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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로데베이크 페트람, 이콘, 20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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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로데베이크 페트람, 이콘, 2016.)

Dog君 2019. 7. 9. 04:47


1. 명색이 경제사를 공부한답시고 깝치고 다니지만 경제에 대한 내 앎의 깊이는 끔찍한 수준이다. 경제 전반적으로 다 문제인데, 그 중에서도 주식이라는 것이 특히 어려운 개념이었다. 그래서 예전에 언젠가 증권사에서 일하는 친구를 붙들고, 아니 어째서 주식 시장이라는 것이 가능한 거냐고, 주식회사가 자본금 확보를 위해 발행한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증권이 어째서 회사의 운영상황과 연동돼서 가격이 오르내리는지, 어떤 순간에는 기업의 실제 가치와는 상관없이 주식 시장에서의 수요공급 불균형 때문만으로 가격이 오르내리기도 하는데 어째서 그게 기업의 경영상황을 반영하는 거냐고, 기초 중의 기초 같은 질문을 마구 던진 적도 있다. 물론 그 때 내게 돌아온 것은, 뭐 그런 당연한 거를 굳이 물어보고 그래... 하는 차가운 표정이었지...














무식해서 미안하다...








2. 한두마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건/현상을 이해하고 싶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왕좌의 게임 시즌8이 왜 그렇게 개발살이었는지 제.대.로. 알고 싶다면, 그냥 왕좌의 게임을 시즌1부터 다 보면 된다. 시간이 좀 많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주식시장과 증권거래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그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찾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것이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면, 그건 더 좋은 일이고.


3. 책은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설립되는 현장에서 시작하여 주식시장과 증권거래의 역사를 차분하게 좇아간다. 단발성 투자에 근거했던 기존의 회사와 달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장기적인(사실상 반영구적인) 투자에 기초해 설립되었다. 이익 배당이 너무 먼 훗날의 일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주는 회사의 지분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어야 했고, 그로부터 증권을 거래한다는 개념이 처음으로 생겨났다.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선물, 옵션, 공매도 같은 개념이 하나씩 하나씩 추가되었다. 이런 것들을 한꺼번에 외우려고 했으면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이렇게 하나씩 차근차근 배워가니 나 같은 문외한도 어렵지 않게 그 개념을 익힐 수 있다.


4. 그냥 증권거래소의 역사만 썼다면 평이하고 특징없는 서술이 되었을 수도 있다. 사실, 별달리 대단한 주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통찰 같은 것이 담긴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엄청나게 재미있다. 사료에 언급된 하나하나의 사람들을 모두 끄집어내고, 거기에 저자의 상상력까지 (당연히 사료에 근거한) 조금씩 덧붙인 덕에 생생함이 장난 아니다. 어떤 분의 추천으로 골라든 책인데, 의외로 겁나 재미있게 읽었다.


5. 어렵지 않은 책이라 굳이 내용을 정리할 필요는 없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자본금을 모집하던 당시를 묘사한 책 초반의 일부 정도는 인용할 가치가 있다. 대체로 책 전체가 이런 문투라고 보면 된다.


*. 쪽수는 내가 읽은 전자책 기준이다. 전체 518쪽이었다.


  회계 담당자 람프는 지금까지 VOC의 주주가 되려는 투자자들의 이름을 명부에 적어넣었다. 이사들은 서기가 실수하지 않도록 순번을 정해서 감독했다. 바로 오늘, 8월 31일이 청약 마감일이었다. 마지막 날이라 반 오스의 집은 하루 종일 지분을 청약하려는 투자자들로 북적였다.

  규정에 따라 자정 전까지 자본금을 최종 정산해서 기록해야 했기에 늑장부릴 시간이 없었다. 공증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서기가 각각의 항목을 체크하고 숫자들을 더해나갔다. 그가 계산을 거의 끝마쳤을 때, 이 집 하녀인 닐트겐 코넬리스가 방에 들어왔다. 코넬리스는 이날 하루 종일 투자자들이 이 방 안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지켜본 참이었다. 그는 명부가 닫히기 직전, 자신이 갖고 있던 100길더를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루에 0.5길더를 버는 하녀에게 100길더는 아주 오랜 시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큰 돈이었다. 투자할까? 말까? 코넬리스는 하루 동안 마음을 수천 번도 더 바꿨지만, 두터운 명부책이 덮이려는 걸 보니 뭔가 아주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지금 결심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명부에 자기 이름을 올려달라고 서기에게 말했다.

  회계 담당자인 람프는 코넬리스의 이름과 투자액을 명부에 적어넣다가, 문득 자기 집에서 일하는 하녀를 떠올렸다. 그 하녀는 가진 재산이 한 푼도 없었지만, 람프는 보너스 주는 셈 치고 하녀의 이름으로 동인도회사 주식을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감시간인 자정이 되기 불과 몇 분 전이었다. 그래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주명부의 마지막 항목은 다음과 같다. “디그눔 얀스Dignum Jans를 위해 바렌트 람프가, 50길더.”

  마지막 두 명의 주주 이름이 장부에 적히자, 공증인 브뤼닝은 청약의 내용을 정리하는 문구를 써넣었다. 그와 두 명의 조수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으며, 최종일 자정까지 총 367만 4,945길더가 청약되었음을, 자정 이후에는 단 1센트도 추가로 받아주지 않았음도 적었다.

  영시 삼십분에 공증인 브뤼닝과 증인들, 그리고 회계 담당자 람프가 주주명부 마지막 장에 서명을 마쳤다. VOC의 초대 주주명부가 확정된 순간이었다. 이날 청약된 VOC의 지분이 앞으로 얼마나 활발하게 거래될지는 본인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50~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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