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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루페, 2017.)

Dog君 2019. 4. 6. 20:04

 

1-1. 전자책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책, 십자수, 음악, 이 세 가지만큼은 물성物性에 꽤 집착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십자수는 무조건 오프라인 가게를 찾고, 음악 역시 CD나 LP를 사서 (MP3로 리핑하여) 듣는다. 책도 마찬가지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종이책을 고집한다. 무겁고 부피도 크지만, 여행을 가건 출장을 가건 불편함을 무릅쓰고 꼭 종이책을 챙긴다. 아무리 전자책이 편하다지만, 한 번 종이책의 물성物性에 익숙해지고 나니, 전자책은 그저 비인간적인 기계덩어리로 느껴질 뿐이다. (PDF로 다운받은 논문도 굳이 종이에 인쇄한 다음에 줄쳐가며 읽는 걸 보면, 화면으로 글자를 읽는 행위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책과 음악 구입을 대체로 온라인에 의지하는 것을 보면, 내 태도도 아주 일관된 것은 아니다. 작년에 동네서점을 이용할 결심을 하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포기한 적이 있다.) 시대에 뒤쳐진 아재의 쓸데없는 고집 같기도 하지만 뭐... 결정적으로 불편하지 않으면 바꾸지 않는 보수적인 성격이니까 그런갑다 한다. 그래서, 별다른 변수가 없는한 앞으로도 내가 전자책을 읽는 일은 없을 것이다. 

 

1-2.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8개월 조금 넘게 외국에 머무르게 됐다. 한군데서만 있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한 번 자리를 옮기기까지 해야 하는 상황.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무겁고 부피 나가는 것은 최대한 줄여야 했다. 추가 수하물 운임까지 턱턱 내놓을 정도로 여유있는 사정이 아니니, 결국 종이책을 얼마 이상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작년에 읽은 책의 숫자로 환산하면 8개월 간 읽을 책으로 최소 56권을 챙겨야 한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전자책에 입문하게 됐다.

 

2. 첫 전자책으로 이 책을 고른 것도 참 공교롭다. 무엇보다 독서에 대한 태도가, 주인공과 내가 비슷하다. ㅎㅎㅎ 작은 섬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A. J. 피크리는 꼭 나처럼, 전자책을 좋아하지 않으며 좋아하는 책의 취향도 확고하다. 아, 시간이 나면 달리기를 즐긴다거나 궁금한 것이 생기면 인터넷 서핑에 상당히 의존한다는 점조차도 비슷하다. ㅋㅋㅋ

 

*. 아래의 쪽수는 내가 읽은 전자책 기준이다. 전체 369쪽이었다.

 

  “좋아하는 거?” 그는 불쾌감을 담아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싫어하는 걸 말하면 어떨까요? 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종말물, 죽은 사람이 화자거나 마술적 리얼리즘을 싫어합니다. 딴에는 기발하답시고 쓴 실험적 기법, 이것저것 번잡하게 사용한 서체, 없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삽화 등 괜히 요란 떠는 짓에는 근본적으로 끌리지 않습디다. 홀로코스트나 뭐 그런 전 세계적 규모의 심각한 비극에 관한 소설은 다 마뜩잖더군? 부탁인데 논픽션만 가져와요. 문학적 탐정소설이니 문학적 판타지니 하는 장르 잡탕도 싫습니다. 문학은 문학이고 장르는 장르지, 이종교배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는 경우는 드물어요. 어린이책, 특히 고아가 나오는 건 질색이고, 우리 서가를 청소년물로 어수선하게 채우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사백 쪽이 넘거나 백오십 쪽이 안 되는 책도 일단 싫어요. TV 리얼리티쇼 스타의 대필 소설과 연예인 사진집, 운동선수의 회고록,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소설, 반짝 아이템, 그리고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뱀파이어물이라면 구역질이 납니다. 데뷔작과 칙릿, 시집, 번역본도 거의 들여놓지 않아요. 시리즈물을 들이는 것도 내키진 않지만 그건 내 주머니 사정상 어쩔 수 없고. 당신 편의를 봐서 말하는데, ‘빅히트 예정 시리즈’ 같은 건 그게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안착하기 전까지는 나한테 말도 꺼내지 마쇼. 그리고 로먼 씨, 난 무엇보다 말이죠, 별볼일없는 노인들이 별볼일없는 자기 아내가 암으로 죽었다고 끼적거린 얄팍한 회상록들은 도대체 참을 수가 없더군요. 제아무리 잘 쓴 글이라고 출판사 영업사원이 얘기해도. 제아무리 어버이날에 무진장 팔릴 거라고 장담해도.” (24~26쪽.)

 

(…) 에이제이는 종종, 이 세상 최고의 것들은 죄다 고기에 붙은 비계처럼 야금야금 깎여나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레코드 가게가 그랬고, 그다음엔 비디오 가게가, 신문과 잡지에 이어 이제는 사방에 보이던 대형 체인 서점마저 사라지는 중이다.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형 체인 서점이 있는 세상보다 더 나쁜 유일한 세상은, 대형 체인 서점‘조차’ 없는 세상이었다. 적어도 대형 서점은 약이나 목재가 아니라 책을 팔지 않는가! 적어도 그런 서점에는 문학 공부를 한 사람, 책을 읽을 줄 알고 사람들에게 책을 골라줄 수 있는 사람도 좀 있지 않겠는가! 적어도 그런 대형 서점이 온갖 출판 쓰레기를 만 부씩 팔아치우는 동안 아일랜드 서점에서는 순문학을 백 부는 팔 것 아닌가!

(…)

  그는 주먹 쥔 손을 커피 테이블에 탕 내려놨다. “어머니, 저 극악한 기계가 단지 내 사업을 간단히 박살을 내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수백 년 동안 살아 숨쉬던 문학 문화를 체면 차릴 겨를도 주지 않고 급속한 쇠망의 길로 확실히 내몰고 있다는 것을 정녕 이해 못하십니까?” 에이제이가 물었다.

  “호들갑 떨기는.” 어밀리아가 말했다. “진정해.”

  “내가 왜 진정해야 하는데? 난 오늘날의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난 저 물건이 마음에 안 들고, 저런 물건을 내 집 안에 세 개나 두다니 당연히 안 될 일이지. 차라리 해가 덜하게 손녀 선물로 마약 같은 걸 사오시지 그랬어요.” (262~263쪽.)

 

  집에 다 왔을 때쯤 마야의 울음소리는 최고조에 달했는데, 화재경보기와 새해 전야 파티의 빽빽이 사이 어디쯤에 해당하는 소리였다. 에이제이는 애가 배가 고픈가 보다 추론했지만, 이십오 개월짜리한테 뭘 먹여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이빨은 있나 보려고 입술을 당겼다. 이빨이 있었고 마야는 그걸 써서 그를 물려고 했다. 에이제이는 구글 검색창에 질문을 넣었다. “이십오 개월 아기한테 무엇을 먹이나요?” 하여 나온 대답은 대체로 부모들이 먹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글이 간과한 건, 대체로 에이제이가 먹는 음식이 쓰레기라는 것이다. (70쪽.)

 

  “그게 말이죠…… 공인된 방식이 아닌 줄은 압니다만, 애엄마가 나한테 이런 메모를 남겼거든요.” 에이제이는 메모지를 제니에게 건넸다. “보면 알겠지만, 애엄마는 내가 이 아이를 맡아주길 바랐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소원이었어요. 내가 아이를 맡는 게 도리에 맞는 것 같은데요. 지금 여기에 완벽히 좋은 가정이 있는데 굳이 다른 위탁가정으로 옮기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문제에 관해서 어젯밤에 구글에서 검색해봤어요.”

  “구글.” 마야가 말했다.

  “얘가 구글이란 낱말에 꽂힌 것 같은데,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87~88쪽.)

 

3. 전자책에 흥미가 없던 사람이 전자책을 싫어하는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을 생애 첫 전자책으로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책이 우리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 여전히 이다지도 많다는 것. 책을 읽는다는 것이 골방에 틀어박혀 자기만의 성을 쌓는 일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과 교감하고 소통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 부족한 글과 말이지만, 그래도 끝끝내 읽고 쓰고 말하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사정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 읽고 쓰고 말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이런 식의 자기 충전이 주기적으로 꼭꼭 필요하다.) 꼭 종이책이 아니어도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됐잖은가.

 

  “어떤 문제요?” 제니가 물었다.

  “아이 어머니가 애를 나한테 맡기길 원했다면 내가 아이를 넘겨줄 의무는 없다고요.” 에이제이는 설명했다.

  “아빠.”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마야가 말했다.

  제니는 에이제이의 눈을 보았다가 마야의 눈을 보았다. 두 쌍의 눈이 모두 단호해서 난처했다. 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오후는 무난히 넘어갈 줄 알았는데 이거 일이 복잡해지기 시작하네. (87~88쪽.)

 

  에이제이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잠깐 어밀리아를 보러 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 맞아.” (154쪽.)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곤……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곤, 우린 함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예요, 맹세코. 나는 내가 읽는 책을 당신도 같이 읽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밀리아가 그 책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내 아내가 되어주세요. 당신에게 책과 대화와 나의 온 심장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에이미.” (193쪽.)

 

  에이제이는 딸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이런 훌륭한 너드를 배출하다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242쪽.)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우리는 혼자라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301쪽.)

 

(…) 나는 진심으로 아일랜드 서점을 사랑한다. 나는 신을 믿지 않고, 종교도 없다. 하지만 내게 이 서점은 이승에서 교회에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이곳은 신성한 곳이다. 이런 서점들이 있는 한, 출판업은 오래도록 이어져갈 거라고 확언한다. - 어밀리아 로먼.’ (311쪽.)

 

교정.

187쪽 : 어밀리아는 슬몃 -> 어밀리아는 슬며시

208쪽 : 와인한 잔으로 -> 와인 한 잔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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