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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문학과지성사, 201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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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문학과지성사, 2015.)

Dog君 2019. 7. 9. 04:02


0. 읽는다고는 읽었고, 인상적인 부분에 밑줄도 그어뒀지만 글로 추려낼 정도로 감상이 정리되지는(혹은 내용이 이해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이렇게 어려운 텍스트였던가?!) 남자로서, 경상도 출신으로서, 이성애자로서, 한국에서는 명백히 다수자의 범주 안에서 평안히 살았던 내가 외국생활 꼴랑 몇 주 했답시고 (충분히 고민해보지도 않은 채) 소수자가 어쩌고 이방인이 저쩌고 주절주절 떠드는 것도 정말 꼴불견이다. 일단 밑줄 그은 부분만 정리해두고 다음에 시간이 될 때 종이책으로 한번 더 읽어야겠다. 아마 연말쯤에 재독할 것 같고, 재독하는대로 업데이트하기로 다짐한다.


*. 쪽수는 내가 읽은 전자책 기준이다. 전체 413쪽이었다.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말하자면 코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 코라고 불리는 얼굴 한가운데 돌출된 부분이 없는 사람은 냄새를 맡을 수 있느냐와는 별개로, 신체적으로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며,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한 명의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제시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 결함이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또는 결함을 가진 존재로서 스스로를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비가시화 전략이 성공하는 한에서 그는 성공적으로 사람을 연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답게 보이고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 (20쪽.)


  한편 우리는 그림자를 사람의 수행/연기에 필수적인 어떤 요소-그것이 없으면 사람의 수행이 어려워지며, 그리하여 사람자격의 유지에도 타격이 가해지는-가 아니라, 사람자격 자체로 생각할 수도 있다. 즉 그림자가 없기 때문에 사람답게 보일 수 없고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림자의 상실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형상화된다고 말이다. (23쪽.)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용되지만, 그 외연과 내포가 결코 같지 않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보기 전에도,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38쪽.)


  여기서 우리는 권력에 대한 아렌트의 논의를 참조해도 좋을 것이다. 아렌트가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인은 언제나 복수형으로, 즉 ‘주인들’로 나타난다. 다른 말로 하면, 아렌트에게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2자적인 관계가 아니라 3자적인 관계이다. 주인과 노예가 일대일로 대결하는 2자적인 관계에서는 결코 권력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이란 ‘우리’를 만드는 능력이자, 우리 속에서 생겨나는, 행동의 잠재적 가능성이다.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행위하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잠재적 현상 공간인 공론 영역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권력이다.” “권력은 함께 행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서 사람들이 흩어지는 순간 사라진다.” 주인들은 ‘우리’를 만들 줄 알았기에, 권력이 있고 지배할 수 있다. 반면 노예는 고립되어 있기에 무력하다. (…) (47쪽.)


  이러한 비교가 비유럽인이 유럽인보다 덜 폭력적이었음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포로의 손톱을 뽑고 머리 가죽을 벗기는 등, 비유럽인의 전투 관행에는 유럽인들을 놀라게 할 만큼 잔인한 측면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잔인함이 과시적이고 의례적인 성격을 띠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적을 모욕하고 그에게서 사람으로서의 신성함을 박탈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는 적이 패배하기 전에는 사람이었음을 뜻한다. 반면에 현대전에서는 병사들이 처음부터 어떤 명예도 신성함도 갖지 못한 벌거벗은 생명으로 나타난다. 이들에게는 빼앗길 것이 목숨뿐이기 때문에 전투의 목표 역시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는 것, 적을 최대한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된다. (56~57쪽.)


  태아, 노예, 군인, 그리고 사형수의 예는 사람의 개념에 내포된 인정의 차원을 드러낸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말해서 사회는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의 개념은 또한 장소의존적이다. 실종자의 예에서 보았듯이 특정한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사람의 지위를 상실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동어반복적으로 들리겠지만-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사회란 다름 아닌 이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74쪽.)


  패터슨은 남부인들의 자유에 대한 사랑 역시 노예제의 효과라고 보았다. “명예와 자유에 대한 남부인들의 고도로 발달된 감각에는 기만적이거나 비정상적인 데가 하나도 없다. 타인에게 속박과 굴욕을 가하는 자들일수록, 그들이 남들에게 갖지 못하게 한 것을 자기들은 갖고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깨닫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것은 에드먼드 모건이 『미국의 노예제도, 미국의 자유』의 마지막 장에서 피력한 견해이기도 하다. 버지니아 식민지의 초기 역사를 세밀하게 그린 이 책에서 모건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공화주의적 열정이 어떻게 노예제도에 대한 지지와 양립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그가 보기에 워싱턴과 제퍼슨을 비롯하여, 미국의 독립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던 버지니아인들이 모두 대농장주이자 노예 소유주였다는 사실에는 어떤 역설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노예제도가 도입된 후 버지니아에서 성장한 많은 사람들이, 그 이전 세대와 달리 열렬한 공화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단순한 우연 이상의 무엇이 있는데, “적어도 법률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뜻에 거의 전적으로 굴종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제군주에 지배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노예의 존재는 버지니아인들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웠을 뿐 아니라, 평등의 감정을 북돋우었다. “버지니아 소농은 대농장주와 동일한 정체성으로 자신을 정의하였다. [……] 그들이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초를 둔 정체성이 그것이다. 노예가 아니라는 바로 이 점에서 소농은 대농장주와 동등했던 것이다.” (80~81쪽.)


  성원권은 소속감과 다르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별로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데도 성원권을 인정받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외국에서 교육받은 엘리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그 반대로 자기는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생각하지만, 남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나치 정권이 들어섰을 때, 유럽의 동화 유태인들은 자기들에게 닥쳐올 운명을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사회적 성원권은 또한 법적 지위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도 위태로워지기 쉽지만, 하나가 반드시 다른 하나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법적으로 카스트가 폐지되었는데도, 여전히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불가촉천민들이 좋은 예이다). 한편, 우리는 사회적 성원권의 부여가 문화적 자격을 요구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문화적 지식이나 (사회화 과정을 통해 습득된다고 여겨지는) 상호작용의 기술이 부족한 사람은 실제로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특별한 도움이 필요함을 의미할 뿐이지, 그에게 사회 구성원의 자격이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사회적 성원권을 요구하는 데는 어떤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회적 성원권은 사회성sociability과 별개임을 인식해야 한다. ‘히키코모리’에게도 사회적 성원권을 보장해야 하듯이, 외국인에게 사회적 성원권을 부여하는 데 ‘동화’나 ‘적응’을 조건으로 내걸어서는 안 된다.

  외국인이 일단 사람으로서 환대의 권리를 누리다가, 일정 기간이 경과하고 어떤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사회적 성원권을 얻는다는 생각은 환대의 행위 바깥에서 사회적 성원권에 대해 말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하지만 사회적 성원권이 법적 지위와 다른 것이라면, 사실상 우리는 타인의 환대 속에서만 자신의 사회적 성원권을 확인할 수 있다. (83~85쪽.)


  이주자의 예로 돌아가자. 그는 새로운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오래전에 정착한 동포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든다. 그는 길을 걸을 때나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이웃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극장이나 우체국에 갈 때, 먼저 온 이주자들이 느끼는 것만큼이나 자기에게도 사회적 성원권이 있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는 10년이나 20년이 지난 뒤에도, 심지어 시민권을 획득하여 정식으로 ‘그 나라 사람’이 된 후에도 자신의 사회적 성원권이 완전한지 의심할 수 있다. 그의 얼굴이, 이름이, 말투와 행동거지가 주류 집단과 구별되는 한, 그는 법적 지위와 무관하게 여전히 어느 정도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그는 집이나 일자리를 구할 때 미묘한 장벽에 부딪친다. 가는 곳마다 “이미 다른 사람을 구했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자기가 그저 한발 늦었을 뿐인지, 아니면 ‘외국인’이라서 차별을 받는 건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가 주류 집단에서 배우자를 구하려 한다면, 거절의 말은 좀더 노골적으로 바뀔 것이다. “내 딸이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식으로 말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혼인은 숨겨진 카스트 제도가 드러나고, 자기기만적으로 부인되었던 신분 의식이 표출되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그는 이 사회가 자기를 온전한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외국인이라는 꼬리표는 스티그마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외국인이 그 자체로 낙인찍힌 범주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외국인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면서, 그들이 우리 문화의 장점들을 제대로 평가해주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이상적인 외국인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한에서이다. 돈 많고, 교양 있고, “원더풀”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 그들이 이런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는 게 판명된다면, 가령 그들이 돈도 없고, 교양도 없는 데다 남의 나라에 와서도 자기네 방식을 고집한다면, 게다가 금방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아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우리의’ 여자들을 건드린다면, 그들에게 주어졌던 환대는 철회될 것이다. 스티그마가 있는 개인이 그에게 추천되는 특정한 행동 노선line of action에서 벗어났을 때처럼 말이다. 즉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환대 혹은 사회적 성원권은 조건적이다. 환대와 사회적 성원권을 구별하는 사람은 결국 조건적 환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88~90쪽.)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라는 더글러스의 명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이 명제는 모든 사람과 사물이 우주적 질서 안에 고유한 자리를 가지고 있음을 함축하는 것 같다. 또한 그 자리들이 높고 낮음이 있을지언정, 우주적 질서를 지탱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중요하다고 가정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더글러스의 명제는 자리들, 혹은 그 자리에 배정된 사람들이나 사물들의 상대성과 상호의존성을 가정한다. 하지만 이런 가정이야말로 차별을 은폐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이다. 실제로는 여성의 사회적 성원권을 부정하면서도, 음양론에 의거하여 여성과 남성에게 대칭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좋은 예이다. 공간적인 차원에서 이 세계관은 여성에게 안을, 남성에게 밖을 할당한다. 그러면서 여성이 집 밖을 마음대로 나다니는 것을 금기시한다. 하지만 여성의 자리가 집 안이라는 말이 곧 집이 여성에게 속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은 공적으로 성원권이 없기 때문에 사적인 공간을 가질 수도 없다. 다만 남성의 사적 공간인 집에 그의 소유물의 일부로서 속해 있을 뿐이다. (…) (96~97쪽.)


  여성이라는 범주에 언제나 붙어 다니는 더러움과 오염의 관념-그에 따라 여성은 더러운 여성과 깨끗한 여성으로 나누어진다-을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성은 신발이나 밥그릇과 같은 방식으로 더러워지지 않는다. 즉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제자리에서 벗어나면 더럽다고 여겨지는 게 아니다.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은 사회 안에 어떤 적법한 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성은 단지 스스로를 비가시화한다는 조건으로,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고 있을 뿐이다.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동등한 사람으로서 사회 안에 현상하려는 순간, 이 허락은 철회된다. 여성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사회는 여성이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잘못 인쇄된 글자처럼, 여성의 존재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장소를 더럽히는 존재로서만 사회 안에 현상할 수 있다. ‘깨끗한’ 여성이란 보이지 않는 여성이다. (100~101쪽.)


  택시에 탄 승객은 먼저 운전사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의례를 주고받는다. 인사말이 오가고, 때로는 날씨에 대한 짧은 대화가 이어지기도 한다. 이어서 목적지에 대한 확인이 이루어지는데, 운전사가 비가시화되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물론 어떤 운전사들은 승객에게 사탕을 권하거나 계속 말을 걸면서 호스트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 승객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든지 가방에서 책을 꺼내는 등 침묵을 원한다는 표시를 하면, 상호작용이 중단되는 게 보통이다. 승객의 이러한 행동은 운전사의 인격에 대한 무시가 아니다. 그보다는 운전사에게 택시 안에서 지켜져야 할 규범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해 승객과 운전사는 택시라는 공간에 대한 각자의 해석을 상대방에게 제시하며, 그에 따라 기대를 조정한다. 어떤 운전사들은 택시를 자기의 공간으로 생각하고, 승객을 손님처럼 접대하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은 택시를 공공장소로 간주하며, 운전사에게 ‘예의 바른 무관심civil inattention’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점은 택시 운전사는 뒷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못 본 척하도록 기대되지만, 승객들의 행동이 어떤 선을 넘을 경우(싸움이나 술주정 등) 개입할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공공장소에서 규칙을 위반하는 사람에게 예의 바른 무관심의 원칙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 (114~115쪽.)


  버거가 제시하는 이행의 도식-한쪽에는 명예와 역할 자아(‘옷을 입은 인간’), 그리고 규범과 위치감각이 있고, 다른 쪽에는 존엄, 역할에서 벗어난 자아(‘벌거벗은 인간’), 자유, 좌표 상실이 있는-을 다시 살펴보자. 이 이분법의 문제점은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는 구조, 즉 역할들의 체계와 동일시되며, 역할의 옷을 벗는 것은 사회 바깥으로 나가는 것과 동일시된다. 그 결과 개인은 구조가 요구하는 역할들을 수행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고 사회 바깥으로 나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즉 이 모델은 행위자에게 순응주의냐 내면으로의 침잠이냐라는 양자택일만을 남긴다. 규범 또는 가치 체계(마르크스주의 용어로는 이데올로기)가 구조의 산물이자 구조의 재생산을 위한 하나의 계기로 여겨지는 한, 구조에 대한 저항은 모든 규범의 거부로 귀결될 것이다(매킨타이어가 격렬하게 비판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도덕적 진공상태이다).

  하지만 사회는 구조로 환원될 수 없다. 우리는 사회적 실천들 속에서 역할의 수행이나 구조의 재생산과 무관한, 순수한 상호작용의 층위를 발견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줄을 서는 것이나 낯선 장소에서 길을 묻는 것같이, 각자의 사회적 역할을 괄호 안에 넣은 채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 그러한 예이다. 그럴 때 상호작용의 참가자들은 다른 참가자들의 신원에 대해 약간의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갑돌이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치과 의사임을 알아본다), 주어진 맥락에서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들은 역할의 담지자(치과 의사, 환자)로서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조우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할에서 벗어나 있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어떤 질서-의례적 질서-속에 있다. 그들은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방식으로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인정을 표현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예의 바른 무관심을 보여주면서, 타인의 몸을 둘러싼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길을 묻는 사람은 타인에게 다가갈 때와 헤어질 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시한다. 지위와 역할이 다른 개인들이 동등한 권리를 지닌 존엄한 존재로 사회 공간 안에 현상하는 것은 이러한 의례들에 힘입어서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그들은 의례적인 실천들의 바탕에 있는 규범을 단순히 “진정한 자아”와 대립하는, 외적이고 강제적인 힘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들은 그 규범에 도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역할을 괄호 안에 넣은 상호작용과 그것을 조율하는 규범의 존재야말로 버거가 “존엄의 세계”라고 명명했던 현대 사회의 특징인 것이다. (135~137쪽.)


  하지만 모욕을 이처럼 감정의 표현 내지는 잘못된 재현으로 이해할 때, 말과 몸짓이 지니는 수행적 차원은 간과되고 만다. 나를 돼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한 명뿐이라면, 나는 그를 무시해버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둘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마침내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나를 돼지라고 부르기 시작한다면, 나는 실제로 돼지가 된다(따돌림받는 아이들이 숱하게 겪는 일이다).

  수행성의 간과는 상호작용 질서에 대한 정태적인 접근과 관련이 있다. 상호작용 의례의 수행은 규범의 단순한 실천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구성원들 각자가 사회에 대한(사회의 경계와 위치들의 관계, 그리고 그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신의 이해 방식을 드러내고 또 승인받는 과정이다. (…) (145~146쪽.)


  상호작용 의례를 통하여 우리가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그의 인격이다. 다시 말해 그의 안에 있는 “사회적인 것”이다. 그런데 고프먼에게 이 인격은, 초기의 사회화를 통하여 개인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타인들의 협조에 힘입어 표현되고 확인되는 무엇이다. 개인을 인격을 가진 존재로 취급하지 않는 정신병동 같은 곳에서는 사람이 되는 일이 더욱 어렵다. 이런 이유로 고프먼은 의례적 규칙ceremonial rules의 준수에 도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개인은 (사회화를 거쳐서) 일단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남의 도움 없이 계속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사회생활의 모든 순간에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람대접을 받음으로써 매번 사람다운 모습을 획득하는 것이다.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개인은 그러므로 다른 참가자들의 사람다움을 확인해주고, 사람이 되려는 그들의 노력을 지지해줄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 역으로, 그는 남들이 자신을 사람으로 대우해주기를 기대할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 고프먼의 말을 빌리면, “사회는 일정한 사회적 특성들을 갖춘 개인이라면 누구나 남들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에 걸맞게 적절하게 대우해주기를 기대할 도덕적 권리가 있다는 원칙 위에서 조직된다.”

  상호작용 의례를 행하는 것은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경의deference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에서의 그의 성원권을 인정하는 의미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인격이란 “집단적 마나의 할당”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의례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한 명의 온전한 사람임을 부인하는 일이자, 그 역시 공동체의 마나를 나누어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부정, 다시 말해 그의 성원 자격에 대한 부정이다. (154~155쪽.)


  말하자면 고프먼은 의례의 교환에 참여할 자격이라는 측면에서 다음 세 가지 경우를 제시하는 셈이다. 의례의 교환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면서 상대방에게 존중의 의례를 기대하고 요구할 수 있는 경우, 특정한 행동 노선을 따를 때만 조건부로 의례 교환에 참여할 수 있는 경우, 의례 교환의 장에서 배제되어 ‘탈인격화’의 과정을 겪는 경우. 여기서 뒤의 두 경우에 속하는 사람들은 성원권이 불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168쪽.)


  베버는 시장에서 개인이 갖는 기회를 의미하는 계급 상황class situation과 개인의 명예에 대한 사회적 평가에 의해 결정되는 신분 상황status situation을 구분한다. 계급, 즉 동일한 계급 상황에 놓인 개인들의 집합은 공동체적 행동의 토대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공동체는 아니다. 반면에 신분 집단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신분 집단은 특수한 생활양식, 자기네끼리의 폐쇄적인 교류와 혼맥 형성, 결투를 할 자격과 같은 의례적 특권에 대한 주장 등을 통해 스스로를 사회의 나머지와 구별하고자 한다. 이러한 계층화는 순전히 관습적이다. 하지만 경제력의 안정적인 배분에 의해 이러한 계층화가 굳어지자마자 합법적인 특권으로의 길이 쉽게 열린다. (193~194쪽.)


  앞에서 나는 근대화에 뒤따른 공적 공간의 재편성을 상호작용 질서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고찰하면서, 근대화를 그때까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완전한 사회적 성원권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하였다. 나는 이러한 전망이 지나치게 역사주의적이며 낙관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근대화는 모욕-우리는 사회적 제재를 받지 않는 모욕, 위반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규약의 위반에 대해 말하고 있다-을 없애지 못하였으며, 다만 그것을 더 넓고 눈에 띄지 않는 싸움터로 옮겼을 뿐이다. 이는 노동과 자본의 대타협에 기초한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끝나고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노동 통제는 신분적 모욕을 새로운 형태의, 더욱 미묘하고 일반화된 모욕으로 대체하였다. 문자 한 통으로 해고를 통보한다든가, 프로페셔널리즘의 이름으로 노예 같은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모욕이 주로 저학력, 여성, 육체노동자의 몫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모든 노동자, 즉 노동자로서 모든 사람이 모욕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비자로서만 의식하려 하며,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은 되도록 잊고 싶어 한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우리는 연대 의식을 느끼는 대신에 소비자로서 겪게 될 불편을 먼저 생각한다. (206~207쪽.)


  신자유주의 하에서 모욕은 흔히 굴욕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예고 없이 실직을 당할 때, 일한 대가가 터무니없이 적을 때, 아무리 절약해도 반지하 셋방을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굴욕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모욕은 구조가 아니라 상호작용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를 해고한 사장도, 월세를 올려달라는 주인집 할머니도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시장의 법칙에 따라(즉 구조의 담지자로서 구조가 명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들은 매우 예의 바르게, 심지어 미안해하면서 자기들의 입장을 전달하지 않았던가?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 탓으로 돌린다. 그들의 주장은 이런 식이다. 실직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굴욕으로 느껴진다면, 당신에게 자존감이 부족한 것이다. 당신은 혹시 어린 시절에 사랑을 충분히 못 받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먼저 당신의 내면에 있는 상처받은 아이를 달래주어야 한다. 자신의 가치를 믿어라! 그리고 당당해져라! 당신이 긍정적일수록 재취업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한 사람이 자존감을 유지하려면, 그에게 실제로 자신의 존엄dignity을 지킬 수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자존감은 아큐의 ‘정신승리법’과 비슷해져버린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상호작용 질서의 차원에서 (즉 상징적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구조의 차원에서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 (210~211쪽.)


(…) 다른 말로 하면, 제도가 사람을 모욕할 때 그것은 모욕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분주의든 아니든, 이런 관행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효과는 동일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굴욕에 대한 글을 매듭지으면서, 나는 다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는 개념적으로 구별될 뿐, 현실에서는 결합되어 나타난다. 지위와 특권을 분배하는 구조를 내버려둔 채,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원칙을 지키라고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모욕이라는 공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풀러가 21세기 미국의 신분주의를 짐 크로우 법과 비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짐 크로우 법 하의 흑인들은 단지 상징적인 수준에서 성원권을 부정당한 것이 아니었다. 경제와 정치와 법, 요컨대 사회구조 전체가 그들을 이등 시민의 지위에 묶어놓고 있었다. 오늘날의 신분주의 역시 그 배후에는 경제적 약자에게 굴욕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자본가와 그들을 비호하는 정치가, 언론인, 교수, 법관 들이 있다. (217~218쪽.)


  한국 가족은 왜 ‘사람에 토대를 둔 가족’으로 이행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정의 조건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에 토대를 둔 가족, 혹은 관계 그 자체가 중요한 가족-‘관계적 가족’-의 구조는 우정의 구조와 비슷하다. 관계 속의 개인들이 서로를 도구화하지 않고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인 관심을 관계 바깥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관심이 가운데 놓이자마자, 관계는 복잡해지고 불안정해진다. 마음이 돈으로 환산되고, 돈이 마음을 대신하며, 함께했던 시간 전체가 투자, 기대, 이익, 손해, 청산 같은 경제 용어로 기술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경제적인 약자들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가족이라면, 경제적인 관심을 가족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무급가족종사자나 전업주부처럼 가족을 매개로 경제에 간접적으로 접속되어 있는 개인들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내는 경향이 있다. 비계약관계에서 계약관계로, 또는 선물경제 영역에서 화폐경제 영역으로의 이러한 이동은 개인들을 인격적 종속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에서 해방시킨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발전이 가족의 경제적 기능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 안에서 가족은 노동력 재생산의 거점으로서, 그리고 실업의 충격을 흡수하고 경기 확장에 대비하여 예비 인력을 저장하는 장소로서 특별한 중요성을 갖게 된다. ‘가부장제를 보완하는 국가’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본주의와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부장적 가족에서 관계적 가족으로의 이행은 산업화가 수반하는 자동적인 변화가 아니다. 두 형태의 가족은 동시성 속에 있으며, 자본주의는 후자를 만들어내는 만큼이나 전자를 필요로 한다.

  결국 가족을 우정의 원리에 따라 재조직하려는 현대의 기획은 우정이 부딪치는 것과 동일한 장애물에 부딪친다. 타인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의지하여 물질적인 필요를 해결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그것이다. 그들이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고 평등하며 타산적이지 않은 관계를 맺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람의 지위를 법적이고 의례적 측면에서만-즉 형식적인 관점에서만-규정하고, 사람 노릇을 하는데 필요한 물질적 자원의 문제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우정의 조건에 대한 논의는 이렇게 해서 우리를 증여와 환대의 관계에 대한 고찰로 이끈다. (258~260쪽.)


(…) 우정의 조건은 환대임을 주장하면서, 나는 무엇보다 이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먼저 환대가 재분배를 포함한다는 점을 확인하기로 하자.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를 갖는다는 것 외에 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연기하려면 최소한의 무대장치와 소품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는 공간, 갈아입을 옷, 찻주전자와 차를 살 돈 같은 것 말이다. 그러므로 환대는 자원의 재분배를 포함하기 마련이다. (…) (265쪽.)


  우정의 조건은 절대적 환대이다. 환대의 조건 또는 한계에 대한 논의들이 암시하는 바와 달리, 절대적 환대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어떤 벽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 공동체’에 대한 환상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혁명의 시간이나 축제의 시간에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공동체의 임재를 경험하곤 한다. 하지만 절대 공동체를 시적 형태가 아니라 산문적 형태로 현실 속에 고정시키려는 시도는 번번이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문도 없고, 문지방도 없으며, ‘자기만의 방’ 따위는 더더구나 없는 그런 공동체에서 우정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는 비밀을 간직할 수도 고백을 할 수도 없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일도 함께하는 시간을 기다리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70쪽.)


  공동체에 대한 이 두 가지 상상은 서로 경합하면서 지성사 안에서 꾸준히 마찰을 일으켜왔으며, 그 찌꺼기가 대중, 공중, 다중 같은 개념 안에 침전되어 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고래들의 소통 방식을 배타적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공동체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이미지는 강강수월래를 할 때처럼 모든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둘러서 있는 것이다. 모두가 모두의 얼굴을 볼 수 있고, 모두를 향해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시선과 귀와 두 손을 온전히 타인에게 내어주는 이 ‘열린’ 자세에 비해, 도서관에 웅크리고 앉아 책을 읽는 사람의 모습은 너무나 ‘개인주의적’이고 ‘폐쇄적’으로 보인다. 수그린 머리는 나의 관심사는 오직 책이라고 말하는 것 같고, 구부린 등은 그러니 부디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것 같다.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을 눈앞에 보이는 세상보다 더 큰 세상과 연결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도서관의 적막함은 이 사실을 자꾸 잊게 만든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밀실’에 숨어 있다고 여겨졌으며, ‘광장’으로 나오라는 부름을 받곤 했다. (274~275쪽.)


  절대 공동체에 대한 환상은 이처럼 ‘개인이냐 공동체냐’라는 잘못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이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벽을 없애는 것-문자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공동체에 대한 옹호는 사생활 침해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쉽게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과 공동체는 결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며, 공동체 정신을 추구하는 것과 사생활의 자유를 갖는 것 사이에는 본디 아무 모순도 없다. 개인에게 자리/장소를 마련해주고 그의 영토에 울타리를 둘러주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역할인 까닭이다. 뒤르켐이 지적했듯이,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 (…) (277쪽.)


  개인과 공동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관계를 이렇게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절대적 환대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절충주의적 답변(절대적 환대는 불가능하지만 그 불가능성의 지평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등등) 이상의 것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절대적 환대가 사적 공간의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개방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데리다가 그랬듯이 최악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그러한 환대가 과연 가능한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 환대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환대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환대는 실로 우정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의미를 갖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환대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아동학대방지법을 만드는 일,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을 위해 쉼터를 마련하는 일, 집 없는 사람에게 주거수당을 주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실업수당을 주는 일은 모두 환대의 다양한 형식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현대적 이상은, 생산력이든 자본주의의 모순이든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떤 자동적인 힘에 의해 앞으로 굴러감에 따라서가 아니라, 이러한 공공의 노력을 통해 실현된다. (278~279쪽.)


  환대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은 환대를 사회의 외부에서 온 이방인들이 직면하는 문제로 여긴다. 하지만 이미 사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들의 자리가 조건부로 주어지는 한, 환대의 문제를 겪는다. 절대적 환대라는 말로써 나는 데리다가 그랬던 것처럼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환대를 가리키려고 한다. 데리다는 이러한 환대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적 환대에 기초한 사회를 상상할 수 있다. 아니 사회란 본디 절대적 환대를 통해 성립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하다면, 사회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289쪽.)


  공리주의자들은 ‘우리’가 언제나 이미 우리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들은 사회를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며, 연대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사회는 인구, 즉 숫자라는 관점에서 파악된 인간 개체들의 집합으로 환원된다. 사회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사람의 관념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공리주의자들은 사람자격이 하나의 성원권이라는 것, 우리가 사회에 의해 사람으로 임명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이라는 것이 생물학적인 사실에 속한다고 믿는다. 개인은 타인의 인정과 관계없이 자기 안에 내재된 특성에 의해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어떤 사람이 실제로 사람인지 아닌지 판정하는 일, 다시 말해 그의 사람자격을 심사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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