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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한겨레출판, 2016.)

Dog君 2018. 9. 25. 12:26


1. 입과 손으로야 진보를 외치지만, 사실 나도 내 눈 앞의 가시적인 것들에 당당히 맞설 용기는 없다. 따라서 향후에 내가 결혼을 하더라도 장강명처럼 시댁을 파괴할 배짱을 발휘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별다를 것 없이 심드렁한 여행 후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런 배짱 좋은 이야기들을 깔아둔 덕에 범상하지 않게 읽히는 책이다. ‘민족의 명절’ 추석을 맞아 고향집에 내려와서 읽는 책 치고는 좀 그로테스크하다는 느낌도 있지만, 이런 책으로라도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만들어 두는 건 좋은 일인 것 같다. 그래야, 이 책처럼 똑같이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부끄러운 줄은 알 것이고, 할 수 있는만큼만이라도 할 수 있을테니까.


  반면 HJ는 명절에 우리 부모님 댁에 가지 않았다. 설이나 추석에 나는 부모님 댁에 혼자 간다. 내가 내린 결정이다. 

(중략) 

  솔직히 말하면 부모님과 HJ를 설득해서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게 만들 자신이 없었다. 1, 2년으로 될 작업이 아니었다. 양측에 최소한 3년은 전력을 다해야 할 것 같았다. 그 3년간 아마 나는 HJ에게 부당한 비난을 받고, 부모님의 무리한 요구를 웃어넘기며 진이 다 빠지고 말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중략) 

  솔직히 내 부모님과 HJ가 왜 서로 친하게 지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명절에 싫다는 아내를 자기 부모님 댁으로 굳이 데리고 가는 남자들은 왜 그러는 걸까. 보기 싫은 친지들을 만나러 큰집에 가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해마다 명절이 지나면 이혼 상담이 급증하고 형제간 폭행으로 누군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꼭 나오는데, 다들 그런 위험을 각오하고 친지들을 만나는 걸까.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뭔지 정확히 모를 것이다. 그냥 막연히 명절에는 가족이 다 모여야 한다고 하니까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가 뭔지 알지만, 관습의 압력에 맞설 용기가 없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제적인 동기가 영향을 미친다. 부모님에게 사업 자금을 빌리기 위해서라든가 그들을 저렴한 베이비시터로 활용하기 위해 평소에 다소간의 투자를 해야 한다. (pp. 28~30.) 


  나는 그런 ‘애완 인간’을 여럿 봤다. ‘헬리콥터 맘’은 언론의 과장이 아니었다. 나는 사표를 스스로 낼 용기가 없어서 아버지가 대신 사직서를 내준 젊은 엘리트를 안다. 학벌도 좋고 영어도 잘 하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애완 인간이었다. 희고 고운 피부 아래, 순하고 눈망울이 여린,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소형견이 들어 있었다. 그런 애완 인간임이 분명한 변호사도 한 명 안다. 스펙은 좋지만 속은 비어 있다.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인간들이다. 신자유주의가 어쩌고 시민 불복종이 어쩌고 코스프레를 하지만 시누이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겁쟁이들. 추상적인 적을 상대할 때에만 저항 정신을 열변할 수 있는 비겁자들. 그래서 자꾸 거대한 상상의 적을 만들어내는 음모론자들. 교수 판검사, 의사, 약사, 회계사, MBA, 대기업 직원 중에 그런 애완 인간들 많을 거다. 요즘 한국에서는 애완 인간으로 살아야 그런 직업을 가질 확률이 높아진다. 자기 돈으로 미국 유학을 거가나 로스쿨 학비를 댈 수 있는 20대가 몇이나 되나. (p. 38.) 


  한국식 결혼식은 우리 생각에 그런 허세와 불필요한 지출의 결정체였다. 내 생각에는 전형적인 한국식 결혼식은 빼빼로 데이와 매우 비슷하다. 언젠가부터 점점 호사스러워지고 있고, 장식이 본질을 압도하고 있으며, 이제는 거대 산업이 되어버렸다. 업체들이 호사스러움을 부추기고 있으며, 소비자들은 모두 그게 허세이고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도 그 상술에 넘어가고야 만다. 

(중략) 

  왜 이런 미친 짓거리가 사라지지 않을까? 

  내 생각에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이 미친 짓거리에 협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세대가 미친 짓거리의 뼈대를 세우고, 신세대가 거기에 살을 붙이고 잇기 때문이다. 그 미친 짓거리에 협조하지 않는 자들을 “걔 원래 좀 특이하잖아”라며 이단자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 미친 짓거리를 성대하게, 무의미하게 치러낼수록 찬탄을 사고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미친 짓거리는 온 사회 구성원이 거기에 협조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점점 더 강화될 뿐이다. 사교육이나 학벌 같은 문제가 그렇다. 언제나 더 똑똑하고 더 진보적인 다음 세대가 자신들의 앞 세대보다 더 미쳐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관습과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편견과 새로운 속박을 만들어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명문대와 똥통대’라는 기준을 세웠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기에 ‘인서울’, ‘수도권’, ‘지방대’라는 기준을 추가했다. 손자 손녀들은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 국숭세단 광명상가’ 어쩌고 하는 긴 디테일을 만든다. (pp. 48~49.) 


  선글라스를 쓴 채로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신이 다시 멍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다니는지, 왜 자전거를 타고, 왜 수십 킬로미터를 달리며 러닝하이를 느끼려 하는지. 

  사람들은 멍해지려고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피로하게 만든다. 생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대신 괴로움에 빠뜨린다. 이것이 선악과(善惡果)의 정체다. 

  생각은 현실을 넘어선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이다. 생각 덕분에 우리는 애국이니 박애니, 살을 비비며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랑을 넘어선 거대한 사랑을 상상한다. 구원이니 해탈이니, 근육의 나른함과 위장의 포만감을 넘어선 거대한 행복을 상상한다. 구원이니 해탈이니, 근육의 나른함과 위장의 포만감을 넘어선 거대한 행복을 상상한다. 계급이니 국가니, 내가 표정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을 넘어선 거대한 집단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허구를 상상하기 때문에 우리가 거대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거대한 행복을 얻지 못했으며, 거대한 집단 속에서 소외되었다고 여기게 된다. 

  우리는 소 뼈다귀나 산책이나 공 던지기에 좀처럼 열광할 수 없다. 세계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해변에 오거나 죽도록 달린 뒤에야 ‘생각하기’로부터 잠시 해방될 수 있을 따름이다. (pp. 122~123.) 


  진보 운동가나 페미니스트 중에 간혹 결혼식은 올리더라도 혼인신고는 하지 않거나, 아예 결혼을 거부하고 동거를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의견을 존중하며, 그런 선택의 배경도 이해한다. 아마도 그런 결단에는 결혼 제도가 인간을 억압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결혼 제도가 여성의 활동을 제약하거나 성 또는 노동을 착취하는 수단이 된다. (중략) 

  그러나 그렇다고 결혼 제도를 통째로 적으로 몰아붙이는 행위 역시 나는 새로운 억압 안에 자신의 상상력을 가두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은 해방이라는 이름의 억압이다. 

  인간은 가치를 좇는 존재다. 그리고 가치를 좇는 행위 자체가 세상에 폭력적인 질서를 부여한다. 제멋대로 세계를 가치 있는 것, 가치가 덜한 것, 가치 없는 것으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그런 질서는 필연적으로 구속과 억압을 만들어낸다. 모든 광명은 반드시 그림자를 만든다. 아니, 이건 적절치 않은 비유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종이에 데생을 할 때 펜으로 어둠을 그려서 빛을 표현하듯, 그림자가 광명을 만들어낸다는 말이 옳겠다. 왜냐하면, 그 모든 가치는 결국 허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구속과 억압을 통해 겨우 그 허구가 현실 시계에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결혼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사람이 영원한 사랑을 믿으며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다른 사람에게 한눈팔지 않고 상대에게 충실하겠다는 공개 선언이다. 이것은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개념이다. 인간은 열정을 금방 잃고, 섹스의 가능성이 있는 타인을 향해 수시로 한눈을 팔며, 오래도록 한 가지 대상에 충실할 수 없는 존재다. 그것이 해방된 상태의 인간이다. 결혼은 그런 자연스러운 충동을 억압해서 허구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운명적 사랑, 백년해로라는 개념을. 우리는 운명을 구속함으로써 운명을 만든다. 

  내 생각에 결혼의 핵심은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지키겠다는 선언에 있다. (중략) 

  이것이 허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가톨릭 사제의 삶이 왜 고귀한가? 하느님이 그 삶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인가? 신을 믿지 않는 나는, 사제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한 것은 사제들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지키기 어려운 구속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고, 사제 서품을 통해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선언하고, 사제복을 입고 자신이 선언자임을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때문이다. 허구와, 허구가 만들어내는 구속을 받아들일 때 의미 있는 삶이 시작된다. (중략)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모든 억압에 반대한다’는 말은 그냥 난센스일 뿐이다. 물론 미신적이고 비본질적인 억압, 예단은 얼마를 해 가야 한다는 따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그러나 해방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언제나 가치를 찾는 여정의 한 수단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인위적인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면, 인간은 유인원이 된다. 일단 외출할 때는 옷을 걸쳐야 한다는 사회적 억압에 반대해 여름에는 홀랑 다 벗고 다녀야 하지 않을까? 모국어라는 억압에서도 탈출해야 하지 않을까? ‘사과’를 ‘자갈’이라고 부르고 ‘나무’를 ‘개’라고 부르고 ‘만나서 반갑습니다’라는 말 대신 “뚫훍뀄땃찡부리쌍광쾅’이라는 새로운 인사말을 쓰는, 자기만의 언어를 창조해야 하지 ㅇ낳을까? (pp. 186~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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