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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열전 (조한성, 생각정원, 20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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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열전 (조한성, 생각정원, 2019.)

Dog君 2019. 3. 2. 04:21


1-1. 구성과 작법이 보통의 역사책과 사뭇 다르다. 먼저 구성의 측면. 위해 이 책은 3.1운동을 기획, 전달, 실행의 세 국면으로 나누고 각각의 국면에서 활약한 사람들에 주목하는 방식을 택했다. 보통의 역사책이 배경, 전개, 결과, 의의... 뭐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과는 다르다. 사건을 국면에 따라 나눴기 때문에 흐름에 따라 사건을 이해하기가 무척 편하다. 3.1운동이 워낙에 다양하고 복잡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전후 사정까지 함께 머리에 넣고 이해하기가 꽤나 까다로운 것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구성은 독자의 편의성이라는 면에서 일단 합격점이다. 


1-2. 이러한 구성은 책의 내용과도 맞닿는다. 국면 별로 파트를 나눴지만 실제 파트의 이름은 ‘기획자들’, ‘전달자들’, ‘실행자들’로 되어 있다. 각 국면에서 활약한 사람들에 주목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3.1운동이 단일한 주체나 일관된 기획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각 국면에서 활약한 많은 사람들의 작은 실천이 누적된 결과임을 의미한다. 


  민족대표들이 세운 독립운동 계획은 완전하지 않았다. (…) 많은 가능성이 점쳐졌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는 데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독립을 선언한 후 다음 계획도 치밀하지 않았고,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 수정할 계획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 그러나 결핍은 참여를 낳았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부족함을 느낀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스스로 빈틈을 메워나갔다. 독립운동은 그렇게 민족대표의 손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68~69쪽.) 


  독립운동을 단 1회로 끝내선 안 된다는 학생들의 생각은 향후 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천도교와 기독교 측의 운동에 협조는 하되 거기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운동을 펼치겠다는 생각도 소중했다. 이런 생각이 있었기에 민족대표들이 독립운동의 지도를 포기했을 때, 학생들이 나서 그들을 대신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종교인들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10쪽.) 


  제11호, 제12호, 제13호, 《조선독립신문》은 끊길 듯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신문을 내는 사람이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앞서서 나갔던 사람들의 뒤를 이어 다시 한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제12호와 제13호를 낸 시점이 장종건 팀이 제8호와 제9호를 낸 시점과 겹친다는 점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아마도 이것은 장종건 팀이 체포의 위험을 피해 인쇄 장소를 옮기면서 3월 18일부터 21일까지 나흘 동안 신문을 내지 못했던 것과 관련있는 듯하다. 이틀마다 나오던 신문이 나오지 않자 누군가가 그 빈틈을 메우려는 듯 신문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앞서 신문을 내던 팀(장종건 팀)에게 검거 같은 사고가 생겼다고 판단했지만, 사고 여부는 확실하지 않았으므로 호수가 겹치지 않게 제11호부터 발행한 것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두 팀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같은 제호의 신문을 호수만 달리하여 동시에 발행하게 되었다. 

(…) 

  장채극 팀 이후 《조선독립신문》은 누군가에 의해 5월에 두 번, 8월에 한 번 더 세상에 나왔다. 이것이 《조선독립신문》의 마지막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던 《조선독립신문》은 3·1운동기 지하신문의 원형을 만들어내며 조선인을 대변하는 입이 되었다. 한번 열린 입은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았고, 다른 많은 이들에게 말하고픈 욕구를 일깨워주었다. 조선에 수많은 지하신문과 격문이 범람하게 된 이유였다. (192~198쪽.) 


2. 작법도 특이하다. 이 책은 역사책답지 않게 인물 간의 대화를 적극 삽입하고 당시 상황에 대한 상상과 추론도 자유롭게 구사한다. 이러한 작법은 사료의 한계와 관련이 있다. 당시에 작성된 다양한 사료를 교차 검토하여 3.1운동의 실체에 접근한다...는 목표까지는 이 책도 보통의 역사책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주되게 인용하는 사료인 조사보고서는 글자 그대로 신뢰하기가 좀 어렵다. 조사 과정이란 으레, 있는 진실도 숨겨야 하는 피의자와 없는 혐의도 만들어 내야 하는 수사자 사이의 줄다리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사보고서를 통한 사실관계의 재구성은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불완전한 사실관계의 빈틈을 채운 것은 저자의 상상력이다. 재구성이 애초부터 완전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상상력과 추론을 구사하고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대화를 삽입하는 것이 편해지는 것이다. 역사학의 엄격한 방법론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보통의 독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 쪽이 가독성의 측면에서 훨씬 더 낫다. 


(…) 필자는 3·1운동기에 작성된 경찰심문조서, 검찰신문조서, 예심심문조서, 공판시말서 등을 적극 활용했다. 이들 자료는 공개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동안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했다. 심문조서와 공판시말서가 가진 한계 때문이다. 심문조서와 공판시말서는 한 것도 하지 않았다고 숨기려는 피의자·피고와 하지 않은 것도 한 것으로 만들려는 일제 공안 당국 사이의 밀고 당기는 진실과 거짓의 싸움 기록이다. 여기엔 진실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만큼 거짓도 많다. 이런 까닭에 역사학계는 그동안 이 자료들을 한정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필자는 심문조서와 공판시말서가 가지고 있는 풍부한 이야기에 주목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3·1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른 기록에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내밀하게 적혀 있다. 필자는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하되 여타의 사료들과 기존의 역사 연구 성과로 기록들에 섞여 있는 거짓을 걸러내고, 상상력으로 빈틈을 메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복원하고자 했다. 이것은 3·1운동이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 가려진 보통 사람들의 진실을 찾아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9쪽.) 


3. 그러한 구성과 작법을 통해 저자가 드러내고 싶은 것은 행동 그 자체의 의미 아닐까 싶다. 여기서 인용할만한 것은 영화 ‘곡성’의 주인공 종구. 종구는 영화 내내 무엇이라도 하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지만, 그것이 그가 사건의 전체 의미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의 모든 행동은 그저 딸을 위해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 뿐이다. 그저 한 사람의 개인일 뿐이기 때문에 그의 추론과 예측은 대부분 틀린다. 그러한 종구를 보며 관객은 무력감을 느끼겠지만, 이 책은 정반대이다. 개인개인의 실천은 너무 작고 무의미해보이고, 심지어는 무능하기까지도 하지만, 그것이 모이고 모였을 때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일단 무엇이라도 하고 보는 마음도 중요하거니와, 실천 그 자체가 갖는 힘도 있기 때문이다. 실천이 더 많은 실천을 낳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생각도 또 한걸음씩 더 나아간다. 


  결국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이 가장 신경써서 했던 두 가지 일,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외교와 두 통의 천원서 전달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간절히 희망했으나 염원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것일까? 그것은 민족자결주의를 얘기하면서도 여전히 제국주의의 속성을 버리지 못했던 미국의 이중성이 만들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외국의 힘에 기대어 세상이 바뀌길 바랐던 마음,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스스로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세상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그 단순한 진실이 1919년 그해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은 완전히 실패하진 않았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의 힘을 다해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선과 일본, 만주와 연해주에서 많은 조선인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다 함께 일어난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다 함께 노력한다면 세상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세상이 진짜로 바뀌기 시작했다. 칠흑같이 어둡기만 했던 미래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38~39쪽.) 


  이렇듯 천도교 지도부의 향후 계획은 조선총독부를 대체해 신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국내에 세워지는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천도교 지도부의 계획에는 망명정부의 수립이 없었다. (…) 문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신정부의 조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들의 믿음이며, 대중과 함께하지 않아도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 그러나 미래를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없었음에도 그들이 희망을 걸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언제나 역사는 행동하는 데서 시작된다. 언제나 그것이 역사를 바꾼다. 이것이 천도교 지도자들이 한 일이었다. (67쪽.) 


(…) 일제 당국은 이날 시위를 제대로 막지 못했다. 시위는 경성의 주요 지점을 모두 통과하며 만세를 불렀고, 총독부청사 등 주요 관공서만 지킨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왕좌왕하는 경찰과 군대의 모습을 곳곳에서 목격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오랫동안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사람들은 경찰과 군대의 공포를 이겨낼 용기를 얻었다. 이것이 2차 시위에 더 많은 사람이 나오게 된 이유였다. 

  사람들은 시위에 나오며 각자가 가져올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나왔다. 구호를 적어넣은 깃발이 대표적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엔 언제나 그러하듯이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새로운 생각이 태어나고 새로운 인식이 자라난다. 3월 5일 남대문역 일대를 붉게 물들인 붉은 수건도 그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붉은 수건을 머리띠인 양 머리에 두르기도 하고, 완장처럼 팔에 감기도 하고, 손에 들고 흔들기도 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붉은 수건은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불덩어리를 내 친구, 내 이웃에게 전하는 도구였다. 

  붉은 수건은 수레에 담겨 현장에서 대량으로 배포됐다. 그렇게 많은 수건을 미리 준비해 나눠준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일제 당국은 3월 5일 시위에 참석했다가 붙잡힌 거의 모든 조선인들에게 그들이 누군지를 캐물었다. 하지만 끝까지 그들의 존재를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다. (122~123쪽.) 


4.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3.1운동’이라는 명칭을 ‘3.1혁명’으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에 관한 것이다. 사실 ‘3.1혁명’이라는 명칭을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의 연원은 매우 깊고 나름의 근거도 단단하다. '3.1혁명' 주장에서 가장 크게 주목하는 것은 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사상적 지향이 3.1운동을 통해 변화했다는 점이다. 3.1운동 과정에서 나왔던 구호에는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왕정 극복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 정도면 공화정을 지향한다는 대체적인 합의가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3.1운동을 계기로 수립된 임시정부 역시 자유와 평등을 명시적으로 지향했고, 이러한 내용은 제헌헌법에도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 그리고 3.1운동은 이후에 다양한 형태의 운동이 태어날 수 있는 직간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내 고향인 진주의 사례를 예로 들면, 강상호, 강달영 등의 인물이 3.1운동을 통해 지역사회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는데, 주지하다시피 이들은 각각 형평운동과 공산주의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들을 중심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면 범위는 더 넓어진다. 예컨대 어린이운동이라든지...) 그런 점을을 감안하면 ‘3.1혁명’이라는 명칭이 아주 생뚱맞은 것은 아니다. 


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3.1혁명’이라는 명칭 앞에서 아무래도 씨니컬한 마음이 더 크게 드는 것이 사실이다.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자는 것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지만, 그것이 과연 ‘혁명’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것이었는지는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혁명’이라 함은 적어도 기성 권력이 붕괴하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변화가 생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정도는 되어야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과연 3.1운동이 그런 정도의 변화를 유발했는가 하면 거기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일제 식민권력이 결정적으로 붕괴한 것은 아니니까. 


5-2. 공화정 지향으로의 변화라는 점도 사실은 엄밀히 따져볼 여지가 있다.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사상적 흐름에서 왕정 복고가 탈락하고 공화정 지향이 지배적으로 된다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지만, 그것이 3.1운동에까지 소급하는지는 따져볼 여지가 있다. 일단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 중 하나가 고종의 장례식이었다는 점은 왕정에 대한 희구 역시 3.1운동의 주요한 동력 중 하나였음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공화정부의 수립에 그토록 주목하게 되면 의외의 논리적 전개가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3.1운동의 공화정 지향은 일단 '임시정부'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정부'는 '임시'라는 수식어처럼 잠정적인 결론으로밖에 볼 수 없는데, 이렇게 되면 3.1운동의 물리적 완성은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정부'다...라는 주장도 가능해진다. 그러면 이 순간부터 논의는 다시 1948년 건국절 논쟁으로 돌아간다. 그 다음은 뭐, 더 말 안 해도 알겠지. 


5-3. 마지막으로 자잘한 것 몇 가지 덧붙인다. 먼저 (지역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겠으나) 향촌의 경우 봉건적 양반층이 만세시위를 주도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두자. 그리고 두 번째로, 과연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6. '3.1운동'을 '3.1혁명'으로 바꾸는 것은 단지 사실관계 한두개를 따져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주체와 무수히 많은 형태로 전개된 일련의 만세시위 전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그게 그래서 어렵다. 그냥 이름 하나 바꾸고 말고 하는 정도가 아닌 것이다. 물론 과거에 공식적으로 '3.1혁명'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했던 것을 생각하면 '3.1운동'이라는 지금의 명칭 역시 절대적으로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3.1운동'이라는 명칭이 오랫동안 사용되어왔다는 점도 중요하다. 비록 그것이 완전히 흡족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경로의존성 때문에라도 중대한 문제가 있지 않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명칭을 바꾸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7-1. '혁명'이라는 명칭이 오히려 해석의 과잉이 아닌지 되묻는다. 식민지 극복을 위한 전민족적 항거니까 좀 더 강력하게 '혁명' 정도로는 불러줘야 되는 거 아니냐 하는, 민족주의 과잉의 역사해석 말이다. 어쩌면 우리 역사에도 쓸만한 '혁명'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강박의 소산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굳이 '혁명'이라 부르지 않더라도 3.1운동이 충분히 자랑스럽다. 파리 꼬뮌을 굳이 혁명이라 부르지 않더라도 그 의의를 인정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7-2. 나는 오히려 '혁명'이라는 표현이 남발되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나는 ‘3.1혁명’이라는 명명이 엄격하고 신중한 고려에 온전히 기초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 강력한 어감과 의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예컨대 20년쯤 전에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던 그 모양새가 기억난다. 미시적 세계에까지 눈을 돌려서 일상 속에도 어김없이 구축되어 있던 권력관계를 해체하자는 ‘일상적 파시즘론’의 문제의식은 훌륭했지만, 그 과정에서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너무 남발되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어땠는가. 일상의 작은 권력관계도 파시즘, 거시적이고 큰 권력관계도 파시즘, 이거도 파시즘 저거도 파시즘 그거도 파시즘 하다가 결국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옆집 철수도 앞집 영이도 너도 나도 다 똑같은 파시스트라고 하는 지경까지 가지 않았나. 단어의 의미에 대한 신중하고 꼼꼼한 성찰 없이 단어의 어감과 효과만 보고 마구 남발하면, 결국 그 단어가 가진 생명력까지 짧아진다. 


그 외에 밑줄 그은 부분. 


  함태영은 애초에 운동의 날짜를 3월 4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종의 국장이 3월 3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니, 그다음 날 운동을 벌이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최린은 국장 당일에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가능한 한 날짜를 앞당기기를 원했다. 세간에 고종의 독살설이 파다하게 퍼져 있어 국장일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폭동이 일어나면 독립운동 계획은 실행해보지도 못한 채 와해될 수 있었다. 그런데 국장 하루 전인 3월 2일은 일요일이었다. 기독교인 입장에서 일요일에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래서 3월 1일로 날짜가 정해진 것이다. (87~88쪽.) 


교정. 

72쪽 사진캡션 : 신한천녕당 -> 신한청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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