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GO (가네시로 가즈키, 북폴리오, 2006.) 본문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벌써 20년 전이다. 퀴퀴하고 눅눅한 자취방에서 뒹굴거릴 때 친구가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보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 영화에 그다지 마음이 가지 않았다. 이미 20대가 된 내 입장에서 방황하는 10대의 이야기는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애매한 어딘가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자이니치의 이야기에도 역시 마음이 안 갔던 것 같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이기에 그 당시의 나는 확신과 고집이 너무 가득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시덥잖기 그지없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 똘똘 뭉쳐 있던 때였으니까.
그리고 꼭 20년이 지났다. 지금의 나는 확신보다는 주저함이, 명확함보다는 모호함이 더 많은 사람이 됐다.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러한데 다른이에 대해서는 또 오죽하겠나. 그런 마음으로 사는 놈이라 그런가, 우연히 서가에서 이 책을 보고는 단박에 이 책을 골라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20년 전 살았던 사근동 옥탑방과 반지하방의 퀴퀴함이 눅눅함이 생각났고, 대학이랍시고 왔지만 좀체 마음 붙일 곳 없이 소요하며 시간을 죽이던 친구가 왜 그 영화를 몇 번씩이나 돌려봤을지 살짝 짐작이 갔다.
반대로 나는 그 후 20년의 시간 동안 그럴듯한 확신 하나도 못 남기고 이 나이를 먹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물론 우리 세상에는 확신에 가득찬 사람보다는 주저하고 유보하는 사람이 더 많이 도움이 된다는 것 정도는 확실히 알게 됐지만.
그렇게 나 역시 무너져갔다. 아버지의 속셈에 보기 좋게 걸려든 탓도 있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줄곧 선택의 여지가 없는 환경에 갇혀 있었던 내게 아버지의 그 말은 처음으로 주어진 선택권이었다. 북조선이냐 한국이냐. 끔찍하도록 좁은 범위의 선택이기는 했지만 내게는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나는 비로소 번듯하게 인간 대접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18쪽.)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줄곧 아빠가, 한국이나 중국 남자하고 사귀면 절대로 안 된다고 그랬었어......"
나는 그 말을 간신히 몸 속으로 거둬들인 후 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데,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걸까?"
사쿠라이가 입을 다물어버려, 내가 말을 이었다.
"옛날에, 아버지가 한국이나 중국 사람한테 몹쓸 짓을 당했다든가, 그런 이유로? 하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몹쓸 짓을 한 건 내가 아니야. 독일 사람 모두가 유대인을 학살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그런 게 아니야."
사쿠라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아빠는 한국이나 중국 사람들은 피가 더럽다고 했어."
충격은 받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무지와 무교양과 편견과 차별 때문에 튀어나온 말이었을 테니까.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부정하기는 무척 쉬운 일이었다. 나는 말했다.
"너는, 사쿠라이는, 어떤 식으로 이 사람은 일본 사람, 이 사람은 한국 사람, 이 사람은 중국 사람이라고 구별하지?"
"어떤 식으로라니......?"
"국적? 아까도 말했지만, 국적 따위는 언제든 바꿀 수 있어."
"태어난 곳이라든가, 사용하는 언어라든가......"
"그렇다면, 부모의 직업 때문에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외국 국적을 갖고서 일본으로 돌아온 2세는? 그들은 일본 사람이 아닌가?"
"부모가 일본 사람이면 일본 사람이겠지."
"요컨대 어느 어느 나라 사람이란 건 뿌리의 문제란 말이지. 그렇다면 묻겠는데, 뿌리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만약 너희 증조 할아버지에게 중국 사람의 피가 섞여 있었다고 하면 너는 그럼 일본 사람이 아니겠네?" (200~201쪽.)
"난 지금까지 지금까지 차별을 당하고서도 태연했어요. 차별을 하는 놈은 대체로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놈이니까. 한 대 쳐주면 그만이고, 싸움은 자신이 있었으니까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앞으로도 그런 놈들한테는 아무리 차별당해도 태연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또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고 토했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고부터는 차별이 두려워졌어요. 그런 기분 처음이었어요. 나는 지금까지 정말 소중하게 여길 만한 일본 사람을 만난 적이 없거든요. 그것도 내 취향에 딱 맞는 여자애는. 그래서 처음부터 어떤 식으로 사귀면 좋을지도 몰랐고, 게다가 내 정체를 밝혔다가 싫다고 하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스러워서 줄곧 털어놓을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차별 같은 거 할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하지만 난, 결국은 그녀를 믿고 있지 않았었나 봐요. 가끔 내 피부가 녹색이나 뭐 그런 색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다가올 놈은 다가오고 다가오지 않을 놈은 다가오지 않을 테니까 알기 쉽잖아요......" (214쪽.)
교정. 개정판 20쇄
28쪽 13줄 : 꽉 찬 연어 -> 꽉 찬 연어 (띄어쓰기 두 칸)
100쪽 13줄 : 본슈 -> 혼슈
101쪽 1줄 : 본슈 -> 혼슈
128쪽 18줄 : 에릭 클립튼, 매디 워터스, 보디 가이 -> 에릭 클랩튼, 머디 워터스, 버디 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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