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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과 도 (윤미화, 북노마드, 2012.)

Dog君 2012. 10. 2. 16:36


1-1. 솔직히 말하자면 대학원생에게 독서란 일종의 '업무'와 비슷하다. 수업 준비를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할 뿐더러 논문 쓰려고 보는 연구서와 논문들에, 취미 삼아 읽는 책을 더하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 좀 알아보려고 읽는 주간지나 월간지까지 더하면 순수히 활자의 양만 가지고 볼 때 많을 때는 1주일에 서너권 분량은 족히 읽는 것 같다. 대한민국 연간 평균 독서량이 직장인 기준으로 15권 조금 넘는다는데 이 정도면 가히 '활자중독' 수준은 아닐랑가.


1-2. 근데 저 많은 책을 다 읽으려면 사실 좀 마이 피곤타. 책상 앞에 앉으면 어김없이 책을 꺼내들어야 하고 전철에 타서도 책을 꺼내야 되고 버스에서도 책을 꺼내야 되고 자기 전에도 책을 꺼내야 되고... 아 이게 뭐야. 우엥 ㅠㅠ. 가끔 어떤 때는 책 사이사이의 사색이고 나발이고 활자를 읽어나가는데에만 급급해지기도 한다. 옛날에 누가 책은 마음의 양식이랬는데, 저런 식으로 뭔가에 쫓기는 기분으로 책을 읽게 되면 마음의 양식이 되기는 커녕 그냥 뇌에 대한 고문 아닌가 모르겠다. 그렇게 게걸스럽게 독서를 한다고 해서 마땅히 교양이 더 깊어지는 것도 아닌거 같은데 말이지. 대학원생 입장에서는 책을 읽는다는 것이 내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내가 처음에 책 읽기를 시작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끔 자문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기계적으로 책을 읽어대다가는 언젠가 우리도 "책이 정말 네모낳다."라고 말하는 처지로 전락할지 모른다.


2. 그런 의미에서 함 골라봤다.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에 대해 잠깐 짬을 내어 성찰하기 위해 선택한 본격 서평모음집, '독과 도'. 그런데 앞뒤 표지에는 '울자, 때로는 너와 우리를 위해'라든지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과 대치한 고독한 존재다'라는 식의 후까시 넘치는 멘트들이 뽑혀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서평집이라기보다는 무슨 신앙고백서나 자기개발서 같지만, 이 책에 담긴건 엄연히 서평(혹은 독후감)이다.


* 그러고보니 서평과 독후감의 차이는 대체 뭐지.


3. 책을 쓴 윤미화는 로쟈 이현우처럼 '파란여우'라는 이름으로 온라인에서 유명세를 떨친 서평 전문 블로거(라고 한)다. 책날개에 있는 저자소개에 따르면 (무려!) 삼성전자와 (무려!!) 공무원 생활을 거쳐 지금은 시골에 틀어박혀 염소 치고 책 읽으면서 각종 잡지에 글을 기고한다고 한다. 삼성전자가 아니라 중국계 짝퉁 전문 '샘숑전자'에 다녔더라 한들 글 솜씨에 하등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닌지라 스펙에는 별달리 눈이 가지 않지만 저 라이프 스타일은 정말 졸라게... 부럽다. 아 저것이야말로 내가 꿈꾸는 삶이잖은가. 보고 싶은 책 보고 쓰고 싶은 글 쓰면서 사는 인생.


말 나온 김에 대륙의 짝퉁 하나 보고 가자.


4-1. 윤미화에게 독서란 단순히 활자에 담긴 지식을 흡수하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지금의 질문에 해답을 찾기 위한 능동적 과정이다.


  쓸데없는 질문 같지만 독서는 질문과 답을 추출하는 행위라고 여기는 나로서는 포기할 수 없다.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설명한 책을 아무 질문 없이 덮는 일은 수동적 독서다. 따라서 독서 행위가 능동적 태도로 바꿀(뀔) 때 책은 내 것이 된다. 그래서 서평이란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을 것 같은 질문으로 지면을 채우지만 질문이 남긴 서평은 온전한 내 사유로 흡수할 수 있다. (pp. 35~36. 괄호 안은 인용자가 오타 수정)


4-2. 그렇기 때문에 윤미화의 서평은 책을 고르는 것에서부터 스스로와의 대화가 시작된다. 비록 한 사람이 쓴 서평들일지라도 전부 다 모아놓고 보면 아무런 고갱이 없이 제각기 따로 노는 인터넷과 시사주간지의 서평들과는 달리 그녀의 서평 모음은 하나의 일관된 문제의식과 맞닿는다. "이 비인간적인 자본의 사회에서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이 가장 첨예하게 집약된 부분이 2부인데 그녀는 줄곧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와 니어링 부부를 읽으며 (아마 '월든'은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고유명사일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 질문한다.


  나는 도시로부터 떠나온 사람이다. 임금생활이 주는 일정한 수준의 안정과 소속을 버린 사람이다. 그러자 돈이 나를 떠났다. 한때 돈을 좇느라고 200여 마리의 염소를 키우며 허덕였다. 염소재벌이 되어 내가 도시에서 떠나올 때 비웃던 사람들과 자본에게 통쾌한 복수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많은 염소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결국 돈을 갖는 데 실패했다. 허나 어렵게 얻은 자유를 '화폐의 구속'과 바꿀 의향은 없다. 나는 이미 자유의 단 꿀을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방만한 자본이 무법천지로 활개치는 오탁악세(伍濁惡世) 속에서 자본의 정체를 보는 시선을  이 책은 깐깐하게 지적한다. 앙드레 고르는 2007년 병든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억압과 굴레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다가 한날 한시에 손을 잡고 죽음을 맞았다. 평생에 걸쳐 아내에게 쓴 편지를 묶은 책이 『D에게 보낸 편지』다. 사르트르는 그를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 불렀다. (p. 114.)


  나 역시 다르지 않다. 무작정 안빈낙도를 꿈꾸며 선택한 시골살이는 혹독했다. 나에게 강요한 사람은 없었지만 빈 저금통장과 불투명한 미래를 떠올릴 때 후회도 했다. 자유와 가난을 동시에 얻은 나는 두려움과 불편함 앞에서 고민하는 날이 많았다.

  세상에 뒤쳐지는 것 같아 두려웠고 돈 없는 생활 역시 그랬다. 많은 시행착오와 갈등, 고독과 번민이 현실과 내면에서 동시에 분탕질을 치면서 차츰 익숙해졌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시골살이에서 얻을 것은 자연에의 경이와 자족이다. '낮은 태도와 작은 규모와 적은 소유'에 천천히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계절과 사람이 섞이고 순환하는 것을 배우고 현금이 없어도 텃밭에서 채소를 가져와 밥상을 차릴 수 있다. 한 송이 꽃이 힘들게 몸을 여는 과정도 지켜본다. 분투없이 피는 꽃이 어디 있을까.

  나는 헬렌 니어링처럼 함께 돌집을 지을 반려자는 없지만 염소를 돌보고 텃밭을 가꾼다. 나머지 시간은 책을 읽고 글을 쓰거나 마을 할머니들로부터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다. 노인들로부터 세월에 곰삭은 말을 줍고 산에 가선 밤을 줍는다. 야생 오디를 따 먹고 고사리도 꺾는다. 풍족하진 않지만 도시에서 살 때보다 많은 자유와 해방이 내 오두막을 밝히고 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pp. 161~162.)


5.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 아마도 그것이 그녀가 내린 잠정적인 결론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는 거의 같은 표현이 중복되어 사용된 것이 있는데 수없이 서평을 쓰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같은 표현(비유)을 쓴 것일게다. 당연히 그 무의식적 반복에는 그녀의 지향이 숨어있다.


  양계장은 더 놀랍다. 공장식 양계장에서 사육되는 닭들은 A4 용지 한 장 면적에서 알을 낳다가 죽는다. 태어난 직후 귀표를 단 소는 축사에서 자라다가 도축장이나 우시장으로 외출을 한다. 생애 첫 외출이 마지막 외출이다. (p. 138.)


  소를 키우는 축사도 마찬가지다. 백 마리가 넘게 사는 농장은 농장이 아니라 공장이다. 쇠파이프로 칸칸이 나눈 제한된 공간에 갇힌 소들은 옥수수 사료를 먹고 때가 되면 트럭에 실려 도축장으로 떠난다. 생애 유일한 외출이지만 죽으러 가는 길이다. (p. 175.)


6. 그 책들을 통해 윤미화가 내린 결론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애초에 이 책을 고른 이유가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가 무언지 스스로 물어보기 위함이었으니까. 물론 이 책 한 권을 읽은 정도로 지금 당장 내 독서의 의미를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나의 독서(혹은 공부)는 단지 수업 진도를 따라가거나 더 높은 등급의 학위를 취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풀지 못하는 어떤 질문에 답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라는 점 정도를 다시 깨우쳤으니 일단은 그걸로 만족할란다.


7. 무엇인가를 읽고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윤미화가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은 단연 다음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글에서는 '문학'이라고 했지만 그냥 보통의 독서라는 의미로 바꿔 생각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티아니와 하오랑을 지지대처럼 묶어준 것은 문학이었다. 문학이 지닌 상상력이 피폐한 현실을 굳건한 기둥처럼 떠받들어준 것이다. 상상력은 염원이다. 염원은 현실보다 나은 상황을 갈구한다. 우리는 이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문학이 희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몽환으로 위로하고 상상력으로 응원하기 때문이다.

  시를 읊으면서 죽음의 공포를 견딘 사람도 있다. 나치 수용소에서 단테의 오디세우스를 읊던 프리모 레비는 살아서 수용소를 나왔다. 비록 고향으로 돌아와 비통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수용소에서 삶의 희망을 부여해준 것은 단테의 『신곡』, 오디세우스다. 티아니와 하오랑은 문학이 중국인들을 구원할 것으로 믿었다. (p. 265.)


 * 티아니, 하오랑: 프랑수아 쳉의 『티아니 이야기』의 주인공.


ps: 그런데 '毒과 道'가 무슨 뜻인지는 암만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아오.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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