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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繡나부랭이

십자수 단상 2

Dog君 2019. 9. 2. 04:18


  내 십자수에는 철칙이 있다. 절대로 결과물을 소유하지 않는 것.


  취미생활에 무슨 철칙까지 세우며 요란을 떠냐고 한소리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 ‘철칙’이라는 것이 일부러 만든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껏 십자수를 해오면서 거의 예외 없이 누군가에게 다 선물로 줘버린 탓에 생긴 습관에 가깝다.


  이런 습관이 생긴 것은 무엇보다 실용적인 이유가 크다. 십자수로 만들 수 있는 결과물이라는게 기껏해야 쿠션이나 시계, 액자 정도인데, 그걸 다 내가 꾸역꾸역 갖고 있겠다고 욕심을 부리면 당장 내가 못 버틴다. 1년에 4개 정도를 완성한다고 치면 내 방에는 매년 시계와 쿠션과 액자가 하나씩 추가된다는 뜻이다. 십자수 쿠션과 십자수 시계와 십자수 액자가 막 서너개씩 있는 노총각의 방... 아, 그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풍경이다. 그런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비하면 가까운 지인들에게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을 주는 모습은 얼마나 훈훈한가. 도시화와 산업화로 사라진 이웃사촌 간의 따스한 마음씀씀이를 이런 식으로라도 재현한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심리적인 이유도 있다. 나는 선물을 받는 것보다 선물을 주는 것이 훨씬 더 감정적으로 이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최소 1년에 서너 차례 이상 나에게 감정적 희열을 안겨주는 십자수 선물만큼 좋은 것도 또 없다. 결혼 기념 커플 쿠션, 새집 장만 축하 시계, 출산 기념 유아 신발, 생일 축하 액자 등 종목도 딱 적당하다. 이만한 선물을 할만한 이벤트가 내 지인들을 다 합해서 1년에 몇 번이나 있겠나. 이러한 조건은 1년에 서너개 남짓인 나의 십자수 생산능력에 정확히 부합한다.


*. 여기서 하나 주의할 점은, 일단 선물을 한 다음에는 그 선물에 대해서 관심을 딱 끊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준 선물을 벽에 잘 걸어놓고 있는지, 잘 관리하고 있는지, 그런 따위에는 절대 신경을 쓰면 안 된다. 선물을 하는 순간 그 물건에 관한 모든 권리는 선물 받은 사람에게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다음에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딱 두 번.


  19살 때 제일 처음 만든, 엄지손가락만한 사람 얼굴. 가로세로 10칸이 채 안 됐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야말로 처음 해보는 거라 솜씨도 개판이고 색상도 맞춘 게 아니라 누구한테 선물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지금 만들면 30분이면 충분할 거야.) 잘해야 '버리기 아까운 정도'였을 거야, 아마. 그 작은 십자수는 당시에 쓰던 다이어리 표지에 꿰맸다.


  두 번째 예외는 대학교 2학년 즈음에 만든 핸드폰 줄. 이것도 가로세로 10칸이 안 됐다. 색도 단색이라 만드는데 10분도 안 걸리는 정도... 그나마도 케이스가 몇 주 안 가서 부서지는 바람에 얼마 못 달고 그냥 버렸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예외 이야기할 때 빼먹으면 안 되는 게 하나 있다. 사실은 말이지, 예외가 한 번 더 있었다.


  대학 4학년 때였다. 십자수 경력 5년차인데, 나 스스로를 위해 뭐라도 하나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열쇠고리를 하나 만들어서 가방에 달고 다녔다. 가로세로 18칸 정도 되는 열쇠고리였는데 십자수 가게에서 파는 반제품이었다. 한 며칠 잘 달고 다녔다.


  여기서 등장하는 사람은 같은 과 04학번 조XX. 나와 동갑인데 학번은 세 학번 차이가 났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아무튼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겉보기엔 꽤 멀쩡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접근하기 어려운 아우라 같은 것도 있었던, 그러면서도 막상 이야기해보면 약간 뭐랄까... 방학 때마다 안드로메다 여행 정도는 다녀오신 것 같은 정신세계를 언뜻언뜻 보여주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나이가 동갑이라 그런가, 내가 한창 방황할 때라서 그런가, 의외로 말이 잘 통해서 나름대로는 친하게 지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그 열쇠고리를 내놓으라고 했다. 아니, 왜? 멀쩡히 잘 달고 다니던 열쇠고리를 왜 내놓으라는 거냐. 나는 거절했다. 모처럼만에 나를 위해서 십자수 열쇠고리 하나 만들었는데 그걸 달라니, 이거 정말 너무한 거 아니오.


  하지만 나는 뒤이은 그의 말에 열쇠고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의 일부를 가지고 싶어요.”


  당신 뭐야? 캐시 베이츠야? 미저리야? 저리 가, 그래 그거 갖고 떨어져,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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