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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권하는 사회 (김승우 외, 역사비평사,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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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권하는 사회 (김승우 외, 역사비평사, 2023.)

Dog君 2026. 1. 27. 23:03

 

  제238회에서 읽은 책은 김승우 등이 쓴 '투자 권하는 사회'입니다.

 

  2024년 말 기준 대한민국에서 주식을 보유한 '투자자'의 숫자는 1,410만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4 정도인데, 여기에 부동산 투자를 포함하고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가족 구성원까지 생각하면 숫자와 비율은 훨씬 더 올라갈 겁니다. 우리 중 대부분이 어떤 식으로든 '투자'와 관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긴, 물가인상률이 금리를 추월한 것이 한참 오래인 상황에서 투자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운 지경이죠. 저도 별 다르지 않아서, 요즘 친구들과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는 대부분 투자로 귀결되곤 합니다.

 

  김승우 등이 함께 쓴 『투자 권하는 사회』는 이러한 투자 열풍이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의외로 익숙한 것임을 알려줍니다. (부동산에 대해서는 얼마 전에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에서 이야기했으니 생략하고...) 종합주가지수가 몇천 포인트를 넘었다는 뉴스부터, 그 덕분에 얼마의 수익을 냈다는 성공스토리에, 그에 편승해 자기 시키는 것만 따라하면 금방 몇백 몇천 퍼센트의 수익도 금방 올릴 수 있다는 조언(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광고인 것)들까지, 어딜 가든 투자를 이야기하는 작금의 세태가 역사상 처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이 전혀 다른 시기들과 지역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이들 대부분이 실패로 귀결된 경험이라는 점입니다. 김승우의 논문(「시장을 이길 수 있는가?」)에 소개된 여러 주식 투자 기법들은 하나 같이 주가 붕괴와 불황 이후에 등장한 것들이고, 1980년대의 주식 투자 열풍을 다룬 이정은의 논문(「1980년대 후반 증시호황기 '개미'의 탄생과 시련」) 또한 개미군단의 몰락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투자의 역사가 실패로만 점철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자본의 전체 크기는 계속 증가해온데다가 설사 실패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수익과 손실의 큰 주기에서 어느 특정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투자의 역사를 말하면서 실패 사례만 과도하게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이 책의 저자들이 연구의 소재를 결정하는 단계에서 부정적인 선입견이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이 책에 소개된 여러 사례들을 읽으면서 투자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 새삼 되묻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주식 시장에 참여/투자한다는 것은 기업의 생산/이윤 활동에 적극적으로 연루된다는 의미입니다. 자본주의의 작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라는 거죠. 하지만 많은 경우 주식 투자는 도박과 별 다르지 않은 동기에 따라 추동되곤 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투자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사라지고 감과 운에 의존한 도박이나 복권 같은 '대박' 결과만 강조되거든요.

 

  물론 현실적으로 주식 투자에서 정보란 늘상 불균등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모든 개별 투자자에게 완벽한 투자 합리성을 요구하는 것도 합당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투자를 운에 기대는 도박처럼 생각하는 것 역시 딱히 좋은 일은 아닙니다. 자본주의에서 투자란 언제나 투기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자가 동일한 것은 또 아니지 않겠습니까. 이 책에서 소개하는 '실패의 경험들'도 대체로 다 이런 부류가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누구가 주식으로 대박이 났다더라', '남들 다 하는거 나만 안 하면 뒤처지지 않을까' 같은 말들에 휩쓸려 투자가 도박에 점점 가까워질 때 그것은 언제나 실패하고 붕괴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실패의 책임은 우리 같은 개미들에게 훨씬 더 가혹하게 돌아왔구요.

 

  자본을 건전하게 축적한다는 의미에서 '투자 권하는 사회'란 언제나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투기 권하는 사회'로 과열될 때가 (손절이건 익절이건) 당장 발을 빼야 하는 타이밍이겠죠. 물론 누구도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를 모른다는게 가장 큰 문제이겠습니다만은...

 

  (...)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을 창간한 다우(C. Dow)가 이러한 차트읽기의 초석을 마련했다. (...) 동료 존스(E. Jones)와 함께 주식시장을 대표하는 주요 주식 가격의 평균치를 계산하여 시장의 "전반적 정서"를 보여준 다우-존스 산업지수(Dow Jones Industrial Index)를 산출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지면을 통해 소개된 일간, 주간 및 월간 단위의 평균 가격 및 그 변동에 관한 다우의 이론은 경제적 조건과 투자자들의 정서(sentiment)를 고려하여 시장 추세를 팡가하는 전반적인 논증 구조와 더불어 "미래 예측"의 기법을 일반 대중에게 제시했다. 다우가 발판을 마련한 기술적 분석의 초기 논의는 1907년에 창간된 잡지 『표시기(Ticker)』에서도 계속되었다.
  1902년 사망한 다우를 뒤이어 『월스트리트저널』의 편집장 해밀턴(P. Hamilton) 또한 지면을 통해 다우의 주식 분석론을 재생산했다. 대중적 성공을 거둔 1922년작 『주식시장 바로미터(The Stock market barometer)』에서 그는 "주가 등락의 기저에는 반드시 시장 전반을 지배하는 추세라는 게 존재한다"는, 이른바 '다우 이론(Dow theory)'을 정립했다. (...) 프레다는 이러한 이론서들에 등장하는 전문용어(jargon)의 역할에 주목한다. 차티스트들이 의도적으로 발명한 주가 흐름에 관한 용어들은 기술적 분석이 전문적 기법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는 '이중바닥(double bottom)', '저항선(point of resistance)', '추세선(trend line)' 등을 들 수 있다.
  (...)
  모두가 일확천금을 노리지만, 여전히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주식시장에서 기술적 분석은 하나의 길을 제시해주는 금융지식으로 올라섰다. 이론적 핵심은 주기 변동의 규칙성이었다. 차트읽기는 주가가 밀물과 썰물처럼 상승과 하락이라는 변화를 반복한다고 가정했다. 그렇기에 주가는 특정한 조건과 맥락 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관성의 힘"처럼 그 스스로가 주기적은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차티스트 엘리어트(R. I. Elliot) 또한 자신이 주창한 파동 이론에서 주가의 흐름이 자연법칙처럼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된다는 강한 순환론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기술적 분석이 전제하는 주식시장에서 수익을 달성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인가? 대중보다 한발 앞서서, 즉 그들의 매수·매도 심리를 역이용해서 수익을 거두는 것이다. (...) (김승우, 「시장을 이길 수 있는가?」, 21~23쪽.)

 

  1920년대의 낙관론은 사기와 도박이라는 오명으로 얼룩진 금융 활동(practice)의 인식 개선과 더불어 투기마저도 기술혁신과 경제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논의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1929년 대폭락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 뉴딜(New Deal) 행정부는 또한 법률 및 제도 개선을 통해 정치적 압박 해소를 꾀했다.
  증권시장에 관한 뉴딜 개혁의 이정표는 기업 정보공개(public disclosure)였다. (...)
  1920년대 누자자로서 쓰라린 실패를 경험했던 케인즈는 기술적 분석 대신 냉철한 분석을 통한 기업가치 분석에 주목했다. 흥미롭게도 당시 월가에서도 대폭락을 분기점으로 케인즈의 견해를 공유한 전문가들이 있었다. 1910년부터 월가에 몸담았던 그레이엄(B. Graham)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기업의 안정적 재무구조와 장기적 수익성에 기초한 그의 주식 평가론은 1934년 『증권분석』이라는 교과서를 통해 체계적인 전략으로 소개되었다. 또한 그는 뉴욕의 콜롬비아대학(Columbia University)에서 자신의 이론을 꾸준히 강의하면서 수많은 전문 투자자들을 배출했는데, 여기에는 버핏(W. Buffett)도 포함되어 있다. (...)
  (...) 물론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레이엄은 거래소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주식을 발행하는 기업의 자본구조를 분석하고 미래수익, 배당금 및 자본가격과 비교하여 해당 증권의 내재가치(intrinsic value)를 파악하고자 했다. 시장에서 주식이 거래되는 '가격'과 대비되는 이 개념은 둘 사이의 괴리를 전제한다. 그리고 정보를 치밀하게 처리하여 시장에서 원래가치보다 저평가된 기업의 주식을 찾는 것이 증권분석이 정의한 투자였다. (김승우, 「시장을 이길 수 있는가?」, 25~27쪽.)

 

  1960년대의 강세장을 뒤이은 것은 대공황 이후 최악의 주가하락과 함께 시작한 1970년의 약세장이었다.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평균적인 수익률 이상을 달성"하는 것을 약속했던 '슈퍼스타' 자산관리인들은 너무나도 쉽게 몰락했다. (...)
  프린스턴대학 출신 경제학자 말킬(B. G. Malkiel)은 1973년에 발표한 『랜덤워크(Random walk)』에서 그 요구에 답했다. 그는 기성세대의 기술적 분석과 증권분석 모두를 부정하고 "원숭이가 눈을 가리고 주식 목록을 향해 다트를 던져서 종목을 선택해도 전문 펀드매니저만큼 실적을 올릴 수 있다"는, 누구도 결코 시장을 이길 수 없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아웃퍼폼의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랜덤워크는 투자자가 적극적으로 대중심리를 이용하고 저평가된 주식을 찾는 '능동적(active)' 투자와 대척점에 서 있는 '수동적(passive)' 전략을 의미했다. (...)
  우선 주가변동에 대한 수학 및 통계학 연구를 이론화한 '효율적 시장 가설'은 주식시장은 매우 효율적이기 때문에 모든 정보가 주가에 '이미'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 또한 1950년대부터 위원회가 자리 잡았던 시카고대학(University of Chicago)의 경영전문대학원 소속의 증권가격연구소(Center for Research in Security Prices)에서도 주가변동 연구를 진행했다.
  1960년 월가 금융회사들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증권가격연구소는 1926년부터 1960년까지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되었던 모든 주식의 가격변동을 정리하는 등의 통계 연구에 집중했고 주가의 흐름에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지 않으며, 안정적으로 시장 평균을 뛰어넘는 수익 창출은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
  '시장'을 뛰어넘을 수 없다면 투자자는 어떠한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 랜덤워크는 현대 포트폴리오 이론이 제시한 '합리적' 투자론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코위츠(H. Makowitz)가 1952년 논문 「포트폴리오 선택」에서 소개한 자산구성방식은 분산이 "최소한의 위험"과 "지속적인 수익"이라는 목적달성에 "가장 합리적인 전략"이라는 격언에 대한 "수학적 증거"를 제시했다. 전시 계획경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한된 자원의 최적배치(optimal allocation) 방식을 연구해온 운용과학(Operation Research)의 성과를 주식시장에 적용한 이 이론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가정에서부터 출발한다. '시장'이라는 절대적인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투자자는 최적화 전략을 통해 시장 평균에 가까운 수익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수익 추가가 아니라 위험 회피(risk adverse)가 핵심적인 전제로 등장한다. (...)
  효율적 시장 가설과 현대 포트폴리오 이론을 수용한 랜덤워크의 대안은 무엇인가? 즉 시장을 이길 수 없다는 새로운 투자 패러다임 아래에서 전문 자산관리인의 올바른 투자란 무엇인가? 말킬은 주식시장은 대중의 비이성적 판단이나 투표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벽한 공간이기 때문에 시장을 따라가라고 조언했다. 즉, 주식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는 모든 주식을 그 비율만큼 사들이는 것이다. 이 전략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S&P(Standard and Poors) 500과 같은 주식시장 관련 지수에 등록되어 있는 주식들을 구매하는 방법을 추천했다. 『랜덤워크』에서 말킬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승자를 따라잡기 위해 이 주식 저 주식 갈아타는 펀드가 아니라 주식시장의 평균을 구성하는 수백 가지 주식을 광범위하게 매수하는, 그리고 판매 수수료가 없는 저비용 뮤추얼펀드다. (김승우, 「시장을 이길 수 있는가?」, 30~35쪽.)

 

  실질적으로는 러일전쟁 후 일본인의 한국 토지 투자, 이주를 장려하기 위해 일본 각 지방의 자본가·지주가 일본 지방관청의 경비 지원 아래 농업식민회사와 조합을 설립하여 이주 식민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또 이미 한국에 진출해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고 있던 지주들도 이러한 사업을 주도했다. 전자는 도쿄의 한국척식주식회사(1906년 설립), 후자는 호소카와(細川)농장(1904년 전북 익산에 설립)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대다수 일본인 자본가·지주는 이주 식민사업보다는 토지 경영 확대를 추구했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토지를 사들여 한국인 농민을 이용해 대규모 소작제 농장을 경영하고, 고율의 소작료로 받은 쌀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이 더 높은 수익률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한국과 일본의 토지 수익률이 차이가 있던 것은 양국의 경제력 격차로 한국의 땅값이 더할 나위 없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토지 매매 가격은 평균 일본의 1/10 내지 1/3 정도로 저렴했다. 심지어 1/30까지 저렴한 토지도 있었다. 미곡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쌀값은 폭등하고 토지 가격도 상승하는 추세였다. 또 독점자본 등의 독점적 토지 소유로 땅값이 급격히 상승했다. 1905년경 읿나적으로 한국의 토지 투자 수익률은 15% 이상으로 예상되었고, 한국에서 지주 경영을 할 경우에는 당시 일본의 연 4%보다 5배 정도 높은 20%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돈을 빌려 지주 경영을 하더라도 이익이 남는다는 생각으로 당시에도 소위 '영끌'까지 마다않는 토지 투기적 상황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일본 논민의 이주 식민화 정책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일본인 자본가·지주의 토지 투자와 지주 경영은 더욱 촉진되었다. (최은진, 「한국의 땅 투기 열품,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81~82쪽.)

 

  주식회사 설립은 조선은행(1896, 한흥은행), 한성은행(1897), 대한천일은행(1899) 등 은행 주식의 모집으로 구체화되었다. 창립발기문은 "협심", "누구를 막론하고", "실력에 따라" 주식을 매입하여 회사를 설립하는 데 협조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인적 결합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자본결합을 주식이라는증서로 확정하는 일은 관련법과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철도부설운동, 국채보상운동 등 애국적 경제살리기 운동은 있었으나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회사자본으로 집결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은행, 철도, 기선, 운수 등에서 귀족, 관료, 상인, 지주 등을 발기인 삼아 주식모집에 의한 회사설립이 추진되었지만, 연고에 기초한 기부처럼 인식되었고 회사경영에 대한 유한책임 의식이 부재하였다. (이명휘, 「한국 주식시장의 기원」, 99쪽.)

 

  일본은 1898년 경부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지만, 그 이전부터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가 주축이 되어 민간인 발기인 155명이 모집되었고, 발기인 총회에서 자본금 규모와 설립방식을 확정하였다. 경부철도는 1901년 자본금 2,500만 원을 확정하고 일본과 조선 전역에 10만 주의 주식을 공모하여 500만 원을 조달하였다. 철도부설에 소요되는 자본금을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주식으로 모집하는 과정은 조선 거류 일본인 전체와 대한제국의 관료, 황실의 자본을 동원, 집중하여 이루어진 대기획이었다.
  (...) 대한제국기 철도, 전기 등 인프라 건설에 소요되는 거대자본금이 일본 정부의 보증하에 조선인과 일본인 주식투자자의 모집을 통해 조달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자본의 조선 진출 경로로 주식투자가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부철도의 1901년 발기인 190명(33,035주)의 소재지를 보면, 한국인 22명 중에 민영철(100주), 박기종(21주), 이재순(73주), 이지용(73주) 등이 주주로 참여하고 있었다. 1903년 경부철도 주주명부에는 조선 거주 주주가 564명이고, 그들이 보유한 주식은 12,062주로 나타나는데, 이들 중 500주 이상을 보유한 대주주는 대한제국 황실과 민씨 일족이었다. 식민화의 초석을 놓았던 경부철도의 조선인 대주주가 대한제국 황실과 황족이었고, 이후에도 식민지 주요 대기업의 주주로 황실의 참여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 (이명휘, 「한국 주식시장의 기원」, 100~101쪽.)

 

  1911년에는 경성에서 주식매매업자 조합이 결성되었다. 개별적으로 행하던 오사카와의 연결도 조합으로 모아서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하여 비용도 절감할 수 있었다. 조합원끼리 상호기금을 마련하여 거래에 따른 손실을 보존한다든지 투자자를 확보하기 위한 홍보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정식 인가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자체 규약 외에는 어떠한 강제성도 없었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거래의 신뢰와 안정성이 보장되지는 못하였다.
  거래방식을 살펴보면, 오사카 주식거래소(大阪株式取引所)의 가격을 전보로 받아서, 매일 오전과 오후, 전장(前場)과 후장(後場) 2차례의 시장이 열렸다. 조합원은 받아온 주문을 집합시켜 결정된 가격표를 작성, 인쇄, 배포하였다. 일일의 시세가 공시된 인쇄물은 조선인에게도 주식에 대한 지식을 학습하는 매체로 이용되었다. 여기서 매일 500~600주가 매매되었는데, 그중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일한가스전기(日韓瓦斯電氣)였다. 이 회사는 1908년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조선 전력사업의 진출 목적으로 도쿄에 설립한 전기·전차·가스회사였다. 한일합방 이후 식민지 전력사업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일한가스의 주가는 1910년 25원에서 1911년 53원으로 2배 이상 급등하였다. (이명휘, 「한국 주식시장의 기원」, 104~105쪽.)

 

  이렇게 주식의 인기가 치솟자, 1919년 2월경 일본인 일본인 유력 증권업자들은 매일 일정한 시간 일정한 장소에 집합하여 매매거래를 하였다. 이들은 각자의 점포에서 주문을 받아 전화로 거래상황을 교환하다가 매일 오후 3시에 각 점포에서 순차적으로 모여 자신이 주문받은 내용을 취합하여 거래하였다. 동업자가 점차 증가하고 운영도 순조롭고 실적이 높아지자, 이들은 시장규칙에 의한 현물시장으로 설치허가를 받기로 하고 주식회사로 법인화할 준비를 하였다. 그 가운데 32명의 조합원이 출연하여 경성유가증권현물문옥조합(京城有價證券現物問屋組合)을 설립하였다. 이는 공개적으로 인가된 시장은 아니었지만, 조합원이 모여서 조선은행, 식산은행, 동양척식, 조선방직, 조선전기흥업, 조선제지 등 조선 본점회사 주식과 상하이(上海取引所), 오사카의 주식거래소(大阪株式取引所), 일본과 만주의 주요 주식(大阪商船, 日本郵船, 滿洲紡績, 日本製糖, 滿洲鐵道)을 거래하였다.
  그동안 완강하게 불허방침을 고수하던 총독부도 조합의 주식거래가 무리없이 행해지고 회사령의 폐지가 논의되자, 거래소 설립 청원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17명의 발기인이 경성주식현물취인소(京城株式現物取引所)의 설립을 신청하였고, 1920년 자본금 3백만 원의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京城株式現物取引市場, 이하 '경취'로 약칭)이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인가된 주식시장이 출범하였다. (...) (이명휘, 「한국 주식시장의 기원」, 107쪽.)

 

  1930년대 일제는 만주, 중국을 향한 전쟁 준비에 돌입하였고 전시체제로 진입하였다. 중요산업통제법의 적용이 조선에는 유예됨에 따라, 조선은 일본 민간자본의 유망한 투자처로 부상한다. 신설기업의 주식공모도 증가하였고, 군수공업을 위한 자금조달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공인된 거래소 서립에 대한 긍정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경취의 경험을 통해 허위매매의 폐해를 방지할 법령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고, 신용과 자격을 갖춘 거래 중개자의 자질 개선의 요구와 자격심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총독부 식산국은 「취인소(取引所) 제도에 관한 의견서」에서 "거래소 및 시장에 대한 종래의 정책이 실정에 맞지 않고 허술하여서 단속도 어렵고 시장은 더욱 문란해지고 있다"라고 상황을 진단하였다.
  마침내 1931년 '조선취인소령(朝鮮取引所令)'이 제정되었고, 미곡시장과 증권시장을 통합한 청산거래소가 독점거래소로 설립되었다. 조선취인소령은 조선에서 최초로 증권거래를 입법화한 실체법으로, 적용대상은 유가증권뿐만 아니라 쌀과 콩을 포함한 상품 선물시장에 대한 법령이었다. (...)
  조선취인소의 설립은 주식회사 조직의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와 경취(京取)를 합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 (이명휘, 「한국 주식시장의 기원」, 111~112쪽.)

 

  큰 변화 없이 잠잠했던 주가지수가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1985년 말부터였다. 1986년부터는 본격적인 상승곡선이 그려졌다. '3저호황'의 거센 훈풍이 야기한 '사상 최대의 호경기'가 그 이전까지 "경제 규모에 비해 지극히 보잘것없는 정도의 기능만을 담당"해왔다고 평가받던 국내 주식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기업 수익의 호조와 더불어 시중 여유자금이 증가하면서 주식시장으로 돈이 몰리기 시작했다. 87년 대선·88년 총선을 배경으로 풀린 자금까지 더해지면서 상승세는 가파르게 이어졌다. (...)
  자금의 대거 유입에 따라 주식 유통시장부터 달아오르자 정부는 '물 들어오니 노 젓는다'라는 옛말처럼 서둘러 주식시장 확대·육성에 나섰다. 해외의 개방 압력에 따라 1990년대 자본시장 전면개방을 공언했던 일정에도 대비해야 했던 터였다. 그만큼 정부는 주식시장 토대 조선을 위한 기회를 살려야 했고, 주력의 일순위는 주식시장의 양적 확대를 위한 물량공급, 특히 기업공개 확대에 맞춰졌다.
  정부가 기업공개를 '명령'해야만 했던 1970년대와 달리, '3저호황' 하 투자수요가 증가한 기업 측의 호응도 높아졌다. 정부는 기존의 기업공개 '명령'을 '권유' 형식으로 변경하는 대신, 공개요건을 완화하고 각종 세제상 혜택을 늘렸다. 공개를 회피하는 가장 큰 이유였던 경영권과 창업자 이익에 대해서도 최대한의 보장조치를 더해갔다. 증시 활황의 기세를 타고 기업의 응답도 이어졌다. 이전과 다른 기업들의 적극적인 기업공개로 1984~1989년 상장회사 수는 약 2배 증가했다. (...) (이정은, 「1980년대 후반 증시호황기 '개미'의 탄생과 시련」, 156~157쪽.)

 

  1989년 4월 1일, 한국증시사상 최초로 종합주가지수가 1,000선을 넘겼다는 환호는 한순간이었다. 그 이후 증시는 거대 공모주 물량이 쏟아짐에도 힘을 받지 못하는 정체 상태에 놓였고, 1989년 말부터 하락이 가속화되었다. 오르기만 하는 줄 알았던 주가가 연일 하락하는 생소한 광경에 투자자들의 불안감은 높아갔고 거래량은 급감했다.
  화들짝 놀란 정부 역시 주식시장을 살리려 '극약처방'을 아끼지 않았다. 증시가 안정될 때까지 투자신탁회사가 주식을 무제한 매입하도록 지시한 1989년 '12·12조치'를 시작으로, 각종 물량 과잉공급 억제조치는 물론, 부동산 자금의 증시 환류를 위하여 분당신도시 분양 당첨 발표일도 앞당겨졌다. 1990년 5월에는 증권사·은행 등이 4조 원 규모의 '증권시장안정기금'을 발족하고 자금을 투여하기 시작했다. 9월에는 "세계 증시사상 유례없는 상품"이라는 보장형 수익증권펀드 2조 6천억 원어치가 발매되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조치는 반짝 효과에 그쳤을 뿐이었다. 주가지수는 한때 500선까지 붕괴되었고, 〈표 4〉와 같이 1992년 주가지수 평균은 1989년에 비해 40%가량 폭락했다. (이정은, 「1980년대 후반 증시호황기 '개미'의 탄생과 시련」, 166~167쪽.)

 

  그렇다면 '국민주'를 앞세워 서민층까지 적극적으로 증시에 끌어들였던 정부의 정책 의도는 실패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주식시장을 통해 "중산층의 폭을 넓히겠다"는 경제적 유인은 1990년대 초 증시폭락과 '개미군단'의 대거 이탈로 일단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식 소유가 야기하는 경제외적 효과―개인의 체제내화 촉진에 대해서는 실패라 단언하기 어려워 보인다. 결과적으로 '국민주'를 내세운 노태우는 1987년 대선에서 승리했고 정권 임기를 채웠다. 증시폭락 앞에 "정권퇴진" 구호까지 불사했던 개미들의 분노로 잠시 역효과가 일기도 했으나, 1992년 말 단계적 증시개방이 진척됨과 동시에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한 주가는 증시를 떠나지 않고 버틴 일부 개미들의 마른 목을 축여주며 부분적이나마 개미들을 다시 주식시장으로 불러들였다. (...) (이정은, 「1980년대 후반 증시호황기 '개미'의 탄생과 시련」, 180~181쪽.)

 

교정. 1판 1쇄

차례 3장 제목 : 시장을 이길 수 있는가? -> 한국의 땅 투기 열풍,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24쪽 밑에서10줄 : 이라거 -> 이라고

100쪽 7줄 :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榮一) ->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 꼭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한쪽으로 표기를 통일하는게 좋겠다

105쪽 4줄 :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 -> 시부사와 에이이치 : 한자 표기가 100쪽과 다르기도 하고, 이미 100쪽에 한자가 나왔으므로 여기서 또 한자를 표기할 필요는 없겠다

107쪽 밑에서11줄 : 日本製糖,滿洲鐵道 -> 日本製糖, 滿洲鐵道 : 띄어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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