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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뉴스 (김중혁, 문학과지성사, 2006.)

Dog君 2012. 10. 2. 14:33



1-1. 내가 소설을 읽는 경우는 거개 두 가지인데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주문하다가 배송비를 아끼려고 싼 값에 할인 중인 소설책을 끼워넣거나 어떤 특정한 계기로 인해 어떤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경우이다. '펭귄뉴스'는 두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1-2. 내가 김중혁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불과 몇 달 전으로 이동진이 진행하는 '빨간 책방'이라는 팟캐스트에 그가 고정 패널로 출연하고 있는 것이 계기였다. 그의 시덥잖은 언어유희에 나는 다소 매료되었고, 그의 소설책을 사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얼마 전에도 새 소설집을 냈지만 역시 누군가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더듬으려면 첫 작품부터 보는 것이 순서인지라, 2006년에 나온 그의 첫 소설집을 골라들었다.


2. 소설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을 붙여야 하는지 잘 몰라서 이번에도 인상깊은 구절이나 몇 개 쓰고 말겠지만, 그래도 굳이 한 마디 붙이고 싶은 말은 있다. 소설 전반이 다 그런데, 소설들이 하나 같이 끝나는 지점이 이상하다. 이제 좀 이야기가 시작되려나보다...하는 시점에서 그냥 딱 끝난다. 이건 뭐 기승전병... 이런 것도 아니고 대충 발단 찍고 전개 즈음 어디선가 그냥 핫바지 방구 새듯이 소설이 끝나버린다. 특히 몇몇 소설에서는 무척이나 (내가 보기에) 흥미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놓고도 그냥 끝나는 경우가 있어서, 당장에라도 작가를 찾아가서 다음 이야기를 들려줘!하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 든다.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가 특히 그랬던 것 같다) 물론 여운을 남긴다는 측면에선 이게 엄청 효과적인 방법인 것도 같다...


  그 후의 일들은 사실 자세하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살다 보면 기억의 줄기 한가운데 검은 테이프를 붙여놓은 것처럼 깜깜한 시기가 있는데 내게는 그때가 그랬다. 무너져버린 제방을 밟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모든 것이 너무나 빨라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인간의 삶 역시 가속도가 붙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스무 살 무렵은 더디고 더디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기 시작하면 도무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언덕 아래로 사정없이 미끄러지다가 쾅, 하고 박살나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속도를 줄이기 위해선 어쨌거나 조금은 가벼워야 할 필요가 있다, 고 나는 생각한다. <무용지물 박물관> 中 (pp. 36~37.)


  왕만두전골을 먹고 나니 팔다리에서 힘이 솟았다. 고추전과 소주 한 병을 추가로 주문했다. 술이 들어가면 조금 더 멀쩡한 정신이 될 것 같았다. 전골을 먹는 도중에 한마디도 하지 않던 이수연 기자는 밥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지자 숟가락을 놓으면서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익사 직전의 상태에서 인공호흡을 받고 깨어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밥 알갱이 사이사이에는 역시 공기가 많이 들어 있으니까.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 中 (p. 49.)


  고추전과 소주가 도착하는 바람에 대화는 끝이 났다. 나는 발명가의 설계도를 접어서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탁자로 다가앉았다. 그녀와 나는 외계에서 날아온 UFO를 환영하는 심정으로 탁자를 쓸어서 자리를 내어주었고 동그란 접시는 정확한 자리에 내려앉았다. 참으로 먹음직스러운 고추전이었다. 우리는 소주 두 병과 고추전 두 접시를 사이좋게 나눠 먹고 헤어졌다. 사실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소주 한 병을 먹었을 뿐인데 스튜디오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집에는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깨어나 보니 혼자였을 뿐이다.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 中 (p. 51.)


  소포를 받은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삼촌으로부터 도착한 것이었다. 그때는 연구실과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의 중환자실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의 전부였기 때문에 소포를 열어볼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어쩌면 소포를 뜯을 수 있는 힘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미래라는 건 내가 그릴 수 있는 지도의 영역 바깥에 위치한 것이었다.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中 (p. 75.)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는 아주 조용했고, 조심스러웠다. 맹인의 지팡이 같은 목소리였다. 톡, 톡, 톡, 맹인의 지팡이 같은 남자의 목소리는 타자기처럼 톡탁거렸다. 전화의 목소리만 듣고도 그 사람의 생김새나 취미, 혹은 생활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이는 40대 중반, 눈이 조금 작고 입 역시 조금은 작지만 귀는 아주 클 것 같았다. 취미는 뜨개질이나 십자수 - 그것도 아주 커다란 사이즈의 -, 아니면 영화 감상. 생각이 너무 많아서 늘 손해를 보는 타입의 남자가 아닐까, 싶었다. <회색 괴물> 中 (pp. 163~164.)


  아침의 치과는 평온했다. 그 흔한 드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환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건 마치 전투 직전의 참호 같다. 환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곧장 수술실로 끌려갔다. 간호사는 의견을 묻지도 않고 내 가슴팍에 이상한 천을 하나 둘렀다. 그리고 의자가 천천히 뒤로 젖혀졌다. 진정한 공포가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 순간의 움직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 등교하듯 치과를 들락거렸지만, 이 순간의 공포만큼은 적응이 되질 않는다. 마스크를 쓴 의사가 다가왔다. 아마 의사는 훗날 내게 복수당하는 것이 두려워 얼굴을 가릴 목적으로 마스크를 썼을 것이다, 라는 것은 나의 공상이지만,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정말 복수를 할지도 모른다. <회색 괴물> 中 (p. 180.)


  "탈 줄 모르신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정말 간단한 일이니까요. 자전거만큼 배우기 쉬운 게 없죠. 넘어지려는 쪽으로 핸들을 꺾으면 되니까요. 그것만 기억하시면 돼요. 넘어지는 반대쪽이 아니라 넘어지려는 쪽으로 핸들을 꺾는다."

  안내원은 주문을 외우듯 그 문장을 반복했다. 넘어지려는 쪽으로 핸들을 꺾는다. 넘어지려는 쪽으로 핸들을 꺾는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넘어지려는 쪽으로 핸들을 꺾는다', 라고 머리 속에 문장을 떠올려보면 반드시 옆으로 넘어질 것만 같다. <바나나 주식회사> 中 (pp. 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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