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연년세세 (황정은, 창비, 2020.) 본문
테레비나 SNS에는 언제나 일상이 넘쳐난다. 어디 가서 무얼 했고, 오늘은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고......
그런데 그 화면 속의 일상이란, 근사한 강변뷰를 자랑하는 수십억원짜리 넓은 집이라거나 혹은 비싼 식재료로 한 상 가득 차려놓은 밥상이라거나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 머, 누군가에겐 그것도 분명히 일상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일상은 그런 멋진 이미지보다는 매일 반복되는 노동이나 매달 돌아오는 카드명세 같은 것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그래서 그런 장면들에 좀체 공감이 가질 않는다. 나의 그것과 비슷한, 그래서 내가 좀 더 감정이입하기 쉬운 일상적 이야기들은 이제 소설이나 에세이 같은 활자매체에서나 겨우 찾아볼 수 있는 것 같다.
황정은의 이번 소설도 키워드는 비슷하다. 삶에 대한 의지, 사람 사이의 유대, 사소하지만 의식적인 배려로 전해지는 온기... 이번 소설에서는 그것을 통시적으로 확장한 느낌이다. 그러고보니 이 책을 비롯하여 최근에 읽은 몇몇 소설과 에세이에서 계속 이런 이야기를 만나고 있다. 나와 다른 시공간을 경험한 이들에 대한 애정과 공감을 잃지 말자는 이야기 말이다. 냉정하고 차가운 것이 곧 합리적이고 쿨한 것이라고 말하는 요즘 시대에, 서로를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양쪽으로 갈라져 서로에게 최대한 흉악한 말을 내뱉는 것이 당파성이고 선명성이라고 말하는 요즘 세태에 지쳐가는 와중에 이런 책 덕에 간혹 숨통이 트인다.
한영진과 한중언은 거기 뭐가 있다고 매년 기를 쓰고 가느냐는 입장이었다. 해마다 사람 키만큼 자란 풀들을 낫으로 끊어내며 가야 하는 마른 도랑과 뱀이 늘어져 있곤 하는 덤불,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해 휘어진 나무와 이끼들, 볼품없이 이지러진 봉분과 멧돼지가 다녀간 흔적들, 묘를 둘러싼 밤나무, 소나무의 침묵을 그들은 몰랐다. 이순일이 매년 낫으로 길을 내며 거기로 올라가는 이유를 한세진은 이해했다. 엄마에게는 거기가 친정일 것이다. 그 묘가.
할아버지.
나두 이제 할머니가 되었어.
내년엔 못 올지도 몰라요.
최근 서너해 동안 이순일은 묘를 향해 그렇게 말하곤 했는데 올해가 정말 마지막이었다. 이순일은 일흔둘이었고 내년엔 양쪽 무릎에 인공관절을 넣을 예정이었다. 산에서 나고 자라 능숙하게 산비탈에 달라붙어 두릅이며 고사리를 캐곤 하던 이순일은 이제 평지에서도 지팡이가 없으면 걷지 못했고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며 천천히 걸었다. 길도 없는 산을 오르내리는 일을 이제 감당하기가 어려워 올해가 마지막, 올해가 마지막, 하며 몇년을 버텼는데 더는 할 수 없다. 이순일이 마침내 그것을 인정한 게 올 초였다. 이순일은 찾아오는 이도 없이 버려진 듯 산속에 남을 묘를 걱정하더니 파묘해 없애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자기가 죽고 나서는 아무도 찾아가지 않을 무덤이니까. (17~18쪽.)
(...) 김원상이 이순일을 업은 채 오름을 오르기 시작했다. 김원상은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의식하지도 과시하지도 않은 채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한영진은 김원상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사람은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뿐이라고 한영진은 믿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70쪽.)
한영진은 갓난아기와의 간격이 조금 벌어진 뒤에야 아이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아이를 유심히 보고 싶은 마음, 다음 표정과 다음 행동을 신기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마음, 찡그린 얼굴을 가엾고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 관대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 인내심...... 모든 게 그 간격 이후에야 왔다. 한영진의 모성은, 그걸 부르는 더 적절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언젠가 한영진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타고난 것이 아니고 그 간격과 관계에서 학습되고 형성되었다. 그건 만들어졌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한영진은 둘째를 낳을 수 있었고 첫번째보다는 여유 있게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이들을 지금은 좋아했다. 이순일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한영진은 알고 있었다. 이순일의 노동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75쪽.)
이순일은 바닥에 놓인 등산화를 집어 남자에게 건네며 다른 것은 없느냐고 물었다. 다른 거, 더 좋은 거, 오늘이든 내일이든 좋은 등산화를 찾을 수 있기를 이순일은 바랐다. 저녁에 한영진이 퇴근해 돌아오면 네 등산화를 새로 샀으니 신어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맞지 않으면 바꿔다줄 테니 신어보자고 말할 것이다.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것이 뭐가 어렵겠는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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