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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미래 (장세진, 푸른역사, 20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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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미래 (장세진, 푸른역사, 2018.)

Dog君 2019. 4. 7. 22:59


1-1. 거의 6년 전에(;;) 절친한 지인의 추천으로 장세진의 『슬픈 아시아』를 읽었다. 해방을 즈음하여 남한의 지식인들이 ‘아시아’라는 공간을 어떻게 상상하고 대면했는지를 다룬 책이었다. 하지만 결말은 (비극적이게도) 그러한 상상과 대면들이 결국에는 냉전의 강력한 자장 속으로 흡수되고 마는 것이었다. 책의 내용에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전 구조를 넘어선 사유를 보여준 이들이 정녕 없었는지 되묻고 싶어졌다. 냉전이니 제국이니 하는 것에 일방적으로 규정당한 것이 아니라, 그 와중에도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한 사람이, 정녕 하나는 없었냐는 거다. 그런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비로소 가능성이란 것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1-2. 그런 생각을 나만 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책을 낸 이후로 저자는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고, 그로부터 다시 이 책 『숨겨진 미래』를 냈다. 양극화된 냉전 구조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던, 이른바 ‘중간파’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그거 말고도 더 있긴 하다.)


  2012년, 《슬픈 아시아》를 내고 나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 있다. 사람마다 약간씩 표현은 달랐지만, 결국 동일한 질문이었다고 기억한다. 정말로 한국 사회가 그 책에서 내가 묘사한 것처럼, 아무 출구 없이 그토록 암울하고 답답했냐는 물음이었다. 아무리 엄혹했던 역사라 하더라도, 우리에겐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시간,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그 시간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지 않았느냐는 뜻으로 나는 그 질문을 이해했다. (…) (390쪽.)


1-3. 이건 좀 사족인데... 사실 그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마음 속으로 함석헌 정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보다 몇 년 전에 『사상계』를 다룬 한 박사논문을 읽으면서 함석헌을 눈여겨 봐둔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상계』 역시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함석헌의 근본주의적인 지적이 새삼 빛이 난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에서도 함석헌을 빼놓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그는 평화란 “전쟁을 하지 않고 전쟁을 없애는 것”이라는 전제하에 “평화는 정의 없이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가치지향적 입장을 동시에 견지했다. 함석헌의 관점에서라면, 평화의 원칙을 공식적으로 표방한 7·4 성명은 일단 환영할만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과 형식 두 가지 면에서 모두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 7·4 공동성명이 명시한 ‘평화 공존’을 논리적으로 밀고 나가면, 분단된 상태하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노선, 요컨대 분단의 고착화 방향을 가리키기도 했다.

(…) “통일의 기초는 평화”라는 1973년 연설에서 박정희는 지난 6·25의 참상을 상기시키며 평화 상태의 소중함을 새삼 강조하고 있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국제 정세 또한 현상유지를 기조로 한 평화공존의 조류”라는 인식은 바로 데탕트에 대한 정권의 이해이기도 했다.

  제목에서 이미 징후적으로 드러나 있지만, ‘평화통일’을 그토록 강조하던 박정희의 레토릭은 이제 통일과 평화를 서서히 분리하는 쪽으로 나아갔으며, 곧이어 “선평화, 후통일”이라는 노골적인 슬로건으로 변신하게 된다. ‘평화통일’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10월 유신’의 개헌을 단행하고 이른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발족시킨 지 불과 2년도 채 안 된 무렵의 일이었다. 결국, ‘선평화 후통일’이란 1960년대 역대 정권들이 공통으로 내세운 예의 ‘선건설 후통일’의 1970년대식 버전인 셈이었다. (374~375쪽.)


2. 이 책에서 다루는 중간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해방 정국의 정치적 중간파, 예컨대 여운형이나 백남운, 김규식, 안재홍 같은 이들과는 약간 다르다. 그보다는 ‘문화적 중간파’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정당에 기반하지 않은, 정치적 공간 외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에 주로 주목한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저자가 문학을 전공했다는 점과 관련이 있겠지만, 그만큼 ‘중간파’라는 말의 범위가 넓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간파’를 정확히 어떤 경향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것이 저자의 의도도 아니다. 저자의 목적은 ‘중간파’라는 이름으로 그간 시도되었던 다양한 모색들을 하나씩 끄집어 내어 살펴보자는 것에 있을테다. 해방 이후 한반도의 역사가,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중간적 존재들을 최대한 지워내는 과정이었기 때문에라도 이런 접근은 더 반갑다.


  일반적으로, ‘중간파’를 후대에서 연구하거나 평가할 때는 주로 정당 정치 영역에서 활동한 대표적 정치인들에 국한해 논의가 집중되어온 편이다. 예를 들어, 역사학이나 정치학 연구에서는 주로 여운형(종종 ‘좌’로도 분류된다)이나 백남운, 김규식, 안재홍과 같이 정당을 기반으로 한 주요 정치인들의 활동이 부각되어왔다. (…) 물론, 분과로 나뉜 학문 연구의 특성상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 아래서는 당시 언론계에 상당히 폭넓게 포진되어 있던 ‘중간파’ 지식인들, 특히 ‘문화적 중간파’라고도 부를 수 있는 다수의 움직임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대목은 정당이라는 현실 정치 세력의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중간파’의 경우, 지지 세력들 역시 조직보다는 분산된 개인으로 산재해서 존재했던 측면이 강했다는 점이다. 또한 당시 특정 정당의 노골적인 기관지 성격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던 일부 언론을 제외한다면, 소위 ‘중립성’을 원칙적으로 표방하는 언론계 인사들의 성격상 ‘중간파’와 친화적일 확률이 태생적으로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

  돌이켜보면, 좌우협력, 남북협력, 미소협력을 통한 통일국가 수립이 ‘중간파’의 가장 큰 원칙이었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설정된 구체적 사안들에 대해 ‘중간파’ 지식인들 내부에서도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세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정당 정치에 얼마나 깊이 관여했느냐에 따라 그들의 입장 역시 조금씩 변화했다. 예를 들어, 국가 건설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친일파’와의 관계 설정이라든가 미국 특히 남한 주둔 미군정을 이해하는 방식 같은 문제들이 그랬다. (…) (26~28쪽.)


  표면적으로, 《무풍대》는 《효풍》과 마찬가지로 남녀의 사각 관계를 그린 애정소설이다. (…) 사각 관계의 주요한 한 축인 여성 인물 정임을 끝내 재현의 무대 위에 직접 등장시키지 않은 채 작중 인물들의 대화와 기억, 그리고 풍문과 이미지에 의존하여 인물을 간접적으로 형상화하는 방식을 택한다. 예컨대, 정임의 존재는 주인 없는 빈 방의 서가에 남아 있는 “자본론이니 유물사관이니 하는 어려운 좌익 서적들”의 이미지를 통해 어렴풋이 유추되다. 혹은 “소위 중간파라고는 하지만 우익 여성으론 제일 아는 축일걸” 하는 과거 지인들의 평한, 그리고 소문(…)을 통해서만 독자들에게 등장하는, 어떤 분명한 실체 없는 그림자와도 같은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존재/부재로 인해 비로소 이 서사의 사각 관계가 가동되고 성립된다는 점에서 보자면, 정임은 그야말로 이 서사의 비어있는 중심이다. (…)

  이중 재현이라는 전략 자체가 웅변하듯이, 《무풍대》는 사회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중간파’ 지식인의 이야기조차 더이상 그려낼 수 없었던 1949년의 정치적·문화적 현실 그 자체, 즉 ‘재현할 수 없음’에 대한 재현이었다. (53~54쪽.)


  직분 논리를 강조하는 미군정의 호소는 주둔 초기 《농민주보》가 발행되기 이전에도 이미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John Hodge 중장이 여러 번의 기자회견을 통해 경향 각지의 조선인들에게 널리 알려온 것이기도 했다. 하지의 연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직능에 전념하는 자’ vs ‘그렇지 않은자’는 ‘국민’과 ‘비국민’의 도식으로 이내 번역되었으며, 이때 직분 중의 직분, 즉 최종심급으로서의 직분이란 ‘국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당시 특정 직분으로 환원되기 어려웠던 귀환자들, 다시 말해 ‘노동자도 아니고 농민도 아닌’ 그들은 ‘국민’과 ‘비국민’의 범주 사이를 불행하게 오고 가며 미군정에게 항상 두려움과 경계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 (90~91쪽.)


3. 대학에 들어와서 근현대사를 처음 공부할 적에는 중간파에 대해서 꽤 시니컬했다. 양 극단으로 나뉜 현실의 엄혹한 규정 앞에서 중간파의 상상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발언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피가 끓던 20대의 젊은이에게 중간파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ㅎㅎㅎ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것이 오히려 중간파의 강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실 정치에 덜 규정받았기 때문에 도리어 더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상상을 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래의 인용 같은 부분을 읽고 있으면 중간파의 정치적 기획을 단지 '극좌도 극우도 아닌 절충’ 정도로 갈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강하게 든다. 오히려 1910년대 항일독립운동의 동력이 되었던 민족자결의 기획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중간파였는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3.1운동 100주년이라고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중간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여지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물론, 미군을 비롯한 미소 양군의 동시철수 문제는 그 적정 시기(예컨대 선거 이전이나 이후냐)와 구체적 방법 등을 놓고 좌와 우는 말할 것도 없고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중간파’ 정당 세력 내부에서도 의견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커다란 난제 중의 하나였다. (…) 그러나 현실 정치의 세세한 손익 계산에서 한 발 물러나 있던 문화적 ‘중간파’ 그룹의 한 전형이었던 오기영과 같은 인물은 이 사안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이면서도 명료한 입장 표명이 가능했다. 그는 미·소 양군이 “우리끼리의 통일에 맡기고 물러가주면 우리는 우리의 자각에 의하여 좌우의 등 뒤에 있는 무력의 눈치를 살필 것 없이” 독립을 완수해낼 수 있다는 낙관과 자신감을 보인다. (…)

  ‘문화적 중간파’들의 이러한 주장은 특히 우파 정치 세력에 의해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는 결국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정세의 흐름과 ‘탈식민’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시대정신을 둘러싼 사태 진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예컨대 이갑섭은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전쟁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전후 세계 평화를 재건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구 식민지의 완전한 독립을 통해 전전의 ‘민족자결원칙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을 현실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잠재되어 있던 과거의 가능성을 현재의 시간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이러한 종류의 역사 해석에서 본다면, 민족자결원칙은 한갓 ‘이상’이나 ‘당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

  ‘중간파’ 정당이었던 민독당의 리더 홍명희가 “우리는 어디까지나 민족이 욕구하는 바를 체득하며 우리 문제는 우리 힘으로 하는 정신 기백으로 통일 자주 독립을 완수하여야 한다”고 말할 때, 그리고 배성룡이 자신의 저서 제목을 《자주조선의 지향》(광문사, 1949)으로 정할 때 그 기저에 흐르는 공통분모란 바로 유예된 식민의 종식을 의미하는 약소민족의 민족자결이었다. (50~51쪽.)


4. 좀 흥미로웠던 것은 염상섭의 텍스트를 통해 친일의 문제를 대하는 중간파의 또 다른 어떤 단면을 확인한 것이다. 친일의 문제에 대해서는 워낙에 다양한 입장이 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 중간파의 입장이 대변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해방 정국에서 친일의 문제를 대하는 여러 복잡한 입장 중 하나를 확인했다는 점에서 일단 재미있는 언급이었다. “어떤 경로로 축적된 자본이든 그 궁극적 의의는 결국 사용가치가 결정하는 것이므로, 향후 민족국가 건설 과정에서 과거 ‘친일파’가 자본이라는 형태로 어떤 기여를 할 가능성을 이 대목에서 읽어내는 일도 가능하다”는 언급은 특히 밑줄 그어두고 싶은 부분.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염상섭의 《효풍》은 ‘친일파’와의 관계 설정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롭게 읽히는 텍스트다. 소설 속에서 ‘친일파’와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인물은 의외로 주인공 병직인데, 그의 부친 박종렬 영감이 양조장을 경영하는 성공한 사업가이면서 바로 일제시대 도회都會 의원을 지낸 ‘친일파’의 이력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 의지로서 끊을 수 없는 혈연의 끈을 설정해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병직이 여기자 화순을 비롯한 동료 인물들의 월북 비용 대부분을 결국 아버지에게서 취한다는 점은 확실히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비록 발각되기는 하지만, 병직이 자신을 뒤쫓는 남한 경찰의 눈을 피해 아버지의 외딴 별장을 동지들의 비밀 아지트로 활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

  어떤 경로로 축적된 자본이든 그 궁극적 의의는 결국 사용가치가 결정하는 것이므로, 향후 민족국가 건설 과정에서 과거 ‘친일파’가 자본이라는 형태로 어떤 기여를 할 가능성을 이 대목에서 읽어내는 일도 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염상섭이 과거 ‘친일(파)’라는 이슈에 대해 일반적인 ‘중간파’ 지식인들의 견해보다 상대적으로 한층 더 ‘유연’했다고 볼 여지가 없지 않다. (34~35쪽.)


5. 어떤 독자에게는 전쟁포로 꼭지 같은 것은 좀 튀어 보일 수도 있겠다. 중간파 아니니까.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로 나뉘어 죽고 못 사는 원수지간이 되곤 했던 포로수용소의 모습은 중간파는커녕 냉전 구조를 있는 가장 극단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니까. 이 부분은 나도 좀 헷갈렸는데, 포로들이 스스로를 냉전의 주체로 만들어가는 과정 역시 어찌보면 주체성과 상상력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어떨까 하고 저자가 우리에게 조심스럽게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포로들이 적극적으로 냉전을 체화하는 과정 자체가, 한반도의 역사적 행위자들이 냉전을 인식하고 체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한 개인의 주체 구성 과정에서 도덕의 차원이 개입하는 현상에 대한 푸코의 통찰을 빌려보면 어떨까. 개인은 “자신이 따를 규범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을 정하여 자기의 도덕적 완성이라는 가치를 갖게 될 어떤 존재 양식을 설정한다. 그리고 이런 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 작용을 가하며 자기를 알고자 힘쓰고, 자기를 억제하며 자기를 시련에 빠뜨리고 자기를 완벽한 존재로 만들며 자기를 변혁”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푸코가 언급한 “도덕적 주체”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규범적 가치 자체가 보유한 보편타당성의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도덕적 가치(라 믿어지는)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개인이 끊임없이 행위와 노력을 투입한다는 ‘능동성’의 차원 혹은 도덕에 따라 스스로를 ‘만들어낸다’는 실천의 역할 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120쪽.)


6. 그렇게 냉전을 상상하고 구성하는 과정이 순수하게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학(아시아학)의 형성 과정을 다룬 장에서 알 수 있듯이, (냉전 구조의 영향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과거 식민지의 유산도 강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0년대 초반 개최된 《일본에서의 조선 연구의 축적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日本における朝鮮硏究の蓄積をいかに繼承するか》라는 심포지엄의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전후 연구자들의 핵심 키워드는 바로 전전 연구의 ‘계승’ 문제였다. 하타다는 일본인들의 연구가 “문헌 비판이나 사실 고증의 점에서는 극도로 엄밀했고, 거기에 우리가 계승할 만한 점이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는 인식을 보였다. (…) 아울러 논리적으로 연동되는 것이겠지만, 독일의 랑케 사학으로 대표되는 실증주의 아카데미즘을 모델 삼아 성립된 전전 일본의 동양사학이 가진 폭넓은 연구자 풀pool과 그들의 학문적 연량, 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학술적인 제도 자체에 관한 하타다의 신뢰 또한 여전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전전 제국 아카데미와의 이 같은 연속성은 《조선사》가 저술된 시기를 볼 때 보다 확연해진다. 하타다의 텍스트는 물리적 시간으로 보더라도, 제국 일본의 쟁쟁했던 소위 동양사학 연구자들의 저작들을 기반으로 삼아 저술된 텍스트일 수밖에 없었다. (…)

  물론 전전 텍스트들을 인용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떠한 맥락에서 이 선행 레퍼런스들을 활용하고 배치하고 있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예컨대 일본이 통치했던 식민지 시기의 경우, 하타다가 전전의 사료와 연구들을 1·2차 자료로서 이용하되 되도록 팩트만을 추려내어 조선 민족의 저항에 대해 그의 선배들과는 매우 다른 서사를 만들어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목에서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은 하타다의 《조선사》를 매개로 전전 일본 동양사학자 그룹의 전반적인 사유 패러다임과 그 안에서 개진된 한국Korea에 관한 통시적 담론들이 전후 태평양을 가로질러 미국의 ‘동아시아/한국학’의 학적 체계 안으로 별다른 저항과 소음 없이 연착륙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238~239쪽.)


7. 사실 읽기에 마냥 쉬운 책은 아니었다. (분과를 엄격하게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래도 굳이 나누자면) 문학 쪽에서 나오는 연구서들은 역사학에 비해서 아무래도 좀 더 추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이걸 제대로 이해하고는 있나... 싶고 막 그렇다. 그러다보니 손이 잘 안 가는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어찌어찌 책을 다 읽고 나니, 힘들여서라도 완독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슬픈 아시아』에서 어딘지 모르게 아쉬웠던 부분이 『숨겨진 미래』를 통해 채워졌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정한 저자를 따라가며 책을 읽는 거, 학술서에서도 꼭 필요하다. 어떤 이의 생각의 흐름을 졸졸 뒤따라가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꽤 많기 때문이다. 이해하기도 쉽고 말이다. ㅎㅎㅎ 그게 책 읽는 재미이기도 하고. (그러고보니 그 두 책보다 더 앞선 『상상된 아메리카』는 사놓기만 하고 아직 안 읽었네;; 그것도 어서 도전해야지.)


8. 그리고 그 외에 밑줄 친 부분들.


(…) 일찍이 푸코가 통찰했듯이, 국가 내치의 첫 번째 관심사가 “인간들의 수數를 담당하는 일”이라 한다면, 일단 “사람들의 수가 얼마인지 아는 것과 그 수를 최대한 많게 만드는 것은” 자연히 ‘국력’의 증진 여부와 관련해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103~104쪽.)


(…) 많은 논자들이 지적해왔듯이, 인권 개념은 자신이 의거하고 호소하는 ‘보편성’으로 인해 특정 국면에서 오히려 ‘정치성’을 매몰시키거나 혹은 의도된 정치성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한국전쟁 당시 포로 문제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포로들의 거취 선택권은 분명 자유로운 개인의 의사 표현과 망명권이라는 반박하기 어려운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 차원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냉전이라는 국제 대결의 맥락 속에서 잘 계산된, 진영 차원의 인구정치 전략을 희석하고 포장하는 일종의 영리한 명분이기도 했다.

(…) 한국전쟁에 대한 UN의 공식 개입은 한편으로 지구 상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범죄시하는 국제연합의 “전 지구적 사법주의의 기획”이었지만, 당시 미군 공중 폭격의 강공할 규모와 38선 이북의 거침없는 북진 감행에서 드러나듯이 그것은 “가장 최대주의적인 군사주의와 결합되는 아이러니”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 포로들의 시점으로 쓰인 글쓰기는 단순히 반공이데올로기를 맹렬하게 전파나는 기록이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 인권 등과 같은 한국전쟁과 관련된 일련의 보편적 기획들이 노정하는 아이러니를 (무)의식적으로 ‘증언’하는 텍스트로 새롭게 독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용소의 경험을 통해 재탄생한 포로들이 실상 남한 냉전 주체의 계보학적 원형에 가까운 존재들이라는 점을 밝혀보았다. (…) (142~143쪽.)


  한편, 정치제도의 전반적인 중국화(관료화)와 함께 조선의 토지소유 시스템 역시 매우 ‘중국적’이었다고 서술되는데, 라이샤워에 의하면, “관료와 지주의 동일성은 중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현저”했고, 중국에서보다 한국의 지배 계급과 여타 계급의 사회적 격차는 훨씬 두드러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의 그것이었다. (…)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수반하는 고도의 안전성과 변화의 완만성은 라이샤워가 파악한 중국사회의 상대적인 이점과 강점이었지만, 그러나 이러한 ‘중국적’ 역량은 아쉽게도 한국, 특히 조선에서는 결코 발현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술된다. 왜일까.

(…)

  요컨대, 미약한 왕권을 배경으로 한 지배(양반) 계급의 강고함 및 내적 폐쇄성(동일성), 그리고 그 견고한 역사적 지속성 등은 와그너가 박사학위논문 이후에 시도한 조선의 족보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에서 여전히 일관되게 담겨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조선 지배 계급을 묘사하는 라이샤워의 뉘앙스를 되도록 그대로 살린다면, 이들에 의해 장악된 조선왕조는 중국 사회의 좋은 점을 닮지 못하고, 오히려 나쁜 점은 극대화시킬 수 있는 자연적·사회적·정치적 조건들을 ‘완비한’, 매우 “슬픈 상태에 놓여 있는” 비운의 케이스일 수밖에 없다.

  내인론 내러티브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공력되어야 하는 시기는 바로 서구와의 조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근세였으므로, 조선 후기의 ‘실패’ 요인 분석에 라이샤워가 공을 들린 것은 따라서 당연했다. 중국의 경우, 유교적 중앙집권 관료제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해도 그 광대한 크기 때문에 오히려 통치가 느슨해지기 쉬웠던 반면, 조선은 작은 사이즈로 인해 오히려 중국보다 더 완강하고 획일적인 관료국가의 통치가 발현되었다는 것이다. 더욱 불행한 것은 그 속성상 중앙집권적일 수밖에 없는 관료 정치가 조선에서는 양반 계급의 비대한 성장으로 ‘귀족화’되어, 정작 근대국가 성립에 필수적인 강력한 왕권 확립(메이지 시기의 일본이 그러했던 것처럼)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 무엇보다 역설적인 것은 조선이 중국의 (악화된/슬픈) 변이형으로 고유성을 지닌 채 500여 년이 넘도록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 역시 조선 통치 기술의 질이 어떠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중국 대륙의 정치적 형세라는 외부 변수로부터 발원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라이샤워가 쓴 한국 편의 마지막 문장이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 것은 《동양문화사》의 심층 내러티브 구조상 필연적인 결과였다. “한국의 경제는 훨씬 뒤떨어졌었고, 정치적 능률은 더 많이 침식되어 있었고, 사회는 더 정체되어 있었으며, 더구나 지적 및 문화적 창조성은 더욱 잠자고 있었다. ……한국사에 있어서 극히 쓰라린 1세기의 막이 이렇게 열리게 되는 것이었다.” (252~255쪽.)


교정.

229쪽 19줄 : 전전 (식민주의)과 -> 전전(식민주의)과

238쪽 13줄 : 라는  심포지엄의 -> 라는 심포지엄의 (띄어쓰기 2칸)

254쪽 20줄 : 랴이샤워 한국 편의 -> 랴이샤워가 쓴 한국 편의

254쪽 21줄 : 《동양문화사》 심층 -> 《동양문화사》의 심층

259쪽 사진 캡션 : 도조 히데東條英機 ->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338쪽 8줄 : 빙적이아憑敵利我 (‘利'의 글꼴 다름)

342쪽 16줄 : 인류는 관념이고 (‘인’이 볼드 처리 안 됨)

367쪽 6줄 : 수행적인 performative -> 수행적인perform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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