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다시 조선으로 (이연식, 역사비평사, 2024.) 본문
1996년 개봉작인 인디펜던스 데이가 20년만에 후속작을 내고, 2000년 개봉작인 글래디에이터는 24년만에 후속작을 낸 것처럼, 2012년에 나온 『조선을 떠나며』의 후속작인 『다시 조선으로』가 12년만에 나왔습니다. 전작이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를 떠난 재조일본인을 다루었다면 후속작은 같은 시기 한반도로 돌아온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책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로 유입된 인구 규모가 대략 2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하는데(37쪽) 당시의 인구규모를 생각하면 이들을 빼놓고 이 시기를 이해할 수는 없겠습니다.
해방 직후의 정치 상황은 (2000년대를 전후하여 대학가에서 주로 읽던 ㅋ)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등의 책을 통해 이미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친숙합니다. 하지만 그들 책에서 다루는 것은 대체로 정치사라서 당시의 사회와 경제 전반에 대해서는 의외로 마음에 드는 책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조선을 떠나며』가 우리에게 즐거운 독서경험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 부분을 정확히 공략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일거에 혼란에 빠진 재조일본인들의 처지를 생생한 문체로 담아내어, 무척 즐겁게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한국이 이런 판국이었다면, 돌아온 조선인들이 겪어야 했던 것도 결코 녹록치 않았을 겁니다. 해방 직후에야 귀환 동포에 대한 감성적이고 온정적인 시선이 가득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갈수록 녹록치 않은 환경이 계속되면서 사회 내적인 균열과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책에는 귀환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귀환자들에 대한 주택 정책이나 귀환자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지역(예컨대, 신마산)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습니다. 저자를 포함하여 일군의 연구자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논문을 꽤 여럿 발표하기도 했으니 이들을 잘 갈무리하고 새로운 내용을 조금만 보태도 서사를 만들기에 충분할거라 기대했거든요. 하지만 이 책은 대부분의 분량을 해방 직후의 혼란상을 소개하는데 할애합니다. 때문에 귀환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허벅지 긁다가 어느새 종아리를 긁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잠시 내려놓고, 해방 직후의 사회상을 찬찬히 살펴보는 데 주력한다면 이 책은 의외로 만족스러울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의 천태만상이 책을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과 권세 있는 사람들이 고급 요릿집에 모여 '야동'을 즐겼다는 이야기는 '아이고, 이런 이야기는 또 어디서 찾아내셨대' 싶어서, 일단 그 자체로도 재미가 있습니다. ㅋㅋㅋ
물론 당시의 상황을 선정적으로 드러내는 것에만 이 책의 무게중심이 있지는 않습니다. 책 전반에 짙게 깔린 것은 저자의 짙은 탄식입니다. 귀환 조선인에 대한 사회적 냉대에서 드러나듯 남한에서 사회적 통합이란 이미 이 시기부터 난망한 것이었고, 해방 직후 재조일본인으로부터 시작된 경제적 혼란은 미군정의 독단적인 정책으로 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 폭발했습니다.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신음했던 한국의 근현대사는,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난 뒤에도 여전히 신음하고 있었음이 새삼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런 탄식은 일전에 읽었던 『1945년 해방 직후사』와 아주 비슷합니다. 전혀 별개로 쓰여진 두 책이 이처럼 비슷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어쩌면 이것이 해방 직후의 한국 사회에 대해 대체로 합의된 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이들 두 책의 저자 세대 연구자라면 말이죠.) 이런 정도의 재미를 가진 책이 통설通說의 지위까지 갖고 있다면, 독자로서는 좀 더 편안하게 이 책의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책의 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메시지의 측면에서 기존의 책과 별달리 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애초에 승부처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귀환 조선인 이야기 대신 해방 직후 한국 사회의 '꼬라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처럼 많아지면서, 돌고돌아 결국에는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버린 어떤 서사'로 다시 돌아온 것만 같습니다.
이처럼 부산 부둣가에서 어린이들이 고사리손으로 밀가루와 석탄을 훔쳐 연명하던 1946~1947년 동절기에 이르게 되면 해방 직후 잠시 반짝했던 귀환자에 대한 동정론이나 감성적인 동포 구제론 등의 사회적 정서는 이미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들이 유입되면서 주택, 식량, 일자리 부족은 날로 심해졌고, 구호품 조달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식민 지배 말기 전시 통제 경제 체제 아래서 비축된 각종 생필품마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기주민들에게 이들은 그저 '가난하고 더럽고 성가신' 사람들로 치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풍수해나 역병마저 겹치면 이들의 유입으로 인한 사회적 피로감은 극단으로 치달아 귀환자의 남한 유입 자체가 또 다른 '재난'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는 귀환자와 월남민의 도난 사건은 기주민들의 이러한 인식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반면 당장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의 것이라도 훔칠 수밖에 없었던 귀환자와 초기 월남민으로서는 애초 기대했던 동포들의 사회적 구호는커녕 일상화된 차가운 시선에 이미 고국에 대한 환상은 부서진 지 오래였다. 급기야 1946~1947년을 지나며 기주민 사회가 이제는 유입 집단에 대해 노골적인 경계와 배척의 정서를 드러내자 귀환자와 초기 월남민은 소외감을 넘어 사회적 반감마저 품게 되었다. 이처럼 해방 조선은 외적인 남북 분단 외에도 사회 내적으로도 수많은 균열과 갈등으로 인해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33~34쪽.)
(...) 해방 후 남북한을 통틀어 한반도 전역에서 돌아간 일본인은 약 '91만 6,883명'이었다. 이 가운데 남한지역만 따로 떼어보자면 군인·군속은 18만 1,209명, 민간인은 41만 6,610명이었다. 즉 신분을 막론하고 남한에서 돌아간 일본인은 약 '60만 명'으로서 현재 북한 지역에서 귀환한 일본인보다 약 2배가 많았다. 그러면 지금의 대한민국 영토를 기준으로 남한 지역으로 해방 후 유입된 규모는 얼마나 되었을까. 통계 자료에 따라 상당한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해방 후 유입 규모는 대략 '217만 명'에서 '237만 명' 사이로 추계하고 있다. (...) (37쪽.)
천황의 항복 방송 이후 1945년 9월 초순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일본인들의 동향은 '뱅크런'과 '집단 패닉'이란 키워드로 집약할 수 있다. 이 무렵 일본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은행으로 달려가 예금부터 찾고 가재도구까지 급하게 팔아치운 뒤 모두들 먼저 돌아가겠다며 밀선을 섭외할 수 있는 부산항 일대로 몰려갔다. 이렇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뒤 어수선한 분위기가 잦아들 무렵 『경성일본인세화회회보』 창간호가 나왔다. 발간사는 "우리들의 친구 조선의 기쁨을 우리의 가쁨으로 받아들이고, 동아시아의 발전을 위해 우리도 협력하자."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당시 일본인 사회가 조선인들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새삼 느끼게 된 '긴장감'을 반영한다. 동시에 '공생'을 모토로 한 내용들이 많았다. 이것은 내심 이들이 조선에 '잔류'하려는 마음이 강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래서 초기에 세화회에서는 잔류 쪽에 무게를 두면서 영주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가동하기도 하였다. 수강 신청자가 몰려 대박을 터뜨린 'YMCA 조선어 강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113~114쪽.)
해방 직후 이러한 조선인(건준)·일본인(총독부)·점령군(미군정)이라는 3자 간의 동상이몽에 따른 팽팽한 기 싸움에서 결국 미군정이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자, 일본인 송환 정책을 둘러싸고 남한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는 불만을 품게 되었다. 왜냐면 미군정은 오랜 식민 지배로 인한 일본인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은 물론이고 해방 후 신국가 건설에 대한 기대와 전망 등을 무시한 채, 오로지 승전국의 국익 확보와 점령 지구의 '치안 유지'라는 관점에서 일본인 송환 문제를 풀어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의 일본인들이 해방 후부터 1945년 2~3월에 모두 송환될 때까지 저지른 각종 사건·사고, 그리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군정의 일본인 송환 정책 및 세부 방침은 급기야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조선인의 역린을 자극하고 말았다. (124쪽.)
이처럼 민간 자본가의 생산 시설 파괴와 재산 밀반출, 일본 군부대가 퇴각 직전 분풀이로 자행한 비상식량과 일용품의 폐기, 인천 화약 공장에서 보듯이 군수·화학·전력 등 군수동원법, 군수회사법, 군수생산책임제 등에 따라 국가(총독부)가 자금 운용 및 생산에 직접 관여한 국책기간산업시설의 파괴 등은 해방 초기에 빈발한 충독적인 살상 사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심각한 범죄로 인식되었다. 즉 당시 남한 사회는 이러한 행위를 일종의 건국 방해 행위로 받아들였다. 왜냐면 이러한 생산시설 등은 해방 후 신국가 건설 과정에서 적산(귀속재산)으로 엄격히 관리해 반드시 공익적 차원에서 재활용되어야만 하는 사회적 자산인데, 이렇게 일본인들이 자국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재산 밀반출을 위해 의도적 파괴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 아울러 이러한 재생산 시스템의 붕괴와 함께 그나마 확보된 원료 및 완제품의 불법 횡령과 방매는 이것들을 노리던 투기꾼들을 양산해냈다는 점에서 신국가 건설을 앞두고 출발부터 남한 사회의 기강과 체질을 왜곡시켰다. 특히 미군정의 핵심 권력 및 구 친일파 세력과 결탁한 권력형 정상배('모리배') 집단은 국공유 및 사유 부동산·기업체의 불법 매수, 구호품의 횡령, 식량 등 생필품의 사재기와 밀수를 일삼았다. 따라서 이들의 부정 축재는 총독부가 패전 후 모라토리움과 뱅크런 사태, 즉 파산을 방지하고 일본인 송환에 필요한 공작 자금을 마련하고자 마구 찍어내고 본토에서 공수한 돈과 함께, 사회적 부의 극단적인 편재와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돌아간 뒤에도 장기간에 걸쳐 남한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사회적 병리 현상을 심화시킨 주된 요인으로 지목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태는 단지 일본인 송환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문제였을까. 결코 아니다. 남한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 그리고 학계에서는 일본인들이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벌인 일련의 행동을 지켜본 뒤, 이러한 끔찍한 사태를 예상하고 다양한 경로로 일본인 소유 재산을 당장 '동결'해 자유매매를 금지하고, 이들이 보유한 화폐를 공공 기관에 '등록·예탁'시켜 국가(남한에 수립될 임시정부나 군정 당국)가 철저히 '관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미군은 진주 후 이러한 남한 사회의 권고를 무시한 채 1945년 9월 25일 일본인 사유재산의 매매(미군정법령 제2호)를 허용함으로써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탐욕과 죄악의 판도라 상자를 기어코 열고야 말았다.
당시 남한 사회는 미군정을 상대로 어떠한 방안을 제시했을까. 1945년 8월 16일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발족한 조선학술원에서는 10월 9일에 남한의 총 화폐 보유량 '61억 8천만 원' 중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화폐량을 대략 '46억 원' 정도로 추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데이터를 근거로 당면한 경제문제를 진단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인이 보유하고 있는 화폐량을 정확히 조사해 방출을 최대한 억제하거나 무력화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임을 지적했다. (...) 이처럼 백남운의 조선학술원 보고서에서는 송환 국면에서 일본인의 재산 방매가 광범위하게 발생할 것을 정확히 예견하였다. 또 이것이 급속한 통화량 팽창으로 이어져 악성 인플레이션을 유발함으로써 향후 민생과 국가 재정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따라서 일본인 보유 화폐를 관리하되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일본인 보유고에 대해서는 특별히 "신국폐와 조선은행권의 교환을 암시할 것"이라며 일종의 '화폐개혁' 효과를 통해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안전장치를 마련하도록 권고한 것이다.
아울러 남한 사회는 긴급한 사회문제로서 일본인의 불법적인 재산 처분과 밀항에 대한 단속을 강력히 요구했다. 특히 군부대 집단 송환에 이어 민간인 송환 작업이 본격화된 1945년 10월 중순부터 11월 중순 사이에는 한겨울이 되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려는 일본인의 불법 재산 처분과 밀반출 관련 범죄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 이에 미군정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일본인의 밀항을 철저히 단속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언제나 말로만 그칠 뿐 그로부터 채 보름도 지나지 않은 11월 7일 똑같은 방식으로 목선 6척에 현금과 귀중품을 가득 싣고 한강에서 인천을 통해 몰래 돌아가려 한 일본인 밀항단이 검거되었다. (130~133쪽.)
(...) 과거의 기록 속에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볼 때면, '역사란 결국 시공간을 넘나드는 도플갱어들의 재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주로 선한 사람들보다는 역사 속의 악인들이 마치 오래된 유럽 건물 꼭대기의 빙글빙글 도는 시계탑 인형들처럼 주기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왜 정권이 교체되거나 시대가 바뀌는 국면에서는 항상 전생에 제 머리만 믿고 싸움질만 해대던 아수라, 제 욕심만 부리던 아귀, 그리고 줄곧 못된 악업만 쌓은 축생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것일까. 당시 서민들은 비롯해 귀환자나 월남민에게 해방 공간의 고급 요정은 '인간계'를 괴롭히기 위해 무간지옥에서 환생한 아수라, 아귀, 축생들이 밀회를 나누던 '만악의 근원지'로 비치지는 않았을까. (152~154쪽.)
결국 김형민이 사들인 청파동의 10채나 되는 가옥은 해방촌과 이태원 쪽으로 밀려난 조선인 원주인 땅 위에 지어진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떠나간 이상이 집들은 그 땅이 군용지로 수용된 억울한 사람들에게 돌아갔어야 했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면 최소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 할 재산이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미군정이 잠시 자유 매매 거래를 허가한 그 짧은 사이에 돈 있고 발 빠른 사람들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사회적 부의 분배를 왜곡시켰을 뿐만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제 뱃속 채우기에 바쁜 사회적 관행을 확대 재생산하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 해방 직후 미군정이 취한 관재 정책과 인사 관행은 못내 아쉽다. 결국 그 모든 사달의 시작은 미군정이 '법령2호'를 통해서 구 일본인 재산의 자유 매매를 허가한 것이었다. 인간의 탐욕을 점령군의 명령으로 뒤늦게나마 통제해 보고자 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일본인 송환에 따른 공·사유 재산의 매매가 불러올 사회적 혼란을 이미 미군이 진주하기 이전에 예상하고 구 일본인 재산과 각종 배급품에 대한 엄정한 국가 관리를 강조한 조선학술원 백남운 위원장을 비롯한 남한 사회의 요구와 권고를 무시한 후유증은 이토록 오랜 기간에 걸쳐 후유증을 남겼다. (228~229쪽.)
이처럼 남한에서 새 삶을 살아보겠다던 귀환자가 초기 월남민의 원대한 꿈은 열악한 정치 환경과 더불어 남한 사회의 '냉대' 속에서 식어갔다. 1946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급증한 만주 재이민과 일본 재밀항 현상은 해방 직후 신국가 건설의 열기라든가, 민족주의의 고조 속에서 한껏 물신화된 '국가'와 '민족'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먹을거리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도움의 손길도 내밀지 못한 조국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이러한 남한의 구호 능력과 사회적 통합 능력의 취약성은 오랜 식민 지배로 인해 구조화되었다. 여기에 더해 미군정의 점령 통치로 인해 이들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회적 구호 요구가 무시된 결과, 남한 사회는 귀환자, 월남민, 도시 빈민에게 있어 '비정한 조국'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웃사촌이라고 믿었던 주변 사람에게 입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 '피를 나눈 동포'라는 것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헛된 신화라는 것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 1장과 3장에서 보았듯이 나를 사창가로 몰아간 자, 나를 '적산 가옥'이나 '전재민 수용소'에서 내쫓은 자, 내가 받을 쌀과 구호품을 빼돌린 자, 내 말투와 옷차림을 비웃은 자, 나를 시장에서 내몬 자, 내가 들어갈 요정에서 도색 야회를 즐기던 자들도 타지에서는 한민족이요 피를 나눈 동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275~276쪽.)
교정. 초판 1쇄
40쪽 밑에서10줄 : 운라(UNRRA, 연합국국제부흥기구)
49쪽 밑에서8줄 : 운라(UNRRA, 연합국구제부흥기구) -> (40쪽과 49쪽의 표기 통일)
66쪽 사진캡션 : 탄전이었느나 -> 탄전이었으나
148쪽 밑에서2줄 : 도생영화 -> 도색영화
218쪽 5줄 : 1사분면 -> 2사분면
218쪽 6줄 : 4사분면 -> 3사분면
218쪽 밑에서11줄 -> 2사분면 -> 1사분면
226쪽 2줄 : 만초전 -> 만초천
280쪽 8줄 : 모코로 -> 모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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