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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 (이영석, 아카넷, 20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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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 (이영석, 아카넷, 2019.)

Dog君 2019. 9. 24. 04:52


1-1. 제목이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이니까, 일단 내 기억 속 ‘제국’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으로 글을 시작해야겠다. ‘제국’이라고 했을 때는... 음... 로마제국이나 몽골제국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언덕의 도시에서 시작해 몇 차례의 전쟁을 거치며 지중해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크기로 성장한 로마제국... 음... (나는 한 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한참 빠졌었다. 1판 1쇄를 구한답시고 온 시내를 다 돌아다녔던 기억도 난다. 지금 생각하면 흑역사지만.) 몽골초원의 작은 평범한 유목민족이 인류사상 최대의 포텐을 터뜨리며 유라시아 전체를 호령했던 몽골제국... 음... (몽골제국에 대해서는 예전에 잭 웨더포드의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를 읽었다.) 로마제국과 몽골제국은 반복적인 군사행위를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데, 이런 특성은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제국이 대체로 공유한다.


1-2. 그런데 백조 중에도 까만 놈이 있고 까마귀 중에도 하얀 놈이 있는 것처럼, 여기에도 예외가 있다. 예외라고 해서 어디 구석탱이 찌끄래기 어디쯤에 있는게 아니고, 19세기 이후 세계 최강이었던 영英제국이 그랬다;; 그러면 ‘예외’치고는 너무 큰 ‘예외’ 아닌가 싶긴 한데, 뭐 암튼... (왜 ‘대영大英제국'이 아니고 ‘영英제국’이라고 하는지는 저자의 페이스북 담벼락을 참조하시고.) 우리 각자의 상식을 총동원해봐도, 영제국의 확장은 로마제국이나 몽골제국의 그것과 분명히 다르다. 의도된 군사행위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영석의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에 따르면 영제국의 확장은 당장의 상업적 필요에 의해 무역망을 확대하는 것이 먼저였다. 현지에서 군사행위를 벌이는 것은 무역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한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그 결과물 역시 확장된 ‘영토’가 아니라, 점과 선으로 연결된 ‘네트워크’였다.


(…) 영제국의 형성은 처음부터 정치적 기획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경제적 현상이었다. 특히 식민지 확대는 영국 국내와 유럽 대륙에서 소비시장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처음부터 영국 정부가 나서서 제국의 건설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소비시장의 변화에 따라 대양으로 나아간 영국인들은 에스파냐·포르투갈·프랑스와 같은 초기 제국의 쓰레기더미를 뒤지던 해적이었다. 이어서 상인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들은 설탕 수요 때문에 카리브해의 서인도제도로, 담배를 찾아 북아메리카로, 향료와 차와 면직물을 구하려고 아시아에 진출했다. (42쪽.)


  ‘제국’이란 “세계적 규모에서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초국가적 조직”이다. 역사적으로 제국은 주로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서 자국의 경계를 넘어 인접한 다른 지역들을 병합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영제국은 기존의 제국과 매우 달랐다. 식민지는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효율적인 통치가 쉽지 않았다. (…)

  일찍이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이렇게 말했다. “영제국은 지금까지 제국인 적이 없었다. 다만 한 제국을 기획(project)한 것일 뿐이다. 금광 자체가 아니라 금광의 기획인 것이다.” 여기서 ‘기획’이라는 표현은 제국이 구체적인 실체로 등장하지 않았으며, 다만 모호한 의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영제국의 팽창 문제는 오랫동안 역사가들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

  다른 한편, 근래 영제국을 중심과 주변의 수직적 관계라기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수평적 연결망(네트워크)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제국을 네트워크로 이해할 경우 19세기 이후 전개된 세계화 현상은 영제국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 (65~66쪽.)


1-3. 몽골제국과 로마제국을 ‘면面의 제국’이라고 한다면, 영제국은 ‘점點과 선線의 제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점과 선의 무한한 집합이 면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하겠으나, 문돌이에게 엄격한 기하학 이야기는 여기서 내가 뭘 알아야 말이지... 스탑 플리즈.) 이러한 영제국의 특성을 정리하고 나니, 어쩐 일인지 지금 미국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세계 각지의 전략거점에 흩뿌려둔 군사기지를 통해 세계 패권을 구축하고 유지했던 미국의 모습은 기실 영제국에 의해 1-2세기 전에 이미 선취되었던 것이 아닐까. (미국의 이러한 특성에 대해 브루스 커밍스는 Dominion from Sea to Sea Pacific Ascendancy and American Power에서 'an archipelago of empire'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2011년에 서해문집에서 『미국 패권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나온 번역본에서는 이 표현을 ‘군도 제국’으로 번역했다.) 


1-4. 물론 영제국과 미국은 다른 점도 굉장히 많기 때문에 양자를 단순하게 동등비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영제국의 역사에서 지금 세계 패권의 모습을 일부 찾을 수 있다면, 지금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영제국의 역사를 공부할 이유는 일단 충분하다고 하겠다. 좀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그 영제국이 어떤 과정을 통해 몰락하고 해체되었는지를 공부한다는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도래할 미국의 독점적 세계패권이 무너지는 그 어느 순간을 비장하게 예감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그 부분에 독자를 끌어당기는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의 첫 번째 지남철이 숨어있다. 


2-1. 자, 여기까지 서론. (나란 남자, 늘 서론이 길지...) 영제국은 해체 과정 역시 그 이전의 다른 제국과 달랐다.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끝에 외세(혹은 분노한 민중반란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고 황제는 자살하고 패잔병들이 변방에서 부흥운동을 벌이고... 뭐 그런 드라마틱한 사건이 영제국의 해체 과정에는 없었다. 걸주 뺨치는 폭군이 등장했던 것도 아니고, 제국의 수도가 함락된 적도 없다. 그저 영제국은 2차대전 이후 탈식민 분위기에 맞춰 스무드하고 자연스럽게 해체되었고 영국 사회 역시 그 과정에 부드럽게 탈脫제국의 과정에 적응할 수 있었다.


  영제국의 지속과 해체의 과정을 밝히는 작업은 영국 현대사는 물론, 20세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두 세기에 걸친 영제국의 팽창과 급속한 해체에 관해 영국 학계에서 강조하는 통념이 있다.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제국의 팽창은 정부의 뚜렷한 의도나 계획보다는 우연적인 선택과 임기응변에 따라 이루어졌고, 해체도 역사의 추세를 간파한 정치인과 일반 시민의 합의를 통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그만큼 정치 사회적 혼란이나 진통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12~13쪽.)


<메흐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by Fausto Zonaro. 영제국이 적어도 이런 일은 안 겪었다는 거다.


2-2. ...는 것은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일 뿐,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영제국은 스무드하게 해체되기는 개뿔... 양차대전부터 몇 차례에 걸쳐 왕복으로 싸다구를 맞아가면서 해체됐고, 그 때문에 영국인들 각각의 심성 역시 그러한 해체의 기억과 유산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이해해야 2019년 현재 브렉시트를 하니 마니 하면서 끝간데 없는 혼란의 끝을 보여주고 있는 작금의 영국도 이해할 수 있고.


  오랫동안 영국 정치인과 국민은 제국 해체가 커다란 혼란과 충격 없이 온건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을 높게 평가했다. 제국에서 영연방으로의 평화로운 이행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해체가 영국 사회에 가져다준 충격이 작았을까. 우선 1950~60년대 영국 정치인들에게 제국 문제는 항상 중요한 관심사이자 화두였다. 다음으로, 제국 해체와 함께 수만 명의 귀환자가 영국에 유입되면서 사회적 충격을 주었다. (…) 영국의 역사가들은 제국에서 영연방으로의 순조로운 이행을 강조할 뿐, 제국 해체가 가져온 사회 심리적 트라우마 또는 그것이 일상생활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제국 해체는 생생한 현실이었고, 그것이 사람들의 삶과 일상성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제국 해체 이후 한 세대 이상 영국의 역사가들은 제국 팽창과 해체의 전 과정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도덕적 부담과 해체의 충격이 오히려 시대 변화에 순조롭게 적응했다는 심리적 위안을 요구했던 것처럼 보인다. 199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제국사 연구는 역사가들이 이전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비로소 제국을 ‘역사화’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해 준다. 문제는 이 ‘제국의 역사화’가 이전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도덕적 부담감에서 벗어나 오히려 제국 지배를 시대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자국 중심주의적 연구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 (27~28쪽.)


  제국이 영국인들의 일상생활과 정신세계에 남긴 유산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지식인들은 도덕적 부담감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제국적 가치가 시대의 추세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영향을 받아 영국사 연구자들은 제국과 제국적 가치가 영국사의 지배적인 동력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매켄지는 이러한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고 본다. 제국은 지식인의 담론에서 밀려났지만, 일상생활에서 소비되는 제국적 상품(차·담배·코코아·비누·설탕 등)과 대중문화 속에 깃들어 있었다. 매켄지가 보기에, “제국의 유산은 영국인들의 정신세계의 보호무역시장” 안에서 계속 번창하고 증식해 온 것이다. 포클랜드 전쟁 당시 일반 대중의 열렬한 지지야말로 “제국적 세계관의 가치와 그에 대한 신념이 영국인의 의식 속에 침전되어 남아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33쪽.)


3-1.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에 따르면, 영제국이 최절정에 달했던 19세기부터 이미 제국 해체의 징후는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점과 선으로 이어진 그 거대한 네트워크는 물리적으로나 추상적으로나 19세기의 닝겐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것이었다. 먼저 물리적인 측면부터 살펴보자면, 일단 거대한 제국을 연결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영 마땅치 않았다. 로마제국이 지중해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가도를 건설했고 몽고제국이 유라시아를 지배하기 위해 역참을 설치했던 것처럼,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에 의존했다. 하지만 19세기의 해상교통이라는게 아직 전세계를 원활하게 연결할만할 수준은 못 되었다. 지중해랑 유라시아까지는 그나마 카바가 됐는데 전세계까지는 택도 없는 거다. 전세계를 거의 실시간으로 연결할 수 있는 기술이라면 하다못해 전신기술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이건 최소한 20세기 초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 슬프게도 19세기의 영제국은 아직 닝겐에게는 너무 버거운 크기였다. 영제국은 일단 거기서 한번 삐걱. (전신기술의 발달이 이데올로기의 전파와 국제정치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Erez Manela의 The Wilsonian Moment를 참조할만하다...만은, 읽다가 얼마 전에 기차간에서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건 언제쯤 정리할 수 있을지 기약이 읎구만.)


너무 컸단 말이죠...


3-2. 추상적인 면, 그러니까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영국의 정치가 혹은 지식인들은 영국이 건설한 식민지(그 중에서도 백인자치령국가)가 영국 영토의 확장이 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았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같은 백인자치령국가는 기본적으로는 영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건설한 것이 맞지만, 그들이 반드시 영국의 정체성만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들은 각자의 땅에서 각자의 정체성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거기에 미국 같이 새롭게 떠오르는 강대국의 영향까지 받다보니 이들 백인자치령국가의 정체성을 반드시 영국의 그것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는 상황이 됐다. 그 결과는 뭐겠냐, 영제국 내에서도 각각의 정체성들이 따로따로 목소리를 내는 상황이 됐다는 거다. 예컨대 양차 세계대전에서도 이들은 영제국 혹은 영연방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군사활동을 벌였지만, 실제 작전 수행 과정에서는 영국의 주도권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서 영제국의 응집력 역시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형이 생각보다 무능하더라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자치령과 식민지, 그리고 복잡한 정부기구를 하나로 묶는 연결망은 어떻게 강화·유지되었는가. ‘영국 세계 체제’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다윈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이를 설명한다. 우선 신문·전신·증기선·철도·상품·정보인력 이동 등 기술진보와 변화가 제국 연결망을 강화했고, 다음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찾기 어려운 이윤·상품·서비스·문화로 구성된 ‘영국적 세계’라는 독자적인 정체성이 형성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세계를 보호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자의식 또한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78쪽.)


  ‘대영국(Greater Britain)’이라는 말은 1860년대 이래 일부 지식인들이 거론하고 있다. 실리는 특히 백인 정착지를 영국이 아니라 단순한 속령으로 보는 견해를 비판한다. 대중의 인식에 영국(Great Britain)은 브리튼 군도로 각인되어 있다. 백인 정착지를 ‘영국의 확장’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는 없었다. 실리에 따르면, 이런 태도는 편협한 섬나라 근성(insularity)일 뿐이다. (…) 실리는 “영국식 이름이 지구상의 다른 나라에까지 널리 퍼지는 이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이야말로 ‘대영국’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대영국’의 개념은 영국인의 세계적 확산이라는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19세기 후반 대륙을 기반으로 팽창한 강대국들의 등장에 자극받아 나타난 것이었다. 제국(empire)이라는 표현을 비판 것은, 그 말이 함축한 전제적이고 군국적인 의미가 영국인의 자유에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리 이전에 제임스 프로드가 이미 새로운 강력한 국가들에 맞서 영국과 백인 자치령을 연결하는 “군살이 없고 좀 더 효율적이며 응집력이 강한” ‘대영국’의 이상을 설파했다. (…)

  새로운 경쟁국에 맞서 영국이 계속 번영을 누릴 수 있는가. 실리는 대륙 국가 미국의 발전을 주목한다. “여러 대앙에 의해 갈라져 있는 영국인은 근대 과학의 발명을 십분 활용해 미합중국과 같은 그런 국체(國體)를 고안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완전한 자유와 굳건한 지역 간 통합이 무한정의 영토 확장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사실 서구 정치사상사에서 공화국은 자유와, 그리고 제국은 전제와 동일시되었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마키아벨리·몽테스키외 등은 넓은 영토를 가진 제국에서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체가 나타나기 어렵다는 견해를 드러냈다. (…)

  그러나 미국이야말로 새로운 교통수단과 통신의 발전에 힘입어 합중국 형태로 시민적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 체제를 확립했다. 미국은 연방주의를 통해 광대한 대륙을 통합할 수 있었다. 미국의 성공은 2차 산업혁명 이후 기술발전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미국의 성공은 경쟁국의 등장으로 위기에 직면한 영국의 미래에 새로운 시사점을 던져준다. 실리가 보기에, 당대 영국의 선택은 두 가지로 제한되어 있다. 하나는 이들 대륙 국가와 마찬가지로 대영국의 길로 나가는 것, 다른 하나는 순전히 유럽 열강의 수준으로 위축되는 것이다. 유럽의 다른 국가와 달리 영국은 인구, 영토, 자원 면에서 대륙 국가 못지않은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들 요소를 통합하고 결합할 의지도, 정책도 갖지 않았다. 영국인 스스로 “단지 유럽 대륙 북서 해안에 떨어져 있는 섬에서 살아가는 국민”으로 자처했을 뿐이다. 브리튼과 백인 자치령을 통합하려는 기획과 일관성과 응집성이 없었다.

  실리는 브리튼섬과 백인 자치령을 결속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다가왔다고 단언한다. 지금까지 영국의 자치령과 속령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비효율적인 영토였다. (…) 그러나 증기선·전신·전기 등 새로운 기술혁신과 더불어 이제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네트워크가 이전부다 훨씬 더 강화될 수 있는 기술적 조건이 무르익었다. 영국과 해외 자치령이 정치적으로 밀접하게 통합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109~112쪽.)


  딜크, 실리, 프로드 등이 제창한 ‘대영국’론이 단순히 구호에 그쳤던 데에는 기술적인 문제가 영향을 미쳤다. 실리가 입론의 근거로 삼았던 기술발전이 그 자신의 예상과 달랐다. 그가 내세운 ‘거리의 소멸’은 한 세기 후에나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 영국 정체성의 문제 또한 너무 단순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는 영국인, 영국식 이름 및 지명의 세계적 확산과 영국성의 확장 가능성을 연결한다. 그러나 이민자들에게 태어난 나라의 문화와 삶의 방식에 대한 친숙성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스스로 형성해 나간 정체성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

  미국 문제도 고려의 대상이 된다. 실리에게 미합중국의 정치와 국가발전은 ‘대영국’론을 주창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실리 자신도 미국이 장래에 강력한 국가로 떠오르리라는 것을 예견했다. 그럼에도 다음 세기에 미국이 영국의 미래를 좌우하는 상수로 작용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 20세기에 들어와서 지정학적 요인은 영제국에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영국 세계 체제는 비유럽 세계를 속박하는 전 지구적 지배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정학적 조건의 성격이 변하면 그 영향을 받는 취약한 구조였다. 특히 미국의 대두에 직접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캐나다·뉴펀들랜드·오스트레일리아 등 자치령은 20세기에 들어와 정치와 문화는 물론, 경제통상과 방어 문제에 이르기까지 영국 못지않게 미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29~130쪽.)


  시민적 자유와 대의제 헌정, 이 두 키워드야말로 실제로 자치령 주민과 영국을 이어주는 정신적 유대감의 원천이었다. 친영국 감정은 그들이 인종적·문화적 전통을 공유한다는 인식뿐 아니라, 선진적이고 자랑스러운 정치제도를 공유한다는 자긍심에 기반을 두었다. 문제는 이러한 자긍심이 영국을 향하는 구심력보다는 영구고가 좀 더 대등하고 동등한 관계를 요구하는 원심력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쟁이 장기화하고 사상자 수가 급증하면서, 자치령 정부 사이에 영국 정부 및 군 지휘부의 작전을 불신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 당시 자치령 국가 정치가들 사이에 영국 정부의 독단을 비판하고 전쟁 수행 능력을 불신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

  전쟁기에 자치령 국가들은 인내 수준을 상회할 만큼 엄청난 인력을 동원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전쟁의 전 과정에서 영제국의 헌정 관계에 구심력과 원심력이 동시에 작용했다. 영국계 이민의 친영국적 정서와 문화적 유대감은 영국과 자치령 국가의 연대를 강화하는 구심력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장기화와 사상자의 급증에 직면하면서, 자치령 국가들은 참전과 희생의 대가로 제국의 새로운 헌정질서를 요구하고 독자적인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강화시켜 나갔다. 전쟁은 독립된 자치국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계기였던 것이다. 이는 영제국 네트워크의 원심력이라고 할 수 있다.

(…)

  1차 세계대전 직후 자치령 국가들은 이전 제국 질서의 변화를 요구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자치령은 전후에 파리강화회의나 국제연맹에도 독자적인 주권국가로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당시 영국 정부로서는 국제기구나 회의에 자치령 국가들의 참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자치령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특정한 ‘제국의 원리’를 고안했다. 영국왕이 “영연방 개별 국가들을 결속하는 초석”이라는 원리였다. 단일한 군주를 중심으로 상징적으로 맺어진 네트워크야말로 개별 국가들의 협조와 발전의 기초가 되는 셈이었다. (…) (154~160쪽.)


  영국적 문화와 전통을 이으면서도 영국과 평등한, 달리 말해 완전한 자치 및 외교권을 갖는 국가들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는 제국 안에서 영국을 포함한 백인 자치령 국가들이 동등하면서도 공동의 이해와 문제들에 대해 영국을 중심으로 협조하고 조정할 수 있다는 여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양차대전 사이에 이런 차원의 호응이 높은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를 분류한다면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뉴펀들랜드가 가장 높고, 공화정을 지향하는 아일랜드자유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낮은 편이었으며 캐나다는 그 중간에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영국적 전통에 집착이 강한 자치령 국가인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뉴펀들랜드는 내용이 무엇이든 헌정질서의 재수립에 독자적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남아공과 아일랜드공화국은 영연방에 소극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부정하는 태도를 나타내지도 않았다. 반면, 캐나다는 영제국이라는 국가 관계는 중시하면서도 영국과의 평등성과 독자적인 외교를 특히 강조했다. (217~218쪽.)


4-1. 물론 그것만으로 제국이 해체되지는 않는다. 아까 위에서는 영제국이 결정적인 군사적 패배 때문에 붕괴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영제국의 해체를 가속시킨, 혹은 그것을 확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아주 없는 것은 또 아니다. 이 책은 그 계기로 1차대전 이후의 금본위제 복귀와 수에즈 위기를 꼽는다.


여기서 TMI 하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금본위제부터 정리를 하자. 금본위제란, 통용되는 화폐의 가치를 금의 가치와 직접 연동시킨 제도이다. 금화를 생각하면 쉬운데, 금화의 가치는 곧 그 금화 자체를 구성하고 있는 금의 가치와 동일하다. 그냥 모양이 동전 모양일 뿐 그 가치는 그 금화에 포함된 금의 가치와 동일하다는 거다. 이런 것을 금본위제, 그 중에서도 '금화 금본위제도’라고 한다. 그런데 이 금화라는 게 여러모로 쫌 불편하다. 무겁기도 하고 부피도 크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짝 짱구를 굴렸고, 금화 대신에 종이(혹은 그만큼 가벼운 다른 재질)로 된 지폐를 발행하는 대신 이것을 은행에 가져가면 곧바로 그 금액만큼의 금으로 바꿔줄 수 있도록(이것을 ‘금태환’이라고 한다.) 하자는 사회적 약속을 하게 된다. 그러면 화폐의 휴대성이 크게 개선된다. (이것을 ‘금지금 본위제도’라고 한다.) 하지만 화폐량이 금 보유량보다 더 커질 수는 없다는 점은 여전하다. 금본위제를 채택하면 물가와 화폐량, 환율의 관리가 쉽고 외부의 경제적 충격에 대한 저항력이 높아진다는 등의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금본위제를 모든 국가가 다 실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금이 있어야지... 그래서 금 보유량이 부족한 국가는 화폐의 금태환을 보장할 수 있는 다른 국가의 화폐를 보유하는 식으로, 즉 금본위제를 실시하는 국가의 화폐에 자국 화폐의 가치를 연동시키는 방식으로 금본위제를 실시한다. (이것을 ‘금지금 본위제도’ 중에서도 ‘금환 본위제gold-exchange standard'라고 하고, 이 때 기준이 되는 화폐를 ‘본위화폐'라고 한다.) 이러한 금본위제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매우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게오르그 크나프가 『화폐국정설』에서 ‘법정화폐Fiatgeld’ 개념을 도입하면서 해체의 단초가 마련되었다. (게오르그 크나프와 역사학파 경제학의 견해를 받아들이게 되면 화폐의 등장에 대해서도 완전히 새로운 설명이 가능하다. 여기서 그걸 다 설명하기에는 내 지능이 너무 부족하므로, 여기서는 일단 그런 것도 있다는 정도만 밝히고 넘어간다. 금본위제에 대한 이상의 내 이해는 예전에 읽었던 차현진의 『숫자 없는 경제학』에 많이 기대고 있다.)


4-2. 먼저 1차대전 이후의 금본위제 복귀를 살펴보자. 내가 이쪽으로는 영 기초지식이 약해서 자신이 없긴 한데, 일단 내가 이해한대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통화수요 폭발로 금본위제가 포기되었던 1차대전이 끝난 후,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금본위제를 복구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때 어느 화폐를 본위화폐로 하느냐가 문제가 됐는데, 1차대전 내내 세계의 금을 쭉쭉 빨아댕긴 미국 달러화가 가장 유력한 본위화폐 후보가 됐다. 그런데 영국만 유독 자기 처지도 모르고 자국이 보유한 금을 토대로 금본위제로 복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통화량을 줄여보니, 아이고, 영국 파운드화의 통화량이 훨씬 더 많이 줄어들었던 모양이다. 즉, 파운드화의 화폐가치가 더 많이 올라가고 그에 따라 환율도 더 크게 변동했다는 거다. 이해를 돕기 위해 상황을 아주 간략화시켜서 가정해보자. 먼저 기존의 영국 파운드화와 프랑스 프랑화, 그리고 프랑화와 연동된 미국 달러화의 환율이 1:1:1이었다고 하고, 여기서 금본위제 복귀를 통해 파운드화의 화폐량과 화폐가치가 인위적으로 조정되어 환율이 1:2:2가 되었다고 하자. (프랑화와 달러화는 연동되어 있으므로 화폐가치가 같이 달라진다.) 그러면 미국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영국의 1파운드짜리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기존에는 1달러만 지불하면 됐지만, 금본위제 복귀 이후에는 2달러를 지불해야 한다. 반대로 1프랑짜리 프랑스 상품을 사기 위해서는 여전히 1달러만 지불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된다? 영국 상품의 가격경쟁력이 폭망한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도 화폐량이 줄어들면서 물가가 떨어지고 소비자의 구매력도 감소한다... 자, 이렇게 영국은 현자타임...


4-3. 두번째 계기는 제2차 중동전쟁이라고도 부르는 수에즈 위기다. 수에즈 위기 그 자체에 대해서는 각자 인터넷 검색을 해보도록 하시고... 수에즈 위기에 대처하는 영국의 애초의 의도는, 나세르의 수에즈운하 국유화에 맞서 영국군이 이집트에 군사작전을 감행, 수에즈운하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트리컨티넨탈의 민족주의 바람도 깔끔하게 청소하는 그림이었다. 영국이 본격적인 식민지 정복에 나섰던 지난 수 세기 동안 이런 식의 시나리오가 실패했던 적은 없었다. 인도나 중국 같은 거대한 국가에 대해서도 언제나 승리했던 영국의 대전략 아이냐. 수에즈 위기에 대처하는 영국의 마음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예전만 못해서 그렇지 왕년에 임마, 한 끗발 했거든? 후후후... 하는 마음으로 야심차게 이집트에 개입 스킬을 시전했는데... 아이고, 이게 미국의 적극적인 반대로 싹 어그러져뿟다. 소련이 개입해도 미국은 신경 안쓰겠다며 압력을 줬고, 외환시장에서 요동치는 파운드화 가치를 방어하는 것도 안 도와주겠다고 나왔다. 그래서 결론은 뭐? 영국은 미국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늙은 종이호랑이라는게 만천하에 드러나버렸다. 예전에 내 식민지였던 놈들이 어쩌고,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저쩌고, 혼자 궁싯궁싯 불평해도 다 소용읎는기라... 이렇게 또 두번째 현자타임...


  1930년대 영국은 심각한 경제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경제침체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전 세계적인 해상 네트워크를 통해 제국 질서를 회복한 영국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더욱이 전간기 영제국의 유지를 뒷받침했던 국제질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 사회주의와 파시즘 모두 영국이 내세운 자유주의 가치에 정면 도전했다. 1930년대 경제위기에서 파시즘 독재와 사회주의가 효율적이라는 점이 드러나면서 대의제와 책임정부라는 이념도 이전만큼 존중받지 못했다.

  1929년 10월 경제공황 이후 자본주의 위기는 자유주의 위기를 뜻했다. 전 지구적 경제불황에 직면해 전 세계에 걸친 교역과 무역에 바탕을 둔 영제국은 그 영향을 더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일부 이론가들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영제국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는 런던이라는 중심이 다른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 세계에 걸친 영연방 구각들의 협조와 파트너십에 바탕을 둔 국가연합을 의미했다. (…) 자치령 국가는 물론, 인도와 민족주의 요구가 거센 기타 지역에 더 확대된 자치를 허용하는 대신, 제국의 경계를 벗어나 이탈하는 것은 오히려 패배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인식함으로써 그 민족주의 요구가 완화되기를 기대했다.

(…)

  당시 정치인들 상당수가 제국을 해체하는 원심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 백인 자치령 국가에서 좀 더 강화된 경제블록, 그리고 좀 더 긴밀한 결속을 요구하는 때에 이를 위해서는 자치령 국가 정치가들의 적극적인 지지가 긴요하다고 보았다. 원심력은 군사적 측면에도 작용했다. 민족주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이제 영국 해외 자산에 대한 군사적 공격 위험이 증대되고 있었다. 이런 위험이 높아지는 데 비해, 영국의 느슨한 제국 체제, 각지에 산재해 방어하기에 취약하며 무역의존도가 너무 높은 제국은 변화하는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웠다. (242~244쪽.)


  수에즈 운하는 오랫동안 영제국의 아이콘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그 효용가치가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국유화 선언이 영국인에게 가져다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

  국유화 선언 다음날 이든은 내각에 여러 각료가 참여하는 ‘이집트위원회’를 구성하고 대응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의문점은 이든이 처음부터 군사력 사용을 시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이다. 기존 연구들은 이든의 우유부단한 성격, 평화적 해결 선호 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7월 27일 각의에서는 무력 사용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 미국의 반대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지만, 프랑스는 군사개입에 적극적이었고 캐나다와 인도를 제외한 영연방 국가들은 대부분 무력행사에 찬성하는 편이었다.

  이렇게 보면, 즉각적인 군대 동원이 여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미국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군사개입에 의존하기 어려웠으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전쟁으로 운하가 폐쇄될 경우 서유럽이 겪게 될 경제적 파국이었다. (…)

  수에즈 위기 직후, 이든이 예측하지 못한 것은 군사개입에 대한 미행정부, 특히 아이젠하워의 완강한 반대였다. (…)

  아이젠하워는 군사개입 시도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 (279~281쪽.)


  더욱이 수에즈 위기는 세계경제에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 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서 영국은 미국의 여러 지원과 도움을 토해 파운드화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수에즈 위기 당시 파운드화 위기는 제국 지배의 오랜 유산인 스털링 통화권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군사개입의 좌절은 그 취약성을 재확인한 사건이었다. 위기 이후 스털링 통화권의 취약성에 대한 우려와 불안이 국제무역과 환거래에서 기존의 오랜 관행과 익숙함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 (293쪽.)


5-1. 이제 영국에게 남은 선택지는 유럽통합운동 뿐... 그 전까지는 눈도 안 줬지만,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니 이제는 그것도 아쉬운 처지가 됐다. 영국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혹은 세계정세의 변화에 따라 스무드하게 유럽통합운동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제국이 해체되고 동네방네에서 망신살이 뻗친 끝에 등떠밀리듯 타의적으로 유럽통합운동에 내밀렸다는 거다. 그러다보니 유럽통합운동에 참여하는 과정 역시 당장의 경제적 기대에만 기대어 진행됐고, 초국가기구에 가입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국내 의회주권과의 충돌 문제 같은 것에 대한 고민은 거의 다 생략됐다. 그런 식으로, 좋은게 좋은거지, 응? 찡긋찡긋, 하며 묻어둔 지뢰들이 수십년이 지난 후에야 하나씩 드러난 결과가 바로 브렉시트를 하니 마니, 탈퇴 조건이 있니 없니, 하면서 옥신각신하는 2019년 현재 영국의 모습;;


그리고 내가 왔지롱.


  그렇다면 당시 경제 실무를 맡은 관리들이 영연방 회원국 사이의 무역증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은 무엇인가. 1950년대 초반 하더라도 파운드화는 태환화폐였다. 달러부족시대에 회원국 무역의 영국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그러나 독일 및 일본의 대두와 더불어 파운드화는 약세로 돌아섰으며 영국과 회원국 간의 무역 비중도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실무 관리들은 회원국과의 무역 증대가 영국에 실익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 그들은 영연방 회원국과 무역을 강화할 경우 반대급부로 역외무역, 특히 대유럽무역이 쇠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더욱이 영연방 회원국 모두는 자국의 경제발전에만 관심이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이래 영국 주도의 영연방이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된 것은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 가입 시도 및 영연방 사무국 창설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

  한편, 영연방 사무국(Commonwealth Secretariat) 설치는 19654년 정상회의에서 결의했는데, 이는 탈식민화로 회원국이 급속하게 증가한 데 따른 결정이었다. (…)

(…) 사무국 체제는 영연방이 영국 중심에서 다변화 과정에 들어섰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 그러나 사무국 체제의 출범 후에도 영연방이라는 국가연합의 실체는 상당히 모호해졌을 뿐 아니라 그 실제적인 효용성에 대한 의문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영국 문화에 어느 정도 익숙한 세대에게는 자연스러운 결합 또는 연결망으로 여겨지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필요성에 대한 회의는 깊어지게 마련이었다. (…) (309~311쪽.)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통합운동에 대한 영국의 소극적인 태도이다. 흔히 19세기 고립주의 전통 탓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출범 당시 영국은 처음부터 관심을 대표를 파견한 바 있다. 그런데도 1951년 파리조약 체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영국의 소극적인 태도는 대륙 국가들과 다른 여건 및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인도아대륙이 세 나라로 독립했지만, 영국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두고 있었고 영연방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더욱이 초국가적 성격을 지닌 기구에 가입합으로써 영국 의회주권의 침해받을 수 있다는 우려감도 작용했다. 전통적으로 영국인에게 주권이란 의회주권을 의미했으며, 대의제 발전과 성숙을 가장 ‘영국적인 특성’ 중의 하나로 여길 정도였다. (…)

  그러나 수에즈 위기 이후 모든 상황이 변했다. 아니, 변했다기보다는 영국의 정치인들이 그 변화를 비로소 체감했다고 보아야 한다. 탈식민운동의 본격적인 전개에 따른 일련의 식민지 독립, 영국 경제의 상대적 쇠퇴와 세계경제에서 비중 저하, 두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빚어진 냉전 구도 아래서 영국 외교의 추락 등은 이전에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변화였다. 1960년대 영국이 유럽통합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런 상황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319~320쪽.)


  그렇다면 보수당 정부가 EEC에 대해 전향적 태도를 갖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이미 언급했듯이, 수에즈 위기 이후 상황 변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더욱이 영국이 전통산업, 이를테면 석탄과 제강 분야의 위축을 겪던 1950년대에 ECSC의 상대적인 성장은 영국 정부가 공동시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보고서의 통계가 보여 주는 것은 명백하다. ECSC의 선철 및 제강 생산량 증가율이 영국과 비교하면 월등하게 높다. 반면, 석탄 생산량의 감소율은 영국보다 낮았다. 이런 결과는 공동시장의 비교우위를 한 번에 보여 준 셈이다. (…) 전간기에 영국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고민한 문제, 대양이냐 대륙이냐, 이 선택의 문제는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명약관화해진 것이다. 대륙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

  맥밀런, 더글러스-흄 등이 이끈 보수당 정부는 1964년 10월 총선에서 패배해 물러난다. 노동당 정부를 이끈 해럴드 윌슨은 그 자신이 경제사를 강의했던 사회주의적 성향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제국주의적 맥락에서 영연방을 중시했다기보다는 영연방 내 부국들이 빈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함으로써 결속력을 높이고 또 불평등의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곧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취임 초기에 영연방 회원국들과 교류 협력을 강화하고 빈곤국의 개발을 촉진하려는 그의 몇몇 시도는 모둗 좌절로 끝났다. 우선 영연방국들의 반응이 소극적이었고 경제부처 실무 관리들이 그런 시도에 회의적인 태도를 가졌을 뿐 아니라 반대했다. (…) 1966년 이후 윌슨의 입장도 EEC에 접근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상과 현실 앞에서 현실을 고려한 것이다. (326~327쪽.)


  유럽공동체법(European Communities Act 1972) 제정을 둘러싼 의회 논의 과정을 살펴보면, 초국가적 정치체 가입에 따른 헌정상의 문제나 의회주권 제약 문제는 당시에 별로 다루지 않았다. 대부분의 발언은 경제적인 측면에 집중되었다. (…) 유럽통합운동이 처음부터 국가통합을 지향했음에도 이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마도 실현성이 희박한 전망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비교하면 공동시장은 당장 현실적인 문제였다. (331~332쪽.)


  유럽공동체 가입을 다룬 교섭 협상이나 의회 토의, 유럽공동체법, 1975년 국민투표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된 것은 오히려 기존 영연방 국가를 어떻게 배려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단일한 공동시장에 대한 경제적 기대감만 증폭되었을 뿐이다. 15년간의 긴 논란에서 유럽공동체가 곧 유럽통합운동의 산물이며, 따라서 의회주권의 오랜 전통을 지닌 영국에서 초국가적 정치체와 영국 의회주권의 충돌이 헌정의 혼란과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의가 없었다. 이러한 측면을 원래부터 도외시했는지, 아니면 중요성을 느끼면서도 정치적 필요에 따라 논쟁 주제에서 제외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국내의 한 연구자는 이 점을 주목하여, 국가주권 문제를 논의하지 않고 오직 공동시장의 접근에 따른 경제 혜택에 초점을 맞춘 1970년대 초 일련의 가입논의와 1975년 국민투표는 원래부터 반쪽짜리 가입이었으며 말썽의 소지를 안고 출발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336~337쪽.)


5-2. 등떠밀리듯 해체된 제국의 상흔은 정치뿐만이 아니라 영국인의 심성에도 고스란히 남았다. 이 책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영국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보수성과 배타성 역시 제국의 해체가 남긴 유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종주의와 같은 내밀한 정서는 겉으로는 좀처럼 파악하기 어렵다. 제국 해체 과정에서 영국인들은 제국의 과거를 언급하지 않고 가능한 한 그 기억을 잊으려는 공적 문화를 조성했다. (…) 그러나 1950년대 이후 유색인 이민자의 급증과 더불어 이전에 나직하고 순화되었던 백인 정체성이 큰 목소리로 자기를 드러내는 강한 정체성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색인 이민 증가는 잊었던 제국의 기억을 다시 불러오고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다. (…) (352쪽.)


  19세기 후반 백인 정착지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대영국론에서 감지되는 ‘백인성’은 상상된 구성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제국 팽창기에 백인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백인성’을 획득한다. 우너주민 사회를 교화시키고 개척한 남성성의 담지자로서 백인 정체성은 오랫동안 영국인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파월의 연설을 둘러싼 논란에서 그를 지지한 수만 명의 보통사람들도 이 같은 정체성을 나타낸 것일까. 여기에서 새롭게 재조직된 ‘백인성’의 인식은 19세기 후반의 그것과 대조적이다.

  19세기 후반 제국 절정기에 백인 정체성은 역사의 능동적 창조자로 나타난다. 그 지배적 서사는 영웅적이고 남성적인 코드를 보여준다. 그러나 1960년대에 ‘백인성’은 패배한 사람들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이 문제를 깊이 분석한 슈워츠는 1960년대 보수적인 영국인들의 정서에서 ‘백인성’은 능동적이라기보다 수동적이며, 스스로를 유색인의 이민에 따라 위험에 빠진 패배자 또는 약자로 여겼다고 본다. (…) 전후 백인 자치령 국가로 이주한 영국인들의 정서는 이런 맥락에서만 이해된다. (356~357쪽.)


  1955~65년 사이에 영국 사회는 급속하게 변했다. 공적 생활에서 정치인과 전국적인 명사들은 여전히 제국적 가치를 언급하고 정당화했지만, 이사이에 팝문화와 록음악, 앵그리영맨 세대의 도전에 그 가치는 제자리를 지키기 어려웠다. 전쟁기 또는 전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는 그들 선대 및 부모와 전혀 다른 제국 관계를 맺었다. (…) 제국적 가치와 경험은 영국인들의 일상생활과 공적 삶에서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제국 가치에 대한 옹호는 일종의 시대착오로 간주되었다.

  영제국 역사에서 식민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인종을 기억하는 것이다. 영국인들이 문명을 다른 세계에 전파했다는 의식에 기반을 두기도 한다. 오랫동안 영국인들은 이를 통해 그들의 ‘백인성’을 확인했다. 1950~60년대는 제국적 가치의 기억에서 망각으로 거대한 변화를 겪은 과도기였던 것이다. (…) (364~365쪽.)


6-1. 이상이 이 책의 내용에 대한 나의 아주 간단한 요약이다. 워낙에 넓고 긴 시간을 다루는 책이다보니 디테일을 최대한 빼고 간단하게 요약한다고 했는데도 이 정도 분량이 나왔다. (솔직히 말하면, 제대로 이해하고 요약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별 것 없다. 그냥 영국에 있으니까 영국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내가 이름을 아는 딱 두 명의 영국사 전공자 중 한 분이 바로 저자라는 것이 이유의 전부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이 책의 서평을 쓰셨고...) 그렇지 않고서야 한국 현대 경제사를 연구하는 내가 이 책을 고를 이유가 뭐가 있겠나. 그런데 이 책, 의외로 나한테 도움이 됐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통찰을 준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 개인적인 업무와 관련해서 의외의 도움을 얻었다. 내가 요새 한국전쟁 관련 영국 사료를 보는 중이거든.


6-2.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영연방 내의 백인자치령국가들이 영연방 내부에서 일으키는 파열음이다. 여기서는 양차대전을 주요 사례로 들었지만 그런 문제는 사실 한국전쟁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영연방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견했고, 그 덕에 영연방군은 미군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독립된 사단을 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대하는 영연방(군)의 자세는 미국(군)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한국전쟁의 국제법적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나,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병하는 과정 등등에서 영연방과 미국의 입장은 미묘하게 어긋났다. 1950년대의 영국은 이미 힘이 빠질대로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진영의 도발에 전전긍긍하는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의 국제법적인 성격을 규정하거나 한국으로의 군대 파병, 중국으로의 확전 가능성 등에 대해서 미국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운 입장이었고, 이 부분에서 계속 미영 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다. 영연방군 내부에서도 균열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캐나다는, 이 책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독립된 지휘권을 중시했기 때문에 영연방사단 내에서도 여단을 따로 구성했고 일부 대대를 차출해서 별도의 작전에 투입하는 것에 대해서도 큰 불만을 표했다. 이러한 내용들을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을 통해 미리 접한 덕분에, 실제 사료를 훨씬 더 편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런 사전이해 없이 사료부터 맞닥뜨릴 때의 막막함이란, 뭐랄까, 태평양 한가운데 빤쓰 한 장만 걸치고 던져진 기분이잖냐...)


안 당해보면 모르는 그 기분.


7.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이 책은 오랜 시간에 걸쳐 쓰여진 독립된 글을 모은 것인데 (영제국이 형성되는 과정과 좀 비슷한 것 같다. 이거 굉장히 의미심장하지 않나. ㅎㅎㅎ) 그렇기 때문에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약간 아쉬움이 있다. 예컨대 책의 후반부에서 제국의 해체가 영국인의 심성에 남긴 심리적 상흔을 이야기하면서 “백인성” 혹은 “Englishness” 등의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게 좀 뭐랄까, 너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살짝 든다. “백인성” 혹은 “Englishness”가 제국의 해체와 영국인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할 때, 이것이 제국의 형성과 운영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지부터 찬찬히 설명해 왔다면 그런 느낌이 확실히 덜했을 것 같다. 물론 영제국의 정치경제적 측면을 다룬 책의 전반부와 영국인의 심리를 다룬 책의 후반부의 분석레벨이 다르기 때문에 내 요구가 다소 무리하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후반부에서 이와 비슷한 개념들을 장별로 각각 다른 이름으로 등장시키기보다는 이것들을 조금 더 다듬어서 하나의 개념으로 통일시켰다면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제국의 해체와 그 유산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정립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독자 역시 좀 더 쉽게 이 책의 고갱이를 짚어낼 수 있었을 것이고.


8. 늘 이야기하지만, 어떤 책을 읽고 나서 이런저런 점이 아쉽다, 라고 말하는 것은 꼬투리를 잡아서 저자와 대거리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책을 읽고 나서 말하는 아쉬움이란 응당 책을 읽다가 생긴 궁금증을 풀기 위한 질문으로 정리되어야하고, 그 질문을 푸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뒤를 이어 공부하는 (바로 나 같은) 이의 몫이 되어야 한다. 영제국의 해체를 본격적으로 논하는 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의 영제국사 연구를 한 차례 중간결산했다면, 그 중간결론에 이어 더 긴 본문을 쓰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숙제다. 위에 쓴 저 아쉬움은 내가 언젠가 답해야 할 질문으로 남겨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사료史料와의 한바탕 샅바싸움을 위해 책상으로 간다...는 아, 이렇게 슬픈 결론이라니!)


*. 그 외에 밑줄친 부분은 아래와 같다.


(…) 존 브루어(John Brewer)에 따르면, 18세기 영국은 간헐적으로 발발하는 전쟁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국가기구를 발전시켜 나갔다. 사실 전쟁은 원래부터 의도되었던 것이라기보다는 해외시장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벌어졌기 때문에 주된 전장은 아메리카나 인도와 같은 해외 식민지였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과 육군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지출을 점차로 늘렸고, 이를 부담하기 위해 물품세 부과와 일련의 국채(national debt) 발행이라는 수단에 의존했다. 이 시기의 국가는 일종의 효율적인 전쟁기구였다. 따라서 그 서역은 한마디로 ‘재정-군사국가(fiscal-military state)’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44쪽.)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재정-군사국가 체제는 기구 자체의 팽창과 더불어 더욱 비효율적인 통치기구로 변모했다. (…) 19세기 영국 정부가 국가의 재정 및 행정상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강조하고 일련의 개혁을 단행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근대화 모델이 말하는 것과 달리, 정부 역할의 확대가 아니라 축소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의회 회기는 더 연장되었다. 그러니까 전문성과 효율성이라는 그 시대의 구호는 18세기 국가 체제의 발전 과정을 나타내기보다는 그 체제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53~54쪽.)


  18세기 이래 영국 사회는 ‘토지와 화폐의 결합’이라는 틀을 유지해 왔다. 지주와 화폐자산가층의 동맹은 18세기에는 ‘낡은 부패 관행’으로, 19세기에는 값싼 정부와 자유무역주의로 변모했지만, 그 동맹은 언제나 영국의 경제발전과 해외 팽창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19세기 후반 신사적 자본가층이 외연적으로 확대되면서 그 내부의 역학관계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동맹의 균형추가 경제개혁의 주된 수혜자였던 금융세력에 기울어진 것이다. (…) 사실 공업화 이후 서비스 부문이 확대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영국의 특이성은 런던이 세계의 어음교환소이자 무역중심지로서 광대한 해외 지역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구 런던시의 은행·보험·투자·해운업과 직접 관련된 부유한 인사들이 신사 자본가의 주류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신사 자본가층의 이 같은 재편성이 가능했던 것은 전통적 엘리트의 인식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국이 자유무역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공장”보다는 “국제적 서비스 중심지로서의 위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는 신사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화와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신사 자본가의 새로운 주류로 등장한 상업-금융자본은 국가의 대외정책에 깊숙이 개입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새로운 제국 팽창의 길로 나아갔다. (63~64쪽.)


  오늘날 영국인들 사이에 제국에 관한 기억은 급속하게 희미해졌다. 1997년 갤럽의 사회조사는 이를 단적으로 알려준다. 7년 전쟁의 영웅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의 비율이 65퍼센트였다.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의 경우 77퍼센트, 시인이자 『정글북』의 작가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을 모르는 비율은 79퍼센트였다. 이와 반대로 아직도 오스트레일리아가 식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47퍼센트에 이르렀다. 미국이 과거에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50퍼센트를 넘었다. 19세기 영국의 제국 경영과 그 경험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진 것이다. (95~96쪽.)


  자유무역론을 넘어 대공황기의 경제 불안을 극복하려면 결국 공통의 기반을 가진 국가들과 협조가 필수적이다. 이 경우 유럽 경제권과 제국 경제, 두 가지 선택 가능한 경제블록을 상정할 수 있다. 문제는 두 경제권 모두 미국에 대한 대응전략이면서도 각기 서로 다른 약점을 보여 준다는 사실이었다. (…)

(…) 1920년대 후반 영국 정부는 경제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제국의 경제통합과 식민지에 대한 런던의 경제 및 행정상의 책임을 강조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 1920년대 제국 네트워크를 강화하려는 이런 일련의 노력이 대공황기에 블록경제 결성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170~173쪽.)


  1925년 전격적인 금본위제 복귀는 케인과 홉킨스의 언급대로 시티의 금융자본, 넓게 말해 신사적 자본가들의 경제적 이해를 반영한 조치였을까. (…) 처칠의 조치는 순경제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미국의 부상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그리고 제국 네트워크 강화의 필요성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25년 금본위제 논란은 신사 자본주의의 이해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 (…) (178쪽.)


  그러나 이런 장기 지속적이고 제도적인 요인만이 아니라 또 다른 측면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영국에서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은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었고, 특히 1차 세계대전기에 정부가 생산효율을 위해 적극 간섭하는 과정에서 산업민주주의의 대변자이자 후원자가 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전후에도 이 전통은 계속 남았으며, 이것이 미국식 생산조직을 도입하는 데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192쪽.)


교정.

책 앞날개 표지 그림 설명 : 윌리엄 터너, 「트라팔가 해전」, 1805 -> 윌리엄 터너, 「트라팔가 해전」, 1822 (1805년은 트라팔가 해전이 일어난 해이고, 윌리엄 터너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822년이다. 이에 대한 별도의 설명이 없어서 해전이 일어난 해와 그림을 그린 해가 혼동될 수 있다.)

21쪽 각주 16번 : journal_of_ colonialism -> journal_of_colonialism (언더바 뒤의 띄어쓰기)

24쪽 9줄 : 이집트의 보호령은 -> 이집트의 보호령화는

112쪽 3줄 : 대영국의 길로 나가는 -> 대영국의 길로 나아가는 (‘나가다’와 ‘나아가다’는 늘 헷갈리는 표현이다. 나도 이 지적은 자신이 없다... ㅠㅠ)

209쪽 5줄 : 요컨대 ‘밸푸어 정식’이란 -> ‘요컨대 ‘밸푸어 선언’이란 (여기서 ‘밸푸어 정식’이란 문맥상 ‘밸푸어 선언’을 지칭하는 듯 하다. 물론 나는 이 분야에 대해 문외한이므로 내 지적이 틀렸을 가능성도 크다.)

365쪽 1줄 : 정당화했지만, 이사이에 팝문화와 록음악, -> 정당화했지만, 팝문화와 록음악,

382쪽 5줄 : ‘고한제’ 생산방식 -> ‘고한제(苦汗制, sweating system)’ 생산방식 (오탈자는 아니고, 단지 내가 ‘고한제’라는 표현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적어둔다. 한자나 영어를 병기해주면 나처럼 ‘고한제’를 처음 본 독자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고한제’를 처음 본 독자라면 ‘고한제’를 생산방식 혹은 제도의 일종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낮은 어휘력이 원인이므로 반드시 교정해야 하는 부분은 아니다.)

387쪽 18줄 : 현재 2012년 올림픽을 위해 타워햄리츠에 대규모 올림픽공원을 조성 중이다 -> 2012년 올림픽을 위해 타워햄리츠에 대규모 올림픽공원도 조성되었다. (여기서 또 본능을 억누르지 못하고 보태는 TMI. 한국어 웹이나 구글 지도에서는 올림픽공원이 타워햄리츠 바깥에 있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올림픽공원은 여러 개의 자치구borough에 걸쳐있고 그 중 하나가 타워햄리츠 자치구다. 한편 런던 올림픽공원은 올림픽이 끝난 후 2013년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공원Queen Elizabeth Olympic Park으로 재단장했다.)

412쪽 13줄 : 보수당은 이전의 232석보다 -> 노동당은 이전의 232석보다

413쪽 1줄 : 2016년 조기총선에서는 -> 2017년 조기총선에서는

446쪽 잉글랜드성(Englishness) 항목 : 402 -> 402, 406 (엄밀히 말하면 꼭 고칠 것은 아니다. 하지만 12장에서 ‘Englishness’가 상당히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같은 표현을 ‘잉글랜드적인 것’으로 번역한 406쪽도 함께 거론하면 어떨까 싶다. 하지만... 또 그렇게 하면 색인의 규칙에서 어긋나기 때문에 여기에 관해서는 고민이 좀 더 필요하긴 하다. 이 책의 다른 장에서 ‘백인성’이라는 표현도 사용되고 있음을 참고할 필요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위의 본문에도 몇 마디 얹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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