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박영서, 들녘, 2023.) 본문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부동산 문제는 정권의 명운이 걸린 중대한 문제로 간주됩니다. 선거 때마다 부동산 문제는 공약목록 상단에 위치하고, 새롭게 들어선 정권은 부동산 대책에 골머리를 앓습니다. 보통의 시민들에게도 집값과 땅값은 올라도 걱정이고 떨어져도 걱정입니다. 온 나라가 부동산에 울고 웃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데 이런 부동산 문제가, 단지 작금에만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수백 년 전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화두였다고 하니, 구미가 당기는 주제입니다.
물론 조선시대의 부동산과 지금의 부동산이 같은 의미인 것은 아닙니다. 조선시대의 토지는 거의 유일한 생산수단이었지만 지금의 토지는 생산재로서의 의미는 거의 없죠. 집도 비슷해서, 조선시대에도 집값의 등락은 있었고 이를 노린 투자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처럼 국가권력의 향배가 오갈 정도로 중대한 문제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개념을 기준으로 과거를 무리하게 해석하는 것은 종종 부적절한 재단으로 이어지곤 하죠. 하지만 동시에 지금의 관점으로 과거를 재해석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기도 합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처럼, 지금 우리가 겪는 어떤 문제의 해법을 과거의 또다른 경험에서 찾을 수도 있다는 거니까요. 지금 우리가 가진 고민이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이 의외의 위안을 주기도 합니다.
이 책에 소개된 조선시대의 부동산 문제를 찬찬히 읽다보면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욕심이란 여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재理財에 집착하는 것을 터부시했던 성리학의 시대에도 투자를 통해 재산을 불리려는 노력은 엄존하고 있었고 온갖 편법을 동원해 재물을 탐하는 이들 역시 흔했음이 이 책 내내 확인되니까요.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그러한 탐욕이 무절제하게 확산되어 사회의 근간을 허물 정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여러 노력들도 있었습니다. 지배계층의 과도한 토지 점유를 막고자 했던 과전법과 직전법이 그러하고, 조선시대 내내 여러 차례 반복되었던 양전사업이 그러합니다. 그러한 노력들이 있었기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 오랜 시간동안 (근근하게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리고 그러한 노력들조차 중단되고 건국 초의 이상理想이 무너졌을 때 조선은 멸망했던 것 아닐까요.
이 책이 소개하는 조선시대 부동산의 천태만상은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고 또한 우리를 실망케 하는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말미에 이르러 다시금 희망과 이상을 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다 그런 거라고 절망하며 좌절하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되뇌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원래의 이상과 목표가 무엇인지를 곱씹어야만 그나마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 거라고, 저 역시도 그렇게 믿어볼랍니다.
토지 개혁론자들의 아이디어는 간단하고 깔끔했습니다.' '모든 토지의 국유화'와 '경작자에게 직접 분배'. 농민 한 사람이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토지를 국가로부터 받아 경작하면서, 생산물의 십 퍼센트 정도만 세금으로 납부해도 빈부 격차와 재정 고갈을 모두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조준의 토지 개혁안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당시 고려의 현실에 맞게 구현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는 농민과 국가 사이에 끼어든 특권 계급이 농민에게서 오십 퍼센트를 받아 불로소득으로 떼먹고 나라에는 하나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과 나라가 모두 가는해졌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조업전의 근거를 폐지해 불로소득을 없애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명했습니다.
(...)
과전법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엇을까요? 그들의 개혁은 과연 이상을 충실히 따랐을까요? (...)
(...) 조준의 발언이 묘하게 달라졌습니다. 그는 분명히 '예외 없고 원칙적인 국유화를 주장했었는데요, 사적 토지 소유를 원천 차단한다는목표가 어느새 '서울 안의 사대부에게는 사전을 허용하자'는 내용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백성에게 경작할 땅을 분배한다던 당초 개혁안의 내용은 아예 빠져 있죠. (...)
과전법의 핵심은 토지조사를 통해 모든 토지를 파악하고, 분배 상태를 초기화하여 법률에 맞게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대원칙은 '나랏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토지를 분배하되, 원칙적으로 상속은 불가능하다.'였습니다. 과전법이라는 이름부터가 '관직자에게 적용되는 토지법'이라는 뜻이었죠.
과전법은 언뜻 관료들의 수입과 관계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과전법이 중대한 개혁이었던 까닭은 따로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실제 경작자'의 법적 지위를 마련했다는 점입니다. 토지를 빌려서 직접 경작하는 농사꾼들이 이른바 전객(佃客)이라는 법적 용어로 새롭게 규정되었죠. 과거의 토지대장에는 이들의 존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땅은 명목상으로는 국가가 소유하고 개인에게 빌려주는 것뿐이었지만, 사실상의 소유권은 그 개인에게 있었죠. 과전법은 이러한 소유 구조를 단순화하여, 오직 '땅 주인(국가)'과 '땅 빌린 사람(전객)'의 관계로 조직화합니다. 토지대장에서 사람 이름을 빼고 가호 번호를 전면에 등장시킨 까닭도 기존의 '토지 소유자'를 '토지 사용자'로 바꾸겠다는 의도에서였죠.
이러한 변화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실제 경작하는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국가로부터 직접 토지를 빌려 받는 국가가 공무원에게 지급한 토지를 빌려 받든 생산량의 약 십 퍼센트만 납부하면 됐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국가에, 후자의 경우에는 개인에게 말이죠. 땅 주인은 오직 국가뿐이니 중복 수취는 불가능했고, 정해진 곳에서 고정된 수세를 한 번 납부하고 나면 그만이었습니다. 나머지 생산물은 자기 몫으로 챙기고요. 이렇게 소규모 자영농을 육성하고 보호하겠다는 조치는 가히 혁명적인 시도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 그들이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정치적 위기를 만나고 여러 사람의 피를 흘리며 추진한 개혁의 결과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됩니다. '약간의 특권을 용인한 모든 토지의 국유화'와 '소규모 자영농의 육성과 보호'입니다. 이 두 가지 특징 모두가 '상속 또는 독점에서 나오는 불로소득의 원천 차단'과 '백성의 삶의 질 향상을 통한 국가 재정 건전화'라는 두 가지 목표에 상응했죠. (...)
그러나 안타깝게도 '특권 토지의 세습화'와 '모호한 소유권의 인정'이라는 미완성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 (35~40쪽.)
공법은 1444년(세종 26년) 공표된 이후 실험을 계속하다가 45년이나 지난 1489년(성종 20년)에 전면 시행되었습니다. 과전제가 토지 개혁이었다면, 공법은 과전제라는 토지제도 위에서 현실에 부합하면서도 소규모 자영농을 보호할 수 있는 조세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던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공법 이후 한 해 농사의 성과가 좌우되는 토지조사사업과 예외 조항의 관리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자, 그렇다면 실제는 어땠을까요? 과연 공법은 조선의 평범한 백성들을 윤택하게 했을까요? 안타깝게도 '사람의 문제'와 예외에서 시작되는 특혜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토지조사사업을 수행하는 공무원들이 각 지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에 대해 중립적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왕과 신하들이 수십 년간 토론과 실험을 거듭한 끝에 만들어낸 시스템이었으나, 결코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행정 현장에서 벌어지는 부조리가 제도의 예외를 파고들었고, 그 예외가 블랙홀이 되어 시스템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부자들은 세금을 모두 피해 갔고, 부담은 소규모 자영농들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결국 조선이 개국 초기부터 전략적으로 육성하려 했던 소규모 자영농들은 세금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60~61쪽.)
그렇다고 이러한 행위가 윤리적으로 정당화된 것은 아닙니다. 탈법적인 수단을 이용하여 축재하다가 고발되어 파직당한 사례가 무수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윤리보다는 생존이 우선인 국가적 위기 상황일수록 전략적인 재테크는 더욱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심지어 전쟁이 닥쳐도 말이죠.
(...)
LH공사의 직원들이 3기 신도시 등에 투기한 것이 적발되었을 때, LH공사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아무리 문제가 되어도 차명으로 열심히 투기해서 이득 보겠다'는 글을 써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 위기가 정말로 무서운 까닭은 평소에는 그럭저럭 작동되는 윤리적 기준이 쉽게 무너진다는 점에 있습니다. 나아가 누군가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선례를 만들면, '나도 따라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다'는 위기감이 전염병처럼 퍼집니다. 설사 그 과정이 다소 비윤리적이라 해도요.
아마 조선의 양반들 또한 그랬을 겁니다. 자그마한 예외 규정을 비틀어서 제도와 시스템에 구멍을 낸 사람들, 그들을 비판하면서도 그 방법을 조금씩 변용하여 법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길을 찾아낸 사람들, 어느새 그들의 방식을 표준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덕분에 환곡이라는 훌륭한 사회보장제도는 부패의 온상이 되었죠. (71~73쪽.)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통계상 양반과 평민의 토지 보유 현황은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양반은 멀쩡히 농사 잘 짓는 땅도 주인 없는 땅으로 속여서 탈세했고, 평민은 농사지을 수 없는 땅도 새로 개간한 땅으로 '등록당해' 더 무거운 세금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상대적으로 고부가가치인 논은 주로 양반이, 저부가가치인 밭은 주로 평민이 소유했죠. 이서를 비롯한 중인 계급 또한 양반과 경제적 이익을 같이하면서 평민을 수탈했습니다. 〈표 2〉의 '용궁현 전체 합계'를 보면 양반과 평민의 토지 보유량이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양반과 중인의 것은 물론, 주인 없는 토지까지 다 합친 것과 평민의 토지를 비교해야만 불평등의 실체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죠. 비록 이조차도 거친 셈법이지만 말입니다. (111쪽.)
외부로부터 위기가 닥쳐왔을 때의 선택지를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없이 위기를 맞아 해체되거나,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새로운 흐름을 타거나, 내부 결속을 강화하거나. 조선은 세 번째를 선택했습다. 연이은 전란과 자연재해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체재로, '종법(宗法)' 즉 적장자 중심의 '우리 가문끼리 체제'가 자리 잡습니다. 이는 그전까지 이론적으로는 강조됐지만 좀처럼 관습으로서 정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가족안에서는 장손(長孫)을 중심으로, 가문 안에서는 종손(宗孫)을 중심으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연대를 강화했죠. 이 과정에서 여성은 '보호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가뜩이나 좁았던 사회활동의 범위도 더욱 쪼그라듭니다.
조선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토지 확보, 다시 말해 총생산량의 증가는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 양반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지출의 규모는 늘어났습니다. 예컨대 과거 시험이 있습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과거에 합격하기까지 들어가는 비용도 막대해졌죠. 그래서 이들은 더더욱 자산 증식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한 세대에서 아무리 부를 쌓아도, 몇 세대를 거치고 나면 재산의 총량은 어느샌가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그 주요한 원인은 상속이었습니다. (113쪽.)
사람들은 각자가 처한 사회적 환경과 역사적 맥락에 맞으면서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속제도를 찾아왔습니다. 조선을 예로 들어볼까요? 조선 전기, 남녀균분상속이 뿌리 깊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물론 관습적 영향도 컸겠지만, 아마도 토지의 사유화와 개인의 독점을 최대한 제한하려 했던 조선 사회의 법적 테두리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원칙적으로 토지는 왕(국가)의 소유이므로, 언제 어느 때라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했죠. 무엇보다 토지는 곧 과세 대상이므로, 토지를 많이 소유할수록 다양한 종류의 세금을 부담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조선 사람들은 재산을 최대한 쪼갰습니다. 한 사람이 모은 재산이라도 몇 대만 거치면 쪼개진 땅 하나하나를 추적하기가 몹시 어려웠죠. 이렇게 땅을 쪼개면 재산이 분할되지만, 조선 전기에는 개간 등으로 재산을 불리기가 비교적 용이했습니다. 인구구조상 아직은 소수였기에 양반이라는 신분만으로도 충분히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여전히 포텐셜이 가득한 미개간 '꿀땅'이 도처에 산재했죠. 그래서 조선 전기의 남녀균분상속제에는 성장하는 나라의 활력과 얼마든지 새로운 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물씬 느껴집니다.
반대로 조선 후기의 상속제는 '지키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양반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드는 지출이 늘어난 반면, 개간 등으로 토지를 늘릴 기회는 줄었죠. 게다가 전란이나 기근 등 외부에서 닥쳐오는 위기로 양반 사회는 해체 위협에 사로잡혔습니다. 분할 상속은 조금씩 몰락 양반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정계에서 멀어진 가문은 좀처럼 반등할 기회를 잡기 어려웠죠. 조선 전기에는 공권력이 의지와 명분을 갖추면 제아무리 경제적 권력을 갖춘 사람이라 해도 충분히 규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사적 권력이 공적 권력을 압도하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부를 한곳에 모아 규모를 불리는 일이 중요했던 겁니다. 제사라는 이벤트를 핵심으로 이루어진 장자 중심 상속제는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양반들의 수였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조선의 사례에서 상속세의 의의를 충분히 끌어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평생 이룬 부를 상속하는 순간이야말로 재분배하기에 적합한 시기입니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는 상속세가 없었기 때문에, 상속을 통해 자산을 형성하고 분배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거의 없었습니다. 양반의 부는 백성과 나라에 기대어 형성된 것임에도, 이들의 재분배는 오직 가족 안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나라로부터 받은 특혜와 백성의 노동을 불공정하게 동원한 대가를 징수하고 이를 나라 전체의 재분배에 투자하는 작업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
상속세는 오랫동안 이어진 역사 속 불평등을 반성한 끝에 나온 제도입니다. 상속세의 불완전한 점을 찾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혹자는 상속세나 소득세 그 자체에 대애 "내 능력과 노력의 대가를 왜 빼앗아 가는가?"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건 홀로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선 특권층에게 최대 업적 중 하나로 여겨졌던 '과거 급제'조차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불평등한 출발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조선 사대부들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외면했습니다. (...)
만약 노력과 능력만이 공정의 표준이 되고 상속세가 공정성을 훼손하는 부적절한 개입으로 여겨진다면, 끝내는 적자생존에 의한 공멸의 시대가 오고 말 것입니다. (120~124쪽.)
(...) 조선은 자영농 중심 국가를 꿈꿨으나, 그 계획은 무너졌습니다. 자영농은 무거운 세금과 자연재해로 인한 물가 상승에 토지를 팔고 소작농 또는 노비가 되었습니다. (...)
지주와 계약으로 묶인 농민은 아무리 농사를 많이 지으려 해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도 부족하고, 소작 계약을 맺은 땅에 소홀해지면 계약을 파기당할 우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남은 수익으로 그들은 의식주와 관혼상제비, 종자비, 세금 등을 모두 해결해야 했습니다.
(...) 농민들은 적은 소득을 어떻게든 불려보려고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가진 땅이 적은 집에서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어린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온 가족이 호미와 곡괭이를 들고 논밭으로 나갔죠. 하지만 소득보다 가족 구성원의 생계비용 및 부채가 늘어나는 속도가 훨씬 빨랐고, 결과적으로 생산 이윤이 지속적으로 하락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소작지는 늘어나는데 빚의 멍에 또한 계속 늘어나는 이상한 사이클, 어디서 많이 본 풍경 아닌가요?
자영농이라 해도 이럴진대, 소작농의 상황은 당연히 더 안 좋았습니다. 조선 후기 농민들의 일상적인 가난은 기본적으로 고정지출이 노동으로 얻는 소득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던 까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에 대입하면, 아무리 일해도 부를 축적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소작료가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을 낳은 원인이라 할 수 있죠. (171~173쪽.)
이문건과 같은 사대부들이 행한 개간 과정에서의 독점, 환곡 등 국가 재정과 공권력을 활용한 축재 등은 분명 하나하나가 충분히 처벌받을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전제가 그러한 행위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조선이 사대부와 왕의 나라로서 유지되기 위해선 사대부와 왕실의 권력이 살아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권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부를 갖춰야 합니다. 그래서 과전법으로 토지 개혁을 도모할 때도 사대부와 왕실에는 특권적 토지가 허용되었습니다. 이때 보장했던 특권들이 시간이 지나며 훗날 수많은 보통 사람의 토지를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바뀐 것이죠. 몇몇은 고발당해 처벌받기도 했지만, 이문건과 같은 수많은 양반 지주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재산을 쌓아나갔습니다. 사대부와 왕이라는 '계급'의 존재가 독점의 당위를 제공한 것입니다.
(...) 부동산 불평등은 마침내 고려에서 그러했듯, 조선을 망하게 했습니다. 상황을 단순히 보면, 땅을 소유한 자가 땅이 없는 수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면서 그들에게 적절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국가에 내야 할 세금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국가 경쟁력이 하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는 조금 더 복잡합니다. 사대부·지주 계급의 땅 독점은 나라 전체적인 관점에서 '망국병'의 원인이었으나, 작은 공동체 단위에서는 공동체의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원리로 작용했습니다. 이른바 조선의 도덕 경제[moral economy]입니다.
조선 사회가 지주가 소작인을 착취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특히 위기의 순간에 대가 없이 헌신하는 것은 지주의 미덕이자 의무였죠. 만석꾼 집안이 어려울 때마다 곡식을 베풀었다는 일화가 전국 방방곡곡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
그러나 만석꾼 일화를 단순히 '훈훈한 이야기' 정도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선의와 연대 의식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해도, 수백 년간 허용되었던 약간의 틈이 강력한 축재 수단이 되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백성이 만석꾼에게 의지하지 안으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는 경제적 예속 상태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
조선 후기,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제 규모 성장은 상황을 더욱 심화했습니다. 서울의 명문가 집단, 이른바 경화사족은 그들만의 양반 문화를 만들어냅니다. (...) 모든 양반이 그러한 수준에 이르고 싶어 했습니다. 그에 따라 축재가 정치적 문제가 됐던 이전 세대와는 달리 축재를 정당화하는 인식이 뚜렷해지죠. '진짜 양반'과 '한량'을 구분하는 것처럼, 이들은 전국의 양반들로부터 비난과 선망을 동시에 받습니다. 완벽한 구별 짓기가 이뤄진 것입니다.
이들 또한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었으나, 이들이 만들어낸 부동산 중심 권력 구조는 모든 사람이 부동산을 움켜쥐지 않고선 살아남을 수 없는 무한 경쟁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대지주는 엄청난 땅을 독점하면서 국가 경제를 주름잡고, 중소 지주는 대지주가 주도하는 부동산 시장에 편승하면서 신분 상승을 꿈꿨습니다. 땅이 없거나 아주 적은 따을 가진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하락하는 노동생산성에 의존해 간신히 생계를 해결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만, 개혁 과정에서의 타협과 비정상의 관습화는 마침내 조선이 설계했던 '땅의 고른 분배를 통한 노동 중심 경제 구조'를 '부동산 중심 경제 구조'로 변형시킵니다. 소득의 상당분에 감당하지 못할 빚까지 내어 땅에 부었고, 그럴 여유도 없는 사람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며 간신히 의식주나 해결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19세기 조선의 단면입니다. 수백 년간 부동산 불평등이 누적된 결과였죠. 슬프게도,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182~185쪽.)
서울 안 땅 한 치가 금값과 같다는 성희안(成希顔, 1461~1513)의 말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서울의 역사를 꿰뚫습니다. 도성 안에 제대로 된 공터가 거의 없으니, 사람들은 산에 집을 지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정당하게 허가를 받았고, 누군가를 빽을 썼지만, 아무 힘도 없는 사람들은 불법건축물을 올려 살았습니다. 세 경우 모두 서울의 주택 공급 문제에서 비롯되었지만, 가장 큰 처벌을 받은 이는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편 성희안은 더욱 중요한 말을 합니다. '세를 주는 풍속이 없어 사람들이 살 곳이 없다.' 이 말은 즉 월세나 전세와 같은 주택임대제도가 없어 주거난이 더욱 심각하다는 의미입니다. 공급 부족은 집값 상승의 주된 원인 중 하나입니다. 조선 전기 서울의 집값을 추측할 수 있는 자료가 매우 적지만, 15세기 중반에는 중간 정도 수준의 집값이 면포 약 355~603필 정도였는데, 16세기 중반경에는 최소 수천 필에서 최대 1만 5천 필까지 이르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면포의 가격이나 물가 등을 고려해야겠으나, 백 년 만에 열 배 이상 뛰어오른 것입니다. 이러한 폭등의 배경에는 절대적인 공급 부족이 있었습니다. (205~206쪽.)
조선 전기의 왕과 조정은 심각한 주거난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공급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걸까요? 그 이유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담나, 아마도 왕도(王都)가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우려한 까닭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조선이 꿈꾼 사회는 서울과 지방이 각자 생산 기반을 가지고 자립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수도에 유입되는 인구를 모두 수용하기 위해 계속해서 택지를 개발한다면, 지방 공동체는 점점 자립하기 어려워졌을 테니까요. (...)
또한 '서울 프리미엄'이 떨어지는 것도 달갑지 않았을 겁니다. 조선 시대 서울이라는 공간은 한양 도성(사대문 안)과 성 밖 십 리(성저십리)로 구성됩니다. 서울의 인구를 적절히 부양하기 위해선 공간을 넓혀야만 했죠. 즉 도성의 설계와 나아가 도성 안에 맞춰진 행정 시스템·SOC·유통망·교육 시설 등을 모두 바꿔야만 합니다. 서울 사람들에게 부여된 각종 세제 혜택과 의무 변제도 재검토해야 하죠. 이는 곧 누군가는 이익을 포기하거나 타인과 나눠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문제들이 조선이 택지 공급을 통해 서울 확장을 시도하지 않은 이유로 추측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부동산 정책은 규제에 집중됩니다. 사치 금지, 신분에 따른 주택 규모 제한, 고위 공직자의 1가구 1주택 규제, 풍수지리에 의거한 개발 금지 및 불법건축물 철거, 서울 안 주택의 상속 제한 등이 그것이죠. 이를 용적률 제한, 1가구 1주택, 상속세, 그린벨트 등으로 치환하면, 오늘날의 부동산 규제 정책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224~225쪽.)
명동 집값 이천 냥이면 그는 일생을 편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가 매달 아버지로부터 받던 생활비를 기준으로 하면 무려 10년 5개월치에 달하는 금액이었죠. 유만주가 갑자기 기묘한 일탈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그토록 무리한 거래를 밀어붙인 걸까요? 아마도 가쾌가 바람을 불어넣었을 겁니다. 오랜 기간 유만주와 거래하며 그의 꿈과 좌절을 알아챈 거죠. 메인 스트림을 욕하면서도 그 속에 합류하기를 꿈꾸던 서울의 아웃사이더 지식인. 그 욕망의 간극을 채워줄 수단으로서 명동 집이 선택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결과적으로 명동 집 구매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의 부친이 말렸던 이유와 같이, 형편에 비해 집값이 너무나 비쌌기 때문입니다. 유만주는 생활비와 이자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결국 그는 명동 집을 다시 팔고 이사를 가게 됩니다.
유만주의 주택 구매기는 읽는 것만으로도 많은 현대인의 트라우마를 재생시킬 것 같습니다. 다리가 퉁퉁 부을 정도로 끝없이 집을 보러 다니고 꼼꼼히 따져도 결국 변수가 생겼습니다. 구매자와 공인중개사, 판매자 사이 수 싸움은 끝이 없었고, 집을 욕망의 항아리로서 선택한 대가는 잔인했습니다. 끝없이 고뇌하고 흔들렸던, 세상 물정 모르는 한 선비가 실패하고 만 배경에는 피도 눈물도 없이 엄혹한 부동산 시장의 질서가 있습니다. 집의 금전적 가치가 오를수록, 인간이 가진 도덕적 잣대는 더욱 약해집니다. 여전히 미덕을 잃지 않은 수많은 유만주가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절실합니다. (290쪽.)
모든 도약은 희망을 잃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절망적인 저출생과 양극화 통계는 때때로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고, 답답한 정치권의 모습은 현실을 도피하게 합니다. 공동체의 연대는 허물어지고 개인과 개인의 투쟁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죠. 마치 19세기의 조선처럼, '이대로 망할 나라'라는 좌절감이 우리의 일상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조선이 망국의 수렁에 빠진 것은 '농사짓는 이에게 토지를' '실거주자에게 살 곳을'이라는 희망이 완전히 무너진 순간부터였습니다. 여러 문제가 있었음에도 오백 년을 지탱해온 체제를 허술하다고 평할 순 없겠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앞으로 몇 년을 이어갈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위기도 넓게 보면 흐름의 일환일지 모릅니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예정되지 않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세상은 바뀐다'는 굳건한 희망 속에서 내딛는 걸음입니다. 우리 사회 공동체를 위해, 그리고 미래 세대의 더 편안한 삶을 위해, 함께 뚜벅뚜벅 걸어나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336~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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