측 항의를 받고 히라도의 상관장 약스 스펙스Jacques Specx를 소환합니다.
(...)
생각해보면 포르투갈이 더 보편 상식적인 주장을 한다고 생각됩니다만 바쿠후는 놀랍게도 VOC의 손을 들어줍니다. 그 결과 히라도의 VOC 상관은 포획한 포르투갈 상선의 물품을 모두 소유하게 되고, 그로 인해 엄청난 수익을 올립니다. (...)
일본은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요? (...) 무엇보다 도요토미의 남은 세력을 마지막으로 쳐낸 오사카 전투가 바로 그해 가을 9월에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사실 영향력이 죽어들고 있었습니다. 그 전해에 예수회가 마침내 전면 추방을 당했고, 포르투갈은 엄격하게 무역 활동으로 역할이 제한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도 바쿠후 쪽에서는 네덜란드나 잉글랜드라면 오히려 기리시탄 문제 없이 교역을 늘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394~396쪽.)
결국 중국에 진출하는 해답은 뭐다? 마카오를 손에 넣자! 1622년 바타비아에서는 코르넬리스 레이어선Cornelis Reiersen 제독이 이끄는 정예부대를 보내 무역 거점을 허술하게 방비하는 정도였던 마카오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맙소사. 졌습니다. 그러자, VOC는 마카오 말고 아예 푸젠성으로 바로 가서 핫라인을 개설하기로 합니다. 이듬해 1623년 페스카도레스섬에 자리를 잡고 바로 건너편 아모이항을 '공격'합니다. (...) 그런데, 맙소사. 또 졌습니다. VOC는 이번에는 명나라군에 밀려버립니다.
바타비아의 본부에서는 원래 중국을 상대로 전쟁하려던 게 아니었으니, 이대로 상황이 악화되면 더 곤란해지리라 판단하고 매파 레이어선 제독을 전격 경질하고 레이던 대학 법학박사 출신의 비둘기파 마르턴 송크Maarten Sonck를 다시 책임자로 보냅니다. 마르턴 송크는 아모이의 복건순무福建巡撫 상저우쭤商周祖와 협상을 하고 펑후에서 물러나 그 너머의 일라 포르모사Ila Formosa라는 섬으로 물러나기로 합의합니다.
이렇게 하여 포르투갈인이 처음 일라 포르모사라고 부르던 섬이 동아시아 해역사에 전략적 요충지로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 타이완섬입니다. (408~409쪽.)
1627년, 제3대 지사로 피터르 나위츠Pieter Nuyts(또는 Nuijts)가 부임합니다. 나위츠 지사는 우선 리단의 죽음으로 해적 두목의 자리에 오른 이콴 정즈룽을 중간에 끼워 중국 푸젠성에 계속 로비를 하는 한편 일본에 공식 사절로 건너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의 해상 무역 해적들에게도 다카사고高砂 즉 타이완은 이전부터 원주민들과 사슴가죽 교역을 해온, 아예 연고가 없는 땅은 아니었다는 것이죠. 지도를 살펴보시면 일본 사쓰마에서 류큐로, 다시 요나구니与那國까지 섬들이 타이완 바로 앞까지 연결됩니다.
피터르 나위츠는 제3대 포르모사 즉 타이완 지사 및 대일본 사절로, (...) 나위츠가 부임하여 타이완의 원주민들을 평정하고 요새의 기틀을 잡고 나니, 난데없는 엉뚱한 사람드이 등장하여 별 해괴한 소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도 초기 주인선 무역을 하던 일본인이 이 섬은 자기들이 벌써 6년 전에 와서 자리를 잡은 일본땅이라고 클레임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이 '야피오엔Jaffioen'이라고 부른 이 일본인들에 대해 나위츠가 바타비아에 보고한 편지에는 중국에서 요구한다면 말이 되지만 그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일축하고 있는데, 일이 좀 꼬이기 시작합니다.
1627년 나위츠가 VOC를 대표하여 통상을 요구하러 에도에 와있는 동안, 이 야피오엔이라는 일본인도 바쿠후에 와서 '다카사고가 일본땅임을 확인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타이완 원주민들까지 잡아와서 들이밀고, VOC에 대해 여러 가지 중상모략(거의 사실이었다고 생각되지만)을 늘어놓으며 방해공작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사람의 이름을 하마다 야효에浜田弥兵衛라고 하는데, 결과는 예상과 달리 바쿠후에서 둘 다 만나주지 않아버립니다. 하마다 야효에의 경우는 그렇다 치더라도 VOC의 외교적 임무를 띤 사절단장인 나위츠로서는 그야말로 외교 참사를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 그 다음해 출항 허가를 요청하로 온 '야피오엔'은 나위츠의 사무실에서 갑자기 칼을 빼서 나위츠의 목에 겨누고 그를 꽁꽁 묶어 인질로 잡아버리는 사건을 벌입니다.
(...)포르모사의 실크 창고를 다 털어주고 그나마 일본에 가서 나머지를 더 물어주는 조건으로 나위츠는 간신히 풀려나지만, 일본에 간 인질들 중 그의 어린 아들은 수용소에서 사망하는 비극도 벌어집니다. 그런데, 나위츠의 실수는 이쯤으로 적당히 끝나지 않습니다.
1627년 에도에서의 해프닝으로 인해 VOC의 대일 교역이 1628년부터 잠정 중지되고, 교역 재개를 위한 협상 조건 중 하나로 1632년 일본으로 소환된 나위츠는 소란의 책임을 지고 1636년까지 5년간 가택연금의 상태가 됩니다. (...) 그러니까 1620년대 후반부터 1630년대 중반까지 VOC는 일본의 길들이기에 당하고만 있는 형국입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VOC는 마침내 에도 바쿠후에서 포르투갈을 대신하여 교역 상대로서 독점적인 위치를 확보합니다. (...)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나가사키로의 이주입니다. 그때까지 히라도에서 큰 상관 건물들을 짓고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지내던 VOC는 1639년 포르투갈이 최종적으로 추방되자 히라도에서 나가사키로 강제 이주하게 됩니다. 히라도는 이렇게 하여 오랜 국제 무역항의 자리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포르투갈과 관계가 점점 악화되자 나가사키에는 포르투갈인들이 혹시라도 선교를 하거나 통제에서 벗어날 것을 염려하여 한 곳에 몰아넣으려고 만든 인공섬 데지마出島가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이 완전 추방된 후 나가사키로 이주시킨 VOC 상관을 이 빈 인공섬으로 몰아넣은 셈입니다. (...) 그나마도 네덜란드만 유일하게 일본에서 추방당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나위츠는 어쩌면 자신의 임무를 그렇게 역살적으로 해낸 것일까요. (423~426쪽.)
원주민 선교가 가장 활발하던 시기는 바로 스페인 군대의 힘이 가장 강력했을 때입니다. 이때는 산도밍고(단수이)에서 산살바도르(키룽)까지 스페인인이 별다른 무장 없이 혼자 길을 걸어가도 안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후 스페인 군대는 타이완 동쪽 해안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태평양 횡단을 나선 갤리선들이 폭풍을 만났을 때 피신할 수 있는 안전 지역들을 확보합니다. 실은 이게 무역보다 더 큰 이유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슬라 에르모사의 산살바도르에서 이뤄지는 무역은 이때 점점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산살바도르 요새의 무역 기지로서의 역할을 방해한 것은 바로 VOC입니다. VOC의 무차별적인 해적질에 시달리던 1627년, 스페인 마닐라에서 포트 제일란디아 요새를 공격하려 기세 좋게 출동을 하였지만 태풍으로 가지도 못하고 실패를 하는데, 반면 VOC는 효과적으로 포르투갈 카라카선과 스페인 갤리선들을 공격합니다. 게다가 앞서 이야기를 하였지만, 중국 해적들까지 VOC 갈을 휘날리며 마닐라나 마카오를 오가는 중국 정크선들을 공격해서 해적질을 합니다. 스페인이 타이완 북부에 기지를 둔 의미 자체가 없어져버리도록, VOC는 중국 물건이 나오는 푸젠성 항구 쪽이 아니라 기착지인 마닐라 인근 해상에서 이들 배를 공격하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한마디로 타이완섬에 위치한 요새의 전략적 필요성이 별 의미가 없어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계속해서 무역 방해를 받으니 일단 마닐라 입장에서는 산살비도르 요새까지 배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역 자금이 부족해집니다. 중국 상인들이 타이완에 실크를 가져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일도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이때 마닐라도 결정적인 재정 악화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이 재정 악화는 1630년대부터 1640년대까지 멕시코에서 오는 공식적인 은의 양이 급감한 것이 주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여파로 마닐라 자체의 재정이 힘들어지자 내부적으로 돈만 잡아먹는 타이완 요새들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됩니다.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필리핀 남부 무슬림 술탄국들과의 갈등이 전쟁으로 확대되어 그쪽에 병력이 필요해지자 결국 마닐라에서 병력을 철수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립니다. (464~466쪽.)
교정. 초판 1쇄
51쪽 11줄 : 발단이랄까 할 수도 -> 발단이라고 할 수도
53쪽 밑에서7줄 : 피터르손 페르바스트Pieterse Verbaest -> 피터르서 페르바스트Pieterse Verbaest
185쪽 밑에서2줄 : 서남계절풍 -> 서남 계절풍
309쪽 11줄 : 인도양를 -> 인도양을
327쪽 밑에서10줄 : 금불金弗을 (글꼴크기)
444쪽 3줄 : 도니미코 -> 도미니코
447쪽 4줄 : 일랴 포르모사 -> 일라 포르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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