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일제의 사상통제와 전향 정책 (홍종욱, 동북아역사재단, 2024.) 본문

이 책은 동북아역사재단이 기획한 '일제침탈사 연구총서'의 47번째 책입니다. 독자에 따라서는 '침탈사'라는 시리즈 제목이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어떤 독자는 '정책'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이 책의 기획, 즉 식민지배정책을 내재적으로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서두에서 잘 요약한 것처럼, 지배정책 연구는 "일제의 침탈과 한국인의 저항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일본의 한국 통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15쪽)을 가능케 하는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범죄를 프로파일링하는 것이 아무리 많이 해도 결코 낡은 것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또한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동일한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함인 것처럼 말이죠.
또다른 측면에서, 어떤 독자에게는 이 책의 제목이 좀 어색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식민지배를 '원체험'처럼 공유하는 한국인에게 식민지기의 사상통제는 너무 당연하게 들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독립을 꿈꾸는 자를 통제하고 처벌한다는 것이 식민지배에서는 너무 당연해 보이는데, 그걸 또 이렇게 정색하고 연구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거든요.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사상통제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독립운동을 처벌하는 법적 기반은 대체로 치안유지법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제1조의 '국체 변혁' 조항이 (사회주의자에게는 '사유재산 제도 부인' 조항도!) 주로 근거로 활용되었습니다. 식민지배를 벗어날 것을 기도하는 독립운동이 결국에는 일본의 '국가 체제'를 변혁하려는 시도에 해당하기 때문에 위법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식민지 지배'가 일본의 '국가 체제'에 포함되는지 여부입니다. 이러면 다시 식민지배 이전의 일본은 또 무엇이었는가가 문제가 될 것이고, 이는 또한 식민지라는 존재가 일본의 국가에서 매우 핵심적인 부분임을 일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도 합니다. 이들 문제를 하나하나 다 따지다 보면, 급기야 일본이라는 '국체'가 내부적으로 정당성을 상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독립운동=국체변혁'이라는 해석이 1930년대 후반에나 본격적인 검토가 시작되었고 판례로 확립된 것은 그보다 훨씬 늦은 1943년이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104쪽) 다시 말해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법적 처벌의 논리를 구성하는 과정은 곧 일본 본국의 국체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일반화하자면 식민지의 지배질서를 구성한다는 것은 동시에 본국의 질서를 재구성하는 작업이기도 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이에 대해 저자는 도바타 세이이치의 '역식민(逆植民, counter colonization)' 개념을 인용합니다.(17쪽))
너무 당연해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는 점은 전향 문제를 다루는 책 후반부에서도 드러납니다. 일본이 전향 정책을 본격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로, 여기에는 단지 탄압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주의 운동을 잠재우기 어렵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에 대해 처벌 일변도가 아니라 피고인의 '태도', 즉 전향 여부에 따라 기소를 유보할 수도 있게 한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사회주의자의 '전향'을 '저항의 포기'나 '지배권력에의 투항' 정도로 간단히 이해하지만 막상 식민권력 입장에서는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똑같이 사회주의자였다고 해도 일본인의 전향은 그저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을 폐기하는 정도로 가능했지만 조선인에게는 그에 더하여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주의까지 폐기해야 한다는 이중의 장벽이 있었다는 거죠.
이러한 이중 장벽 때문에 일본은 조선인 사회주의자의 전향을 결코 마지막까지 신뢰할 수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입니다. 조선인 사회주의자에 대한 전향 정책은 언제나 '위장전향'과 '역전향'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는 거죠. 실제로도 전향자들을 관리하기 위한 단체 내에서 조선인들은 단체의 구성과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이조차도 일제에게는 경계심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었습니다. 조선인의 적극적인 활동 때문에 조선인이 단체의 장이 되고 일본인이 이를 보좌하는 상황이 되기라도 하면 이는 곧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위계가 전복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죠.(142~146쪽) 이런 사례는 뭘 해도 열심히 하는 한국인의 '종특'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살짝 현웃을 짓게끔 하기도 하지만, 전향 정책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곤궁한 것이었고 일제 식민권력이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해서 (중꺾마...)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식민지배가 종식된 후에도 사상통제의 논리만큼은 여전히 종식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의 후반부가 다루는, 치안유지법이 국가보안법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바로 그에 해당합니다. 1948년 국가보안법 제정 당시부터 치안유지법의 재현이라는 비판이 나왔습니다만, 반공을 내걸고 현존 질서를 지키려 했던 국가권력의 필요는 여전했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국가보안법 아래 전향자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국민보도연맹'을 만든 사상검사 오제도가 1940년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 서기로 일할 당시 사상검사로 있던 이가, 전시체제기 사상통제를 위해 만들어진 '대화숙'의 창시자 나가사키 유조라는 점은 너무나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런 점들은 식민지배의 유산이 우리 말 속의 일본어 표현이나 공원에 식목된 일본 품종의 나무 몇 그루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공동체 바깥의(가끔은 내부의) 모호한 대상을 적으로 규정한 뒤 이에 대한 공동체 구성원의 생각과 사상을 규제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우리 머리 속에 단단히 똬리를 튼 식민지배의 정신적 유산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고보면 지금 이 글도 그런 유산으로부터는 자유롭지 않은 셈이네요. 저어기 앞쪽에서 '사상통제가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한 말과 생각 자체가 그런 유산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니까요. 하하;; 짐짓 남의 일인척 했지만, 당장 저부터가 남 보고 고나리질 할 처지가 아니네요 ㅠㅠ;;
(...) 일찍이 일제의 사상통제를 분석한 리차드 미첼(Richard H. Mitchell)은 「치안유지법」과 사상통제는 절대 악이며 파시즘적인 것이므로 새삼스럽게 그 제도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풍조를 비판한 바 있다. 식민지 조선의 경찰 제도를 분석한 마쓰다 도시히코(松田利彦) 역시 "지배 정책사 연구의 경우는 지배 정책 담당자의 논리를 내재적으로 이해하고 일정한 합리적 설명을 하는 것 자체에 강한 심리적 규제가 작동"한다고 지적했다. 지배 정책사 연구의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정책사 연구는 일본의 한국 통치가 지닌 가혹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러한 통치를 가능하게 했던 제도적 합리성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러할 때만 일제의 침탈과 한국인의 저항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일본의 한국 통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도 가능하다. 이 책을 포함한 동북아역사재단 '일제침탈사 연구총서'의 취지도 바로 그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14~15쪽.)
사상통제의 기술은 식민지 조선에서 개발되고 시험되어 일본 본국으로 유입되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은 일본 제국을 제국이게끔 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고, 중국 및 소련과 맞닿아 있는 '위험 지대'라는 점에서 사상통제의 최전선이었다. '식민지 독립이 국체 변혁에 해당하느냐'는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국체의 내포와 외연은 식민지에서 만들어졌다. 도바타 세이이치(東畑精一)는 식민지에서 제국 중심으로 정책의 역류를 '역식민'(逆植民, counter coloniza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사상통제의 역식민은 반공과 식민주의라는 20세기 세계사의 모순이 응축된 식민지 조선의 모습을 드러낸다. (17~18쪽.)
1928년 이후 민족주의 독립운동 사건은 물론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제국의 기반 이탈'은 「치안유지법」에서 정한 국체 변혁에 해당한다는 해석이 일반화되었다. 1930년 8월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 판결은 피고인들이 사유재산 제도를 철폐하고 공산사회 실현을 위한 혁명을 기도했다고 판단하면서, 먼저 그 혁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일본의 지배를 배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꾀함으로써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고, 「치안유지법」의 국체 변혁 조항을 적용했다. 같은 해 11월 김복진 등 조선공산당 사건에 대한 판결에서도 같은 논리로 국체 변혁 조항이 적용되었다. 다만 판결문에서는 식민지 독립이 왜 국체 변혁에 해당하는지를 여전히 명확히 하지 않았다.
조선 독립운동의 법률상의 성질을 확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1930년 7월 '신간회 철산지회' 사건에 대한 고등법원 판결이었다. 그해 4월 평양 복심법원의 제2심 판결은 이 사건을 "봉토를 참절하고 국가적 분립을 목적으로 하는 소위 국체 변혁 정도에 달하지 않는 정치 변혁으로 인정"하여 「치안유지법」이 아닌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을 적용했다. 독립운동을 처단하는 키워드인 '봉토 참절'이 등장했지만, 신간회 철산지회 활동은 거기까지 이르지 않았다는 판단이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상고 취의서에서 피고인들이 "조선인의 정치적 분리를 암시"했다면서 "우리 제국의 통치권을 배척하여 조선의 독립을 공동 달성할 목적으로 모의하고 결사를 조직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7월 고등법원은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려는 것은 우리 제국 영토의 일부를 참절하여 그 통치권의 내용을 실질적으로 축소하고 이를 침해"하는 것이므로 "치안유지법의 소위 국체 변혁을 기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후술할 1934년 검사 사사키가 쓴 글에서는 이 판결로 "조선 독립운동의 법률상의 성실은 확정되었다"라고 평가했다. (96~97쪽.)
1930년을 전후하여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치안유지법」을 적용하는 논리가 판례로서 확립되었다. 다만 일본 본국에서는 식민지 조선과 달리 독립운동이 일본의 국체 변혁에 해당한다는 해석은 1930년대 후반에야 검토가 시작되어 1943년에 이르러서야 판례로서 확립되었다. 국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 「치안유지법」의 확대 적용 역시 식민지 조선이 일본 본국보다 앞서갔다고 할 수 있다. 독립운동에 「치안유지법」을 적용하는 것에 신중했던 이유는 식민지 영유를 국체에 포함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 탓이었다. 예컨대 1943년 4월 조선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는 "본시 황국 일본의 존엄한 국체는 조선이 병합되지 않았던 과거와 병합 후의 현재 그리고 더욱 발전하게 될 장래를 통하여 조금의 변혁도 없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104~105쪽.)
일본 관헌이 전향 정책을 본격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1928년과 1929년에 걸친 일본공산당에 대한 대량 검거 후 그 처리를 고심하던 관헌은 탄압만으로는 사회주의 운동을 진정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전향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고민하게 된 것이다.
1931년 3월 사법차관 통첩 제270호에 의해 전향이 처음으로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 취급 방법의 하나로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즉 검사에게 피고인의 태도 여하에 따라 기소를 유보할 권리가 부여된 것이다. (...) (111쪽.)
식민지 조선에도 대량 검거로 인해 검찰, 예심, 공판 과정이나 옥중에 놓인 사회주의자에게 전향이라는 새로운 정책이 적용됨으로써, 서서히 전향자가 나타났다. 〈표 2-3〉을 보면 1930년대에 들어서도 미미하던 전향자의 숫자가 1932년 정도부터는 상당한 수에 이르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표 2-1〉을 보면 1920년대 말부터 급증하기 시작한 「치안유지법」 위반자 수가 1932년의 4,581명을 정점으로 이후 감소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운동이 침체에 빠져들면서 전향자가 서서히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주의자의 전향이 발생하기 시작한 데에 대해 고등경찰은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먼저 만주국의 성립에 따른 일본의 국력에 대한 재인식, 둘째로 1932년 말부터 계획되어 실시되고 있는 농촌진흥운동이 성과를 거둔 점, 셋째로 일본에서 공산당 지도자 사노·나베야마의 전향 성명을 계기로 일어난 대량 전향의 영향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중한 '취체(取締)'와 '선도'의 영향을 꼽았다. 그리고 조선의 사상계에 대해서 일제는, 옥내 전향자가 속출하고 사상적 폭력행위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등 '호전의 서광'이 보인다고 평가했다. (114쪽.)
당국의 전향 정책의 결과라고 할 사회주의자의 전향은 일본과 조선 사이에 서로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조선인 사회주의자의 전향에는 일본인 사회주의자와 달리 민족이라는 넘기 어려운 벽이 존재했다. 일제의 집요한 탄압과 주변 정세의 변화에 직면하여 비록 자신의 이념이 현실성을 잃었다고 판단한 사회주의자라 하더라도, 일본이라는 다른 민족의 조선에 대한 지배를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대 중반까지 조선에 있어 사회주의자의 전향은 일본과 비교했을 때 아직은 미미한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1933년 일본공산당의 지도자였던 사노와 나베야마의 전향 성명 발표 후 일본과 조선 사회주의자의 동향을 비교해 보면 이러한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일본에서는 두 지도자의 전향에 고무되어 공산당이 실질적으로 궤멸에 이를 정도의 대량 전향이 일어났지만, 같은 시기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인 사회주의자의 동정에 대한 일제 측의 조사를 보면 "한 사람의 전향자도 없고 오히려 내지인의 전향을 계급적 타락 내지 변절로 보면서 맹렬히 활동을 개시해 전향, 검거에 의해 조직 진영 내에 있어 내지인 구성분자의 감소에 반해서 조선인은 점차 조직 내에서 중요하게 되고 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일본에서 발생한 「치안유지법」 사건에서 조선인이 점하는 비율을 보면 1931년 3.5%, 1932년 5.7%에 그쳤던 것이, 일본 공산당의 대량 전향이 발생한 이후인 1933년과 1934년에는 각각 10%에 달했다.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 역시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주의자의 대량 전향에 대해 대체로 '냉담'하고 '반감'적 태도를 보였다. 일본 관헌은 사회주의자의 전향에서 보이는 일본과 조선의 이와 같은 차이에 대해, 조선인 사회주의자의 '근저에 흐르는 강렬한 민족의식과 국가적 관념에 대한 근본적 상위'를 들어 설명했다.
일본 관헌은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이 '단순히 마르크스주의 문헌의 독서'를 통하거나, '관념적인 의분이나 정열'에서 출발한 것과 달리,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의 배후에는 '생생한 민족적 우려와 번민'이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일본 관헌은 조선인 사회주의자의 전향을 더 복잡한 문제로 인식했고, 설사 사회주의자가 전향을 표방했다 하더라도 그 진실성을 의심했다. (118~119쪽.)
경성 콤그룹에서 활동하던 권우성(權又成)은 박헌영(朴憲永)과 만난 자리에서 "실형(實兄)의 권유에 의해 조선시국대응사상보국연맹 마산 분회에 가입하고 그 간사에 본의 아니게 뽑혔다"라고 보고했다가, "형식적 전향의 반동성을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책을 받았다. 이러한 정황이었기 때문에 '위장전향' 혹은 '역전향'의 가능성도 늘 존재했다. 당국은 '표면전향을 위장하여 관헌의 눈을 속이거나 혹은 사회의 동정을 얻고자 사상보국연맹에 가맹하는 등 전향을 위한 전향에 다름없다고 관찰되는 자'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연맹을 조선인의 자주적 조직으로 삼고자 하는 적극적인 움직임도 존재했다. 7월 결성대회에 참가한 대동민우회 회원이자 평양 재주 변호사 노진설은 "자주단체 결성 준비 위해 입성"한다고 밝혔다. 법무국의 조사에서도 연맹에 대해 '전선(全鮮) 사상 전향자를 들어 하나로 삼을 강력한 자주적 조직을 형성할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고 평가했다. 연맹 규약에서도 '자주적 사회복귀'를 내걸었고, 창립선언에서도 '소극적인 자기청산에서 적극적인 자기완성으로' 나아갈 것을 표방했다.
(...)
전향자의 자주적인 움직임은 당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전향자라고는 해도 총독부 당국이나 일본인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자는 존재했다. 신의주보호관찰소장을 거쳐 후일 대화숙 창립을 주도하는 나가사키 유조(長崎祐三)는 "연맹 본부의 간사에는 전향자 수 명이 있어 그들은 어느새 간사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거기서 전향자 특유의 실행 불가능한 추상적 실천 사항을 결의하고 이 방면에 경험이 없는 민간인인 총무에게 이의 실천 방식을 채용토록 하여 총무 이름으로 각 지부에 그것을 지령하여 지부에서는 부지부장인 보호관찰소장이 역으로 전향자가 결의한 것을 실천한다고 하는 진기한 현상이 싹터 왔다"고 지적했다. 결국 법무국장은 간사회 개최를 엄금했다. 어디까지나 연맹 규약 및 조직도에 의한 운영이었지만, 당국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 본국과 식민지 조선을 구분 짓는 차별적인 인식도 확실히 드러났다. 나가사키는 '내지'의 전향자는 공산주의이지만 조선의 전향자는 공산주의 외에 '국가주의적 성질'을 띤 민족주의자도 있기 때문에 '내지'의 위원회를 흉내 내어 "연맹을 전향자의 자치에 맡긴다면 그들은 점점 지도자 의식을 키워, 끝내 그들은 보호관찰소의 지도조차 거부하기에 이를 우려가 있다"고 경계했다.
조선인이 수장이 되고 일본인이 이를 보좌하는 체제에 대해, 당국은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위계의 전복을 경계한 것이다. (...) (142~146쪽.)
중일전쟁기 조선총독부의 치안유지 체제는 세 가지 층위로 구성되었다. 제1환은 사상범에 대한 감시, 통제, 전향 강요를 행하는 사상범 보호관찰 제도다. 제2환은 사상범을 낳은 조선의 지역사회와 가족을 통제하는 사상정화 공작과 조선방공협회다. 제3환은 사회 전체를 감시, 통제하는 유언비어 단속이다.
1930년대 전반부터 농촌진흥운동과 관련 속에 '사상정화 운동' 전개되었다. 좌담회, 강연회, 중견 청년단의 보도, 시찰인·시찰단체의 확대·선도 등을 통해 지역 주민을 사상적으로 교화하려는 운동이었다. (...) (148쪽.)
계급 문제와 민족 문제 해결은 식민지 사회주의자의 놓칠 수 없는 두 가지 과제였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치안유지법」을 휘둘러 이를 국체 변혁과 사유재산 부인으로 처벌했다. 식민주의와 반공의 사상통제는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내건 민족혁명론과 거울 쌍과 같은 관계였다. 인정식의 전향 선언에 드러난 농공병진 및 자작농 창정을 통한 계급 문제 해결, 내선일체를 통한 민족 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는, 일본 정부의 힘으로 식민지 사회주의자의 오랜 과제를 풀려는 굴절된 민족혁명론이었다.
인정식이 전향 선언에서 사용한 평등, 권리, 정치, 요구와 같은 말에서 그에게 사회운동가적 면모가 지속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1933년 전향 선언을 발표한 뒤에도 한동안 반코민테른 천황제 사회주의를 주창했던 사노 마나부의 행적을 연상케 한다. 사노와 인정식의 전향은 모두 굴절된 혁명론이었다. 인정식의 전향 선언은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보여 준 힘에 위축되어 굴복한 정도에 머물렀지만, 1939년 이후 일본 정부에 참여한 혁신 좌파가 주창한 동아협동체론에 호응하면서 인정식을 포함한 조선의 전향 좌파는 본격적인 전향 논리를 전개하게 된다. (184~185쪽.)
대화숙은 여성교육, 사회복지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벌이고, 문화인과의 합작을 통해 '국민음악', '국민연극' 등을 전개했다. 총독부라는 식민지 국가의 국민 만들기 기획이 비로소 사회 깊은 곳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점에서 전시체제기 조선 사회는 식민지 근대의 정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관자(趙寬子)는 현제명 등 식민지 말기 조선에서의 문화인들의 활동에 대해 언급한 뒤 국가정책과 문화생산의 협력체제는 남북한으로 그대로 이어졌다고 분석한 바 있다. 문화인과의 합작에 더해 국어강습회 및 수산 등 전시체제기 조선에서의 대화숙의 활동은 사회에 대한 깊은 개입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해방 후 한반도에서의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대화숙 모델은 일본 본국에도 도입이 고려될 만한 것이었다. 일본 본국의 치안 당국으로서도 예방구금 제도가 충분히 기능하고 있지 않다는 불만이 있었다. 1945년 8월에 열린 홋카이도 사상 실무가 회동에서는 기소유예자라도 훈계하고 석방하지 말고 "사상연성도장에 수용하고 주로 근로를 통하여 국체관념 철저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대화숙 방식의 일본 본국으로 역류, 즉 역식민 가능성을 보여 준 장면이었다. (235~236쪽.)
1948년 12월에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그해 9월에 내란 행위 특별조치법이라는 이름으로 긴급동의안이 발의되었지만 큰 진전이 없었는데, 10월 여순사건의 충격 속에서 서둘러 제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울러 같은 해 9월 제정된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억누르려는 의도도 있었다. 「국가보안법」과 「반민족행위 처벌법」의 관계에서는 식민주의와 반공의 결합이라는 식민지 시기로부터 이어지는 구도를 확인할 수 있다.
11월 3일 『자유신문』에 공개된 「국가보안법」 초안은 내란 행위 처벌을 규정했다. 그러나 내란 행위는 구형법의 내란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이유로 삭제되고 또한 법의 핵심이 변란 '행위' 처벌에서 변란 '목적'의 결사와 집단 구성 및 가입 처벌로 바뀌었다. 이러한 새로운 초안이 11월 9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소장파 의원들은 「국가보안법」이 「치안유지법」과 다르지 않으며 민주적 헌법정신에 배치된다고 폐기를 주장했다. 공산당뿐만 아니라 '선량한 남녀노소', '애국지사' 등 전 국민을 탄압할 우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신문 등에서도 「국가보안법」을 「치안유지법」의 재현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공포, 시행되었다. (...) (248~249쪽.)
미군정기 검찰의 위상은 초라했다. 미군정은 경찰을 수사 주체, 검사를 기소 주체, 판사를 공판 주체로 상정했다. 따라서 검사의 직무 및 권한을 조정하여 검찰권을 수사 단계에서 배제하고 소추 기능에 한정했다. 경찰에 대해서도 사법권, 즉 「범죄즉결례」(1910)에 근거한 즉결심판권은 박탈했다. 다만 악법적 요소 더 강한 강제처분권(강제수사권)과 예비검속권(행정검속권)은 제한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미군정은 검찰보다는 경찰에게 힘을 실어준 셈이었다. 검찰은 대륙법의 형사절차에 무지한 미군정이 단순하게 영미법적 시각에서 검찰권을 제약한다고 이해했다.
1946년 2월 검사총장 김찬영은 검찰사무에 관한 건을 하달해 사상 검찰 부활을 꾀했다. 그러나 사상 사무를 독점해 왔던 일본인 검사가 없는 탓에 사상 검찰 구축은 여의치 않았다. 1946년 5월에 터진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은 사상 검찰이 부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담당 검사 조재천을 비롯하여 여러 젊은 검사가 피고인들에 대한 취조 및 심문 과정에서 공산주의를 학습했다. (...) 사상검사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선우종원은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가리켜 "공산당과 나와의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46년 12월 미군정 사법부장 김병로의 사법부령으로 대검찰청, 고등검찰청, 지방검찰청이 설치됨으로써 검찰 조직은 식민지 시기 이래 법원에 병치된 상태에서 벗어났다. 다만 1948년 5월 「법원조직법」, 8월 「검찰청법」이 공포될 때까지 사법 조직의 기본 틀은 식민지 시기와 유사했다. 검찰은 1947년부터는 조재천이 부장을 맡은 정보부를 강화하여 좌익관계 소요·파업·테러 사건 등의 수사 및 기소 지휘를 전담시키고자 했다. 다만 자체 정보 수집이 빈곤한 탓에 결국 경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식민지 시기 사상 검찰의 위상은 회복하지 못했다.
1948년 8월 공포된 과도검찰청법은 검찰권이 강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법으로 첫째, 검찰 조직이 법원에서 완전히 분리·독립했다. 이로써 검찰은 법원 병치에서 오는 심리적 종속감에서 벗어났다. 둘째, '검사동일체 원칙'을 규정하여 상명하복의 일사분란한 조직을 꾀했다. 다만 사법부장의 지휘권을 명시함으로써 정치적 간섭을 초래할 소지를 남겼다. 셋째, 검찰 직속의 사법경찰 기구를 설치했다. 대검 정보과, 지검 수사과의 서기관과 서기가 사법경찰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여 검찰이 수사 주재자임을 재천명했다. 과도검찰청법과 이를 계승한 1949년 12월의 검찰청법은 검찰 중심의 수사 지휘와 수사기관의 일원화라는 검찰의 의지를 표현했다. 검찰은 반공 사법체제의 컨트롤 타워로서 사상전의 최일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다만 내전과 학살 상황에서 검찰의 입지는 무장력을 갖춘 경찰과 군에 비해 좁을 수밖에 없었다. (...)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 시행은 사상 검찰이 반공의 최전선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지검 정보부는 부장검사 장재갑을 중심으로 검사 오제도, 선우종원, 정희택을 배치하여 사상 검찰 재조직을 위한 거점으로 기능했다. 12월 16일 검찰총장 권승렬이 고검장, 지검장에 하달한 통첩 「건국에 방해되는 범죄 차단에 관한 건」에서는, 종래 남치, 감금, 파괴, 살상 등 정치적 색채를 띤 사건의 관계자를 정치범으로 취급하였지만, "앞으로 이러한 도배들을 건국을 방해하는 반역 도배로 취급"하라고 지시했다.
(...)
검찰권 강화의 핵심은 경찰로부터 수사지휘권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1945년 12월 미군정청 법무국장 훈령으로 검찰의 역할이 기소 지휘에 국한됨으로써 경찰에 대한 수사 지휘가 불가능했다. 1948년 과도검찰청법으로 이를 폐지했지만, 수사 지휘는 현실적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9년 6월 「국가보안법」 시행 이래 첫 중대 사건인 국회 프락치 사건을 계기로 검사의 경찰에 대한 수사 지휘가 비로소 본격화했다. (254~258쪽.)
오제도는 국민보도연맹이 자신의 아이디어였다고 강조했는데, 그 아이디어는 스스로 1940년에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 서기로서 근무한 경험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오제도가 부임했을 당시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의 사상검사로서 신의주보호관찰소 소장을 맡고 있던 이는 다름 아닌 대화숙의 창시자 나가사키 유조였다. 오제도와 쌍벽을 이룬 사상검사 선우종원도 국민보도연맹에 대해 사상보국연맹과 대화숙에서 착상을 얻은 것이라고 증언했다. 한편 북한에서는 1946년 말부터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이 전개되었다. 해방 직후 남북한 모두에서 일제 말 전시체제기와 유사한 사상통제 및 대중동원이 시도된 셈이다. (261~262쪽.)
「치안유지법」의 국체가 천황제, 즉 군주제를 가리켰다면 「국가보안법」의 국체는 민주공화제로 달랐다. 다만 두 법 모두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즉 반공을 내걸고 각각의 현존 질서를 지키려는 데서 일치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치안유지법」은 일본 본국과 달리 독립운동을 주된 처벌 대상으로 삼았다. 공산주의와 더불어 조선 민족 자체가 경계의 대상이었다. 해방 이후 「국가보안법」도 반공을 내걸었지만 거기서 말하는 공산주의는 결국 북한과의 교류, 접촉이었다. 「치안유지법」의 적이 식민지 조선이었다면 「국가보안법」의 적은 북조선이었다. 전자의 대항 논리가 민족해방이었다면 후자는 민족 통일이었다. 사상통제의 논리 속에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는 결합하였고 이는 민족혁명론의 음화였다.
식민지 이래 이어지는 민족혁명론 앞에 한국의 반공 독재 정부는 오랫동안 수세적인 입장으로 일관했다. 사상을 논하기보다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 감옥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진 전향과 비전향은 사상 이전의 처우와 조건의 문제였다. 사상으로서의 전향은 제도로서의 전향 바깥에서 왔다. 식민지 말기 민족해방이라는 이념이 흔들릴 때 대량 전향이 벌어진 것처럼, 민주화가 진전되어 민족 통일이라는 가치가 상대화되고 나서야 비로소 사상으로서의 전향이 본격화했다. (290~291쪽.)
교정. 초판 1쇄
47쪽 밑에서2줄 : 구체적 진술했다 ->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53쪽 밑에서8줄 : 불기소 경우는 -> 불기소의 경우는
74쪽 밑에서4줄 : 사범 빈발하고 -> 사범이 빈발하고
255쪽 5줄 : 조재천를 -> 조재천을
281쪽 밑에서4줄 : 무정부의주의를 -> 무정부주의를
286쪽 밑에서7줄 : 농업이론 비판하고 -> 농업이론을 비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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