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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과 공자: 패자의 등장과 철학자의 탄생 (강신주, 사계절, 201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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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과 공자: 패자의 등장과 철학자의 탄생 (강신주, 사계절, 2011.)

Dog君 2012. 6. 11. 14:48



1-1. 나는 '~란 무엇인가'나 '너는 ~를 왜 하니' 하는 식의 질문에 무척이나 약하다. 뭔가 기똥찬 단어나 문장 하나로 답을 해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먼저 밀려오는데다가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을 안 하면서 살다보니 할 말도 영 궁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런거 생각 안 하고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사는 놈이라...


1-2. 좀 후까시를 잡으면서 '우리는 왜 인문학을 배우(연구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면 아마도 강신주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쩌고저쩌고...하는 식으로 답할 것 같다. 강신주는 어떤 조직이나 시스템, 예컨대 국가 같은 것에 대해 좀 극단적일 정도로 싫어하는 티를 내는데 그것들이 인간의 자유를 어떤 식으로든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거 같다.


2. 그래서인지 코딱지만큼이라도 국가권력을 강화시켜줄 수 있는 빌미가 있다...싶으면 일단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그러한 즉각적 반응 앞에선 노자도 예외가 아니다.


  '소국과민'이 등장하는 구절을 직접 읽어보면, 노자가 그렇게 단순한 주장을 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통치자가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책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 둘째, 민중이 죽음을 무겁게 여기고 거주지를 옮기지 않도록 하라. 셋째, 문자를 사용하지 않도록 하라. 여기서 우리는 소국과민으로 표방된 소세계가 자율적인 피통치자들의 공동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소국과민의 소세계는 통치자의 인위적인 폐쇄와 단절의 정책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p.72~73)


3-1. 관중에 대해서는 관포지교에 나오는 그 사람 혹은 제환공을 도와 패업을 이룩한 명재상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강신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철저한 현실주의적 정치가 정도로 정리된다. 굳이 비교대상을 찾자면... 대충 비스마르크 쯤 되는 것 같다.


  관중은 민중의 실존적 삶의 조건을 직시했던 사람이다. 더 나아가 그에게 민중은 비록 피지배층의 신분에 머물러 있지만, 지배층과 동일한 욕망 구조를 가진 사회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다시 말해 관중의 민중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자신들을 지배하는 국가가 이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는 국가로부터 벗어나 다른 곳으로 떠나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관중은 바로 이런 민중의 유동성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약 그들에게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시혜를 베풀 수 있는 다른 국가로 거처를 옮겨버릴 것이다. (p.91)


3-2. 아까 말한 것처럼 강신주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국가체제에 대해 상당히 씨니컬하다. 따라서 위와 같은 관중의 논리도 '이렇게 하야 진정한 복지포퓰리즘국가를 완성하얏소...'로 흘러가는게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고 구속하기 위해 국가권력 혹은 지배자의 위치를 강화하는거다...'라는 식이 된다.


  그래서 아직도 관중의 정치철학적 통찰은 유효하다. 국가를 지상의 가치로 긍정하는 국가주의자에게도 그렇지만, 동시에 국가라는 형식을 대신하는 '자유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인문주의자에게도 그렇다. 국가주의자는 관중의 정치철학을 통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서 시혜와 자발적 복종의 논리가 국가를 유지하는 첩경이라는 점에 주목할 것이다. 반면 인문주의자는 시혜와 복종의 논리 이면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다시 말해 분배하는 자와 분배받는 자라는 원초적 불평등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아직도 국가가 하나의 불가피한 형식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착각을 바로 잡기 위해, 우리는 관중의 정치철학을 인문학적 시선에서 다시 성찰할 필요가 있다. (p.121)


  물론 지속적인 약탈을 도모하기 위해 이제 지배층으로 변신한 부족은 피지배층인 부족 사람들에게 적당한 시혜를 베푼다. 마치 소나 양에게 쾌적한 우리와 맛 좋은 건초를 제공하거나, 그들을 늑대나 호랑이와 같은 짐승들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결국 피지배층에 대한 지배층의 시혜나 보호는 더 커다란 수탈을 기대하면서 이루어지는 것 뿐이다. 그렇지나 소나 양이 목동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듯이, 피지배자도 국가가 잣니을 위해 존재하고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착각할 수 있다. (p.125)


4. 그나마 관중은 현실주의적이기라도 했는데 공자는 그나마도 없다. 현실을 멀쩡히 초월해버린 이념. 중국 철학의 시작이라는 공자도 강신주 눈에는 그냥 바람과자먹고 구름똥 싸는 신선처럼 보였나보다.


  먹을 것이 없다면, 귀족이든 민중이든 간에 군주에 대한 신뢰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런 자명한 사실을 간과하고, 공자는 먹을 것이 없어도 민중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강변하고 있던 셈이다. 결국 공자가 말한 민중은 사실 그만의 백일몽 속에만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관중에 따르면 민중은 물질적인 토대가 확보되어야 인간으로서 예의나 수치심을 가질 수 있다. 만약 민중을 배불리 먹이지 못했다면 군주는 그들이 예의나 수치를 모른다고 비난할 자격이 없는 셈이다. (p.108)


  사실 권력자는 화려한 옷을 입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라는 화려한 치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반드시 권력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결코 이 화려한 옷을 벗어버리지 말라고 평생 역설하고 다녔다. 더 나아가 그는 죽더라도 예라는 옷을 벗지 말라고 강변하기까지 한다. 하긴 인한 사람에게서 이 낡은 옷은 이제 피부에 완전히 달라붙어서 떼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결국 춘추시대의 혼란을 해소하겠다는 공자의 실천적 신념은, 현실과 삶으로부터의 초연함을 이야기하면서 근본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제 공자의 사상은 철학이 아닌 일종의 종교로 승화되고 만 것이다. (p.225)


5. 앞으로 이 시리즈는 10권의 책이 더 나올 예정이고 제자백가의 사상을 다 훑을 것이다. 이 책에서 보여준 것처럼 국가체제에 대한 입장이라는 관점에서만 이야기를 계속한다면 사실 이후 작업들에 대한 기대치는 좀 많이 떨어질 것 같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해도 나 개인적으로는 책을 다 사모을 것 같다. 왜? 일단 재밌잖아. 역사학도 이렇게 좀 말랑말랑하게 써야 되는데. 흐.


ps. 이 작업이 진행되면 진행될 수록 신영복의 '강의'와 비교가 많이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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