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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준비의 기술 (박재영, 글항아리, 202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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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준비의 기술 (박재영, 글항아리, 2020.)

Dog君 2021. 5. 21. 01:00

 

  예나 지금이나 내 삶의 목표는 똑같다. "어제 한 일을 오늘도 하고, 오늘 하는 일을 내일도 하길." 요약하자면,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생활보수랄까.

 

  그래서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 꼭 어디를 가야겠다는 위시리스트 같은 것도 없고, 꼭 먹고 싶은 음식도 없다. 남들은 1년에 한 번씩은 어떻게든 여행을 떠난다고들 하는데, 아니 이 사람들아, 쉬려고 휴가를 냈으면 집에서 발 닦고 잠이나 자야지 왜 굳이 피곤하게 여기저길 싸돌아다녀, 다니길.

 

  어찌어찌 여행을 간다 해도 사정은 그대로다. 사진 한 장 제대로 찍는 법이 없고, 이름난 명소에도 별달리 관심이 가질 않는다. 맛있고 별난 음식을 먹어도 그때 뿐이지 끼니만 넘기면 곧장 시큰둥해진다. (물론 이건 내 둔한 미각 탓이기도 하다.)

 

  2019년에 9개월 정도 네덜란드와 영국에 머물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에서 그리 오래 살아볼 기회가 내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본성은 여전했다. 해야 할 일만 하고, 지켜야 할 하루 일과를 그대로 반복하다가 그냥 돌아왔다. 여행이라고 다닌 곳도 딱히 별로 없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들에 가서도 샌다고, 여행을 싫어하는 성격이 외국에 나갔다고 해서 어디 가겠나.

 

  여행을 안 좋아하는 놈이 여행준비라고 좋아할리가 없고, 그래서 이 책에 대해서도 별달리 큰 기대가 있지는 않았다. 저자에 대한 신뢰에 팬심도 약간 더해서 이 책을 사기는 했지만, 글쎄... (저자사인까지 받아놓고 이렇게 말하는 심보는 또 뭐람...)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꽤 바뀌었다. 아니, 어쩌면 이 책은 여행에 대한 내 생각이 완전히 바뀌는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이런 부분을 읽으면서 나 역시도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여행을 하고 여행을 즐기고 있었음을 깨닫게 됐다.

 

  그(여행준비의 장점―옮겨적은이)중 하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뭘 잘하고 못하는지, 어디에서 보람을 느끼고 어디에서 실망하는지, 장점은 무엇이고 단점은 무엇인지, 어떤 순간에 가장 큰 행복을 느끼고 어떤 순간에 가장 좌절하는지, 결국 나의 가치관은 무엇이며 인생관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파악하는 건 긴 인생을 좀더 알차게 보내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의 본모습을 잘 알지 못한다. 녹음된 자기 목소리를 들으면 어색하게 들리듯, 자신의 실제 모습을 마주하는 일이 언제나 유쾌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길을 잃었을 때 지도에서 내 위치가 어디인지를 파악하는 것처럼 문제 해결이나 목표 달성의 출발점이 된다. (59~60쪽.)

 

  여행을 가면 반드시 그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곳을 방문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
  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여행준비의 시작은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더 즐겁게 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찾아보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여행지가 결정된 이후라면,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그곳에서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81~82쪽.)

 

  이런 부분에 연필로 밑줄을 죽죽 그으면서 자연스레 지난 여행들을 떠올렸다. 교토에서는 아침 일찍 '철학자의 길'을 산보한 다음 노천 카페에서 커피와 삶은 계란을 먹으며 망중한을 즐겼고, 같은 날 밤에는 만취해서 카모카와강 고수부지에서 비를 맞으며 잠을 자기도 했다. (그 옆에서 젊은 친구들이 'Don't look back in anger'를 떼창하던 걸 들은 기억이 난다.) 하노이에서는 재래시장과 뒷골목들을 쏘아다니다가 다리 아프면 근처 카페에 퍼질러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시간을 죽였고,(베트남 커피는 정말 쓰고 정말 달았다. 레알 극강의 단쓴조합이었다.) 몽골에서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생애 처음으로 말을 탔다.(그리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던 청년은 자기가 김제에서 몇 년간 일을 했었노라고 말했다. 처음 만난 몽골남자와 한국남자가 대화할 수 있게 해준 구글에게 다시 한 번 감사.) 2019년에 매일 같이 산책과 달리기를 즐겼던 암스테르담의 렘브란트 파크와 런던의 윔블던 앤 퍼트니 커먼스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그 덕에 달리기 기록이 엄청 좋아졌다!). 이름만 들어봤던 막스플랑크 연구소도 가봤고,(문과 중에 가 본 사람 몇이나 되겠냐...) 괴팅겐에서는 연초에 작고하신 뤼트케 선생의 묘소에 인사도 드릴 수 있었다.(사모님이 만들어주신 레몬파이는 정말 끝내줬다.) 암스테르담과 런던, 파리의 십자수 가게를 모두 찾아다녔고,(그때 사모은 키트들 덕분에 앞으로 20년 정도는 걱정 없다.) 에릭 클랩튼이 유년을 보낸 마을도 다녀왔으며,(생가 방문이야말로 찐팬 인증 아니겠습니까.) SOAS 학생회관을 매주 출입하는 행운도 누렸다.(간만에 학생 느낌 좀 내봤시다. 땡썰랏, 샬럿.)

 

  근사한 기념품도 하나 남기지 못했고 남에게 내보일만한 여정도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의 테마로 여행을 즐기고 있었던 거다.

 

  글타. 나는 여행을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했던 것 역시 '여행'이기는 마찬가지였다는 걸 몰랐을 뿐.

 

  그걸 알고 나니 기분이 정말 좋아졌다. 내 생각보다 내 인생은 훨씬 더 즐거웠고, 훨씬 더 즐거울 거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2021년의 첫 책이 이 책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 여행준비의 가장 큰 장점은 여행이 풍성해지는 게 아니라 추억이 풍성해지는 거다. 여행을 앞두고 그 나라 말을 조금만 공부하면 더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다. 메뉴판을 읽고 원하는 걸 주문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을 익히는 일은 특히 중요하다. (36쪽.)

 

  나는 한국인의 영어 실력을 세 단계로 나눈다. 돈 쓰는 데 필요한 영어가 가능한 사람은 중간 레벨이다. (...) 영어를 사용하며 돈을 쓸 수는 있는데, 돈을 벌지는 못한다. 돈 버는 데 필요한 영어까지 가능한 사람이 상위 레벨에 있고, 영어가 잘 안 통해서 돈을 쓰는 데도 적지 않은 불편함을 겪는 사람이 하위 레벨이다.
  문제는 중간 레벨의 사람들이 영어를 사용하며 돈을 쓸 대, 많은 경우 썩 유쾌하지 않다는 데 있다. 의사소통은 되는데, 뭔지 모르게 폼이 안 난다. 분명히 내가 갑이어야 하는 상황인데, 영어를 잘 못해서 괜히 을이 된 듯한 기분일 때가 있다. 알고 보면 나도 공부 많이 했고 나름 교양 시민인데, 별것 아닌 영어 표현 하나를 몰라서 무지렁이가 된 듯한 찜찜함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이러려고 그렇게 오랫동안 영어를 공부했나 싶은 자괴감이 드는 순간이 많은 것이다. (39~40쪽.)

 

  (...) 여행자는 호기심이 많고 고집은 적어야 한다.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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