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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투어 (설혜심, 웅진지식하우스, 201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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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투어 (설혜심, 웅진지식하우스, 2013.)

Dog君 2019. 7. 16. 18:30

 

1-1.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비행기 안, 내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싱숭생숭했다.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는 것을 끔찍하게도 싫어해서 이 나이를 먹도록 해외에서 열흘 이상 머물러 본 적도 없는 내가, 난생 가 본 적도 없는 나라에서 8개월도 넘게 머무를 계획으로 떠나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겠다고 본 영화는 공교롭게도 ‘퍼스트맨’이었다. 최초로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의 개인사를 다룬 영화인데, 달로 떠나는 닐 암스트롱의 마음이나 외국으로 떠나는 나의 마음이나 매한가지 같아서 영화를 보고 나서 도리어 마음이 더 울적해지고 말았다. (유튜버 발없는새가 매우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이 영화는 달착륙으로 거대하게 도약한 인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작게 한 걸음을 내딛은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꼭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압도적인 화면과 사운드 외에도 이 영화를 봐야할 이유는 많으니까.)

 

 

1-2. 파견근무가 결정된 후, 외국생활하니 좋겠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하지만 글쎄, 나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전에 블로그에 쓰기도 했다만은, 낯선 환경에 노출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나에게 낯선 외국생활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격이 그 모양이니 지금 사는 것도 발전 없이 이모양이꼴인가 싶기도 하지만, 생겨먹은게 이런걸 어쩌겠냐 생각하며 짐짓 포기하며 산다.

 

1-3. 그렇게 우울한 마음으로 암스테르담 스키폴공항에 내린 후, 눈물로 베갯잎을 적시는 나날이 계속... 된 것만은 아니고, 그래도 살아야겠기에 그럭저럭 잘 버티며 살고 있다. 타지에서 겪는 시행착오는 여전하고 사소한 일상 하나하나가 만만찮은 퀘스트인 것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적응을 하고는 있고 그러면서 조금씩 배우는 것도 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오랜 시간 관찰하고 지켜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수확이 아닌가 싶다. 낯설고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 진짜 내 모습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도 장점이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여행과 연애만큼 좋은 것도 없다고 하지.)

 

2-1. 지금 내가 꼭 그러하듯이, 여행에는 단지 내가 사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거나 휴양지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여행을 낯선 환경에서 낯선 경험을 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지혜을 배우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여행에세이가 시중에 널려 있을리가 없지.) 젊은이에게 배낭여행이나 도보여행 같은 것을 권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닌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어학연수나 교환학생 같은 것도 넓은 의미에서의 여행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2-2. 설혜심의 그랜드 투어에 따르면 이것은 단지 지금만의 일이 아니다. 대략 17세기 중후반부터 19세기까지 유럽, 그 중에서도 영국 상류층 자제를 중심으로 견문과 지식을 넓히는 여행이 크게 유행했다고 하는데, 그것을 통칭하는 이름이 ‘그랜드 투어’이다. 물론 여행의 개념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그 전의 여행이 매우 특정한 직업군과 목적으로 한정되었던 것에 반해 이 시기의 그랜드 투어는 엘리트 계층 전반에 넓게 퍼져 있었고, 그 목적도 견문과 지식의 획득이라는 개인적인 수준에 맞춰져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고대 사회에서 여행은 대개 특별한 사명이나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군인, 성직자, 상인과 같은 특별한 직업군에게만 여행 허가가 주어졌다. 물론 소수의 여유 있는 자유인은 훌쩍 여행을 떠날 수가 있었지만, 자신의 문화권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관습에 따라 이루어진 여행이었다. 그런데 로마 시대에 들어서면서 여행이 폭발적으로 유행한 시기가 있었다. 흔히 팍스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고 불리던 1~2세기로 제국 팽창을 위한 전쟁이 줄어들고 평화가 지속되면서 로마제국이 건설한 훌륭한 교통망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23~24쪽.)

 

(…) 하지만 한 번 생겨난 관습을 뿌리 뽑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이미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여행이 사라질 수는 없었다. 다만 새로운 사회 환경 속에서 그에 맞는 형태와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순례다.

  순례란 본래 “교회에 관련되거나 그에 준하는 사명, 혹은 좀 더 명확하게는 교회의 허가 하에 수행되는 여행이나 사명”을 뜻한다. 로마제국 말기부터 사람들이 순례를 떠나기 시작하면서 크고 작은 성소들이 순례지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순례는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의 속죄를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졌는데, 어디로 순례를 다녀왔는지에 따라 면죄의 등급이 매겨졌다. 최고 등급에는 예루살렘, 그다음 등급에는 로마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가 위치했다. 이 세 곳은 그리스도교의 3대 성지였다. (26쪽.)

 

  중세 말이 되자 순례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여행이 생겨났다. 자유의지를 표출하는 이 자발적인 여행은 종종 ‘모험’의 성격을 띤다. (…)

(…) 14세기부터 호기심은 도덕적인 오명을 벗기 시작했고 15세기가 되면 인간정신의 우월한 특성으로 여겨지기에 이른다. 나아가 여행의 합법적인 동기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탐험의 시대’나 ‘발견의 시대’에 딱 맞는 개념으로 떠오르게 된다. (29~30쪽.)

 

  해상권을 장악하고 식민지를 확대해가면서 상업과 투자 잉여가 커지고 영국 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게 된다. (…)

  또한 18세기 영국에서는 흔히 ‘소비혁명consumer revolution’이라고 불리는 움직임이 목도되었다. 이는 인쇄와 출판이 발달하면서 일종의 정보혁명이 일어나 소비를 주도한 현상을 말한다. 세계 최초로 나타난 정기간행물들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온갖 정보를 취급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여행이 한몫을 차지했다. 엄청나게 많은 여행 관련 출판물들이 나타났고, 건강과 사교를 위한 온천 여행이나 교육을 위한 여행이 일종의 유행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그랜드 투어는 영국의 엘리트가 꼭 밟아야 할 교육의 최종 단계로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35~36쪽.)

 

  그랜드 투어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로마였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영향으로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당시 유럽에서 로마는 여행자들이 보아야 할 모든 것을 함축하는 곳으로 표상되었다. (…) (123쪽.)

 

4. 그랜드 투어의 기본적인 목적은 교육이었다. 해외에 나가서 견문을 넓히고, 더 많은 학문을 배우고,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당시에도 상류층으로서 꼭 필요한 덕목이었던 모양이다. 어린 애를 굳이 조기유학을 보내고, 어학연수를 가고, 교환학생을 가고, 하는 지금 한국의 그것과 꼭 같은 이치다. 사람 사는게 17세기라고 다르고, 영국이라고 다르고, 그런거 아니니까.

 

  앞에서 본 것처럼 그랜드 투어의 선구자는 시드니로 알려져 있지만 17세기 후반이 되기까지 시드니처럼 여행할 수 있는 영국인은 많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던 영국 정부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나 이탈리아로 여행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통해 가톨릭의 영향을 받게 되어 영혼이 더럽혀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명분이었다. 종교적 차이가 전쟁으로 이어지곤 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종교재판에 회부되거나 정치적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영국 정부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가톨릭 국가로의 여행을 반역 행위로 규정했다. 특히 생토메르, 랭스, 두에와 같은 곳으로의 여행이나 유학은 심각한 의심에 몰릴 수 있었다. 이곳들에는 유명한 제수이트파 학교나 베네딕트파 대학이 있어서 로마 가톨릭에 물들 위험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이 되면서 유럽을 휩쓸었던 종교 갈등이 상당 부분 누그러졌다. 이성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새로운 과학이 등장하면서 마녀사냥과 같은 광포한 종교적 박해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전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가톨릭 국가로 여행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도피하는 사례들이 주를 이루었다면 이제는 교육을 전면에 내세우고 당당하게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33~34쪽.)

 

(…) 하지만 학생을 집 안에서만 교육시키기에는 당시의 영국 사회가 너무 큰 변화를 겪고 있었고, 학생들이 당장 배워야 할 것은 너무 많았다. 여기서 제3의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해외여행과 여행 중 아카데미 수학이었다.

  이미 르네상스 시대부터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를 필두로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는 아카데미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18세기는 ‘아카데미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브뤼셀, 마드리드, 베네치아, 런던 등 유럽 곳곳에서 아카데미가 유행했다. 이런 학교들은 당시에는 실용적인 학문으로 분류되었던 역사, 철학, 시, 수사학 등의 인문학 교과목을 가르쳤다. 인문학 이외에도 승마, 프랑스어, 춤 등 대학이 절대 가르치지 못했던 분야의 수업들이 제공되었다. (39쪽.)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생경하게 보였을지라도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은 분명히 상류계급의 표지였다. 게이야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행에서 습득한 외국어를 사용하라고 권했다.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이 젠틀맨의 기본 소양이자 정치가나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의 필수 덕목이라면서 말이다. (170쪽.)

 

  메디치 가문이 예술품을 수집하고 트리부나를 만들었던 이유는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품 수집이 특별히 존경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세속적인 권력뿐만 아니라 교양과 미적 감각까지 지니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또한 그랜드 투어를 떠난 젊은이들이 배우고 싶어 하고, 고향으로 가져가고 싶어 하는 능력이었다.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은 비르투오소(virtuoso혹은 버튜오소)라고 불리게 된다. 미덕virtue에서 유래한 이 말은 예술이나 도덕에 상당히 특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뜻하며, 나중에는 특별한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확대되어 쓰였다.

  고대부터 아름다운 그림이나 조각에 대한 숭배나 아름다움에 대한 논설은 늘 존재해왔다. 하지만 유럽 문화에서 회화, 조각과 더불어 연극, 음악, 문학 등이 ‘예술’이라는 집합적인 정체성을 부여받은 것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의 일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고급 문화highculture’는 18세기에 발명된 것이나 마찬가지다.8 여기서 고급과 저급을 구별하는 인간의 판단 능력을 두고 철학자들의 진지한 논의가 펼쳐졌다. (…) (186~188쪽.)

 

  이제 예술에 대한 취향, 즉 감식안은 새로운 시대에 필수 불가결한 사회적 지표로 세련된 취향이야말로 지배계급의 기준이 되었다. 영국의 조지프 애디슨이 말하는 ‘사교적인 사람sociableman’이나 볼테르의 ‘사교계인LeMondain’은 예술, 문학, 음악에 대해 말할 수 있고, 기분 좋은 대화를 통해 자신의 세련됨을 뽐낼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통용되었다. (…) (191쪽.)

 

(…) 그랜드 투어 옹호자 가운데 원조라 할 수 있는 리처드 러셀스가 해외 유학의 효과로 꼽은 내용들을 한 번 정리해보자.

 - 책에서 읽고 배우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게 많이 배울 수 있다.

 -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고생을 해봐야 성장하게 된다.

 - 우물 안에서 가장 잘난 줄 알던 사람은 더 넓은 땅에서 수많은 훌륭한 사람을 만나봐야 훨씬 겸손해지고, 아랫사람들을 배려할 수 있게 된다.

 - 여행을 해야만 많은 언어를 배울 수 있고, 그래야만 다른 나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

 - 인류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결국은 모두 친인척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무엇을 수입해야 하고, 어떤 실험을 해야 하며, 어떤 종류의 지식을 증진시켜야 하는지를 알게 되어 국익에 기여할 수 있다.

 - 고국에서 들을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게 하므로, 현명한 사람은 더 현명해지고, 선악을 구별하게 된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들은 평생 자신감을 주고, 늘그막에 추억거리가 된다.

 - 다녀와야 사회를 비추는 태양이 될 수 있다.

 - 유명한 이들이 이미 다녀왔기 때문이다. (315~316쪽.)

 

5. 물론 그랜드 투어가 언제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꼭 그러하듯이 어떤 사람에게는 조기유학과 여행이 방랑과 방탕의 지름길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돈 많고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들에 달라붙어서 한몫 챙기는 사기꾼들도 많았고.

 

  중개상들은 언제든지 사기 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마에 머물던 괴테는 어느 모임에서 한 백작이 위조 보석을 구입한 일로 화제의 중심이 되는 광경을 보았다. 그는 “그처럼 고결하고 부유한 예술 애호가가 항상 믿을 만한 사람하고만 거래할 수 없는” 세태에 분개했다. 실제로 당시 유행하던 여행기에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기도 전에 옛것 연구가며 미술품 중개상들이 물밀 듯 방문하던 광경이 자주 묘사되어 있다. 중개상들은 초심자들이 모조품을 진품으로 믿게 할 만큼 현란한 말재주를 갖고 있었고 많은 귀족들은 그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그들은 엄청난 값을 받고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티치아노의 모조품을 팔았다. (207~208쪽.)

 

  당시 교육서나 여행 지침서에서 한목소리로 강조하는 중요한 내용은 학생이 질 나쁜 친구를 멀리하게 하라는 것이다. 로크는 “어울리는 무리에 대해 더 논하기보다는 당장이라도 펜을 집어던지고 싶은 심정”이라고까지 말했다. 집에 가두어두고 교육시키자니 편협한 세계관에 갇힐 위험이 있고, 해외로 보내자니 “어딜 가나 성행하는 무례함과 악덕에 물드는 것을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하는 딜레마 때문이었다. 따라서 좋은 친구를 사귀게 하는 것, 즉 학생에게 나쁜 친구들이 가져다줄 악영향을 미리 경고하고, 어울릴 집단을 선별하고, 친구들과의 만남을 끊임없이 통제하는 것이 동행 교사의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234쪽.)

 

  무분별한 육체적 탐닉은 대부분 성병이라는 치명적인 대가를 요구했다. 보즈웰은 로마에서 성병에 걸렸고, 베네치아에서 또 걸렸다. 그는 루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마에서 격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베네치아에서 새로운 상처를 입었다”고 에둘러 보고하며 주접을 떨었다.47 사실 성병은 18세기 영국 귀족 사회에서 무척이나 심각한 문제였다. 역사가들은 이 당시 성병이 인구 문제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했다는 데 동의한다. 18세기 상류층 가운데 아예 후손을 보지 못해 완전히 가문이 몰락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를 초래한 원인의 하나로 그랜드 투어를 꼽지 않을 수 없다. (314~315쪽.)

 

6-1. 근 200년에 걸친 그랜드 투어의 대유행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 저자에 따르면 그랜드 투어가 유럽에 남긴 것은 두 가지의 정반대 감정이었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유럽 각국을 여행하면서 나와는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진 사회공동체를 경험했고 이것은 국가 정체성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말하는 ‘국가 정체성’이란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감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속하지 않은 공동체에 대핸 스테레오타입화된 감각이기도 하다.

 

  1970년대 우리나라 여행자들이 해외에서 우리나라 물건을 만나면 무척이나 반가워했던 것처럼 18세기 영국 여행자들은 외국에서 ‘런던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코담배통을 보거나 ‘메이드 인 잉글랜드made in England’라는 상표가 붙은 물건을 보면 무척 기뻐하며 직접 사곤 했다. 외국까지 와서 자기 나라 물건을 사는 것은 애국심과 자긍심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나중에 의회에 진출하고 고위 공직자가 된 헨리 파머슨Henry, 2nd Viscount Palmerson, 1739~1802은 1764년 그랜드 투어를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여행이 가져다주는 하나의 장점은 다른 나라를 보고 그곳 사람들을 만나서 비교해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우리나라의 우수한 가치에 대해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259~260쪽.)

 

  국가별 스테레오타입은 18세기 초반에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이때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근대적 형태의 국가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국가가 만들어지면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자기 국민이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한 국민의 특성, 즉 국민적 정체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내용이 많지만 당시 유럽에서 각 나라의 국민적 특성이라는 것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진 주제여서 18세기 학자들은 국가별 ‘관습과 매너’를 진지하게 탐구했다. 계몽사상가들도 마찬가지여서 루소는 영국인은 오만하고, 프랑스인은 허영심이 많다는 말을 남겼다. (…) (275~276쪽.)

 

  나라별로 관습이 다르다는 점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점차 외국 문화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상대주의적인 태도가 도덕적 우월성의 지표가 되어갔다. 실제로 대륙에서는 종종 집에 들어가는 방식조차 달랐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집에 들어갈 때 주인이 손님보다 먼저 들어가지만 프랑스에서는 이것이 엄청나게 무례해 보일 수 있었다. 식탁의 상석에 여주인이 앉는 영국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상석을 가장 귀한 손님에게 내주었다. 심지어 걷는 속도와 보폭도 나라마다 달랐다. 이런 관습의 차이를 알고 현지의 관행에 맞출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교양인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외국인들 사이에 영국의 외국인 혐오증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증언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1791년 영국을 다시 찾은 독일의 여행가이자 자연학자 게오르크 포르스터Georg Forster, 1754~1794는 불과 십수 년 만에 이방인을 대하는 영국 사람들의 태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서 놀랐다고 말했다. 30년 동안 영국 사회를 면밀하게 관찰해온 어떤 위그노도 1787년에는 영국인의 태도가 훨씬 개방되었음이 틀림없다고 확신하는 말을 남겼다. (281쪽.)

 

  프랑스에서 꼭 보아야 하는 곳은 물론 파리였다. 여행자들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새 옷을 사 입었다. 그것은 일종의 필수적인 절차였다. 토비아스 스몰렛은 “영국인이 파리에 오면 완벽한 변신을 하기 전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프랑스식으로 버클도 바꿔야 했고, 러플의 모양도 달라져야 했다. (…) (97쪽.)

 

  여행자들은 프랑스 궁정에서 ‘페인트’라고 알려진 백연을 얼굴과 목과 가슴에 바른 귀부인들을 만났다. 백연을 너무 두껍게 발라 시간이 지나면 갈라지고 회색으로 변하기도 했다. 백연 중독으로 치아를 잃거나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가짜 사마귀, 즉 무쉬mouche를 붙이는 것도 유행했다. 이 애교점은 별이나 초승달, 심지어 사륜마차까지 다양한 모양을 띠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애교점을 너무 많이 붙여서 얼굴이 파리 떼에 뒤덮인 것처럼 보였을 정도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애교점을 붙였다. 이것을 어디에 붙이느냐에 따라 그날의 기분이나 개성을 드러낼 수 있었다. 턱에 붙이면 얌전하다는 뜻이었고 파렴치하거나 뻔뻔한 인상을 주고자 할 때는 코에 붙였으며 이마 한가운데 붙인 점은 위풍당당함을 나타냈다. 하트 모양을 오른쪽 뺨에 붙이면 기혼자라는 뜻이었고, 왼쪽 뺨에 붙이면 약혼 상태라는 뜻이었다. 심지어 애교점은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영국 궁정에서 왼쪽 뺨에 붙이면 휘그당, 오른쪽 뺨에 붙이면 토리당을 나타냈다. (146쪽.)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많은 귀족 가문이 절멸한 네덜란드에서는 화려한 사교 생활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남아 있는 가문들이 초대한다 할지라도 어설프게 프랑스 귀족을 흉내내곤 해서 촌스럽고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오히려 여행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평범한 네덜란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누구하고나 잘 어울리고 쾌활하며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이른 아침 여행자가 가장 먼저 보는 광경은 앞코가 뾰족한 나막신을 신은 여자들이 돌로 포장된 길을 열심히 닦는 모습이었다. 낮에는 거리 음악가의 연주를 들으며 줄타기 곡예나 인형극도 볼 수 있었다. (137쪽.)

 

6-2. 그런데 정반대로, 국가를 초월한 연대의식 같은 것도 그랜드 투어의 산물이었다. 각 사회별로 일어나고 있던 정치적, 철학적 사고들이 그랜드 투어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공유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유럽’이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상상하는 기본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18세기는 클럽의 시대였다. 영국에서 클럽이 생겨난 데는 커피하우스의 역할이 컸다. 커피하우스는 떠들썩한 술집이나 의사당 혹은 증권거래소와는 또 다른 공간이었다. 특정한 커피하우스에 특정 정치이념 혹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서 얼마 후 회원제로 운영되기 시작한다. 20세기 학자들에게 ‘공론장Public Sphere’이라고 불리는 이 공간은 “계몽운동의 공화국들”이었다. 신사들은 가정에서 벗어나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정치가에 대한 뒷공론이나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우정을 쌓아갔다. (172~173쪽.)

 

  사회 전반에서 ‘유럽’이라는 어휘가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까지 유럽을 하나의 단위로 삼은 인쇄물이 갑자기 많이 나타나기도 했다. <유럽의 소문Europaische Fama>이나 <유럽의 지식인들L’Europe Savante>, <유럽의 관청Europaische Staats-cantzley>과 같은 연속 간행물이 그것이다. 예술적 차원에서도 활발한 교류가 일어나서 유럽이 마치 하나의 무대처럼 생각되었을 정도였다. 프리드리히 2세의 음악 교사였던 요한 요아힘 크반츠Johann Joachim Quantz, 1697~1773는 1752년 이상적인 음악 양식은 모든 민족의 최상의 음악적 특징을 혼합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1785년 무렵에는 이런 혼합 양식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채택되어 “모든 유럽에는 단 하나의 음악이 있다”라는 비평이 나올 정도였다.

  이렇듯 범유럽주의적 세계관이 유행할 수 있었던 데는 계몽주의가 한몫했다. 유럽에 이성의 힘을 앞세운 새로운 권력체들이 등장하고 국가들이 저마다 존립을 위해 서로를 비교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던 한편, 일부 계몽주의자들은 통합적인 유럽에 대한 열망과 구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결국 통합적인 유럽에 대한 관심, 즉 코스모폴리타니즘이 훗날 유럽연합의 탄생에 영감을 주게 된 것이다. 유럽은 이제 거대한 국가들의 연합체로 여겨졌고, 거기에는 국경을 초월한 시민주권이나 인류애, 힘의 균형과 같은 개념들이 자리 잡았다. (282쪽.)

 

  이렇게 변경 지역을 특징 지어가는 과정은 ‘이방 효과foreign effect’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 거꾸로 통합적 공동체로서 유럽만의 특성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 즉 비유럽적인 곳에 대한 묘사를 통해 ‘유럽성Europeaness’이 무엇인지를 찾아냈던 것이다. 클라크의 여행은 더 넓은 세상을 보며 보편성을 찾아내기보다는 아직은 차이점에 더 주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시대 유럽의 범세계주의, 즉 코스모폴리타니즘은 유럽 중심주의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유럽이 세계 보편이 되리라는 기대는 역설적이게도 유럽 대륙이 특별하다는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295~296쪽.)

 

  그랜드 투어의 효과는 비단 영국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대륙 곳곳을 누비던 엘리트들이 몸에 익히게 된 국제적 문화는 유럽의 귀족 계급에게 동질성을 가져다주었고, 유럽의 상류사회는 국제적 차원의 취향, 지식, 교양, 교육 등을 공유했다. 또한 그 과정은 사상의 전파를 용이하게 했고 계몽주의를 범유럽적인 현상으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319쪽.)

 

6-3. 우리는 다른 유럽 국가와는 구분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가정체성’과 결국 우리 다 같은 유럽 사람 아이가! 하는 ‘초국가정체성’이 동시에 태어났다고 하니 살짝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 같다만, 그래도 외국 나와서 맨날 눈 파랗고 머리 노란 사람들만 보던 와중에 아시안 마트에서 그나마 중국말이라도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혹은 그 마트에서 일본산 인스턴트 미소팩을 사서 석달 내내 먹었던 내 입맛 같은 것을 생각하면, 한국인으로서의 국가정체성과 아시아인으로서의 초국가정체성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또 아닌 것 같다는 두루뭉술하고 니맛도내맛도 아닌 결론을 내려본다.

 

7. 그 외에 재미있었던 부분, 밑줄 그은 부분은 아래와 같다.

 

(…) 실제로 영국 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기후를 몹시 싫어해서 삶의 불만족을 날씨 탓으로 돌리는 것이 국민성이 되었을 정도다. 어느 귀부인은 파리에 간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잉글랜드의 모든 어리석음은 분명히 이 험악한 날씨가 가져오는 찬 기운 때문이야. 파리의 청명한 날씨와 다른 많은 편리함을 누릴 네가 부러워”라고 썼다. (43~44쪽.)

 

  시간이 흐르면서 여행 비용이 치솟기 시작했다. 17세기 내전의 와중에 그랜드 투어를 떠난 유명한 일기작가 존 에벌린John Evelyn, 1620~1706은 매년 300파운드(2011년 기준으로 약 4만 파운드) 정도를 비용으로 지출했다. 하지만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젊은 귀족의 경우 아버지가 매년 3000~4000파운드를 부담해야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2011년 기준으로 약 40만 파운드 안팎이다. (…) (63쪽.)

 

(…) 다음과 같은 ‘필수 질문’들은 당시 무엇을 중심으로 해외 정세를 파악했는가를 엿보게 해준다.

 - 성직자의 급료는 얼마이며, 어떤 재원으로 충당되는가?

 - 어떤 군사 훈련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 장례 절차는 어떠한가?

 - 이혼 성립에 필요한 요소들은 무엇인가?

 - 상하수도 설비는 어떠한가?

 - 대학에서 체벌은 어디까지 이루어지는가?

 - 빈민을 교화시키기 위한 강제노역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음은 물론이다. (76~77쪽.)

 

  아직 사진기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여행자들은 자신이 본 풍광을 화폭에 담기를 원했다. 그것은 기록이자 추억으로서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동질감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자랑스럽게 설명을 늘어놓을 수 있는 대화의 물꼬가 될 것이었다. 당시 여행자들은 상상의 풍경화인 카프리치오carpriccio를 좋아했다. 이런 그림은 실제와 상상의 경계에 있는 것으로, 개선문, 콜로세움, 부러진 원주, 부조 등을 한 장의 그림에 모아놓은 것이다. 여러 장의 그림을 사는 것보다 한 장의 그림으로 주요한 유적 모두를 볼 수 있기에 경제적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도시 경관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린 풍경화인 베두타veduta도 발달했다. 베두타 양식으로 그린 그림 중에는 특히 이국적인 풍광이 펼쳐지는 베네치아 그림이 큰 인기를 누렸다. (…) (199~200쪽.)

 

  19세기 중엽 그랜드 투어의 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그 후로는 관광tourism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관광은 “그랜드 투어의 빠르고 저렴한 모방물일 뿐”이라는 야박한 평가를 받곤 한다. 폴 퍼셀Paul Fussell 같은 학자는 르네상스 시기에 탐험이 있었고 부르주아 시대에 여행이 있었다면 관광은 프롤레타리아의 시대에 속한다면서 여행을 여러 뭉치로 구별 지으려고 했다. (339쪽.)

 

  나폴레옹 전쟁 직후 여행자의 수가 급증하고, 비교적 다양한 사람들이 여행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때의 여행은 중상류층에 제한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1815년을 매스 투어리즘의 시발점으로 보는 이유는 ‘대중mass’에 대한 명확한 개념 규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중은 ‘지위, 계급, 직업, 학력, 재산 등의 사회적 속성을 초월한 불특정 다수로 이루어진 집합체’로, 많은 인원의 집합체라는 수적 개념도 있지만 더 중요하게는 탈계급적 속성을 강조하는 용어다. 따라서 진정한 매스 투어리즘의 시작점은 여행자 수의 폭발적 증가와 더불어 계층적 구분이 획기적으로 폐지되는 19세기 중엽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 새로운 조류는 교통수단의 혁명적인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816년 최초의 증기선이 도버와 칼레 해협을 건넜고, 1825년 영국에서 최초의 철도가 부설된 이래 곳곳으로 철도망이 퍼져가기 시작했다. 교통 인프라의 발전은 근대적 관광이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했으며 노동생산성의 급격한 향상, 도시화, 중산층의 빠른 성장, 교육 수준의 향상, 자유 시간의 증대와 같은 변화가 여행 수요를 크게 증가시켰다. (341~342쪽.)

 

교정.

532쪽 : 심지어발전의 -> 심지어 발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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